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필연
168화. 필연
전투에서 병사수는 가장 중요한 승리요소였다. 힘 대 힘으로 승부를 가리는 기병 싸움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총 4필이고, 헤르만 백작군은 총 10필이었다. 2.5배의 숫자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
‘기선을 제압하고 측면으로 치고 빠지면...’
로벨은 해비 랜스를 고쳐잡고 작전을 구상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첫 돌격에서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상대방을 모두 낙마시켜도 여전히 ‘적’의 숫자가 많았다.
하지만 싸움부터 생각하는 것은 안 좋은 습관이었다.
랜스를 랜스 레스트에 걸고 전의와 각오를 단단히 다질 때, 마녀 키르케가 한마디 했다.
“저 기사님도 장미성에 가나 봐요?”
“응?”
로벨의 당황해서 창끝을 아래로 떨구었다.
워낙 흉흉해서 당연히 덤빌 것으로 여겼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주군에게 초대받은 입장이었다. 로벨도, 몰드 헤르만 백작도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중무장 기병대를 끌고 와?”
“이 녀석들을 데려온 거랑 비슷하지 않을까요?”
아야와 이야카가 순진무구하게 앞발을 들고 헥헥! 거렸다. 로벨은 고민했다. 하지만 길지 않았다. 해비 랜스를 옆으로 치우고 명령했다.
“정지신호 보내.”
사실 ‘정지신호’란 것이 정해진 무언가는 아니었다. 깃발을 흔들거나 소리를 질러야 한다. 과묵한 몬트는 좀 더 용병다운 방법을 사용했다. 안장주머니에서 뿔나팔을 꺼내 힘껏 불었다.
부우우웅-!
구릉 사이로 우렁찬 나팔소리가 퍼졌다. 효과가 있었다. 캔터로 달려오던 몰드 헤르만 백작의 기병대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상대방의 얼굴이 보이는 거리에서 완전히 정지한 후 로벨처럼 하프 플레이트 차림의 기사만 트롯으로 다가왔다. 몰드 헤르만 백작이었다.
“여기서 대기해.”
로벨은 해비 랜스를 깃발처럼 세우고 마주 나갔다.
아이언 베어 요새 전투 이후 처음이니 거의 1년 만이다. 헤르만 백작은 모자를 살짝 올려 인사했다.
“로벨 로드릭 백작,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 몰랐소.”
로벨은 헤르만 백작이 지나온 언덕을 힐끔보고 말했다.
“호수성에서 오는 길이 아닌 것 같소?”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버팅거 시티를 지나오는 길이오.”
“장미성으로?”
“경도 마찬가지라 생각하오.”
로벨만큼이나 헤르만 백작도 경계했다. 그랜드 챔피언, 롱소드 마스터, 무적무패의 기사 등의 호칭이 만만하지 않았다. 예의 바르지만 신경질적인 탐색이 이어졌다.
“장미성에 어울리는 복장이 아닌 듯하오?”
“그렇다고 연회복을 입으면 웃음거리가 아니겠소.”
“하하핫! 맞소! 책상 앞에서 돌멩이나 퉁기는 부르주아 꼴이지!”
부르주아가 들으면 ‘쇳덩이를 넣을 곳이 없어서 머릿속에 넣은 노블리티’라고 몰래 욕했을 것이다.
헤르만 백작은 과묵한 몬트 외 기마 소대를 보았다.
“기사가 아닌 것 같소만.”
“내 용병들이오.”
“울프 용병단? 실력이 좋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고작 3명이라니?”
수레를 모는 허풍쟁이 제이콥이 빠졌으나 구태여 정정해주지 않았다.
“저들은 일당백이오. 셋으로 충분하오.”
헤르만 백작은 감탄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미소를 띄웠다.
“술이나 마시고 담소나 나누자는 초대가 아니란 것을 피차 알고 있으니 잡설을 빼고 충고하겠소. 적과 아군을 분명하게 하시오.”
“적과 아군?”
“한 곳에 지낸다고 이웃이 아니고 한 주인을 모신다고 친구가 아니오.”
헤르만 백작은 모자를 잡아 인사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로벨이 부르기 전에 일행을 이끌고 남쪽으로 달려갔다. 로벨은 소리 없이 환호하는 울프 용병단과 달리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선전포고인가?”
@
프란시스 시티.
유라피아 대륙의 동서를 잇는 교역항이자 볼탄 반도에서 가장 번화한 중심지. 정복왕 샘 포클의 12기사 중 한 명인 아몬드 프란시스 공작이 20년에 걸쳐 건설한 남해의 대도시였다.
