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72화 (172/605)

172화. 어르기

172화. 어르기

전투가 끝나자 잔치가 시작되었다.

인간이 죽어서 남기는 것은 보잘것없는 이름이나 명예 따위가 아니라, 피와 살점, 그리고 땀으로 빚은 귀중한 쇳조각 몇 개였다.

“이놈들이! 나도 아직 챙기지 못했는데!”

발냄새 베커가 부주를 휘둘러 까마귀 떼를 쫓아냈다. 영악한 까마귀들은 도망가는 척하다가 발냄새 뒤쪽에 앉아 유리처럼 빛나는 눈알을 꼭 집었다.

시체는 욕심이 없었다.

까마귀가 눈알을 떼어가고, 들쥐가 손가락을 갉아대도 저항하지 않았다. 어둠이 찾아오면 이리와 승냥이가 내장을 헤집고 팔다리를 뜯어갈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는 불평하지 않았다. 그리고 산 자도 잔혹하다 말하지 않았다. 인간도 전쟁의 선물을 마다하지 않았다.

“적당히 챙기고 불 놓아라.”

“어? 저쪽에서 수거할지도 모르잖소?”

“네놈이 볼 때 저놈들이 돌아올 거 같냐?”

“킥킥! 하긴! 마누라도 팽개치고 도망갈 기세더구만.”

울프 용병단은 시체를 뒤져서 몇 푼 안 되는 은화 부스러기, 구리반지, 화살이 빗겨가길 바라며 만든 부적 따위를 챙겼다.

펄프 대장은 앙증맞은 토끼발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주인의 나이를 봐서 어머니나 나이 많은 누이의 선물일 것이다. 옛 신의 사제들은 이교도적인 미신이라 질타하지만, 아들이, 남편이, 형제가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가족에게 신앙은 중요하지 않았다.

“카악-! 퉷!”

펄프 대장은 가래침을 뱉고 요새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까마귀와 쥐와 용병 나부랭이보다는 조금 고상한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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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포레스트 요새의 영주와 기사가 모두 달려 나왔다. 야심이 넘치는 늙은 영주, 명예욕이 가득한 중년 기사, 아직은 순수한 기사 종자 등이 구세주를 칭송했다.

“오! 오오! 로벨 로드릭 백작!”

“실로 엄청난 무용이었소! 옛 신의 가호를 받은 듯하오?”

“소문대로 굉장한 미남이시군!”

거듭 말하지만, 로벨은 교우관계가 좋지 않았다. 포클랜드의 유명한 백작, 자작, 남작이 입을 모아 칭송하는데, 누가 누군지 몰라 대응하기 어려웠다.

“백작의 칼솜씨는 언제 봐도 놀랍소. 우리 왕제군에 잘 오셨소이다.”

“아, 와트 마르셀 자작.”

다행히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검은 숲 해방군에 동참한 와트 마르셀 자작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낯익은 기사가 몇몇 더 있었다. 아이언베어 요새에서 싸우고, 그랜드 토너먼트에서 경합한 기사들이었다. 로벨은 눈인사를 나누다가 정식 기사치고 아직 어린, 그러나 은빛으로 빛나는 화려한 필드 아머를 입은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15살? 16살? 잘 익은 보리처럼 화사한 금발과 보일 듯 말 듯한 주근깨가 인상적이었다. 와트 마르셀 자작이 작게 속삭였다.

“저분이 데이브 고른 데오니스 폰 포클랜드 왕제님이시오.”

“아...”

로벨은 무릎을 꿇으려다가 멈칫했다. 로벨의 주군은 에릭 공작이 분명한데, 에릭 공작의 주군이 누군지 분명하지 않았다.

‘왕제한데 충성한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고민은 깊지만 짧았다. 로벨은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그냥 무릎 꿇었다. 다행히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볼탄 반도 로드릭 가문의 로벨 로드릭입니다.”

데이브 왕제는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일어나시오.’ 한마디를 웅얼거렸다. 왕위계승자라 하나 이제 갓 성인이 된 15살이었다. 피투성이 그랜드 챔피언 앞에서 크게 위축되었다. 귓불이 빨개진 이유는 모르겠지만.

와트 마르셀 자작이 분위기를 바꿀 겸 목소리를 높여 질문했다.

“병사는 저들이 전부요?”

전문 용병 100명이 작은 전력은 아니지만, 자비에 후작 일당을 물리치고 포클랜드 시티를 점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후속 부대가 오고 있소. 본인의 주군이신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본대도 합류할 것이오.”

“에릭 공작이 직접 말이오?”

“그렇다면 승산이 있소!”

오늘 아침까지 도망칠 곳을 고민했을 영주와 기사들이 승리를 기대하며 환호했다.

“자자! 이러지 말고 성안으로 들어갑시다.”

