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파나케아
178화. 파나케아
노릭스 후작은 술을 한 잔 따라 애꾸눈에게 권했다. 이로써 술잔이 딱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손님들은 술잔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로벨이 성문을 힐끔거리자 애꾸눈이 무심한 듯 안심시켰다.
“네 부하들은 마을 처녀와 노닥이고 있다. 신경 쓰지 않기에 조용히 빠져나왔다.”
“...이것들이!”
로벨은 화를 내면서 활짝 웃었다. 아무튼 다친 사람이 없으니 다행이다. 하지만 정작 걱정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로벨은 흐룬팅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는데 지금껏 순순히 따라온 것은... 설마...”
“너희를 이곳에 데려와야 했으니.”
마녀 키르케가 어이없어서 빼액-! 소리쳤다.
“꼭 이렇게 해야 해요? 그냥 초대장을 보낼 생각은 없었어요?”
“그러면 초대에 응했을까?”
로벨과 마녀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사신의 초대에 응할 만큼 용감하지 못했다.
“그런가?”
“그렇죠?”
애꾸눈을 납치한 것도, 애꾸눈으로 납치당한 것도 모두 계획된 일이었다. 로벨이 볼 때는 참 불편하고 번거로운 방법인데 결과적으로 초대에 응했으니 비웃을 수 없었다. 로벨은 자신을 끌어들인 악마, 혹은 악마와 비슷한 무언가에게 무섭게 따졌다.
“이 기회에 확인해야겠어. 너희의 목적이 뭐야? 왜 우리를 괴롭히는 거야?”
노릭스 후작이 술잔을 흔들었다.
“로벨 로드릭은 지혜로운 기사라고 들었네. 한번 맞춰보게.”
로벨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유서 깊은 악당들의 목적을 꺼냈다.
“우리 왕국을 지배하려고?”
노릭스 후작이 재미난 농담이란 듯 껄껄 웃었다. 반면 애꾸눈은 희미한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보다 큰 것을 노리고 있지.”
“...유라피아 대륙을?”
“그보다 더욱 크네.”
“야만의 땅까지? 동방대륙까지?”
노릭스 후작은 빙그레 웃었다. 철부지 손녀를 놀리는 태도였다.
“그보다 훨씬 크네.”
“...그런 게 어디 있어?”
노릭스 후작은 술잔으로 로벨과 성 밖 부하들을 가리켰다.
“자네도 가지고 있고, 저 밖에 시끄러운 용병들도 가지고 있네.”
로벨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릭스 후작이 정답을 가르쳐주었다.
“인간의 영성(靈性)일세.”
이야기가 단숨에 어려워졌다.
“그게 뭐야?”
“사랑하고, 미워하고, 고민하고, 후회하고, 소망하고, 질투하는 힘일세.”
“지성 같은 거야? 아니면 감정 비슷한 거?
“그것보다 고차원적이지. 자유롭게 상상하고, 상상한 것을 현실로 만드는 놀라운 힘이니까.”
“상상을 현실로...? 난 가끔 하늘을 날고 싶어. 하지만 아무리 상상해도 하늘을 날 수 없는데?”
노릭스 후작이 빙그레 웃었다.
“그 소망이 모이고 모이면 언젠가 하늘을 날게 될 걸세. 그것이 인간이 가진 놀라운 힘이지.”
로벨은 등 뒤에 날개가 자라나는 상상을 했다. 아무래도 갑옷을 입을 때 불편할 것 같았다.
“그런 힘이 있다 치고, 그런 걸 왜 탐내는 거야?”
노릭스 후작은 술잔을 기울이며 역으로 질문했다.
“가난한 자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돈?”
“병든 자의 소원은 무엇일까?”
“건강!”
노릭스 후작은 솔직한 대답에 만족했다.
“지성이 있는 존재라면 자신에게 부족한 것, 부재한 것을 갈망하지. 우리 또한 그러하네.”
“너희는 영성이란 것이 없어?”
노릭스 후작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 사이 애꾸눈이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는 인간이 상상하여 만들어낸 인지의 존재다. 허구, 허상, 사념, 상상이다. 인간이 죽음을 상상해서 죽음이 되었고, 불멸을 꿈꾸어서 불멸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 뜻으로 이룬 것이 없다.”
“그래서 뭐야? 인간을 죽이고 영성인지 뭔지를 빼앗겠다?”
“부모를 죽이는 자식도 있는가?”
“음... 흔치 않지만 패륜아가 나오... 그런 뜻이 아니구나?”
로벨이 머리 아파하자 노릭스 후작이 조금 쉽게 정리했다.
