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수송
179화. 수송
로벨은 하얀 숲 마을을 조용히 거닐었다. 한가한 마을에 한적한 거리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서 평온하지 못했다.
‘볼프 후작을 의심한 것은 사실이야.’
‘저 괴물을 의심해야지 않을까?’
‘거짓말쟁이.’
‘그럼 누구를 믿어야 하지?’
로벨은 오솔길을 걷다가 큼지막한 밤나무에 가로막혀 잠시 멈춰 섰다. 가을바람에 익어가는 허리 굽은 나무가 탐스럽고 아름다웠다. 로벨은 밤송이를 멍하니 올려다보다가 방향을 바꿨다.
저 멀리서 아야와 이야카가 촐랑거리며 따라왔다. 꼴에 늑대라고 돼지를 쫓아내고 닭을 몰아내며 평화로운 거리에서 깡패짓을 하고 있었다. 마녀 키르케가 봤으면 착한 아이들 괴롭히지 말라고 혼쭐을 냈겠지만, 지금은 노릭스 후작을 따라 드루이드 집회에 참석했다.
“드루이드라...”
곰, 늑대, 사슴, 떡갈나무 따위를 숭배하는 기이한 마법사 집단. 그 때문에 옛 신의 교단과 오랫동안 마찰을 빚어왔다.
“역시 그렇지?”
아야와 이야카는 뭐가 그런지 모르면서 그냥 그렇다고 컹컹! 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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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숲 드루이드 집회는 유라피아 대륙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마법사 모임이었다. 보편적으로 ‘가장 오래된’이란 뉘앙스에는 권위적인, 전통적인, 격식 있는 등이 뜻이 담겨있는 경우가 많은데, ‘마법사’란 단어와 결부하면 조금 다르게 해석되었다.
“으히히힛! 개구리 뒷다리!”
“개, 개구리 뒷다리! 막 이래!”
“깔깔깔! 깔깔!”
높고 낮은 웃음이 휘날리고, 높고 낮은 고깔모자가 날뛰었다.
수염이 덥수룩한 드루이드는 과일주 항아리째 벌컥벌컥 마신 후 그대로 토했고, 걸음마를 뗀 햇수를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드루이드는 나비를 쫓아 뒤뚱뒤뚱 뛰어갔고, 허리둘레가 나무통만한 드루이드는 쟁반을 여섯 개씩 나르며 걸쭉한 욕설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울프 용병단은 진지하게 토론했다.
“마녀 아가씨의 친구들일까?”
“저 정도면 혈족이겠지.”
“나 마법사가 싫어졌어...”
나이, 외모, 성별이 달라도 하는 짓이 마녀 키르케와 똑같았다. 별거 아닌 것에 자지러지라 웃고, 울고, 화내고, 다시 웃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최대한 이해심을 발휘했다.
“마법사 중에는 미치광이가 많잖아. 이상한 약을 맛봐야 하니까. 일종의 직업병이지.”
“우리 안 미쳤거든요?”
마녀 키르케가 사슴 통구이를 가져오며 투덜거렸다. 울프 용병단은 푸짐한 고기상에 탄성을 질렀다.
사슴은 왕이나 영주만 사냥할 수 있는 귀한 짐승이었다. 물론, 주인이 없는 월경지에서는 사슴이든 사자든 마음대로 사냥할 수 있지만, 주인이 없는 땅은 주민도 없으니 일반적으로 지나다닐 일이 없었다.
“여기 영주 나으리는 퍽 너그러운 나으리인가보다.”
“그러게? 우리 기사 나리도 일 년에 한 번 잡을까 말까 한 게 사슴인데.”
울프 용병단은 사슴의 갈비뼈를 우악스럽게 뜯어가며 시시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기사 나리는 어디 간 거야?”
“어? 산책한다고 나갔는데?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더라.”
“왜? 후작이랑 이야기가 잘 안 됐나?”
외팔이 더치가 시무룩해졌다.
“기사 나리 몫은 남겨둬라.”
“에이, 언제 올 줄 알고 남겨? 그냥 먹자.”
그때, 로벨보다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웃고 떠드는 파티장에 어울리지 않는 어두운 얼굴이지만, 그럼에도 환대를 안 할 수 없는 귀한 손님이었다.
“여기서 뭐하는 거지?”
슬픈 눈으로 살점을 발라내는 외팔이도, 양쪽 볼이 터져라 고기를 밀어 넣는 겁쟁이도, 아야와 이야카에게 주려고 뼈다귀를 챙기는 마녀 키르케도 모두 동작을 멈췄다.
