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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67화 (167/605)

167화. 땅울림

167화. 땅울림

어린 집사가 로벨의 심정을 대변했다.

“오른쪽을 막으면 왼쪽이 터지고, 위쪽이 조용하면 아래쪽이 시끄럽고, 이게 뭐야!”

마녀 키르케가 적절한 표현이라고 좋아했다. 로벨 일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모르는 도널드 상단 대리인과 울부짖는 파이슨은 이해하지 못했다.

“포클랜드 시티 시내에서 왕자 지지파 기사 17명과 왕제 지지파 기사 22명이 맞붙어서 5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숫자에 민감한 어린 집사가 따져 물었다.

“잠깐! 39명이 싸웠는데 왜 50명이 사상자에요?”

상단 대리인은 로벨의 안색을 살피며 부연 설명했다.

“기사님들은 대부분 무사하고, 기사님을 모시는 수행원과 길 가는 시민들이 주로...”

“아... 튼튼하게 입고 싸우셨구나...”

웃기지만, 웃을 수 없었다. 그냥저냥 자유도시도 아니고, 수도에서 무장한 기사들이 패싸움을 벌여 수십 명의 시민이 다친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포클랜드에서 전쟁이 일어날 거란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면서 검은 숲을 기웃거리던 용병들이 일제히 포클랜드 지방으로 몰려갔다.

“소문에는 잉그비아 왕국의 철사자 용병단이 왕제파에 붙었다고 합니다.”

“그 작자들이 또 왔어요?”

울부짖는 파이슨이 얼굴의 흉터를 긁적이며 추가 설명했다.

“에르나 왕국의 회색곰 용병단과 아이란드 왕국의 모래폭풍 용병단도 참전합니다.”

“그런 용병단 처음 듣는데요.”

로벨은 명망 높은 기사답게 시시콜콜한 용병 소식에 관심두지 않았다.

“에릭 공작의 생각은 어떨까?”

수도의 기사들이 치고받고 싸워봤자 최종 결판은 각 지방의 공후작 제후들에게 달려있었다. ‘12기사 가문’이라 통칭되는 공후작 가문 중 과반이 지지하는 쪽이 왕이 될 것이다.

로벨은 자신의 주군이자 볼탄 반도 절반을 지배하는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생각이 궁금했다.

“왕위계승서열로 보면 제1왕자가 높지만... 이제 겨우 3살이라 국왕 노릇을 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들어요. 밤에 오줌도 못 가릴 나이잖아요?”

“그래도 적통이라 전통을 무시할 수 없잖아요.”

목구멍에 넣을 수 있는 것 외에는 일체 관심이 없는 아야와 이야카를 제외하고 모두 심각했다.

어린 집사가 제일 먼저 결론 내렸다. 영지일도 머리 아픈데, 저 멀리 떨어진 왕위계승싸움까지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땐 무지몽매한 농민들의 사상을 따르죠.”

“무지몽매한 사상?”

“윗분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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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어린 집사는 애써 눈을 돌렸지만, 두 사람 생각보다 왕위계승다툼이 심각했다. 그 증거로 늑대성에 손님이 들끓기 시작했다.

“누구라고?”

“왕실 재무대신이었던 호버트 알트랑 경의 심부름꾼이요.”

“아니, 지금 나간 사람 말이야.”

“아? 포클랜드 선주연합 대표 바란 남작이 보낸 선장이에요.”

로벨의 정치적 입지는 로벨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높았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가장 신임하는 기사이자 볼탄 반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군사력을 가진 영주였으니 왕자파나 왕제파나 그냥 간과할 수 없었다.

“그럼 저것은 뇌물이야?”

로벨은 메인 홀 한 곳을 채운 상품들을 가리켰다. 후추상자, 계피자루, 동방비단, 유리 식기, 손잡이가 보석으로 장식된 대거와 금실로 방패가 수놓아진 더블릿 등이었다.

어린 집사의 입꼬리가 천장까지 올라갔고, 마녀 키르케의 광대가 하늘을 찔렀다.

“어머나! 이뻐라! 반짠반짝 아름다워요!”

“휴우~ 이게 다 얼마야? 수도의 귀족들은 정말 부자군요.”

로벨은 예전부터 그러했듯 반짝이는 것보다 뾰족한 것에 관심이 많았다.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에 양손을 걸치고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 이걸 받아도 될까?”

“공짜 아니에요! 침묵의 대가죠!”

“침묵?”

어린 집사든 악당처럼 히쭉- 웃었다.

“왕자 지지파한테는 ‘국정을 위해 왕제를 지지할 생각이었지만, 이 성의를 봐서 그러지 않겠다’라고 말했고요, 왕제 지지파한테는 ‘제1왕자 정당한 계승자지만, 이 성의를 봐서 아무 말 하지 않겠다’라고 말했어요. 양쪽 모두 만족하더라고요.”

