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84화 (184/605)

184화. 포클랜드 후작

184화. 포클랜드 후작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이끄는 1,500명의 군대가 도시 외성을 넘어 왕성을 포위하자 3살짜리 국왕을 보필하는 늙은 기사들은 도망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백기를 올렸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포클랜드 시티 수비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전리품을 가장한 약탈품을 조금 챙기고, 동이 틀 무렵 보람차게 한 보따리 싸들고 샘 포클의 왕성에 도착했다.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펄프 대장은 1년 치 수입을 짊어지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기사, 병사, 귀부인, 자유민 가리지 않고 성문 앞에 모여서 만세! 만세! 외치고 있었다. 어디서 났는지-십중팔구 약탈품일 것이다- 술통까지 뜯어서 서로의 머리를 적셔줬다. 역사상 가장 관대한 장군이라도 전투 중에 허락할 행동이 아니었다.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벗고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었다.

“전쟁이 끝난 모양이야.”

“주군! 주군!”

로벨보다 먼저 온 머를 브릭 경이 상체를 완전히 벗은 채 젖은 셔츠를 휘둘렀다. 여름의 자취가 채 가시지 않았다 해도 새벽공기가 쌀쌀한데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젊어서 좋겠다.”

펄프 대장 등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젊지 못한 고용주를 보았다.

‘수염도 안 난 양반이...’

‘그냥 두쇼. 저맘때는 원래 나이 들어 보이고 싶어 하니까.’

로벨이 떨떠름하게 보자 머를 브릭 경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꾸깃꾸깃한 셔츠를 갖춰 입었다. 상반신은 튜닉이고, 하반신은 플레이트 아머라 기괴했다. 그러나 로벨 말고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주군, 성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공작님과 왕제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소?”

로벨은 술과 여자에 눈이 반짝이는 울프 용병단을 돌아보았다.

“그럼 펄프 대장하고...”

로벨이 수행원을 지목하려하자 80여 명의 정예 용병이 일제히 하늘과 땅에 관심을 보였다. 필사적으로 슬픈 이야기를 떠올리기도 했다. 로벨은 빙그레 웃고 간절한 노력을 무시했다.

“...애꾸눈 볼포스, 허풍쟁이 제이콥, 세 사람은 따라와. 외팔이 더치는 남아서 엉뚱한 짓 못하게 통제해.”

희비가 엇갈렸다. 허풍쟁이는 앓는 소리를 내었고, 외팔이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으하하! 염려 놓으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통솔하겠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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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도 혼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반 병사의 출입을 통제하기는 했지만, 물욕이 넘치는 것은 고귀한 기사나 비루한 농민이나 똑같아서 값나가는 금은보석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초상화와 청동상을 떼 가지 않은 것도 다행이다.

“흐미, 삐까번쩍하구만.”

“죄다 금이고 은이야.”

펄프 대장 등은 벽에서 떨어진 금장식 액자,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은촛대, 가늘고 고아서 맞은편이 비치는 비단 휘장 따위를 정신없이 구경했다. 그냥저냥 방문객이 오가는 홀인데도 이 정도니, 국왕의 침실이나 귀빈실은 어느 정도일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포비아 왕국의 부가 집중된 곳이니까.”

허풍쟁이는 보석이 달린 식기를 슬그머니 챙기다가 펄프 대장의 손찌검에 비명을 지르며 떨궜다.

“왕의 재산이다. 지체 높은 기사 나리도 안 건드리는 이유가 있다.”

사실은 안 보이는 곳에서 열심히 훔치고 있지만, 기사의 허세 뒤에 숨은 인간 본연의 욕심을 뜨내기 용병이 알 리 없었다. 물론, 모든 기사가 좀도둑처럼 구는 것은 아니었다. 위대한 기사들은 금은보화보다 더 커다란 것을 탐냈다.

“로벨 경, 어서 오시오.”

“로벨 백작! 대승이오! 대승! 우하하핫!”

에릭 공작, 페르젠 백작, 헤르만 백작, 마르셀 자작 등이 왕좌 앞에 모여 있었다.

샘 포클의 왕좌. 수 천 명의 기사를 지배하는 권좌. 세계의 패권을 논의할 수 있는 막강한 자리지만, 의외로 볼품은 없었다. 샘 포클 시절에 만든 의자라 실용성과 심미관이 모두 뒤떨어졌다.