로벨은 수레에 걸터앉은 마녀 키르케를 곁눈질했다. 처음 프란시스 시티에 왔을 때 오두방정 떨었던 기억이 생생했다. 하지만 마녀는 그때와 달리 시큰둥했다.
“수도를 보고 와서 그런지 감흥이 없네요.”
“...아쉽네.”
눈이 높아진 탓도 있지만, 여름이란 계절이 감동을 방해했다. 갓 잡은 생선이 하루 만에 악취를 내뿜고, 거리 구석에 쌓인 오물더미에서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었다. 사람들은 활기가 없고 가축들은 그늘진 곳에서 숨만 헐떡였다.
로벨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여름이라 아름다운 곳도 있어.”
“장미성!”
마녀 키르케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허풍쟁이가 얌전히 앉으라고 마주 소리쳤지만, 장미성이 처음인 발가락 슈미츠와 흉내쟁이 퍼시발이 마녀에게 동조해서 떠드는 바람에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로벨 일행은 기운차게 시장을 지나 장미성을 올라갔다.
장미성의 정원에는 여름 장미가 만개했다. 어디를 보나 선명한 붉은색이 가득했다.
“와아... 예뻐! 너무 예뻐요!”
마녀 키르케는 꽃밭을 뛰어다녔다. 아야와 이야카도 덩달아 껑충껑충 뛰며 쫓아갔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한쪽 콧구멍을 막고 반대쪽으로 코를 팽! 풀었다.
“그럴 거요. 정원사의 피와 눈물을 먹고 자란 꽃 아니오.”
수레꾼이 신랄해도 기사와 용병들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꽃밭을 뛰노는 소녀와 강아지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소녀는 억센 지팡이와 고깔모자를 가졌고, 강아지는 사람 머리통을 깨물어 삼킬 덩치지만 말이다.
성내에도 예의를 중시하고 정숙함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 유명한 로벨 로드릭 깃발을 보고 감히 다가오지 못했다. 그래서 장미성의 아성까지 마음껏 웃고 떠들며 나아갔다.
“로벨 백작?”
“오! 그랜드 챔피언!”
아성 앞에 이르자 공기가 무거워졌다. 붉은 꽃잎이 사라지고 회색 금속이 가득했다. 전쟁터로 달려나갈 것처럼 무기와 갑옷을 갖춘 기사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로벨은 안면이 있는 기사들과 목례를 나누고 과묵한 몬트에게 속삭였다.
“자리가 불편하면 조금 떨어져 있어. 주군에게 부탁해서 쉴 곳을 마련해줄게.”
“저희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키르케, 같이 갈래?”
“정말요? 와아!”
로벨은 플레일에서 내려 마녀에게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귀부인을 에스코트하며 입장하는 것은 흔한 일이라 특별히 이상하지 않았다. 뾰족한 에냉(Hennin) 대신 축 처진 고깔모자를 쓰고, 화려한 쉬르코 대신 칙칙한 꼬뜨를 입었어도 말이다.
성문에 몰린 기사들이 주춤주춤 비켜서고,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자연스럽게 메인 홀로 입장했다. 사실 연회는 내일이고, 진짜 연회도 아니라 어색한 행동이었다. 메인 홀에 들어가니 여름답지 않게 썰렁한 바람이 불었다. 몰드 헤르만 백작을 비롯해 미리 도착한 기사들과 기사들을 접대하기 위한 시종이 몇 명 있을 뿐이었다. 잠시 머뭇거리자 나이가 많고 복장이 화려한 시종장이 조급히 다가왔다.
“로벨 로드릭 백작님, 어서 오십시오.”
“에릭 공작님은?”
“접객실에서 페르젠 백작과 담소를 나누고 계십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로벨보다 먼저 온 봉신들이 있었지만, 시종장은 순서를 무시하고 로벨을 가장 먼저 안내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을 복권시킨 충신에게 감히 순서를 지키라 말할 사람은 없었다.
시종장은 로벨에게 양해를 구하고 접객실 안쪽으로 보고했다.
“마로드, 로벨 로드릭 백작이 도착했습니다.”
“오오! 안으로 들어오시오!”
시종장은 접객실 문을 잡고 먼저 들어갔다. 로벨은 마녀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눈짓하고 홀로 들어갔다.
프란시스 가문의 부귀와 품위를 자랑하는 장소였다. 한쪽 수백 권에 달하는 장서가 빼곡히 채워져 있고, 호랑이 가죽, 코끼리 상아, 대리석 조각상 등등 볼탄 반도에서 구할 수 없는 사치품이 곳곳에 자리해 있었다.