“우리는 인간을 사랑하네. 사랑하는 방법이 다를 뿐, 늑대의 왕과 뱀파이어 군주도 인간을 사랑하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보석처럼 빛나고, 꽃잎처럼 가녀린 너희들이거늘!”
“헛소리! 인간을 해치는 게 사랑이야? 그래서 얻는 게 뭔데?”
“영성을 가지는 것.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존재’하는 것.”
로벨보다 마녀 키르케가 더 놀랐다.
“그게 가능해요?”
사신과 드루이드가 차례로 대답했다.
“그러한 존재가 있었다.”
“인간이 옛 신이라 부르는 자.”
“인지의 세계에서 태어나 인간으로 죽어간 자.”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죽음.”
로벨은 철학에서 신학으로 넘어가자 신음을 흘렸다. 노릭스 후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부자로 태어난 자는 빈자의 고통을 상상할 수 없고, 부모가 되지 못한 자식은 부모의 걱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영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용서하지도 않을 거야.”
로벨이 으르렁거리자 노릭스 후작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마도의 수호자가 모두 자네의 적은 아닐세. 적어도 나와 요정왕은 자네 편이라 할 수 있지.”
로벨은 요정왕이 선물한 흐룬팅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또 다른 마도의 수호자를 노려보았다.
“저자는?”
“저 친구는 가장 순수한 죽음에서 태어났네. 한때 인간이었던 우리와 다르네. 존재의 이유가 다르지. 자네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중립일세.”
“좋아. 너희 괴물들의 목적도 알겠고, 패거리가 나눠진 것도 알겠어. 하지만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어.”
“그게 무엇인가?”
“그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이유가 뭐야? 그전에 나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가 뭐야?”
긴 이야기를 돌고 돌아 처음으로 돌아왔다.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자네가 우리 수호자를 막아줬으면 하네.”
“왜?”
“이 세상은 본디 인간의 것이고, 인간이 선택한 길로 나아가야 하네. 적어도 나는 그리 믿고 있네. 그러기 위해서는 악마추종자와 마도의 수호자를 막아야 하네.”
“질문을 잘못했어. 왜 ‘하필’ 나야?”
“자네가 가장 강하니까.”
로벨은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좀 강하긴 해.”
노릭스 후작이 짓궂은 얼굴로 보충 설명했다.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강함이 아닐세. 힘과 재주로 보면 자네보다 강한 인간은 얼마든지 있네. 더스틴 폴라, 고르크 슐츠, 그렉 페럿...”
“그렉 페럿은 죽었다.”
애꾸눈이 허리를 끊었다. 노릭스 후작이 혀를 찼다.
“그리 되었는가?”
“늑대왕의 짓이다.”
로벨은 익숙한 이름과 익숙지 않은 이름에 얼굴이 찡그려졌다. 노릭스 후작은 청년 기사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았다.
“그 어떤 인간도 순수한 힘으로는 늑대왕을 이길 수 없네. 강한 염원과 강한 의지가 필요하지. 그런 의미에서 자네가 적임자일세.”
“늑대의 왕과 싸워봤어. 하지만 이길 수 없었어.”
로벨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리로 데려온 것 아니겠나. 자, 따라오게나.”
노릭스 후작은 술잔을 비우고 일어났다. 그리고 당연히 쫓아올 거라 믿는 듯 메인 홀을 지나 뒤뜰로 나가버렸다.
“어디 가는 거야?”
로벨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지만, 애꾸눈이 말없이 따라가고 마녀가 호기심에 쫓아가자 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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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에서 볼 때는 그리 크지 않은 단층 저택이었는데, 뒤쪽으로 넘어가자 장미성의 정원을 통째로 옮겨도 될 만큼 넓은 땅이 나타났다. 농사를 지어도 될 공터에는 오직 한 그루의 나무만 심어져 있었다. 그냥 평범한 나무가 아니었다.
“저, 저게 뭐야?”
로벨은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생긴 것은 떡갈나무인데 잎부터 뿌리까지 온통 하얀색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잎사귀 사이로 눈송이 같은 꽃가루가 나풀나풀 떨어져서 땅에 닿으면 작은 새싹이 피어나고 꽃망울이 맺혔다가 곧 시들어서 사라졌다. 마녀 키르케가 숨 막히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얀 숲이 하얀 숲이라 불리는 진짜 이유에요.”
로벨이 당황하는 사이 노릭스 후작이 신령한 나무의 일부를 가져왔다. 아주 익숙한 모양이었다.
“신수(神樹) 파나케아(Panacea)로 만든 투구일세.”
“파나케아?”
