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66화 (166/605)

166화. 별 따기

166화. 별 따기

간밤에 내린 소낙비로 개울이 꽐꽐 흐르고, 첫 여름을 맞이한 송아지가 신나게 냇가를 뛰어다녔다.

로벨은 계절만큼이나 활기를 띠는 로드릭 시장을 둘러보고, 싹이 자라 푸르게 물든 추경지를 살펴보고, 전망이 좋은 목초지 울타리에 앉아 따뜻한 햇살을 즐겼다.

“음메에에에...”

새끼 양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걸어와 쇼오스에 머리를 부볐다. 뿔이 자라는 부위가 간지러운 듯 자꾸 칭얼거렸다. 로벨은 가죽장갑을 벗고 곱슬곱슬한 양머리를 긁어주었다.

“음메에에에...”

새끼 양이 기분 좋은 듯 눈을 꼬옥- 감았다.

태양은 따스하고 바람은 시원하고 풀벌레 소리는 잔잔했다. 기사도 행복하고, 늑대도 행복하고, 건초를 모으는 척하면서 몰래몰래 훔쳐보는 꼬마 목동도 행복한 날이었다. 이곳에서 행복하지 않은 것은 주판알을 굴리는 소년가장과 떡갈나무 지팡이를 휘두르는 마법소녀 뿐이었다.

“에잇! 여기까지 와서 일하지 말라구욧!”

“나 참! 상반기 예산안이 죄다 틀린 것을 어떡해요!”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티격태격하자 아야와 이야카가 지겹다는 듯 자리를 피했다.

거대한 포식자가 움직이자 새끼 양은 납짝 엎드려서 부들부들 떨었다. 어린 집사한테 쥐어박히고 살아서 그렇지 엄연히 맹수 중의 맹수였다.

사실 늑대 남매보다 험악한 용병과 그 용병들을 거느린 그랜드 챔피언 기사도 기를 못 펴기는 마찬가지였다.

로벨은 새끼 양을 다독여서 어미 품으로 돌려보냈다. 새끼 양은 사슴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사라졌다. 늑대 남매는 경쟁자가 사라지자 로벨 좌우에 앉아 허벅지와 옆구리에 머리를 기댔다.

‘나한테서 냄새나나?’

로벨은 아야와 이야카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퍽퍽 긁어주었다. 늑대 남매는 골골거리며 좋아했다. 그때 어린 집사가 주판용 돌멩이를 쓸어담고 벌떡! 일어났다.

“에잇! 안 되겠어요! 헨리 상회장을 만나야겠어요!”

“또?”

“하반기 예산안도 수정해야 해요. 근데 ‘또’라니요? 이거 전부 영주님 일이거든요? 크앙! 남 일처럼 말하지 말라구요!”

어린 집사가 역정을 내자 기사도, 늑대도, 마녀도 찔끔해서 주섬주섬 일어났다.

“가, 가자고. 가면 되잖아.”

“끼이잉...”

@

로벨이 전쟁터를 떠돌아다니는 사이 로드릭 마을은 몰라보게 발전했다.

검은 숲 피난민과 떠돌이 자유민이 정착하면서 인구가 3배 가까이 늘어났다. 기존의 단층 흙집 사이로 2, 3층짜리 목조저택이 세워졌다. 검은 숲 이민자답게 목재 다루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어린 집사가 심혈을 기울이는 로드릭 시장도 규모가 상당해져서 7개 상단이 상점을 내고 29개 상단이 정기거래를 약속했다. 헨리 피터 상회장이 독점 유통하는 ‘리암 수사의 홉 맥주’가 가장 인기상품이었다.

제분소의 물레방아는 추수기와 상관없이 360일 내내 돌아가고, 대장간의 모루는 도제가 두 명이나 생겨서 하루 종일 탕탕! 쇳소리를 내었다. 마을광장 주위를 걸으면, 농부, 상인, 용병, 장인, 집시, 여행자 등등으로 정신이 없었다. 성벽만 없을 뿐 작은 도시였다.

“오늘은 특히 많네요.”

로벨 일행은 마을광장 앞길을 꽉 메운 수레 때문에 더 나아가지 못했다. 어린 집사가 까치발을 들고 기웃거리다 수레 행렬의 주인을 알아냈다.

“앗! 도널드 상단이 왔나 봐요!”

도널드 상단은 프란시스 시티와 노스폴드 시티를 오가는 정기순회상단이었다.