“그렇지! 승전 축하 파티를 해야지! 왕제님, 어서 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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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포레스트 요새 홀에서 조촐한 승전 파티가 열렸다. 사치와 향락을 미덕으로 여기는 귀족 모임치고 정말 조촐했다. 밍밍한 와인과 걸쭉한 맥주, 검게 변한 양고기와 딱딱한 보리빵이 전부였다. 그만큼 보급사정이 좋지 않았다. 와트 마르셀 자작은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묻지도 않은 해명을 늘어놓았다.

“까마귀 성에서 군수물자를 지원하기로 했으나 검은 숲이 두 쪽으로 갈라져 눈치를 보니 쉽지가 않소. 사실상 포클랜드 시티를 장악한 자비에 후작과 볼탄 반도의 군사를 거느린 에릭 공작의 싸움이 될 것이오.”

로벨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차분히 말했다.

“그리고 하얀 숲이 있소.”

“하얀 숲의 노릭스 후작? 그자가 참전하겠소?”

“분명 참전할 것이오.”

로벨은 악마추종자가 얽힌 만큼 하얀 숲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 와트 마르셀 자작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로벨의 체면을 생각해서 가능성을 검토했다.

“하얀 숲의 군사력은 대단하지 않으나 지금 같이 힘이 팽팽할 때는 무시하기 힘드오. 적이 되면 골치 아플 것이오. 12기사 가문 중 셋이 적이 되는 셈이니.”

“우리 편이 될 수도 있잖소?”

“상상하기는 힘들지만...”

“하얀 숲이 가세하면 승리를 보장할 수 있을 거요!”

데이브 왕제의 기사들이 시끌시끌하게 떠들었다. 로벨은 그들을 쭉 보고 한 가지 깨달았다. 누구도 대전략이 없었다.

누구와 왜 싸울 것인지, 어디서 어떻게 이길 것인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왕제가 왕이 되면 가지게 될 부귀와 영예만 관심 있었다.

로벨은 편을 잘못 선 것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자비에 후작 쪽이 우수해 보였다.

‘지금이라도 바꾸자고 해볼까?’

그럴 수야 없지만, 그러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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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성의 켈트 경, 구릉성의 마튼 경, 늪지성의 메튜 경, 그리고 가시나무 성의 브릭 경이 2~3명의 기사 종자와 30여 명의 농민병을 이끌고 차례로 도착했다. 의무종군기간이 지났는데 소환에 응해준 것이 고맙고 또 미안했다. 이로써 로벨 로드릭 백작군은 총 207명이 되었다. 와트 마르셀 경을 비롯한 왕제파의 군사를 모두 합치면 500명이 넘었다.

숫자가 많다고 꼭 좋은 것은 아니었다. 사람과 가축이 먹어치우는 막대한 식량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왕가의 민심 때문에 징발을 가장한 약탈도 대단히 조심스러웠다. 물론, 아주 안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데이브 왕제가 왕이 되면 징발한 식량을 페닝으로 보상해주겠다는 기약 없는 차용증서를 나눠주었다. 가을을 앞두고 당장 먹을 것이 부족한 농민들은 반발했지만 창칼 앞에서 항의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원정 가는 것도 아니고, 자기 땅에서 보급 걱정이라니?”

“거점이 없는 군대가 그렇지 뭐.”

울프 용병단은 귀리죽을 한 그릇씩 푸면서 투덜거렸다. 그 흔한 종군상인조차 하나 없었다. 국가와 국가, 영주와 영주가 싸울 때는 지휘부에 입찰까지 하면 따라붙는 종군상인이 왕좌를 두고 싸우자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왕제파 영주들도 심각성을 깨달았다.

“에릭 공작의 군대가 오면 2배, 3배로 늘어나게 될 것이오.”

“까마귀 성에 연락해보았소?”

“까마귀 성의 재정으로 1천이 넘는 군대를 얼마나 유지할 수 있겠소?”

로벨은 주드 맥켈런 남작이 그리웠다. 전략전술가로 탁월한 맥켈런 남작이라면 이처럼 우왕좌왕 횡설수설하지 않을 것이다.

로벨은 참다못해 대안을 제시했다.

“지금 한곳에 모여 있어봐야 소용이 없소.”

로벨의 고음은 소란 속에서도 잘 들렸다. 영주와 기사가 수다를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럼 병력을 분산하자는 뜻이오?”

“이 요새는 수비하기 좋은 곳이 아니오. 비축된 물자도 없으니 거점으로 가치가 없소.”

“제임스 공작과 에릭 공작의 지원을 받으려면...”

“이 전쟁을 겨울까지 끌고 갈 생각이오?”

로벨의 말에 영주들은 입을 다물었다. 집이 있고 땅이 있었다. 가을이 오면 추수하고, 겨울이 오면 월동준비도 해야 했다.

데이브 왕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포크, 포클랜드 시티로 진군하자는 것이오?”

기사들의 시선이 로벨에게서 데이브 왕제로 옮겨갔다. 어린 왕제는 갑자기 주목 받자 어쩔 줄 몰라 했다. 로벨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말했다.

