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74화 (174/605)

174화. 눈물

174화. 눈물

로벨은 악이 받쳐서 아론다이트를 휘둘렀다. 자비에 후작의 용병이 자세를 낮추고 바클러를 올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쾅! 쾅! 쾅! 콰직-!

한 번 치자 금속테가 끊어지고, 두 번 치자 나무판이 쪼개지고, 세 번 치자 완전히 박살났다.

깨진 방패 틈새로 겁에 질린 용병의 얼굴이 보였다. 열일곱? 열여덟? 까무잡잡한 피부에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전형적인 아이란드 왕국인이었다.

‘...미안.’

로벨은 젊은 용병의 머리를 잘랐다. 이국의 땅에서 이름 없이 죽게 된 불쌍한 용병이다. 하지만 마음에 깊이 새기지 않았다.

그런 용병은 여기 세 자릿수로 있었다.

“펄프 대장! 성문을 부탁해!”

“예? 그게 무슨... 제길! 죽어! 죽어! 죽어엇! 후우... 안 됩니다!”

펄프 대장도 사다리 하나를 잡고 막싸움 중이었다. 애지중지하는 숏소드는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자루가 짧은 배틀 엑스를 휘둘렀다. 지금처럼 비좁고 밀집된 악다구니 속에서는 저런 무기가 차라리 나았다.

크로스보우 제1소대가 사다리를 올라오는 적병을 향해 일제사격 했다. 자비에 후작군이 사다리 중간에서 우수수- 떨어져나갔다. 그 덕분에 펄프 대장 이하 성벽 수비병은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적의 옆구리를 칠 거야! 겸사겸사 애꾸눈도 잡아오고!”

“자, 잠깐만요! 발가락! 흉내쟁이! 영주님을 따라가!”

로벨은 울프 용병단 밀치고 계단 아래로 뛰어내렸다. 추락사를 방지하기 위해 깔아놓은 건초더미에 정확히 착지했다. 지푸라기와 먼지가 풀풀 날렸다. 로벨의 뜻을 따라 과묵한 몬트가 전투마를 끌고 왔다.

“영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아, 고마워. 콜록.”

로벨은 어깨와 스커트에 묻은 지푸라기를 털어내고 플레일의 고삐를 잡았다. 그때 발가락과 흉내쟁이가 로벨이 떨어진 자리에 떨어졌다.

“기사 나리! 잠까느악!”

“저희도 같이 갑우어억!”

과묵한 몬트는 엉덩이와 가슴으로 경이로운 착지기술을 선보인 전우에게 묵묵히 고삐를 나눠주었다.

“...가자.”

로벨은 플레일의 뺨을 다독이고 안장에 올랐다.

수성 중에 성을 몰래 나가 기습하는 것은 역사와 소설 양쪽에서 흔히 나오는 전술이지만 막상 실천하려면 쉽지 않았다. 적에게 들키지 않은 비밀문이 있어야 하고, 적진에 뛰어들 용감한 병사가 있어야 하며, 적군을 따돌릴 충분한 기동력이 있어야 했다.

“와아! 마침 세 가지가 모두 있잖아?”

“전 아닌 것 같은뎁쇼?”

“푸릉-! 푸르릉-!”

흉내쟁이 퍼시발은 두 번째가 자신이 없었고, 전투마 플레일은 세 번째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적개심에 불타는 과묵한 몬트와 발가락 슈미츠는 달랐다. 친구를 구하고, 친구의 복수를 갚기 위해 각오를 다졌다.

로벨은 세 사람과 네 마리의 심정을 조금씩 공유했다.

“그래도 가야 해. 애꾸눈을 구해오자.”

로벨은 플레일을 제자리에서 돌리며 준비운동했다. 적당히 몸이 달아오르자 소드 벨트를 고쳐 매고 늪지성 병사에게 고갯짓했다. 늙수그레한 병사는 말 한 필 겨우 통과할 측문을 빠끔히 열었다.

“히야앗!”

로벨이 먼저 나가자 로벨의 호위 랜스들은 ‘혹시 작전이 있느냐’,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등을 제안할 겨를 없이 무작정 따라 달려야 했다.

“기사 나리를 따르자! 이랴앗!”

“에휴! 제명에 못 죽지!”

성문을 통과하자 포스트 포레스트의 광활한 평원이 카펫처럼 펼쳐졌다. 볼탄 반도와 달리 굴곡이 거의 없어 말 달리기가 아주 좋았다.

