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저격수
173화. 저격수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는 300년 가까이 버려진 고성이었다. 성탑은 멀쩡한 곳보다 무너진 곳이 많고 성벽은 간신히 형체만 유지할 뿐이며 성문은 뒤틀려서 닫히지도 않았다. 왕제파 영주들이 아쉬운 대로 바리게이트를 설치하고 보강공사를 실시했으나, 울프 용병단 기준에서 나무 울타리 수준도 안 되었다.
“이런 곳에서 세력을 모으려 했다니, 용감한 건지, 멍청한 건지.”
“난 멍청하다에 한 표.”
“그럼 난 두 표!”
“야! 시끄럽다! 돌이나 날라!”
외팔이 더치가 몽둥이로 위협하자 용감무쌍한 풋맨 소대가 대단히 험악한 얼굴로 돌멩이를 주섬주섬 챙겼다.
“지금 하고 있잖아. 지금.”
“난 아무 말 안 했어! 진짜야!”
그들을 겁쟁이라 탓할 수 없었다. 힘으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용병짬밥 20년 차 외팔이를 이길 사람은 많지 않았다. 로벨과 어린 집사를 제외하면 사실상 펄프 대장뿐이었다.
펄프 대장은 모두가 노동하는 가운데 나이와 직위를 방패 삼아 유유자적 주위를 거닐었다. 성문을 보강하는 겁쟁이 데비를 꾹꾹 찌르며 참견하고, 성벽이 무너진 구간에 나무다리를 놓은 코골이 바디를 방해하다가 제발 좀 저리 꺼져달라는 아우성에 화급히 자리를 떠났다.
“에휴... 늙으면 서럽지. 서러워.”
아주 빈말은 아니었다. 어느덧 50을 목전에 둔 펄프 대장은 꼭 용병이 아니어도 살 만큼 산 노인이었다. 정상적으로 결혼했으면 손자한테 용돈 받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늙다리 잭슨이 말년에 재미 좀 보고 있다는데...’
펄프 대장은 늦여름에 구슬땀 흘리는 부하들을 쭉 훑어보았다. 욕설, 음담패설, 악취, 짜증, 흙먼지 등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35년 넘게 보아온 정겹고 지겨운 풍경이었다.
‘나도 은퇴해서 마누라감이나 찾아볼까?’
생각해보면 눈이 하나 없고 팔이 하나 없는 퇴물 용병들을 꾀어서 시골 영주 아래에 들어갈 때 은퇴를 결심하고 있었다. 두 번 다시 전쟁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 시골 영주가 이렇게 성장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전에 애꾸눈을 찾아야지.’
애꾸눈을 생각하니까 다시 우울해졌다.
로벨은 애꾸눈이 살아있다고 확신하지만, 펄프 대장은 반신반의했다. 지난 세월 동안 창칼에, 질병에, 정의를 가장한 분풀이에 죽어간 동료를 세 자릿수로 보아왔다. 애꾸눈이라고 특별하지 않을 것이다.
성문 위에 투석용 돌을 쌓던 새파란 신출내기가 갑자기 성 밖을 가리켰다. 소리가 안 나오는지 입술을 버금거리다가 간신히 말을 토해냈다.
“자비에 후작군이다!”
울프 용병단은 전쟁 전문 용병단답게 작업을 멈추고 무기와 투구를 챙겼다.
펄프 대장도 숏소드와 하프 아머를 점검한 후 신출내기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예상보다 빨리 애꾸눈의 생사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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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도 신출내기의 외침을 들었다. 잠깐 당황했지만, 어린 왕제를 위해 침착함을 가장했다.
“역시 판단력이 좋아.”
포클랜드 지방의 자기 세력이 습격을 받자 수비 대신 공격을 택했다. 사실 로벨이 자비에 후작 입장이었어도 그랬을 것이다.
데이브 왕제는 체스판의 킹이었다. 킹을 잡으면 남은 말이 몇 개든 이기는 것이다. 하지만 킹 옆에는 가장 강력한 퀸이 버티고 있었다.
“이곳에 계십시오. 기사들을 보내서 호위하도록 하겠습니다.”
“겨, 경! 본인은...”
“무슨 말씀인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벨은 잠깐 말을 멈췄다. 펄프 대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고 지휘관이 오래 비울 상황이 아니었다. 진심을 담아 왕제를 설득했다.
“평화도, 정의도, 그리고 진실도 힘이 있을 때 통하는 법입니다. 이 전쟁에서 이긴 다음 진심을 전하십시오.”
로벨은 아멧을 챙긴 후 때맞춰 적의 출현을 보고하러 온 머를 브릭 경에게 명령했다.