로벨은 둥글둥글한 투구를 내려다보았다. 은으로 만든 것처럼 하얗고 매끄러웠다. 헬멧을 조이는 힌지와 바이저를 여닫는 피벗이 워낙 정교해서 한 덩이를 조각한 것처럼 보였다.
“이상하게 여길 것 없네. 저 아이가 가진 지팡이와 똑같은 재질일세.”
마녀가 깜짝 놀라 자신의 지팡이를 내려다보았다.
“이 몽둥이... 아니, 지팡이도 신수로 만든 거예요?”
“네 스승이 말해주지 않더냐?”
“와아-! 처음 알았어요!”
로벨은 머뭇거리다가 투구로 손을 뻗었다.
“이게 나무라고?”
손끝이 바이저에 닿았다. 금속의 차가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이런 색을 가진 거지?”
“헬멧이니까.”
노릭스 후작의 뜬구름 잡는 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농부에게는 골칫거리인 밑동이도 여행자에게는 멋진 의자로 보이는 법이지.”
로벨은 골치 아픈 설명에 관심 없었다.
“헬멧만 주는 거야? 컨틀렛은? 플레이트는? 스커트는?”
“...자네 보기와 달리 욕심이 많군.”
“기왕이면 풀 세트로 갖추는 게 좋잖아.”
노릭스 후작은 껄껄 웃었다. 그러나 끝내 갑옷을 주지는 않았다.
“신수를 지닌 것만으로 큰 힘이 될 걸세.”
“글쎄... 단단해 보이긴 하지만...”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조심스럽게 뒤집어썼다. 첫 느낌은 가벼움이었다. 깃털 모자를 쓴 것 같았다. 그리고 꽉 막힌 바이저에도 불구하고 시야가 넓었다. 얼마나 넓은지 등 뒤에 선 마녀 키르케가 보일 정도...
“아앗!”
로벨은 깜짝 놀라 뒤로 돌았다. 그러자 덩달아 놀라는 마녀와 함께 배꼽을 잡고 웃는 노릭스 후작도 보였다. 이상하고 말이 안 되는데,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이고 있었다. 시야가 360도로 확장된 느낌이다.
“이게 뭐야? 마법이야?”
노릭스 후작은 개구쟁이처럼 히쭉거렸다.
“그리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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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노릭스 후작의 제안을 받아 성 안에 머물렀다. 아무것도 모르는 외팔이 이하 울프 용병단은 따뜻한 식사와 아늑한 잠자리에 마냥 신이 났지만, 집주인의 정체를 아는 로벨은 긴장을 풀기 어려웠다.
로벨은 불편한 왼팔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많아.”
“밤은 길고 술은 가득하지. 편하게 말하게.”
노릭스 후작은 괴물답지 않게 자상했다. 앞뒤 재지 않고 칼부림하는 늑대의 왕이나 뱀처럼 음흉해서 속내를 알 수 없는 뱀파이어 군주를 생각하면 퍽 낯선 수호자였다.
“우선 애꾸눈을 돌려줘.”
“그건 죽음과 상의해야지.”
로벨은 흐룬팅 손잡이를 잡고 도끼눈을 치켜떴다. 노릭스 후작은 손을 휘저으며 즉시 상의해보겠다고 진정시켰다. 두 눈에 장난기가 가득해서 신뢰가 가지 않았다. 로벨은 불만을 삼키고 두 번째 목적을 밝혔다.
마도의 수호자가 아니라, 12기사 가문의 노릭스 후작에게 전하는 목적이었다.
“내 주군, 에릭 프란시스 공작을 도와줘.”
노릭스 후작은 곱슬곱슬한 수염을 만졌다.
“그 부분은 조금 깊이 생각해야 하네.”
“대체 얼마나 깊은 거야?”
“수천의 사람을 묻을 만큼 깊네.”
로벨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번에는 농담이 아니었다. 노릭스 후작은 벽난로에 장작을 하나 넣고 뜸을 들였다. 로벨이 답답해서 입술을 열 때 불쑥 말했다.
“우선 오해를 풀어야겠지.”
“무슨 오해?”
“자네도 짐작하겠지만, 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그림 리퍼가 아닐세.”
슬프게도 짐작하지 못했다.
“무슨 소리야? 그 괴물이 사람을 조종하잖아?”
“그 사실을 누가 일러주었는가?”
로벨은 기억을 더듬었다. 애꾸눈 볼포스,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 포클랜드 시티, 빌포이 다이첼 경, 프란시스 시티, 볼프 사트로 후작...
“볼프 후작?”
“충분히 의심할만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