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민폐
180화. 민폐
로벨이 잠에서 깬 것은 오랜 전쟁으로 단련된 육감과 약간의 운, 그리고 코끝을 간질이는 피냄새 때문이다.
로벨은 먼 곳의 소란과 가까운 곳의 소동을 동시에 감지했고, 양쪽 모두에 집중했다.
“외팔이! 애꾸눈! 모두 일어나!”
로벨은 소드 벨트를 차고 파나케아 투구를 뒤집어쓰며 사각천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로벨의 부름에 먼저 반응한 것은 소란의 원흉이었다. 어둠 속에서 더 어두운 그림자가 나타났다. 소리를 죽이기 위해 몸에 착 달라붙는 가죽 갑옷을 입고, 빛 반사를 줄이기 위해 병장기에 재를 발랐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전문적인 암살자였다. 그리고 전문가라서 꼭 하는 짓이 있었다.
“로벨 로드릭 백작?”
암살자 하나가 이름을 물었다. 바보 같지만 꼭 필요한 절차였다. 임무를 완수하고 기분 좋게 복귀했는데 알고 보니 엉뚱한 사람이었다면 밥숟가락 놓아야 한다.
로벨은 고전적인 질문에 고전적인 반응을 보였다.
“누가 보냈지?”
이 정도면 훌륭한 긍정이었다. 암살자들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쇠붙이를 앞세우고 좌우로 흩어졌다. 연습을 많이 했는지 순식간에 포위망을 구성했다.
로벨은 수적 불리함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시간을 끌며 울프 용병단이 올 거라 믿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파나케아 투구의 효능이 대단했다.
“흠...!”
명령, 신호, 기합 따위가 없이 앞뒤의 암살자가 동시에 움직였다.
로벨은 오른손으로 오른쪽 허리의 흐룬팅을 역수로 뽑아 등 뒤의 자객을 찌르고, 상체를 숙여 정면으로 날아드는 메이스를 피하는 동시에 허리 뒤에서 대거를 뽑아 메이스 주인 낭심에 꽃아 넣었다. 앞뒤에서 거의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윽-!”
“컥!”
앞뒤를 저지하자 곧장 좌우에서 달려들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발검 동작으로 왼쪽에서 치고 들어오는 손도끼를 흘려보내고, 오른쪽으로 파고드는 암살자를 어깨로 부딪쳐 서너 걸음 밀어낸 후 아론다이트를 위로 던져 공중에서 역수로 잡고 투창처럼 집어던졌다. 크고 무거운 칼날이 가죽갑옷을 뚫고 심장에 박혔다.
“으... 으으윽...”
로벨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손만 뻗어 무릎 꿇은 습격자의 가슴에서 흐룬팅을 회수했다. 파나케아의 놀라운 시야 덕분에 일일이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암살자들은 기상천외한 칼솜씨를 가진 것처럼 여겼다.
‘한 손으로 셋을 처치하다니?’
‘제기랄! 소문이 사실이었어!’
암살자들은 포비아 왕국의 전설적인 기사 로벨 로드릭의 소문을 떠올렸다. 성문을 주먹으로 부수고, 성벽을 한 발로 뛰어넘는-애써 성문을 부수고 왜 성벽을 넘는지는 모르지만- 괴물이란 소문이었다.
“누가 보냈는지 말해. 그럼 고이 보내줄게.”
로벨은 흐룬팅을 휘저어 핏물을 털어냈다. 별거 아닌 동작에서 압도적인 자신감이 엿보였다.
“아니면 좀 더 할까? 너희도 한 명만 남아야 양심의 가책 없이 자백하겠지?”
협박이 아니라 배려였다. ‘새벽에 일어나려면 일찍 자야지?’ 수준이었다. 그래서 몇 배 더 무서웠다. 숨이 붙은 암살자들은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때, 부끄럽지 않게 도망칠 계기가 생겼다.
“기사 나리! 기사 나리!”
“으허억? 여기도 적이 있잖아?”
“야! 뭐하냐! 기사 나리를 지켜라!”
외팔이 더치 이하 울프 용병단이 흉악한 병장기를 꺼내들고 우르르 몰려왔다. 암살자들은 유일한 이점인 머릿수마저 잃었다. 눈짓을 교환하더니 바로 몸을 돌렸다. 과묵한 몬트 이하 일부 용병이 기를 쓰고 쫓아가고, 외팔이 더치, 애꾸눈 볼포스, 허풍쟁이 제이콥 등은 로벨을 지키기 위해 지휘막사에 남았다.
로벨은 암살자 시체를 발로 뒤집으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외팔이가 거칠어진 숨을 달래며 코를 훌쩍였다. 손도끼에서 핏물이 떨어지고, 바클러에 화살이 한 대 꽂혀있었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싸운 모양이다.