로벨 일행은 성벽을 따라 달리다가 옛날 옛적에 매몰된 해자를 건너 치열한 공방이 펼쳐지는 성문 앞마당으로 몸을 던졌다. 모래폭풍 용병단의 크로스보우맨이 가장 먼저 알아챘다.

“기습이다! 기습이다!”

로벨은 플레일의 방향을 살짝 바꿔서 눈치 빠른 용병을 들이박았다. 1,400파운드의 질량이 시속 40마일 속도로 부딪치자 종잇장처럼 날아갔다.

로벨은 꼬리뼈에서 전해지는 충격을 정수리에서 털어내며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애꾸눈을 잡는 것이 목적이지만, 애꾸눈만 때릴 이유는 없었다. 기왕 나왔으니 자비에 후작군에게 최대한 피해를 강요할 생각이었다.

“쇄기꼴!”

“에잇!”

봄에 열심히 훈련한 보람이 있었다. 발가락 슈미츠가 오른쪽, 흉내쟁이 퍼시발이 왼쪽으로 나란히 붙어서 로벨을 피해 몸을 던지는 자비에 후작군을 짓밟았다.

기병에게 측면을 내준 순간 학살은 예고된 것이다. 로벨 일행은 무인지경으로 치고, 박고, 찌르고, 때리면서 자비에 후작의 아처부대를 휘저었다. 그 효과는 성벽 위에서 나타났다. 원거리 공격이 줄어들자 울프 용병단은 여장 밖으로 몸을 내밀고 자유롭게 투척물을 쏟아부었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모래폭풍 용병단에게 지옥의 시간이었다.

“애꾸눈! 애꾸눈 볼포스!”

로벨은 적진을 돌파해서 애꾸눈 볼포스 앞에 도달했다. 애꾸눈은 피하지도, 움츠리지도 않았다. 로벨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 듯 느긋하게 헌팅 나이프를 뽑았다. 얄밉게도 사실이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비틀었다. 칼날이 아니라 칼의 몸통으로 때릴 작정이었다. 보통 칼이면 부러지거나 휘어질 테지만, 요정의 검 아론다이트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길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는 자. 그렇기에 무섭고 강하다.”

“뭐라는 거야!”

로벨은 그랜드 챔피언 타이틀이 부끄럽지 않게 애꾸눈의 머리통을 정확히 노렸다. 그러나 애꾸눈 역시 20년 동안 전장을 누빈 베테랑 용병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애꾸눈은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을 살아온 괴물 중에 괴물이었다. 제자리에서 무릎 꿇으며 헌팅 나이프를 휘둘렀다.

깡-!

헌팅 나이프는 이름 그대로 사냥을 위해 제작된 날붙이였다. 짐승의 질긴 가죽을 자를 만큼 날카롭고, 뼈와 힘줄을 끊을 만큼 무거웠다. 제대로 가격하면 아무리 커다란 짐승이라도 무사하기 힘들었다.

오베리아 산 전투마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히히힝-!”

“큭!”

전투마 플레일의 앞다리가 꺾였다. 근육과 통뼈로 완전히 잘리지는 않았지만, 힘이 풀려 달리지 못했다. 로벨은 무게중심을 잡지 못해 앞으로 한 바퀴 구르며 낙마했다.

하늘이 춤추고 땅이 날았다. 그리고 숨이 턱 막히는 고통이 찾아왔다. ‘으아아-ㅅ!’ 아멧 안쪽에서 비명이 휘몰아친다.

“기사 나리!”

“이런! 영주님을 지켜라!”

과묵한 몬트 이하 기마 소대가 급히 속도를 줄였지만 관성을 어쩌지 못해 한창 지나쳤다. 다행히 적병은 겁을 먹어 도주 중이고, 애꾸눈은 전투마를 후려친 충격에 땅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플레일... 플레일...”

로벨은 타고난 기사였다. 자신의 몸보다 흙먼지를 날리며 헐떡이는 전투마를 걱정했다. 앞다리가 부러졌고 출혈이 상당했다.

“플레일!”

로벨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휘청거렸다. 과묵한 몬트가 제때 달려와 팔을 잡았다.

“영주님! 부상이 심합니다!”

“나, 난 괜찮아. 그런데 플레일이...”

“앞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가망이 없습니다.”

“안 돼... 안 돼...”

로벨이 정신을 못 차리자 과묵한 몬트는 소대장의 재량을 발휘하기로 했다.

“슈미츠! 애꾸눈을 기절시켜! 퍼시발! 영주님을 모셔라!”