네일 공국인 특유의 큰 키와 각진 얼굴, 불그스름한 머리카락과 수염, 콧등과 뺨에 희미한 흉터가 있고, 왼쪽 눈에 큼지막한 안대가 자리했다. 유라피아 대륙의 인간이 아무리 많아도 둘 이상은 찾기 힘든 남자였다.
“애, 애꾸눈?”
“으아닛! 애꾸눈이다!”
애꾸눈 볼포스는 동료들의 격한 반응을 다른 의미로 이해했다.
“영주님 허락 없이 사슴을 사냥한 거면...”
“에라이! 지금 사슴이 문제냐!”
“애꾸눈이다! 애꾸눈이 왔다!”
울프 용병단은 귀한 고기를 팽개치고 우르르 몰려왔다.
“이 자식! 드디어 돌아왔구나!”
“제정신 맞지? 맞아? 맞나? 맞구나!”
“애꾸눈이다! 애꾸눈이야!”
애꾸눈은 동료들의 낯선 태도에 그만 뒷걸음쳤다.
“뭐, 뭐냐? 왜 그러는 거야! 저리 떨어져! 이 자식은 왜 울어?”
외팔이 더치는 덩치에 안 어울리게 눈물콧물 쥐어짜며 애꾸눈을 흔들었고, 허풍쟁이 제이콥은 애꾸눈 옷에 코를 팽 풀었고, 과묵한 몬트는 몸을 돌린 채 짤막하게 기도했다.
“왜 소란이야?”
때맞춰 로벨이 돌아왔다. 애꾸눈에게 집중된 시선이 로벨에게 옮겨졌다. 마녀 키르케가 울먹이며 말했다.
“기사님, 기사님, 애꾸눈 아저씨가... 아저씨가...”
로벨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는 애꾸눈 용병을 물끄러미 보았다. 두어 시간 전에도 마주한 얼굴이라 새삼스러울 것이 없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볼포스?”
“영주님, 외람되오나 무슨 상황인지 잘...”
로벨은 상황설명 따위 건너뛰었다. 표정, 말투, 행동, 짜증까지 의심할 여지없이 애꾸눈 볼포스였다. 로벨은 성큼성큼 다가가 와락! 끌어안았다. 마녀는 비명을 질렀고, 용병들은 환호성을 터트렸고, 늑대는 자신의 꼬리를 물것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드루이드들이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잘 왔어. 잘 돌아왔어.”
애꾸눈은 당황했지만 피하지 않았다. 차가운 판금 너머로 따뜻한 감정이 전해졌다. 사랑, 걱정, 그리고 기쁨이 가득했다. 애꾸눈은 어린아이 같은 고용주의 등을 감히 토닥였다.
“예. 돌아왔습니다.”
그 말이 기폭제가 되었다. 울프 용병단은 울고, 웃고, 때리고, 던지며 애꾸눈 볼포스의 귀환을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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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로벨에게 또 다른 선물이 도착했다. 간밤에 마신 술을 두통과 속 쓰림으로 확인할 때, 노릭스 후작이 성 니콜라스처럼 깜짝 선물을 던졌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을 돕겠네.”
로벨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아니, 정말이오?”
노릭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로벨이 ‘정말 고맙다’, ‘잘 생각했다’, ‘난 믿고 있었다’ 등등을 외치기 전에 먼저 선수 쳤다.
“내게는 병사가 많지 않으니 군대를 보내지는 못하네.”
“...그럼?”
“식량과 무기를 지원하겠네.”
로벨은 기뻐하는 자세에서 잠시 정지하고 생각했다. 기대한 것과 다르지만 나쁘지 않았다. 사실 병사를 받아도 먹일 식량이 없었다.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실제 병력보다 정치적인 의미가 중요했다. 볼탄 반도에 이어서 하얀 숲까지 데이브 왕제를 지지하면, 기회주의자, 평화주의자, 결정장애자를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노릭스 후작 역시 그것을 생각하고 자신의 대리인을 소개했다.
“서 슐트일세,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로 군량을 운송해줄 걸세.”
하얀 숲 마을 밖에서 인사한 후드 기사였다.
로벨은 어정쩡한 자세를 바꿔서 환영의 제스처를 보냈다.
“잘 부탁하오.”
“본인이야 말로.”