“그니까, 그 뭐냐, 양, 양, 양 뭐라고 했지?”
“양동작전! 멍청아!”
애꾸눈 볼포스가 외팔이 더치의 엉덩이를 뻥! 차고 앞으로 나왔다. 역시 애꾸눈이 있어야 안심되었다.
“남동쪽에서 습격이 있었습니다.”
“피해는?”
“보초를 서는 노릭스 후작군 병사가 부상당했습니다. 적의 숫자가 얼마 안 돼 바로 격퇴했습니다만...”
애꾸눈은 땅바닥에 너부러진 암살자를 착잡하게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잡병으로 주의를 분산시키고 정예 부대로 영주님을 노린 것 같습니다.”
로벨은 흐룬팅을 칼집에 꽂아 넣고 남쪽을 보았다. 소란스럽긴 하지만 전투의 소란이 아니었다. 슐트 경이 포로를 처리하고 피해를 수습하는 듯했다.
외팔이가 죽은 암살자의 얼굴을 좌우로 돌려보며 말했다.
“이놈들은 뭐야? 생긴 걸 봐서 모래 뭐시기 용병단 같은데? 남쪽 거지떼 맞지?”
발가락 슈미츠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믐달이야.”
로벨을 제외한 모두가 일제히 하늘을 보았다.
“아닌데? 반달인데?”
발가락은 ‘북쪽 돼지들’을 한심하고 쳐다보며 설명했다.
“모나카 왕국의 용병단이야. 아니, 암살단이라고 해야 하나? 전쟁터에서 이런 식으로 암살작전을 펼친다고 들었어.”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대로 전문 암살자였다. 애꾸눈이 안대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암살전문 용병이라니. 별의별 잡놈들이 다 있군.”
“인어의 바다 남쪽에서는 악명 높은 놈들이다. 이놈들 때문에 생긴 경호전문 용병단도 있으니까.”
그 먼 곳에서 무슨 일로 왔는지 뻔했다. 허풍쟁이가 버럭! 화를 냈다.
“자비에 후작, 이 개자식이! 지 실력으로 안 되니까 암살자를 끌어들여?”
귀족모독이지만 탓할 수 없었다. 심정적으로 모두 동의했다.
“암살은 배팅이 큰 만큼 확률이 낮은 도박입니다. 자비에 후작 성격상 다음 대안을 세워뒀을 겁니다.”
“응. 그럴 거야.”
로벨은 몸을 움직이지 않고 동쪽을 보았다.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까지 사흘 이상 남았다. 시간을 벌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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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이 밝아오자 상황이 정리되었다. 애꾸눈 말대로 큰 피해는 없었다. 노릭스 후작군은 전사 1명, 부상 1명, 울프 용병단은 부상 1명이었다. 그것도 싸우다 다친 게 아니라 밤눈이 어두워서 말뚝에 걸려 넘어진 부상이었다. 반면 적군은 21명이 죽고 5명이 생포되었다. 슐트 경이 대단히 강경하게 포로를 심문했으나 포클랜드 시티에서 고용된 프리랜서란 것 말고 알아낸 정보가 없었다. 누가, 왜, 무슨 목적으로 고용했는지도 모르는 삼류 뜨내기 용병이었다.
“저런 놈들 꼭 있지. 첫 전투에서 죽어 나자빠지는 놈들.”
“진짜배기는 기사 나리를 노린 놈들 같은데?”
한편, 암살자를 추격한 과묵한 몬트가 아무 소득 없이 돌아왔다. 외팔이가 한심하다는 듯 투덜거려서 작은 싸움이 났지만, 로벨이 지켜보아 크게 번지지 않았다. 애꾸눈이 차분하게 말했다.
“아군의 위치를 들켰으니 다음은 본대가 올 겁니다.”
“차라리 오라고 하쇼! 박살을 내줄 테니까!”
“자비에 후작님이 직접 올 거예요.”
마녀 키르케가 불쑥 끼어들었다. 로벨은 마녀를 빤히 보다가 ‘몸을 움직이지 않고’ 보았음을 깨닫고 뒤늦게 목을 돌렸다.
“기사님이 말했잖아요. 하얀 숲이 왕제님에게 가담했으니 눈치 보는 여러 영주님이 우리 쪽에 합류할 거라고요. 그러니 영주님을 보내지 못해요. 자비에 후작님이 직접 올 거예요.”
허풍쟁이 제이콥이 미심쩍게 물었다.
“그럴만한 군사가 있을까? 주력군이 박살났는데?”
“용병단을 2개나 고용했어요. 그럼 3개나 4개가 있을 수도 있어요.”