인원이 50명이 넘는 대규모 상단이라 한번 방문하면 헨리 피터 상회장부터 지미의 여관까지 정신이 없었다.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기 전에 맥주를 사 가려는 모양이에요. 작년에 맛보기로 한 통 보내줬더니 홀딱 반해서 지나갈 때마다 찾아와요.”

“저 많은 수레를 채울 수 있어?”

“뉴 로드릭 마을의 작물 중 절반이 보리와 홉이에요. 리암 수사님 말로 220배럴까지 생산 가능하다고 해요.”

“오호?”

로벨은 손뼉을 치고 감탄했다. 헨리 피터 상단과 단독 거래할 때는 고작 20배럴이었는데, 어느새 10배 이상 생산량이 증가했다. 뉴 로드릭 마을의 비옥한 땅과 몇 배로 늘어난 인구와 값비싼 농마의 힘이었다.

“영주님의 재산이거든요? 제발 관심 좀 가지세요!”

로벨은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플레일의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열 걸음을 못 가 다시 수레에 가로막혔다.

“영주님, 영주님,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뉴 로드릭 마을에 행정관을 임명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람 형제가 있잖아?”

“그자들은 천성이 장사꾼이라 권력을 주면 안 돼요.”

“뭣이라? 이 자식! 말 다했냐?”

로벨은 그람 형제가 시장에 있나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길쭉하고 땅딸만한 그람 형제가 아니라 깡마른 상인과 근육질 용병이었다.

“칫. 저치들 때문에 길이 막혔군요.”

로벨은 영지일에 관심을 갖는 영주의 모습을 보여줄 기회로 삼았다. 어린 집사가 뭐라 말하기 전에 플레일에서 내려서 칼자루에 손을 얹고 걸어갔다.

“왜 소란이야?”

소란의 주범인 깡마른 상인과 근육질 용병 외에도 지나가는 사람이 일제히 로벨을 보았다.

깡마른 상인과 근육질 용병은 로벨과 로벨의 일행을 빠르게 훑어본 후 결론 내렸다.

“댁은 또 뭐요? 카악- 퉷! 다치기 싫으면 저리 꺼지쇼!”

두 사람 다 로드릭 마을 초행이 분명했다. 인근주민이나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행상인이라면, 기사, 마녀, 늑대의 조합이 무엇인지 모를 리 없었다.

“대, 댁...?”

로벨은 꼬마 레이디일 때도, 그랜드 챔피언이 된 이후에도 못 들어본 호칭에 당황했다. 근육질 용병은 그 모습을 겁먹은 것이라 오판했다.

“꼬라지보니 어디 촌동네에서 올라온 기사 나으리 같은데, 오지랖 부리다간 일찍 뜰 수 있으니까 조심하쇼.”

로벨은 자신의 꼬락서니를 내려다보았다. 깨끗하고 품위 있는 우플랑드지만, 반짝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손가락에 끼워진 것도 투박한 인장반지가 전부였다.

“그러니까 난...”

“아아! 미리 말해두는데, 난 울프 용병단 대장과 아주 친하오. 이곳의 영주인 로벨 로드릭 백작과 연줄이 있단 말이지.”

로벨은 해명을 잊고 또다시 당황했다.

“펄프 대장 친구야?”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잡았지만 뽑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영주에 대한 모독은 손모가지나 발모가지로 받아야 마땅하지만, 펄프 대장 친구라니 차마 그럴 수 없었다.

펄프 대장이 보았으면 너 같은 친구 없다고 모른척했을 것이다.

그때, 근육질 용병과 싸우던 깡마른 상인이 아랫배를 불쑥 내밀고 호통쳤다.

“니까짓게 로드릭 가문과 연줄이라고? 웃기지 마! 난 퐁드바르 가문의 7대손으로 로벨 로드릭 백작의 먼 친척이다! 누가 더 가까운지 함볼까?”

“나... 나 그런 친척 없어...”

로벨이 중얼거리자 다시 시선이 집중되었다. 어린 집사는 팔짱을 끼고 뚱한 표정을 지었고, 마녀 키르케는 두 손을 깍지 끼고 흥미진진하게 관람 중이었다. 심지어 아야와 이야카조차 엉덩이 깔고 나란히 앉아서 관객 흉내를 내었다.

“대체 무슨...”

로드릭 마을주민 중 표정관리 안 되는 사람은 붉어진 얼굴로 웃음을 참았다.

눈치로 먹고사는 것은 상인이나 용병이나 마찬가지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결정적으로 헨리 피터 상회장이 모자도 삐뚤게 쓰고 뛰쳐나왔다.

“어이구! 영주님! 영주님! 여기 계신 줄 몰랐습니다!”

“여, 영주라고? 어디 영주?”

