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75화 (175/605)

175화. 여행

175화. 여행

로벨은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로벨 로드릭 백작군은 전사자 22명, 부상자 33명이지만, 자비에 후작군은 전사자만 150명이었다. 그 대부분이 주력군인 모래폭풍 용병단이었다.

“오늘 밤에 후퇴할 듯합니다.”

“하긴. 와트 마르셀 자작군이 귀환하면 양쪽으로 포위당하게 되니까.”

자비에 후작의 다음 행동은 전략전술의 대가가 아니어도 짐작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고민할 것은 두 가지였다.

가시나무 성의 머를 브릭 경은 추격해서 피해를 주장했고, 늪지성의 메튜 경은 아직까지 수적 열세이니 무리수를 두지 말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결정을 내리고 실행에 옮길 로벨과 펄프 대장의 관심사는 사로잡은, 아니, 되찾은 애꾸눈 볼포스에게 가 있었다.

로벨은 흐룬팅 손잡이를 쓰다듬으며 아홉 번째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정말 그림 리퍼야?”

애꾸눈이 아닌 애꾸눈은 지겨운 기색 없이 대답했다.

“그렇다.”

“애꾸눈이 아니야?”

“아니다.”

“첫 급료가 얼마였어?”

“모른다.”

“앗! 진짜 애꾸눈이 아닌가 봐!”

이상한 심문이지만 이상하다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싸울 때는 자각하지 못 했는데, 막사 무장해제하고 앉혀놓으니 지난 6년 동안 함께한 애꾸눈 볼포스 그대로였다. 허풍쟁이와 겁쟁이와 발가락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니까 악령이 들린 거잖습니까요?”

“어, 어, 어쩌지? 사, 사제를 부를까요?”

“우리 고향에 엑소시스트 사제가 있는데...”

“아이란드 왕국까지 가자고?”

그때 마녀 키르케가 헛기침으로 끼어들었다.

“미모만큼이나 지성과 품성이 우수한 마법사가 있는데 사제를 왜 찾아요?”

기사와 늑대와 용병과 악마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되었다. 우는 어른도 딸꾹질하게 할 무시무시한 조합이었다. 펄프 대장이 쾌재를 불렀다.

“그렇지! 자고로 독은 독으로 제압하는 법! 악마는 마녀로 잡아야지!”

“마녀 아니라고욧!”

애꾸눈은 하나뿐인 눈을 가늘게 떴다.

“마도에 몸담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마녀가 심연에서 태어난 나와 대적할 수 있을까.”

“흥!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이죠!”

마녀 키르케가 코웃음 치고 떡갈나무 지팡이를 붕붕 돌렸다. 로벨 이하 마법의 문외한은 재빨리 물러나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퇴마 의식을 구경했다.

“악마와 마녀라니? 완전 동화 속 이야기잖아?”

“그래도 마녀 아가씨가 있어서 다행이야.”

겁쟁이 데비 외 몇 명은 겁을 먹고 슬금슬금 도망쳤지만, 펄프 대장을 비롯한 대부분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엉덩이를 붙였다. 하지만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마녀 키르케식 마법을 잠시 잊고 있었다.

“이리 나와! -퍽!- 나쁜 악마야! -퍽!- 아주 혼쭐을 -깡!- 내줄 테야! -퍽!-”

마녀가 애꾸눈의 머리와 어깨를 마구잡이로 두드려 패기 시작했다. 기운이 얼마나 좋은지 죽음의 관리자, 영혼의 수확자, 사자의 인도자가 처참하게 비명을 질렀다. 로벨과 펄프 대장이 마녀의 팔다리를 잡고 떼어냈다.

“그만! 그만해! 애꾸눈 죽겠다!”

“이야? 성질머리 보쇼?”

“옛 신의 사제가 마녀 사냥한 이유가 다 있었어...”

애꾸눈이 숨넘어가기 직전 간신히 말릴 수 있었다. 마녀는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칫! 외팔이 아저씨면 더 좋았을 텐데...”

“머, 뭐라고?”

“아무 말 안 했어요!”

아무튼, 그림 리퍼는 로벨을 슬프게 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로벨은 기절한 애꾸눈을 살펴보고 한숨 쉬었다.

“이 방법은 아닌 것 같아.”

마녀도 순순히 동의했다.