그냥 싸우는 거라면 정예 중의 정예 울프 용병단과 중무장한 노릭스 후작군이 질 리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보급마차였다.
“적과 싸우면서 50대나 되는 마차를 보호할 수는 없어. 위험부담이 너무 커.”
전설의 기사도, 역전의 용병들도 고민했다. 그러자 은근히 똑똑한 마녀가 제안했다.
“가지 말고 오라고 해요.”
마녀의 작전은 한 번에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누구를? 자비에 후작을?”
“아니요. 아쉬운 사람이요.”
“지금 아쉬운 것은 우리인데... 아, 아니구나?”
로벨은 정말 아쉬운 사람이 누군지 깨달았다. 그러자 금방 작전이 나왔다.
“외팔이, 가서 슐트 경을 불러와.”
“어라? 방법을 찾았습니까요?”
“응. 구체적인 작전은 슐트 경이 세울 거야.”
로벨만큼 영민하지 못한 외팔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들었다.
“이제 민폐 좀 끼쳐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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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자작은 포클랜드 지방의 유서 깊은 영주이자 명망 높은 기사였다. 그리고 왕위계승전쟁에 갈등하는 소심한 사내이기도 했다.
심정적으로 정통성이 강한 제1왕자를 지지하지만, 프란시스 공작, 제임스 공작 등 위세 높은 제후들의 눈치를 보아 대놓고 지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부끄럽고, 또 걱정되었다.
전쟁 중에 흔히 일어나는 약탈, 방화, 폭동 등을 방지하기 위해 거금을 주고 10명의 용병을 고용하고 50명의 영지민을 징집했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군대는 초장에 박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어지간한 군대라면 말이다.
“여, 여, 여, 영주님! 여, 여, 여, 영주님!”
하워드 자작은 닭가슴을 쭈욱- 찢다가 괴기한 호칭에 인상을 찌푸렸다.
“여여 영주가 누군지 모르지만, 난 하워드 영주니까 제발 좀 닥쳐!”
평소라면 이 정도 면박으로 깊은 반성을 이끌어냈겠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적입니다! 아니! 적인지 뭔지 모르지만, 그냥 적입니다!”
“적이라고?”
“100명! 아이고! 200명은 됩니다!”
하워드 자작은 깜짝 놀랐지만, 이내 표정을 굳혔다. 왕제파와 왕자파 중 어느 쪽일지 모르나, 성 안의 충분한 군세를 보여주면 쉽게 덤비지 못할 것이다.
“이런 날을 대비해서 비싼 돈 들여 용병단을 고용하지 않았느냐. 내가 갑옷을 입을 동안 용병들을 집합시켜라.”
“그, 그것이... 몽땅 도망갔습니다.”
“머, 뭣이라?”
챙그랑! 접시가 땅에 떨어졌다. 잉그비아 왕국에서 구입한 값비싼 포슬린 그릇이 산산조각 났다. 그러자 도망 안 가고 용감하게 보고하러 온 징수관이 납작 엎드렸다.
“그런 어이없는 놈들이 있나! 대체 왜?”
“적의 깃발을 보고... 울프, 울프 용병단이라고...”
“울프 용병단? 그게 뭔데!”
“그랜드 챔피언, 볼탄 반도의 숫사자, 로벨 로드릭 백작의 사, 사설 용병단입니다.”
하워드 자작의 얼굴이 잘 삶은 닭고기처럼 하얗게 변했다. 심정적으로 도망간 용병단을 용서했다. 본인도 도망가고 싶어졌으니까.
“로벨 로드릭 백작이라고!”
로벨 로드릭 백작은 왼팔의 붕대를 풀고 백옥 같은 손가락을 움직여보았다. 찌릿찌릿한 통증이 있는데 못 쓸 정도는 아니었다.
‘회복이 빨라.’
로벨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예전에 팔이 부러졌을 때는 100일 지나야 겨우 쓸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보름 만에 호전되었다.
‘역시 난 대단해!’
로벨이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질 때, 마녀 키르케가 진실을 알려주었다.
“파나케아는 치유의 힘을 가진 신령한 나무에요. 상처를 아물게 하고 병을 낫게 해요.”
“아... 그래?”
로벨은 파나케아의 투구를 만졌다. 요정왕이 선물한 흐룬팅도 그렇지만, 마도의 수호자 장비는 하나같이 신기했다.
“그래도 무리하지 마세요. 자꾸 다치면 어린 집사가 화낼 거예요.”
로벨은 어린 집사란 말에 목을 움츠렸다. 그러나 금방 자신감을 보였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거 같아.”
로벨은 빙그레 웃었다. 이어서 울프 용병단과 노릭스 후작군이 환호했다. ‘적’의 성탑에 백기가 올라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