마녀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와아! 사기꾼!”

“기왕이면 모사꾼이라 해주세요.”

어린 집사의 콧대가 한 뼘쯤 높아졌다. 그러나 제법 성장한 로벨이 의심했다.

“그걸 믿어?”

“에이, 그럴 리가요? 저들도 바보가 아니죠. 영주님이 적이 아니란 것만 확인한 거죠. 실제로도 그렇잖아요? 혹시 저 몰래 지지하는 사람 있어요? 왕자? 아니면 왕제?”

로벨은 잠깐 고민하다가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의 머리를 동시에 쓰다듬었다.

“난 너희들을 지지해.”

소년과 소녀가 동시에 얼굴을 붉혔다.

“그, 그래도 저 멍청한 마녀보다 제가 낫죠?”

“뭐라구요? 하여간 잠깐도 좋게 넘어가질 않네!”

로벨은 두 앙숙이 싸우기 전에 후다닥 물러났다. 어느 동네, 어느 집단이나 싸움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문제는 에릭 공작인데...’

로벨은 충성을 맹세한 주군이자 가장 강력한 아군인 에릭 프란시스 공작을 떠올렸다. 조만간 만나게 될 것 같았다.

로벨의 직감은 정확했다. 도널드 상단이 홉 맥주를 가득가득 싣고 떠난 뒤, 장미성에서 파티 초대장이 날아왔다. 정말 파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외팔이 더치밖에 없었다.

“드디어 봉신들을 소집하는군요.”

어린 집사는 초대장을 고이 접어서 봉투에 넣었다. 로벨 정도면 명성이 초대장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갖출 것은 갖춰야 했다.

마녀 키르케가 아야의 꼬리를 꼭 쥐고 중얼거렸다.

“설마... 또 전쟁이 날까요?”

“에릭 공작 성격상 포클랜드로 군사를 끌고 갈 것 같진 않아. 왕자와 왕제 중 누구를 지지할지 의논하는 자리겠지.”

그것도 가벼운 일은 아니었다. 아들을 지지했는데 동생이 왕위에 오르면 포클랜드와 어색해질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왕가와 공작가의 어색함은 술이 아니라 피로 풀렸다.

“만약을 대비해서 호위 병력을 데려가요. 시절이 어수선하면 기사님이고 상인놈이고 없어요.”

“응. 허풍쟁이를 준비했어.”

성 밖에서 ‘왜 또 나야! 왜 또!’ 따위의 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집사는 허풍쟁이 하나로 만족하지 못했다.

“저걸로 부족해요. 기마 소대랑 아야와 이야카도 데려가세요.”

“얘네들까지요?”

“늑대성의 영주인데 늑대가 따라와야 폼 나죠. 귀족모임은 자존심의 전장이거든요.”

로벨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반대하지도 않았다. 마녀와 아야와 이야카가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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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침실로 돌아와 컴포지트 아머를 꺼냈다. 전쟁터로 가는 것이 아니라 풀 세팅은 필요 없지만, 그래도 플레이트와 그리브 정도는 갖춰야 안심이 되었다.

로벨이 아밍 더블릿을 뒤집어쓰자 어린 집사가 쪼르르 달려와 허리를 쪼여주었다.

“이번에 받은 뇌물... 이 아니라, 선물로 갑옷을 사요.”

“갑옷?”

“제대로 된 필드 아머요. 이런 무거운 사슬조끼를 입을 필요가 없잖아요.”

로벨은 볼프 후작이 착용한 최첨단 필드 아머를 떠올렸다. 관절에 맞춰진 작은 판금조각이 유기적으로 합쳐지고 펼쳐졌다. 멋도 멋이지만, 방어력이 엄청났다.

“앗! 영주님! 침 흘러요!”

“아...”

로벨은 입가를 쓱쓱 닦았다.

“엄청 비쌀 텐데?”

“어차피 재산은 영주님이 있어야 존속되는 거에요. 영주님이 잘못되면 금이고 은이고 아무 소용이 없어요. 이거 보세요. 이게 무슨 백작가문의 갑옷이에요?”

“너...”

로벨의 컴포지트 아머는 오랜 전쟁, 잦은 전투로 많이 상해 있었다. 망치로 두드리고 기름으로 닦아도 꾸겨진 자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린 집사는 백 플레이트를 아밍 더블릿에 고정하며 약속했다.

“에르나 왕국의 갑옷장인을 수소문해놨으니까 기다려 봐요. 빠르면 프란시스 시티에서 돌아올 때쯤 볼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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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는 새 장난감이 생겼을 때 가장 행복하고, 귀부인은 새 옷을 샀을 때 가장 행복하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수레를 늦추면서 재빨리 속삭였다.