‘어린 집사가 부러워할 거야.’
로벨은 모르지만 로벨의 사치(?)도 만만치 않았다. 무려 ‘살아있는’ 늑대들을 데리고 왔으니 말이다. 지금 성 밖에서 아야와 이야카를 본 기사들은 ‘과연 로드릭 백작!’이라 숙덕이고 있었다. 그 점에서 어린 집사의 판단이 맞았다.
“로벨 경,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소.”
로벨은 무릎을 꿇을까 하다가 자리가 안 좋아서 묵례로 대신했다. 그리고 먼저 온 손님을 보았다.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이 거만하게 올려다보았다. 자고로 아래에서 위로 거만하기란 힘든 법이었다. 로벨은 코웃음 한번 치지 않고 무시했다.
“집사, 로벨 경이 왔으니 차를 새로 내오게.”
에릭 공작은 로벨에게 자리를 권하고 부드럽게 웃었다.
“검은 숲에서 활약을 전해 들었소. 역시 무적무패의 챔피언답소.”
지난 일을 간추린 담소가 오고갔다. 웃음이 두 번 정도 흘러나오고, 근심이 세 번 정도 스쳐 지나간 뒤, 시종장이 다기를 내올 무렵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검은 숲에 이어서 포클랜드에서 사고가 터졌소.”
검은 숲 무용담에 지루함을 감추지 못하던 페르젠 백작이 두 눈을 반짝였다.
“자세한 것은 내일 아침 연회장에서 논하겠지만, 경들이 이리 한곳에 모였으니 미리 조언을 구하겠소.”
에릭 공작은 손수 차를 따라 두 백작에게 나눠주고, 동방에서 건너온 그윽한 차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지독한 현실로 토해냈다.
“누구를 지지하는 것이 좋겠소.”
로벨은 차향 따위 맡지 못했다. 차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혀끝에 피맛이 감돌아 차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로벨이 침묵하자 페르젠 백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통성을 고려해 제1왕자를 지지해야 합니다.”
“정통성이라...”
에릭 공작이 중얼거리자 페르젠 백작은 움찔했다. 정통성 시비로 몰락할 뻔한 에릭 공작이다. 꼭 주종관계가 아니라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로벨은 페르젠 백작을 도울 겸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지금은 침묵해야 합니다.”
“중립선언하란 말이오?”
“국왕 폐하의 실종 사유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우선 그쪽을 조사하십시오.”
“왕실과 자비에 후작이 조사하고 있을 텐데, 우리가 왜?”
페르젠 백작이 반박했다. 로벨은 무시하고 이어 말했다.
“주군, 주군을 음해한 붉은 장미 수도원의 사제를 만나보셨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로벨을 깊이 신뢰하는 에릭 공작은 성의껏 대답했다.
“물론 만나 보았소.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지.”
“짐작하건대, 광인이 되어있지 않았습니까?”
“그, 그렇소. 수도원 지하에 격리되어 있었소만... 그걸 어찌 알았소?”
로벨은 역시나 하는 얼굴로 말했다.
“빌포이 다이첼 경 또한 그러했습니다.”
“다이첼 경? 국왕 폐하의 외삼촌 말이오?”
“이상하지 않습니까?”
에릭 공작과 페르젠 백작이 의아해했다. 로벨은 차근차근 설명했다.
“빌포이 다이첼 경의 일로 왕실은 신임을 크게 잃었습니다. 그리고 에르나 왕국과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쟁 중 검은 숲 제임스 공작이 큰 피해를 입었고,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검은 숲의 몬스터가 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억세게 운이 없다고 생각하오.”
페르젠 백작이 남 일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여기서 그쳤으면 그럴 거요. 하지만 이후 일들을 보시오. 볼프 후작이 기다렸다는 듯 검은 숲을 차지했고, 볼프 후작을 저지할 국왕 폐하는 때맞춰 실종되었소.”
“역시 억세게 운이 나쁘...”
“볼탄 반도, 검은 숲, 그리고 이제는 포클랜드요. 한 번은 우연이지만, 두 번이면 기적이고, 세 번이면 필연이오.”
로벨은 메인 홀에 뚱한 표정을 짓고 있을 헤르만 백작을 생각했다. 한 곳에서 지낸다고 이웃이 아니었다.
로벨은 허리를 곧게 펴고 오래 묵은 진실을 꺼냈다.
“누군가 우리의 왕국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