발가락과 흉내쟁이는 ‘네놈이 언제부터 소대장이었냐?’ 따지는 대신 몸을 움직였다. 애꾸눈에게, 정확히는 그림 리퍼에게 감정이 많은 발가락 슈미츠는 메이스를 뽑아 인정사정없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애꾸눈과 친분이 깊지 않아 죽어도 별 수 없다는 공격이었다. 그 덕분에 평범한 인간보다 신체능력이 좋은 마도의 수호자를 기절시킬 수 있었다.

“퉤!”

발가락은 침을 옆으로 뱉고 애꾸눈을 안장에 올렸다. 그런데 진짜 침을 뱉고 싶은 것은 흉내쟁이였다. 칼만 세 자루에 판금갑옷을 풀로 갖춘 로벨을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기사 나리! 기사 나리! 정신 좀 차리고... 이잇! 기사면 다냐!”

흉내쟁이를 무례하다 말할 수 없었다. 멀찍이 떨어진 적군이 상황을 눈치 채고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과묵한 몬트가 땅에 내려서 아론다이트를 주웠다. 그리고 아직까지 숨을 헐떡이는 플레일에게 다가갔다. 적진 한복판에 방치된 상황인데 기이할 만큼 차분했다. 과묵하다는 별명이 자신에게만 적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네 주인은 우리가 잘 모시겠다.”

“푸르르... 푸르릉...”

영리한 짐승은 죽을 때를 아는 법이다. 콧김을 한번 뿜고 눈을 살며시 감았다.

과묵한 몬트가 아론다이트를 수직으로 세웠다. 그리고 오랜 세월 한 주인을 위해 봉사한 충직한 말을 고통 없이 보내주었다.

“플레이이일-!”

@

로벨과 기마 소대가 요새 동쪽으로 귀환했다. 울프 용병단과 각 영지군이 우르르 몰려와 목청껏 환호했다. 고작 4명이 수백 명의 적을 휘젓고 끝내 몰아냈으니 눈이 있고 귀가 있고 생각이 있으면 환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전쟁 영웅은 침통했다.

“오베리아 산 전투마 값을 생각하면 그럴만하지.”

“야, 임마! 돈이 문제가 아니잖아!”

로벨은 숙영지에서 쓰러지듯 내려 구유통에 걸터앉았다.

“기사님! 기사님!”

마녀 키르케와 늑대 남매가 뛰어왔다. 애꾸눈을 구하는 것도, 플레일이 죽은 것도 성벽 위에서 전부 보았다.

아야와 이야카는 주인의 슬픔을 달래주려는 듯 축축한 코를 로벨의 겨드랑이와 다리에 밀어 넣었다.

“끼잉... 낑...”

“킁. 킁킁.”

로벨은 두 늑대 때문에 웅크리지 못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아직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최고 지휘관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괜찮아.”

로벨은 아야와 이야카의 목덜미를 쓰다듬고 눈망울에 걱정이 가득한 마녀를 똑바로 보았다.

“고작 말 한 마리잖아? 나이도 많아서 오래 못 탔을 거야.”

“기사님...?”

“전장에서 죽는 것이 전투마의 영광이지. 병들어서 골골거리다 죽으면 더 슬펐을 거야. 그래. 그랬을 거야.”

“기사님...!”

“난 괜찮아. 진짜야.”

로벨은 꿋꿋하게 말했지만 마녀의 걱정은 가시지 않았다.

“아뇨! 전혀 안 괜찮아요! 팔이 부러졌잖아요!”

“응?”

로벨은 자신의 왼팔을 들어보였다. 팔꿈치 아래가 축 쳐졌다. 어쩐지 힘이 안 들어간다 했다.

“일단 치료부터해요! 에구! 팔 말고 다친 곳은 없어요? 갑옷을 벗어 봐요!”

“아, 아니야. 팔만 다졌어. 낙마할 때 깔렸나봐.”

“으이구!”

로벨은 마녀 키르케의 도움을 받아 왼쪽 컨틀렛과 뱀브레이스를 풀었다. 마녀는 소매를 걷고 신중하게 뼈를 만졌다.

“아, 아파!”

“뼈가 나갔는데 당연히 아프죠!”

“아니야! 진짜 아프다고!”

“그러니까 당연히...”

로벨은 고통을 숨기려는 듯 바이저를 내렸다. 그러나 숨소리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마녀 키르케는 숨구멍으로 새어 나오는 뜨거운 무언가를 보았다.

“아파... 너무 아프다고...”

창을 막고 화살을 튕겨내는 강철의 갑옷도 눈물을 막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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