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65화 (165/605)

165화. 평화

165화. 평화

검은 숲 해방군이 해산되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까마귀 성에서 보급을 받아 동쪽으로 회군했다. 병력은 조금 줄었지만, 표정이 밝고 걸음이 가벼웠다. 승리하고 생존해서 귀환하니 어두울 이유가 없었다.

“여름이 가깝군요.”

구릉성의 마튼 경이 한가로이 담소를 걸어왔다.

“검은 숲이 안정되면 북부대로가 활성화될 것이고, 그리되면 새로 만든 시장도 번성하겠지요.”

“그리되면 정말 좋겠소.”

어린 집사가 특히 좋아할 것이다.

로벨은 하늘을 한번 보고 아멧을 벗어 안장 고리에 묶고 소드 벨트를 느슨하게 풀었다.

햇살은 따스하고 바람은 부드러웠다. 눈 녹은 땅은 풀이 껑충 자라서 푹신했다. 춥지도 덥지도 않고, 습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은 화창한 날씨였다. 갓 구운 빵과 와인 한 병 가지고 경치 좋은 언덕에 올라 파도치는 푸른 밀밭을 내려다보며 느긋한 오후를 보내고 싶었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로벨은 플레일에게 몸을 맡기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펄프 대장의 고함과 마녀의 수다와 갖가지 병장기 소음 속에서 나름대로 한가함을 즐겼다. 그러나 오래 즐기지는 못했다.

“우아악! 늑대닷!”

울프 용병단 앞으로 송아지만한 늑대가 불쑥 튀어나왔다. 울프 용병단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용병이 깜짝 놀라 뒷걸음쳤고, 그 때문에 선두 대열이 흐트러졌다. 펄프 대장이 죽일 놈 살릴 놈 악을 쓰며 쫓아갔다.

“늑대가 활동하는 계절이 왔구나.”

로벨은 소란에도 한가로이 반응했다. 보름쯤 굶주려서 눈알이 뒤집힌 늑대라도 세 자릿수 무장 집단에게 덤빌 리 없었다.

“가만, 어째 익숙한데?”

로벨을 호위하는 과묵한 몬트, 발가락 슈미츠, 흉내쟁이 퍼시발이 의아한 대화를 나눴다.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엉덩이도 푸짐한 것이 꼭 기사 나리의 늑대 같은데?”

“우헤헷! 정말 그렇게 생긴 게... 맞잖아! 앗! 쏘지 마!”

“야! 야! 쏘지 마! 쏘지 마! 쏘지 말라고 이 자식아!”

송아지만한 회색늑대가 오지랖 넓은 촌장집 개처럼 컹컹 짖으며 뛰어왔다. 크로스보우를 견착한 용병이 방아쇠를 움켜쥐기 직전, 과묵한 몬트가 머리통을 차고 발냄새 슈미츠가 몸을 던져 넘어트렸다.

“컹! 컹!”

“아야!”

마녀 키르케가 수레 위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하필 그때 허풍쟁이 제이콥이 수레를 정지시켰다. 마녀는 균형을 잃고 수레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우당탕! 쿵-! 한 바퀴 반을 구르는 다이나믹한 추락이었다. 잠깐이지만 늑대보다 더 관심 받았다. 마녀는 머리와 허리를 움켜잡고 신음을 흘렸다.

“아야야... 아야... 아파... 힝...”

귀가 밝은 아야는 자기 이름(?)에 귀를 쫑긋 세우고 뛰어왔다.

“컹컹! 컹!”

아야는 300마리의 오크도 뚫지 못한 울프 용병단을 두 쪽으로 가르며 마녀를 덮쳤다. 그리고 끔찍하게 혓바닥으로 맛을 보기 시작했다. 할짝! 할짝!

“까르륵! 하지 마! 하지 마!”

마녀와 늑대가 한 덩이가 되어 뒹굴었다. 구릉성의 마튼 경은 늑대성의 일상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마녀는 고양이하고 어울릴 줄 알았습니다.”

어릴 때 동화책을 좋아했을 것이다.

로벨은 전투마에서 내려 아야에게 다가갔다. 로벨을 우두머리로 인식하는 아야는 꼬리를 내리고 얌전히 앉았다. 그러자 마녀가 반격했다. 아야의 목덜미를 마구 간지럽혔다.

“너 여기 어떻게 온 거야? 사냥? 산책? 설마 가출? 가출은 아니지?”

“보통 성에 무슨 일이 있냐고 걱정하지 않아?”

“악독하고 악랄한 어린 집사가 지키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요. 우리 귀여운 꼬맹이를 굶기고 때려서 쫓아냈다면 모를까.”

“컹!”

꼬맹이치고 덩치가 무시무시했다.

로벨은 아야의 머리를 쓰다듬고 늑대성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

“어린 집사도 어쩌지 못하는 일이 있어. 서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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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가 어쩌지 못하는 일은 전쟁, 가뭄, 변비, 그리고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이었다.