“그림 리퍼는 수많은 수호자 중에서도 최상위 존재에요. 무려 사신이잖아요.”

“그럼 못 죽여?”

“인지의 능력을 가진 모든 생물이 존재를 부정하기 전까지 불가능해요. 마법의 힘을 빌려도 현계에서 추방하는 것이 고작이죠.”

로벨은 포비아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마법사를 떠올렸다.

“하얀 숲의 둠 노릭스 후작이라면?”

마녀 키르케에게 까마득한 사조(師祖)가 되는 마법사였다. 마녀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긍정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은 가능할지도 몰라요.”

로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사람을 웃게 하는 것은 언제나 희망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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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프란시스 공작군이 도착했다.

기사가 55명, 용병이 300명, 농민병이 750명으로 도합 1,100명의 대군이었다.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에 다 들어오지 못해 일부 영주들은 성 밖에 숙영지를 건설해야 했다.

와트 마르셀 자작 이하 왕제파 영주들은 입이 귓가에 걸렸다. 오늘 당장에라도 프란시스 시티로 진격해서 제1왕자 지지파를 몰아낼 기세였다. 하지만 전쟁은 ‘나가자!’, ‘싸우자!’ 외친다고 끝이 아니었다. 네 자릿수 위장을 채울 곡물과 고기가 우선이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겠소?”

“인근 영지에서 최대한 징발했으나, 가을 추수 전이라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전쟁 중에 가장 무서운 것은 적이 아니라 굶주림이었다. 이틀을 굶으면 탈영병이 나오고, 사흘을 굶으면 도적떼가 나온다. 1천 명의 도적이 흩어지는 순간 포스트 포레스트 지방은 지옥이 될 것이다.

“바람성은 사흘 치 식량밖에 없습니다.”

“호수성도 닷새를 버티기가 어렵습니다.”

아이언베어 요새에서 싸울 때와 사뭇 달랐다. 당시는 봄농사가 끝난 직후라 귀리, 보리, 순무 등등 식량이 넉넉했고, 포클랜드 영주들의 협조로 현지조달이 어느 정도 가능했는데, 지금은 그 포클랜드와 싸워야 했다.

“여유식량을 나눠도 열흘을 나기 힘들겠군.”

“그 안에 포클랜드 시티를 점령하면...”

“그게 가능하리라 보시오?”

에릭 공작의 군사와 왕제파 군사를 합하면 1,500명이 넘었다. 적은 병력은 아니지만, 수도를 열흘 만에 차지할 만큼 엄청난 병력도 아니었다.

“검은 숲의 지원은 불가능하오?”

“사트로 후작과 신경전 중이오. 지난 몬스터와 전쟁으로 식량도 없겠지만, 혹 식량이 있어도 식량을 보낼 기사를 뺄 수 없을 것이오.”

“볼프 후작, 그자가 항상 문제로군!”

“포클랜드 지방의 영주들을 최대한 포섭하는 수밖에 없을 거요.”

에릭 공작이 피곤한 듯 이마를 짚었다. 다분히 의도된 동작이었다. 기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오늘 중으로 대안을 강구해 보겠소. 우선 쉬도록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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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젠 백작, 헤르만 백작, 맥기 남작 등의 봉신이 모두 나가고, 에릭 프란시스 공작 임시 집무실에는 로벨만 남았다.

“로벨 경.”

에릭 공작은 왼팔에 부목을 한 로벨을 물끄러미 보았다.

“예, 마로드.”

로벨은 단독으로 전투를 벌인 일을 사과해야 할까 고민했다. 그러자 에릭 공작이 고민을 덜어주었다.

“로벨 경!”

에릭 공작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로벨이 움찔해서 무릎 꿇으려는 찰나, 에릭 공작이 격하게 포옹했다.

“정말 잘 해주었소! 역시 나의 로벨 경이오!”

“아...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 간악한 자비에 후작을 두 번이나 격퇴하다니? 하하핫! 이제 누가 최고인지 깨달았겠지!”

로벨은 조심스럽게 몸을 빼냈다. 에릭 공작은 로벨의 부상당한 팔을 보고 ‘아차차!’ 하며 한발 물러났다.

“흠흠! 아무튼 잘해주었소. 여세를 몰아 포클랜드로 진군하면 좋을 텐데, 보급사정이 좋지 않아 아쉬울 뿐이오.”