로벨 일행이 간밤에 먹고 마시고 떠드는 사이 출정준비를 마친 듯 100명의 병사와 50대의 수레가 갖춰졌다. 밀가루, 보릿가루, 납작한 렌틸콩, 염장된 고기, 건조된 과일, 즉시 취식이 가능한 쉽 비스킷과 오래된 하드 택(Hard Tack) 등등 이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군이 100일은 전쟁을 수행할 양이었다.
“이 작은 깡촌에 무슨 식량이 이리 많아?”
고기와 과일은 이해하지만, 밀과 보리 같은 곡물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노릭스 후작이 푸짐하게 웃으며 말했다.
“숲이 주는 선물이지.”
“...숲에서 보리농사를 지어?”
“숲의 선물로 농사짓는 친구와 거래했지. 껄껄!”
로벨은 노릭스 후작이 수완 좋은 영주란 것을 인정했다.
“이 정도면 가을추수까지 버틸 수 있겠어. 사실상 식량 걱정은 끝난 거야.”
허풍쟁이 제이콥이 트림과 함께 중얼거렸다.
“무사히 옮길 수 있으면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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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2배로 늘어난 병력과 새로 추가된 50대의 수레를 이끌고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로 출발했다.
울프 용병단과 노릭스 후작군 모두 잘 무장된 정예병이고, 숫자도 100명이 넘지만,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모를 혼란한 전장을 가로질러야 하는 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애꾸눈, 무리하지 말고 쉬어.”
로벨은 제정신이 돌아온지 만 하루가 안 된 애꾸눈을 위로했다. 애꾸눈은 그동안 관리가 안 된 아바레스트를 점검하며 대꾸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심려하지 마십시오.”
로벨은 소대원을 배치하는 외팔이 더치와 농마를 살피는 허풍쟁이 제이콥 등을 구경하면서 어젯밤 정신이 없어 묻지 못한 것을 물었다.
“거인의 숲에서... 어떻게 된 거야?”
애꾸눈은 인상을 찌푸리고 안대를 만졌다.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습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누구한테? 도적? 늑대?”
“제가 기억하기로 사람이었습니다. 필히 도적일 겁니다.”
로벨은 거인의 숲에서 쓸어버린 도적떼를 생각했다. 그리 대단한 무장이 아니었다. 애꾸눈이 이끄는 정예 용병이 당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림 리퍼의 짓이 아니면, 대체 누가?’
로벨은 슐트 경과 이야기하는 노릭스 후작을 돌아보았다. 궁금한 것이 많은데, 쉬이 물어볼 수 없었다.
‘지금은 누구도 믿을 수 없어.’
로벨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인간끼리도 믿지 못하는데, 수천 년을 살아온 괴물을 어찌 믿을 수 있을까.
“기사 나리, 출발 준비가 끝났습니다요.”
로벨은 눈앞에 일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은 데이브 왕제와 주군을 도와 포클랜드를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때가 되면 악마추종자, 혹은 마도의 수호자의 속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출발해.”
로벨의 명령이 떨어지자 외팔이 더치 이하 소대장이 개성껏 복창했다.
“울프 용병단! 출발!”
“포클랜드로 간다!”
“자비에 후작을 혼내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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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트 경의 기사 종자와 과묵한 몬트의 기마 소대가 교대로 정찰을 나가고, 스피어맨이 선두를 지키며, 크로스보우 소대가 수레 중간중간에 경비를 서고, 풋맨 소대가 후미를 보호했다. 정석적인 수송대열이었다.
“작은 부대도 놓치면 안 돼. 소식이 전해지면 대규모 부대로 밀어닥칠 거야.”
수송부대의 고질적인 문제는 병력에 비해 행렬이 길다는 것이다. 로벨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선두와 후미를 쉼 없이 오가야 했다. 외팔이 더치가 보다 못해 한마디 붙였다.
“우리 병력이 160명입니다요. 어지간한 영지군은 접근도 못 할 겁니다요.”
“160명이 아니야. 30명이야.”
로벨은 수송부대의 문제를 정확히 짚었다. 행렬이 긴 만큼 은밀, 정숙, 신속 따위와 거리가 멀었다. 소대 간격이 멀어서 갑자기 전투가 벌어지면 선두부대와 후미부대가 각자 싸워야 할 것이다. 외팔이가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이렇게 훤히 보이는데 누가 접근하겠습니까요?”
“지금은 그렇지.”
“지금이 아니면요?”
“밤이 문제야.”
로벨은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하늘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태양이, 구름이, 하늘이 서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가마솥 안에서 뚜껑이 닫히는 것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아무 일 없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간절한 바람은 그냥 들어주는 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