“기사 나리 왜 저래? 조, 좀 무서운데?”

마녀 키르케가 뾰로통해서 이야카의 귀를 비틀었다.

“어린 집사가 갑옷을 사준데요.”

로벨의 행복은 어린아이의 행복과 귀부인의 즐거움 모두에 해당했다.

“하긴. 지금 갑옷이 낡긴 했지.”

“요즘 시대에 컴포지트 아머라니? 저런 건 옛 신의 가난한 기사나 입는 거잖아?”

발가락 슈미츠와 흉내쟁이 퍼시발이 껄껄 웃으며 대화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날카로운 눈빛을 주고받았다.

‘새 갑옷을 사면 지금 갑옷은 안 입겠지?’

‘저 정도 갑옷이면 빚내서라도 사야지. 암. 사야 하고말고.’

기사가 입는 갑옷은 방어력도 방어력이지만, 그 자체로 잘 만들어진 보물이었다. 가난한 기사 가문에서는 가보로 삼아 대를 물려주는 경우가 많았다.

“아셔라. 아버지가 물려준 갑옷을 팔겠냐.”

“그, 그런가?”

“하긴... 말을 탄다고 기사가 된 것은 아니지...”

헛된 꿈을 꾼 용병들은 입맛을 다졌다.

여름이 절정기에 다다라가는 시절이었다. 한낮에 움직이면 사람이나 말이나 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로벨 일행은 새벽 일찍 일어나 오전 동안 이동하고, 점심 무렵에 바람이 잘 부는 그늘에서 푹 쉬고 해가 질 때 다시 이동했다.

“남쪽으로 내려오니까 부쩍 더워지네요.”

“뭘 이 정도 가지고. 내 고향 아이란드 왕국에서는 초여름만 되어도...”

“저 자식 더위 먹었나봐. 벌써 일곱 번째 똑같은 이야기야.”

그래도 전투마와 짐말이 총 5마리고, 수레도 한 대 있어서 견딜 만 했다. 옛날에는 겨울이고 여름이고 봇짐을 메고 두 발로 걸어 다녔다.

“그리 옛날도 아니잖아? 2, 3년 전인데?”

“그것밖에 안 지났나?”

도란도란.

속닥속닥.

로벨은 부하들의 잡담을 흘려들으며 남쪽으로 굽이굽이 뻗은 길을 보았다.

볼탄 반도 남부는 구릉이 많아 잔잔한 파도처럼, 꾸겨진 카펫처럼 위아래로 들쭉날쭉했다. 오른쪽에는 여름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울창한 숲이 보이고, 왼쪽으로 흐릿하게 갈색 산의 봉우리가 보였다.

“거의 다 왔어.”

“정말요?”

마녀 키르케가 수레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러자 아야와 이야카가 좌우로 따라 내밀었다. 로벨은 깜찍한 모습에 소리 없이 웃었다.

“오늘 저녁이면 프란시스 시티 가도로 접어들 거야.”

어린 집사의 표현을 빌려서, 시절이 어수선한데 사고 없이 도착해 다행이었다. 마녀 키르케는 더위를 무릅쓰고 아야와 이야카를 꼭 끌어안았다.

“와아! 다 왔다! 다 왔어!”

허풍쟁이가 채찍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거! 가만히 좀 있으쇼! 황소만한 댁들을 싣고 가는 짐말이 불쌍하지도 않소?”

“저 가볍거든요? 오늘도 깃털하고 박빙의 승부를 벌였거든요?”

로벨은 마녀와 용병의 입씨름은 모른척하고 이후 일정을 생각했다. 에릭 공작 이외에 만나야 할 사람들과 그들과 나눠야 할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컹! 컹!”

“끼잉- 낑-”

아야와 이야카가 자세를 낮추고 경계했다. 야성이 있는 늑대 남매가 가장 먼저 이상을 알아챘고, 그다음으로 로벨이 알아냈다.

“땅울림...”

로벨은 허풍쟁이에게 정지신호를 보내고 기마 소대로 앞으로 불렀다. 눈치 빠른 용병들은 장병기를 꺼내들고 도열했다. 로벨은 이빨로 컨틀렛의 가죽끈을 쪼이며 말했다.

“10필이야.”

“오오! 기사 나리쯤 되면 땅울림만으로 병력을 아십니까요?”

“그냥 찍어 봤어.”

“......”

하지만 기사의 직감은 무시할 수 없었다. 구릉 위로 다수의 기사가 나타났다. 로벨의 짐작대로 딱 10필이었다. 로벨은 해비 랜스를 챙기며 선두를 살폈다.

“저 깃발은... 몰드 헤르만 백작?”

호수성의 푸른 깃발이 남풍을 타고 북쪽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긴장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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