“경과 경의 병사들은 왕제님을 호위하시오. 만약 성문이 뚫리면 앞서 일러준 곳으로 피신하시오.”
“볼탄 해협 말입니까? 아, 알겠습니다.”
로벨은 데이브 왕제를 안심시키기 위해 무릎 꿇고 손가락에 키스했다. 이 정도면 충성서약이나 진배없었다.
“제 병사들은 일당백의 용사입니다. 결코 패하지 않으니 안심하십시오.”
조금 전 ‘성문이...’ 어쩌고와 안 맞는 말이지만, 나이 어린 왕제에게 논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신뢰 가득한 얼굴로 끄덕였다. 로벨은 미소를 짓고 요새 남쪽으로 향했다.
성벽 위에는 펄프 대장 이하 울프 용병단 고참 병사들이 한발 먼저 자리 잡고 있었다. 로벨이 계단을 올라오자 예의 바른 용병들은 투구챙을 잡고 경의를 표했다. 펄프 대장은 상황이 상황이라 예의를 잠시 미뤄두고 보고했다.
“영주님, 자비에 후작군입니다.”
“응.”
로벨은 오른손을 흐룬팅 손잡이에 올리고, 왼쪽 옆구리에 아멧을 끼웠다. 지휘관이 허둥거리면 안 그래도 사기가 낮은 농민병은 대번에 겁을 먹었다. 주의의 시선을 의식해 최대한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엄청나게 많잖아?”
하지만 표정에는 여유가 없었다. 지난 전투에서 100여 명을 격파했는데, 그 손실을 전부 메워서 돌아왔다. 지금 요새 앞에 보이는 숫자만 500명이 넘었다. 게다가 무장도 상당히 좋았다. 크로스보우 소대만 셋이고, 롱보우 소대도 하나 있었다.
“소문으로 들은 모래폭풍 용병단 같습니다.”
“아이란드 왕국 용병단?”
로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울프 용병단처럼 전쟁 전문 용병단을 관찰했다. 아바레스트, 파비스, 워 해머, 클리버 등등 중무장을 갖추고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어설픈 농민병이 아니었다.
로벨은 남쪽 나라에서 올라온 용병단이 어느 정도 실력을 가졌을지 궁금했다. 로벨만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펄프 대장 이하 울프 용병단 주요 간부도 동종업계 종사자를 유심히 살폈다.
“아앗!”
그때, 남보다 눈이 좋은 허풍쟁이 제이콥이 하얗게 질려서 모래폭풍 용병단을 가리켰다.
“저기, 저기, 저 녀석 어째 익숙하지 않아?”
“누구? 저기서도 빚지고 도망쳤냐?”
“농담 아니고! 자세히 봐봐!”
“머리가 한 개고 팔다리가 두 개니까 익숙하지. 여기도 100명쯤 있잖아?”
펄프 대장은 긴장을 풀 겸 허풍쟁이를 놀렸다. 그러나 허풍쟁이는 진지했다. 그것도 아주 진지했다.
“키가 6피트쯤 되고, 외눈안대를 끼고, 아바레스트를 가졌어!”
어쩐지 익숙한 신상정보였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똑같은 이름을 떠올릴 때, 펄프 대장이 버럭! 소리쳤다.
“키 크고 눈깔 없는 아바레스터가 세상천지에 애꾸눈뿐이냐?”
“그, 그렇지 않을까?”
“그런 용병이 두 명이면 신기할 거 같은데?”
겁쟁이 데비와 코골이 바디가 중얼거렸다. 펄프 대장은 고참놈들이 도움이 안 주자 더욱 크게 소리 질렀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가짜 애꾸눈이 또 있을 수 있지! 진짜 애꾸눈이면 저기서 저러고 싸우겠냐?”
“애꾸눈 맞아요.”
마녀 키르케가 고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모두가 조용해졌다. 과묵한 몬트가 하얀 송곳니를 보이며 으르렁거렸다.
“아무리 마녀 아가씨라도 장난칠 게 있고 아닌 게 있소.”
“장난 아니에요. 애꾸눈 볼포스 아저씨에요.”
마녀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힘이 있었다. 가장 의심 많은 용병조차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이게 했다. 펄프 대장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고, 외팔이 더치는 활짝 웃었다.
“살아 있었구나! 그래! 쉽게 죽을 놈이 아니지!”
“그런데 저기서 뭐하는 거야?”
“혹시 첩자로 잠입한 게 아닐까? 예전에 나랑 허풍쟁이가 했던 것처럼...”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저놈들이랑 싸울 줄 누가 알았는데?”
“그림 리퍼. 그 악령의 소행이야.”
로벨이 아랫입술을 살포시 깨물고 중얼거렸다.
