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흙먼지
169화. 흙먼지
장미성의 메인 홀은 천장높이가 20피트, 기둥폭이 220피트인 대연회장이었다. 122개의 양초로 장식한 샹들리에가 작은 태양처럼 주위를 밝히고, 네발 달린 짐승과 지느러미 솟은 짐승이 두 자릿수로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노래도, 춤도, 웃음도 없었다.
로벨을 비롯해 70여 명의 프란시스 가문 기사가 연회장에 모였다. 그러나 숨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대관식처럼 엄숙하고 출정식처럼 비장했다. 실제로 두 가지와 연관이 있었다.
“포클랜드의 자비에 후작이 제1왕자의 대관식을 강행했소.”
에릭 공작이 간밤의 소식을 사실로 밝혔다. 입맛이 없어 술잔만 기울이던 기사들이 난동을 부렸다.
“그자가! 그리 무모한 짓을 하다니!”
“정녕 끝을 보자는 건가!”
마녀 키르케가 까치발을 들고 로벨 귓가에 속닥였다.
“왜 무모해요?”
로벨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 헤르만 백작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자비에 후작이 데이브 왕제에게 선전포고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군을 비롯한 각 지방 제후에게 선택을 강요한 것이지. 국왕이 즉위한 이상 중립은 없으니... 중립을 선언하는 즉 제1왕자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된다.”
로벨은 마녀를 살짝 당겨서 헤르만 백작을 가로막았다.
“경의 생각은 어떻소?”
“기회주의자가 되고 싶지는 않으나, 우선 상황을 엿보는 것이 좋겠소.”
로벨은 왕국을 지탱하는 제후들을 차례를 짚어보았다. 자비에 후작은 제1왕자 편이 되었고, 제임스 공작은 앞가림을 못 하고, 볼프 후작은 제임스 공작 앞가림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고, 에릭 공작은 보다시피 결정을 못 내리고 있다.
“하얀 숲의 둠 노릭스 후작이 캐스팅보트를 쥐었군.”
마녀 키르케가 ‘하얀 숲’이란 말에 두 눈을 크게 떴다. 포비아 왕국이 건국되기 훨씬 전부터, 무려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드루이드의 고향이었다.
로벨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헤르만 백작을 비롯해 연륜이 있는 기사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 저래?”
로벨의 의문에 의외로 마녀 키르케가 대답했다.
“하얀 숲의 후작님은 좀... 이상한 마법사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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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성의 연회는 박수 한 번 없이 흐지부지하게 끝났다. 고향에 일이 있는 기사들은 서둘러 떠났지만, 여유가 있거나 시대의 흐름에 민감한 기사들은 장미성의 식량을 축내며 상황을 주시했다. 로벨도 그중 한 명이었다.
“경의 충고가 쓸모없어졌군.”
에릭 공작은 집무실 책상에 기대앉아 한숨을 쉬었다. 근심과 걱정이 둥둥 떠다녔다. 하지만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미안하게도 신경 쓰지 못했다.
로벨의 집무실이 두 개쯤 들어가고 남을 으리으리한 집무실이었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최상품이었다. 마호가니의 우아한 나뭇결과 에보니의 무거운 색상이 잘 어우러진 가구들을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금은보석 세공품이 장식하고 있었다.
로벨은 책장 사이사이에 위치한 무기와 갑옷에 시선을 뺏겼다. 6피트 길이의 우악스러운 츠바이핸더, 어린아이 머리통만한 철구가 달린 플레일, 바늘로 써도 될 만큼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모닝스타, 사람이 안에 있어서 당장 움직일 것 같은 풀 플레이트 아머와 전쟁터보다 무도회장이 어울리는 화려한 브리간디 등등...
‘멋져! 정말 멋져!’
‘그런데 청소하기는 힘들겠어요.’
에릭 공작은 로벨과 마녀 키르케가 엉뚱한 곳을 보고 있자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내 컬렉션에 관심 가져줘서 고맙소. 이제 이쪽도 관심을 주시오.”
“아... 죄송합니다.”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깜짝 놀라 사과했다. 에릭 공작은 사과를 대충 받고 처음으로 돌아갔다.
“헤르만 백작을 비롯한 몇몇 봉신들이 고하길 하얀 숲의 대응을 보고 결정하라고 하오.”