“전진으로 가기 전에 적의 세력을 분산시켜야 합니다. 왕자파의 영지를 공격했으면 합니다.”

“아군을 쪼개서 적군을 나누는 것이 의미가 있소?”

와트 마르셀 자작이 의아하게 물었다. 로벨은 예상치 못한 질문이라 당황했다. 너무나 상식적인 전술이라 설명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공격할 때는 적을 분산시키고, 수비할 때는 적을 집중시키는 게 유리하오.”

“그, 그런 것이오?”

“칼싸움으로 생각해보시오. 공세일 때는 여기저기를 골고루 노리는 것이 유리하지 않소. 반대로 한곳만 때리면 방어하기가 얼마나 쉽겠소?”

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라 칼싸움으로 비유하니 바로 이해했다. 과거 주드 맥켈런 남작과 싸울 때 체득한 전술이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이 이곳에 있었으면 수제자를 열정적으로 칭찬했을 것이다. 갑론을박이 벌어졌지만, 결국 로벨의 작전이 채택되었다.

영주들은 지도를 펼치고 공략할 왕자파 영지를 물색했다. 평소 사이가 안 좋았던 영주 위주로 선정했는데, 포클랜드 지방 영주가 대부분 해당되어서 별 문제 없었다.

“그럼 왕제님은 어찌하면 좋겠소?”

군사작전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데이브 왕제는 자신이 거론되자 깜짝 놀라 엉덩이를 뒤로 뺐다.

“이곳에서 기다리다 에릭 공작의 주력군과 합류하는 것이 안전할 듯하오.”

“그럼 로벨 백작이 모시는 것이 좋겠군.”

로벨의 군대가 가장 강력하고, 지휘체계상 에릭 프란시스 공작군과 합류해야하니 타당한 결정이었다. 로벨은 데이브 왕제에게 물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주근깨 왕제는 거북이처럼 몸을 움츠리고 말했다.

“경, 경이 불편하지 않다면 그리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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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트 마르셀 경을 비롯한 왕제파 영주들이 30명에서 100명까지 무리지어 출정했다. 그들로 인해 곳곳에서 눈물이 흐르겠지만, 기사로 자란 로벨은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 저 군사를 한곳에 모아놓으며 더 큰 피해가 생길 뿐이다.

“앗! 우리 기사님들이 저기 가요!”

마녀 키르케가 성벽 너머를 가리켰다. 바위성의 켈트 경과 구릉성의 마튼 경도 휘하 병사를 이끌고 출정했다. 에릭 공작이 올 때까지 최대한 많은 전시물자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로벨은 기울어진 성벽 위에서 아군을 배웅했다. 로벨을 수행하는 머를 브릭 경이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저리 많이 나가면 요새 수비가 부실해지지 않습니까?”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에는 울프 용병단 110명과 늪지성 30명과 가시나무 성 25명만 남았다. 자비에 후작이 병사를 모아 기습하면 데이브 왕제가 위험할 수 있었다.

“한번 혼쭐이 났으니 쉽게 공격하지 못할 것이오. 그리고 여차하면 해안으로 도망치면 되오.”

“바다로 말입니까?”

“이안 선장이 푸른 고래 호와 청새치 호를 이끌고 볼탄 해협에서 대기 중이오.”

머를 브릭 경은 주군의 철두철미한 준비에 감탄했다. 리암 수사가 알면 정수리가 붉어질 만큼 억울해할지도 모르겠다.

“로, 로벨 경! 자, 잠깐 볼 수 있을까?”

그때, 어눌한 성품에서 용기를 쥐어 짜낸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벨 일행은 고개를 돌렸다가 아래로 숙였다. 데이브 왕제가 수행기사 하나 없이 성벽을 올라왔다.

“그야 물론입니다.”

로벨은 일행에게 눈짓했다. 머를 브릭 경은 병사들을 살펴보겠다고 중얼거리며 성 아래로 내려갔고, 펄프 대장은 어린 집사 또래의 왕족이 신기한 마녀 키르케를 질질 끌며 멀찍이 떨어졌다. 깨지고 무너진 성벽 위에 젊은 기사와 어린 왕제만 남았다.

“고, 고맙다는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사, 사과하려고 왔소.”

로벨은 겸손하게 대답했다.

“제 주군이신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결정입니다. 제가 치하받을 일이 아닙니다.”

로벨이 부드럽게 웃자 데이브 왕제는 한결 밝아진 표정이 되었다.

“경에게, 경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소. 나, 나는 자비에 후작과 싸우고 싶지 않소. 내 조카하고 싸우고 싶지 않소.”

로벨은 놀란 표정을 애써 숨겼다.

“왕좌에 관심이 없다는 뜻입니까?”

“그, 그렇소! 난 왕좌 따위 필요 없소!”

로벨은 자신이 갈고 닦은 기예 중에 어르기가 있는지 고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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