“아, 악령이요?”
“거인의 숲에 본 괴물 말이야.”
그러자 발가락 슈미츠와 발냄새 베커의 눈이 번뜩였다. 로벨은 복수심에 불타는 병사들을 못 본척하고 펄프 대장에게 말했다.
“애꾸눈은 나한테 맡겨. 두드려 패서라도 잡아올 테니까.”
“영주님, 그건... 아닙니다. 영주님을 믿겠습니다.”
둥! 둥! 둥! 둥!
자비에 후작군의 전투배치가 끝났다. 9개 풋맨 소대가 방진을 구성해서 사다리를 짊어지고 전진하고, 크로스보우 소대가 좌우로 넓게 퍼져서 사격준비를 마쳤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뽑으며 명령했다.
“전투준비.”
울프 용병단만큼 수성에 숙달된 용병단이 드물었다. 즉시 2인 1조로 뭉쳐서 쇠뇌를 장전했다.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전 제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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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병단 끼리 싸울 때는 두 가지 정형이 있었다.
힘 빼지 말고 적당히 싸우는 척만 하자고 합의하는 경우와 몸값 인상을 위해 악착같이 끝장을 보는 경우였다.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에서 마주한 두 용병단은 완전히 후자였다.
“사다리 밀어내! 멍청아! 사다리부터 밀라고!”
“으아악! 벌써 올라왔다!”
길고 짧은 화살이 쉴 새 없이 날아다니고 쇠와 가죽을 두른 병사가 상대방의 피를 탐했다. 전황은 성벽을 끼고 싸우는 울프 용병단이 유리했다. 울프 용병단이 1명 죽을 때 모래폭풍 용병단은 6~7명이 죽어 나갔다. 전사자 교환비로 따지면 충분히 막을 수 있지만, 요새가 부실해서 마냥 안심할 수 없었다. 어느 한 곳이 뚫리면 순식간에 밀릴 수 있었다.
“응?”
로벨은 눈이 시뻘게져서 올라온 적병과 눈을 마주쳤다.
“아... 아앗!”
용병은 매우 억울했다. 죽을 둥 살 둥 사다리를 올라왔더니 거대한 장검과 육중한 갑옷을 갖춘 기사가 버티고 있었다.
“다시 내려가.”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거꾸로 잡고 폼멜로 용병의 머리를 후려쳤다. 깡-! 경쾌한 종소리가 울렸다. 종이 된 당사자는 유쾌하지 않았다. 용병은 뇌진탕을 일으키며 사다리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악착같이 밀려오는 동료들에게 밟혀 죽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몽둥이처럼 휘둘러서 성벽을 올라오는 용병을 하나하나 쳐냈다. 머리 위로 화살이 스쳐 지나갔다. 가끔은 가슴과 어깨를 때리기도 했다. 컴포지트 아머가 없었으면 대여섯 번 죽었을 것이다.
“우아아아악! 살려줘!”
남들보다 살고자하는 욕망이 강한 용병이 끝까지 사다리에 매달렸다. 로벨은 신명나게 두드리다가 생각을 바꿨다. 용병이 매달린 쪽으로 사다리를 밀어주었다. 급조한 탓에 균형이 안 맞는 사다리였다. 한쪽으로 무게가 쏠리자 서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아, 아, 안 돼!”
“될 거야.”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가드를 갈고리처럼 사용해 사다리를 밀어냈다. 사다리 아래쪽에 용병은 재빨리 뛰어내렸지만, 거의 다 올라온 용병은 새끼 원숭이처럼 사다리에 매달린 채 넘어갔다. 애처로운 비명이 메아리쳤다. 전쟁은 잔혹하고 전투는 시끄러웠다. 비명 한두 음절은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다.
로벨은 사다리가 사라지자 다시 애꾸눈을 찾았다. 그런데 애꾸눈도 로벨을 찾은 모양이다.
깡-!
눈앞에서 불꽃이 뛰었다. 로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저격?’
누군가 로벨의 얼굴을 쏘았다. 오리 주둥이처럼 유선형으로 된 바이저가 화살을 빗겨내서 목숨을 건졌다. 아멧을 쓰지 않았으면, 바이저를 내리지 않았으면 정말 위험했다.
로벨은 1.5초 정도 옛 신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저격수를 찾았다. 이만한 사격솜씨를 가진 용병이 흔할 리 없었다.
“애꾸눈!”
침몰선에서 뛰쳐나오는 쥐떼 같은 용병 무리 사이로 거구의 아바레스터가 보였다. 로벨은 그의 진짜 이름을 불렀다.
“그림 리퍼!”
그림 리퍼는 빈 쇠뇌를 치우며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그랜드 챔피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