로벨은 최대한 집중력을 발휘했다.
“둠 노릭스 후작도 주군의 대응을 기다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아닐걸요.”
마녀 키르케가 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볼탄 반도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무서운 기사들이 마녀를 돌아보았다. 마녀는 찔끔해서 목을 움츠렸다. 마녀가 로벨의 연인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에릭 공작은 부드럽게 대했다.
“고견이 있소, 레이디?”
“으헤헹! 고견은 아니고요. 음... 노릭스 후작님은... 성격이 조금...”
“괴짜란 말이오?”
“괴짜! 맞아요!”
“그걸 어떻게 알아?”
로벨이 의아해서 물었다. 마녀는 옛 기억을 더듬느라 눈썹을 팔자로 모았다.
“스승님이랑 지낼 때 몇 번 만났어요.”
“스승님?”
로벨은 마녀가 종종 거론하는 ‘스승’이 궁금해졌다. 하얀 숲의 드루이드라는 것과 어린 마녀를 북쪽산 오두막에 두고 일찍 떠났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노릭스 후작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 가까이 있었군. 소문만 무성할 뿐 실제로 만난 사람이 적지. 어떤 자인지 말해주겠소?”
“스승님이 말씀하시길... 정신 나간 노친네요.”
“...어떤 식으로 정신 나갔는지 설명할 수 있소?”
“사슴을 잡으면 앞다리와 뒷다리 중 어느 쪽이 맛있을지 고민해요.”
로벨과 에릭 공작은 할 말을 잃었다. 마녀가 잘못 말했나 눈치를 보자 자상한 에릭 공작이 애써 농담했다.
“어느 쪽이 맛있다고 하오?”
“그게... 오른쪽 다리와 왼쪽 다리를 구분하지 않아서 실패라고...”
“...괴짜가 분명하네.”
에릭 공작은 의자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책상 앞에 두 명의 괴짜를 의식하며 말했다.
“괴짜의 공통된 특징은 남의 눈치를 안 본다는 것이지. 재미나게 되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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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뒤 포클랜드 시티의 전령이 도착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은 샘 포클의 왕성으로 찾아와서 새 국왕에게 충성서약하라는 요구였다.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이 에릭 공작의 집무실을 찾아와 씩씩거리며 외쳤다.
“서약이 뭔지도 모르는 3살배기 왕자가 보냈을 리 없습니다! 사실상 자비에 후작의 강요 아닙니까!”
에릭 공작은 다혈질의 주니어 백작을 외면하고 언제나 차분한-솔직히 말하면 항상 멍한- 로벨에게 물었다.
“로벨 경의 의심대로라면 자비에 후작이 내 동생, 다시 말해 잉그비아 왕국의 악마추종자와 결탁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소?”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조심해야겠지. 왕제파의 반응은 어떻소?”
“제 부하들에게 소식을 알아보라 명령했습니다.”
로벨은 시장과 항구를 헤집고 있을 허풍쟁이 제이콥 이하 울프 용병단을 떠올렸다. 그런데 소식을 기다릴 필요 없었다.
“그쪽이라면 제가 알아왔습니다!”
페르젠 백작이 가슴을 쭉 내밀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아무도 믿지 않았다- 미리 포클랜드로 사람을 보내놨습니다. 제 사람들이 전하기를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에서 병사를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로벨에게 익숙한 지명이었다. 포스트 포레스트 지방은 포클랜드, 볼탄 반도, 검은 숲으로 모두 통하는 요충지였다. 의미심장한 위치였다.
“로벨 경의 이상한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비에 후작이 왕가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왕제파와 손을 잡아야 합니다.”
“아니면 왕제파를 처단하고 새 국왕 폐하의 가장 충성스러운 기사가 될 수도 있지.”
에릭 공작의 고민이 깊어질 때, 세 번째로 몰드 헤르만 백작이 방문했다. 그 역시 새로운 소식을 가져왔다.
“볼프 사트로 후작이 새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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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 후작이 제1왕자를 지지하자 블랙우드 시티를 빼앗긴 제임스 공작이 기다렸다는 듯 데이브 왕제를 지지했다. 그러자 이해관계가 얽힌 가문들이 빠르게 편을 나눠섰다.
“검은 숲은 둘로 쪼개졌으니 밖으로 나오지 못하겠지.”