“왕좌가 편해서는 안 된다. 군주의 자리는 결코 편한 자리가 아니니...”

로벨을 포함한 모두가 헤르만 백작을 보았다. 헤르만 백작은 헛기침하고 해명했다.

“제 말이 아닙니다. 시인 뷔테의 말이죠.”

의미가 깊은 말이지만, 아쉽게도 왕좌를 차지한 기사들에게 아무 감흥을 주지 못했다.

“왕제님은 어디 계시오?”

“조카와 독대 중이오.”

“3살짜리와?”

“유모, 시종장, 시녀장, 재상들까지 모조리 데려갔소. 기사들로부터 보호하겠다는 뜻 같은데... 한참 잘못 짚으셨지.”

한 지역의 패권을 차지한 대영주들이라 이해가 빨랐다. 로벨만 빼고 말이다.

“주군, 자비에 후작을 따르는 기사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 전에 명분이 있어야 하지. 우선 데이브 왕제의 대관식을 진행하시오. 그런 다음 반역죄로 처리하시오.”

“날이 밝는 대로 옛 신의 교단과 접촉하겠습니다.”

“수도의 유지들을 장악해야 하오. 기사는 아니지만, 그들이 가진 재화와 인맥은 기사의 칼보다 무서울 수 있소.”

“그 일은 와트 경이 맡아주시오. 본인은 왕실부터 정리해야겠소.”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두 눈을 껌벅이며 정치와 모략을 구경했다. 눈 깜짝할 사이 땅과 재산, 더 나아가 목숨까지 빼앗기는 기사들이 속출했다.

“그리고 로벨 경?”

로벨은 갑자기 호명된 자신의 이름에 얼떨떨한 반응을 보였다.

에릭 공작은 로벨에게 정치적인 행동을 요구하지 않았다. 로벨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로벨에게 왕자파 영주의 처분을 맡기면 ‘기사가 명예롭게 죽을 수 있는 곳은 전장뿐이오.’ 하면서 죄다 풀어줄 것이 뻔했다. 옛 신의 교단이나 무역상을 장악하는 일도 비슷할 것이다. ‘신앙과 신념을 수호하는 것이 기사의 본분이오.’ 그런 성격이니 지난날 모두가 배신할 때 홀로 의리를 지켰을 것이다.

에릭 공작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이 전쟁의 일등공신은 경이오. 왕제님께서 직접 공적을 치하할 것이오. 그때 놀라지 말라고 미리 귀띔해주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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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공작의 귀띔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진행된 대관식 직후 논공행상이 시작되는데, 가장 먼저 포상을 받은 사람이 로벨이었다.

데이브 ‘국왕’은 문무백관 앞에서 샘 포클의 보검을 빼들고 더듬더듬 말했다.

“로벨 로드릭을 포클랜드의 후, 후작으로 봉하며, 왕의 군사 고문직을 위, 위임한다.”

로벨은 깜짝 놀라 ‘무엄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문무백관의 축하를 받을 뿐, 호통이나 질책 따위는 없었다.

이로써 볼탄 반도의 백작 겸 포클랜드의 후작이 되었다. 이 정도면 12기사 가문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직위였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정이 조금 달랐다. 어린 집사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실권 없는 명예작위와 명예직함이라 투덜거렸을 것이다.

로벨 이외에도 적절한 포상이 주어졌다. 에릭 공작은 포스트 포레스트의 영지를 하사받았고, 와트 마르셀 자작은 구름성의 백작으로 봉해졌으며, 그 외에도 재물, 땅, 특권 따위가 나눠졌다. 항상 그렇듯 불만불평이 흘러나왔으나 어떻게든 마무리가 되었다.

“기사 나리가 후작이라굽쇼!”

“정확히는 늑대성의 백작 겸 포클랜드의 후작이다.”

“그러니까 후작 맞잖수!”

“...맞다.”

사실 로벨의 후작위는 여러 이해관계에서 겹쳐 나온 것이다. 모래성 같은 왕위를 지탱할 강력한 후원자가 필요한데, ‘강력함’이란 수식어에는 필연적으로 야심, 야망, 권력욕 따위가 따라붙는다. 야심이 없으면서 유사시 힘이 되어줄 충성스러운 기사란 흔치 않다. 설령 그런 기사가 많더라도 새로 개편된 권력구조에서 에릭 프란시스 공작, 둠 노릭스 후작, 와트 마르셀 백작 등의 견제를 받으면 힘을 실어줄 수 없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능력이 있으면서 야심이 없고, 새로운 권력자의 호감을 사는 기사가 하나 있으니, 바로 로벨 로드릭이었다.