로벨은 애꾸눈을 심문했을 때부터, 아니, 왕위계승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생각한 것을 말했다.

“하얀 숲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얀 숲이라...?”

“하얀 숲이 아군이 되면 보급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포클랜드 지방 영주들을 압박할 수 있습니다. 큰 피해 없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잉그비아 왕국의 악마추종자 말이군.”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추종자는 각 지방의 제후를 조종해서 혼란을 부추기고 있었다. 하얀 숲 역시 예외가 아닐 것이다.

에릭 공작은 로벨의 주장을 전부 믿지 않았다. 소설이나 동화 같은 이야기였으니까 당연했다. 그러나 하얀 숲의 가문들이 아군이 되면 유리한 것은 분명했다.

“노릭스 후작은 괴팍한 작자요. 여지껏 관망하는 것을 보아 누구와도 협조할 생각이 없을 것이오.”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로벨이 전령을 자처하자 에릭 공작이 깜짝 놀랐다.

“경이?”

“제 휘하의 울프 용병단만 이끌고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몸이 가벼우니 열흘 이내 답을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에릭 공작은 로벨의 왼팔을 안쓰럽게 보았다.

“몸도 성치 않은데 괜찮겠소?”

로벨은 오른팔로 흉갑을 툭툭 두드렸다.

“제 검과 가문의 명예를 걸고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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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켈트 경에게 바위성, 구릉성, 늪지성, 가시나무 성 병사의 지휘를 맡기고, 펄프 대장에게 울프 용병단 부상자를 부탁한 후 정확히 60명을 추려서 출진 준비했다. 펄프 대장은 외팔이 더치 이하 최정예 3개 소대를 못 미더운 자식 보듯이 보았다.

“기사 나리들도 데려가는 게 좋지 않습니까?”

용병 60명이면 어지간한 장원보다 막강한 군사력이지만, 전시상황이라 쉬이 안심할 수 없었다. 지금 포클랜드의 문제는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기사가 많으면 눈에 띄어.”

기사가 가면 기사 종자, 시동, 하인, 하녀 등이 따라붙고, 각종 무기와 마구, 말먹이 따위를 챙겨가야 했다. 로벨처럼 수행원 하나-마녀 키르케-만 데리고 다니는 경우가 이상한 것이다.

“적아를 구분할 수 없는 것은 포클랜드 영주들도 마찬가지야. 떠돌이 용병처럼 행동하면 적인지 아군인지 몰라 조심할 거야.”

로벨이 자랑스럽게 설명하자 펄프 대장 등은 마녀 키르케를 쳐다보았다. 로벨은 풀이 죽어서 고백했다.

“응. 키르케 생각이야.”

“흐음. 그럼 일리가 있군요.”

로벨은 늑대 남매와 함께 농마가 끄는 수레에 올랐다. 그 모습을 본 머를 브릭 경이 탄식했다.

기사가 말을 타지 않는 것은 대단한 수치였다. 과거 동방원정 시절, 잉그비아 국왕이 땅에서 일반 병사처럼 싸우자 숙적인 동방대륙의 술탄이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말을 선물한 일화가 있었다. 그 정도로 말은 기사의 상징이자 자존심이었다.

“주군, 제 말이라도...”

“아니오. 조금 전 말했듯 눈에 띄지 않게 다녀와야 하오. 그리고 한쪽 팔이 불편하니 말보다 수레가 낫소.”

로벨은 왼팔을 들어 보였다. 머를 브릭 경은 부상자에게 승마를 권했음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로벨은 로드릭 가문의 첫 번째 기사에게 자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본인 대신 주군과 왕제님을 부탁하오.”

머를 브릭 경은 롱소드를 뽑아 가드를 가슴에 붙였다.

“이 목숨을 바쳐서 두 분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로벨은 브릭 경의 과민한 반응에 머쓱하게 끄덕였다. 외팔이 더치가 인원과 물자를 확인 후 보고했다.

“기사 나리, 이제 출발해도 됩니다.”

로벨은 늑대 남매에게 아픈 몸을 기대고 포박당한 애꾸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럼 출발.”

과묵한 몬트를 선두로 울프 용병단이 출발했다. 포클랜드를 되찾고, 평화를 되찾고, 애꾸눈을 되찾기 위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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