“아...”
로벨은 볼프 후작이 말한 ‘더 많은 피’가 포클랜드의 내전이 아닐까 생각했다. 로벨이 잠시 딴 생각하는 사이, 에릭 공작이 로벨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로벨 경, 군사를 얼마나 모을 수 있소?”
“농번기라 징집이 어렵지만, 3, 400명 정도는 가능합니다.”
“페르젠 백작은?”
“전 1,000명도 가능합니다!”
“상황이 심각하니 진지하게 답하시오.”
“...500명까지 가능합니다.”
“호수성 역시 그러합니다.”
헤르만 백작은 따로 묻기도 전에 대답했다. 에릭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고 300년 동안 이어온 볼탄 반도 주인의 권한을 행사했다.
“지금 병력을 소집하시오.”
“적이 누굽니까?”
로벨 이하 기사들이 집중했다. 에릭 공작은 천천히, 하지만 돌이키기 힘든 결정을 내렸다.
“샘 포클의 위대한 가문을 모욕하는 자비에 후작과 그 일당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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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묵한 몬트가 피식 웃었다.
“재미난 화법이군.”
허풍쟁이 제이콥과 발가락 슈미츠는 과묵한 몬트가 웃었다는데 놀랐다. 애꾸눈 볼포스가 실종된 뒤 통 웃지를 않은 영감이었다.
“재미? 전쟁인데?”
과묵한 몬트는 고용주를 힐끔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에릭 공작은 3살짜리 국왕과 싸우는 것이 아니다. 자비에 후작과 싸우는 것이지.”
“그게 그거 아니오?”
“아주 달라. 후계자 전쟁 때도 보았지만 역시 정치감각이 있군.”
에릭 공작은 나이에 비해 수완이 대단했다. 흉내쟁이 퍼시발이 고개를 돌려 침을 탁! 뱉고 말했다.
“젠장할! 높으신 분 감각이야 알 바 아니고, 우린 어찌 되는 거요?”
“왕제파와 합류해서 자비에 후작군과 싸우겠지.”
“이기면 당연히 좋은 거고, 만약에 지면 어찌 되오?”
“반역죄로 참형... 까지는 아니지만, 꽤 굴욕적인 처우를 받겠지.”
“아! 글쎄 높으신 분 말고! 우리 말이오! 우리!”
“용병이 뭐 대단한 거 있나? 이기면 돈 받고, 지면 도망치는 거지.”
“이런! 말을 잘못 했소. 우리 기사 나리 말이오.”
허풍쟁이 제이콥 외 울프 용병단은 새로운 전장을 향해 묵묵히 나아가는 로벨을 보았다. 가장 신입인 흉내쟁이조차도 저 뒷모습을 따른 지 3년이 되었다. 후계자 전쟁 때부터 함께한 초기 맴버들의 심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전쟁에서 지고 급료를 못 받으면 결국 떠나겠지만, 그래도 마음 한켠에 걱정과 아쉬움이 남을 것이다.
“기사님! 기사님!”
마녀 키르케가 대뜸 소리쳤다. 울프 용병단은 깜짝 놀라 시선을 사방팔방으로 돌렸다. 이럴 때 눈 마주치면 뻘쭘했다.
‘누가 마녀 아니랄까봐...’
하지만 감성에 젖은 용병들을 골려주려고 로벨을 부른 것은 아니었다. 아야와 이야카가 수레에서 뛰어내려 남쪽을 향해 짖었다.
“크르르릉...!”
“컹! 컹!”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즉시 말머리를 돌렸다. 늑대의 감각이 아니어도 곧 알 수 있었다. 구릉 위로 뿌연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최소 두 자릿수의 인마가 움직이고 있었다.
“또 헤르만 백작일까요?”
“호수성 방향이 아닌데... 제길! 전투준비!”
구릉 아래로 첫 번째 그림자가 드리웠다. 햇살에 반짝이는 헬름과 바람을 수평으로 가르는 랜스가 어떻게 봐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허풍쟁이! 먼저 가! 몬트! 슈미츠! 퍼시발! 나를 따라와!”
로벨은 습관적으로 이마를 잡았다. 바이저를 내리는 동작인데 잡히는 것이 없었다.
‘아차.’
로벨의 갑옷은 반쪽이었다. 싸우기 좋은 날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