에릭 공작 입장에서는 자신의 가장 충직한 기사가 중앙귀족이 되니 오히려 환영할 일이고, 와트 마르셀 백작 등 구(舊)왕제파 영주들은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먼 지방의 기사라 위기감을 덜 수 있었다.

그렇게 조금은 치졸하고, 조금은 잔인하고, 조금은 황당하게 왕위계승전쟁이 마무리되었다.

“그나저나 이제 우리는 어쩌요?”

“뭐가?”

“자비에 후작 일당은 자기네 성에 꽁꽁 틀어박혔잖소. 그거 잡으러 가야 하나?”

“이미 승부가 갈렸는데? 아마도 협상하겠지. 작위와 영토를 보존해주는 대가로 충성을 받을 거다. 물론, 세금과 피해보상을 왕창 물리겠지만.”

“하여간 기사 놈들이란! 괜히 죽어 나자빠지는 것은 우리 병사들이지!”

전쟁이 끝나자 전쟁 말고 쓸모가 없는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할 일이 없어졌다. 발가락 슈미츠가 안장끈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포클랜드의 후작 나리가 되셨으니까, 이제 고향으로 안 가시려나?”

“너 고향이 아이란드 왕국이라면서?”

“아니, 뭐, 이 정도 정 붙였으면 늑대성도 내 고향이지.”

울프 용병단에 소속된 지 4~6년이 지난 고참 용병들은 암묵적으로 긍정했다. 용병 노릇을 시작하면서 이처럼 오래 한 곳에 엉덩이 붙이고 지낸 적이 없었다. 마을 처녀와 결혼을 약속한 녀석도 있고, 시장 상인과 동업을 계획하는 녀석도 있었으니 이쯤 되면 로드릭 마을의 주민이나 다름없었다.

코골이 바디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남아도 허풍쟁이 녀석만 남겠지. 우린 집에 갈 거니까. 걱정이랑 하지를 마.”

“왜? 왜 내가 남는데!”

“그래. 남을 거면 다 남아야지.”

마지막 대사는 걸쭉한 용병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울프 용병단을 찔끔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부로 후작 나리가 된 기사 나리가 뚱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하하! 농담입니다요. 우린 기사 나리가 가는 곳이면 지옥 끝까지 따라갑니다요! 암!”

‘어린 집사가 급료를 지불하는 동안’이란 전제가 빠지긴 했지만, 용병이 보이는 충성심치고는 최상급이었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럼 가자.”

“...예?”

분위기가 싸해졌다. ‘지옥으로 가자굽쇼?’, ‘어디로 가야 나오는데?’, ‘나, 난 가자고 안 했는데...’ 따위의 시선이 오갔다. 하지만 로벨이라고 지옥을 찾아갈 재주는 없었다. 로벨은 오해를 정정해주었다.

“늑대성으로, 우리 집으로 가자.”

“아, 아앗!”

“정말입니까요?”

울프 용병단은 신이 나서 투구를 던졌다. 어린 집사가 툴툴거리며 챙겨 줄 전투수당을 받아서 로드릭 마을 시장과 노스폴드 사창가에서 흥청망청 낭비할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생각이 깊은 용병도 있었다. 펄프 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렇게 빨리 회군해도 됩니까? 자비에 후작도 그렇고, 왕자파 영주들도 그렇고, 아직 뒷정리가 안 됐을 텐데요?”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에 손을 얹고 시끌시끌한 왕성을 돌아보았다.

“그건 주군이 알아서 할 거야. 난 할 일이 없어.”

어린 집사가 있으면 모를까, 로벨, 마녀, 용병은 전후처리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권 한 조각이라도 더 챙기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적당한 핑계거리를 둘러댔다.

“깁스 자작의 일이 남았잖아. 호른 경과 바이란 경이 걱정 돼.”

“에이, 고작해야 깁스 자작인뎁쇼?”

외팔이가 손사래 쳤다. 하지만 주름살만큼이나 사려가 깊어진 펄프 대장은 로벨의 속내를 읽었다.

“이안 선장에게도 회군을 알리겠습니다.”

“응.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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