어린 집사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지금 당신들이 밟고 있는 땅의 영주님요.”

“히이익!”

“로벨 로드릭 백작님!”

깡마른 상인과 근육질 용병이 경쟁하듯이 로벨 발아래 몸을 던졌다. 로벨을 조금 전과 다른 의미로 난감해졌지만, 싸움을 말렸다는데 의미를 두었다.

“저리 가! 옷 늘어나!”

@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펄프 대장 친구’와 ‘퐁드바르 가문 친척’이 거짓말은 아니란 것이다.

근육질 용병은 펄프 대장이 네일 공국에서 일할 때 몇 차례 같이 일한 적이 있었고, 깡마른 상인은 비록 방계지만 귀족 출신으로 로드릭 가문의 먼 친척이었다. 어린 집사가 애지중지하는 로드릭 가문 가계도를 잘 뒤져보면 한쪽 귀퉁이에서 이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영주를 능멸한 죄가 없지는 않았다.

어린 집사가 옆구리에 손을 얹고 턱을 치켜올렸다.

“어? 저기 떨어진 게 뭐죠? 간인가? 이야! 간덩이가 아주 배밖에 나왔군요?”

이야카는 간이란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두리번거렸다. 마녀 키르케가 이야카를 달랬다.

“저런 거 먹으면 안 돼. 지지야. 지지.”

로벨은 의자팔걸이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괴었다. 죄 지은 펄프 대장 친구와 먼 친척은 두 손을 더욱 공손히 모았다.

“영주님이신 줄 미처 모르고... 죄송합니다.”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로벨은 코로 한숨을 쉬고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니까 한번 봐 줄게.”

“오오! 자비로운 영주님!”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요!”

깡마른 상인은 로드릭 시장을 담당하는 도널드 상단의 새 책임자 폴드 퐁드바르였고, 근육질 용병은 도널드 상단에 고용된 네일 공국 출신 용병 ‘울부짖는’ 파이슨이었다.

“그런데 왜 싸운 거야?”

울부짖는 파이슨이 머쓱하게 해명했다.

“울프 용병단에서 용병을 모집 중이란 소문을 듣고 어떻게 한발 담가볼까 해서...”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숲에서 전사자가 발생해 결원을 메꾸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 남부 돼지 놈이 계약이 끝나지 않았으니 보내줄 수 없다며 트집을 잡지 뭡니까?”

“트집이라니! 트집이라니! 분명 계약서에는 성 달튼의 날까지 상단 대리인을 보호한다고 명시되어있어! 아직 28일이나 남았잖아!”

“젠장! 28일이면 늦는다고! 어느 용병단이 28일이나 공백을 비워두겠어!”

“쓰으읍...”

로벨은 자세를 바꾸면서 입술을 깨물자 다시 조용해졌다. 로벨은 권력의 맛을 잠시 음미한 후 본격적으로 중재했다.

“선수금을 반환하고 임무를 포기하면 되잖아.”

울부짖는 파이슨은 답답한 듯 가슴은 쾅쾅 때렸다.

“그걸 싫다고 합니다!”

“왜?”

상단 대리인 폴드가 곁눈질로 사정을 알렸다.

“이곳이야 위대하신 영주님이 다스리니 아무 문제 없지만, 북쪽으로 좀 더 가면 난리난리 아주 난리입니다.”

“그쪽 영주들은... 없구나.”

강철성을 비롯한 사트로 가문의 봉신이 대거 자리를 비웠다. 치안공백은 당연했다. 로벨과 어린 집사가 서로를 보았다.

‘지금 북쪽을 칠 기회가 아닐까?’

‘맞아요! 깃발 장사할 타이밍이죠!’

의미가 다른 눈빛인데 신기하게 통했다. 기사와 집사가 동상이몽에 빠지자 마녀 키르가 명쾌하게 해결책을 내주었다.

“선수금 돌려받아서 새 용병을 고용하면 되잖아요?”

상단 대리인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게 당장 안 됩니다. 레이디도 알잖습니까-‘어머나! 레이디래!’, ‘저런! 시력이 안 좋으면 장사하기 힘들 텐데...’- 지금 포클랜드 지방에서 난리가 나서 쓸 만한 용병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국왕 폐하 실종 때문에? 그런데 용병이 왜 필요해?”

상단 대리인과 울부짖는 파이슨은 서로를 보았다. 로벨 로드릭 백작이 정치에 관심 없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다.

“소식을 못 들었습니까? 포클랜드에서는 3살 왕자와 15살 왕제(王弟)의 파벌이 나눠져서 치열하게 싸우는 중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