로벨은 구릉성의 마튼 경과 기사 종자, 과묵한 몬트 외 기마 소대 3인과 마녀 키르케만 대동하고 한발 먼저 늑대성으로 향했다. 총 6필의 기마가 두두두- 뛰어오자 성 안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기사 나리다! 기사 나리가 돌아오셨다!”

성탑의 보초병이 종을 두드리며 소리치고, 성문지기가 성문을 좌우로 활짝 열었다. 로벨 일행은 거침없이 언덕을 올라와 늑대성으로 들어갔다.

어린 집사와 수비대로 남겨놓은 울프 용병단 열댓 명과 호른 경이 몰려나왔다.

“영주님! 영주님!”

로벨은 전력질주로 흥분한 플레일을 진정시키기 위해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게 한 후 재빨리 뛰어내렸다. 전쟁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있는 컴포지트 아머가 철컥! 철컥! 소리를 내었다. 어린 집사가 그 몰골을 보고 대뜸 잔소리했다.

“몸 좀 사리라니까! 또! 또 앞장서서 싸웠네! 그리고 왜 연락을 안 해요? 편지 한 통 없어서 걱정했잖아요!”

“저요? 제 걱정이요? 우히히힛-!”

마녀 키르케는 과묵한 몬트의 도움을 받아 전투마에서 내린 후 비틀거렸다. 어린 집사는 정신 못 차리는 마녀를 무시하고 보고했다.

“아무튼 잘 오셨어요! 지금 큰일이 났어요.”

“큰일? 검은 숲보다?”

로벨은 플레일을 다독이며 건성으로 반응했다. 어린 집사와 늑대성이 멀쩡하면 큰일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린 집사를 대신해 호른 경이 말했다.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로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호른 경, 언제 온 것이오?”

“엿새 전에 도착했습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로벨은 전투마 안장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무기, 투구, 담요 등을 내린 후 과묵한 몬트에게 고삐를 넘겼다. 그 사이 호른 경이 변명하듯 철 지난 보고를 올렸다.

“장미성에서 에릭 프란시스 공작님을 뵙고, 의심스러운 정황을 포착해 뱃길로 포클랜드 시티를 다녀왔습니다.”

“의심스러운 정황?”

“주군, 놀라지 마십시오. 볼프 사트로 후작이 검은 숲을 공격할 듯합니다.”

구릉성의 마튼 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마녀 키르케는 깔깔 웃었다. 로벨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미 알고 있소.”

“...벌써 공격했습니까?”

“그렇소.”

호른 경을 탓할 수 없는 것이, 그만큼 볼프 후작의 작전이 은밀하고 신속했다. 검은 숲에 들어와 도시를 하나 점령할 때까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으니 말이 필요 없었다. 호른 경은 뒷북을 수습하기 위해 두 번째 카드를 꺼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국왕 폐하가 실종되었습니다.”

“뭐라고?”

두 번째 소식은 조금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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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전제왕권을 수립한 동방대륙인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유라피아 대륙에서 국왕의 실종은 대단한 사건이 아니었다. 물론, 옆집 강아지가 실종된 것처럼 ‘거 참, 안됐구만.’ 하고 넘어갈 일은 아니지만, 국가의 위기, 재앙, 쿠데타 위협 따위를 고려할 사항도 아니었다. 전쟁 중에 죽거나 실종되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계승 서열 1위에게 다시 충성하면 그만이었다. 이러한 유라피아 대륙 기사들의 마음가짐은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었다.

“내 땅에 피해오는 것은 없잖아?”

로벨도 국왕의 실종 자체는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

“국왕 폐하는, 그럴 능력이 있는지와 상관없이 중심추가 됩니다.”

“중심추요?”

외팔이 더치가 정수리를 퍽퍽 긁으며 물었다. 호른 경은 못 배워먹은 용병들을 위해 쉽게 풀이해주었다.

“왕이 아니면 싸움을 말릴 수가 없다.”

“어차피 안 말리잖아요?”

어린 집사가 투덜거렸다. 전쟁을 몇 번이나 치렀는데, 국왕이 나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자잘한 전쟁에 모두 관여할 수 없지. 그러나 왕국의 사활이 걸린 전쟁이라면 다르다.”

로벨은 국왕이 친정한 전쟁을 떠올렸다.

“에르나 왕국?”

호른 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쪽이면 차라리 다행입니다. 외부의 적 앞에서는 단결할 테니까요.”

로벨은 덜컥해서 다시 물었다.

“검은 숲과 볼탄 반도의 싸움?”

“예. 그렇습니다. 검은 숲을 침략한 볼프 사트로 후작을 제지할 사람이 없습니다.”

로벨의 생각보다 조금 심각했다. 로벨은 혹시 악마추종자 소행이 아닐까 의심하다가 그만두었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마법사 집단이라도 한 나라의 왕을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다. 왕실에 마법사가 없는 것도 아니고.

로벨은 의심하고 고민하다가 힘이 빠져서 투덜거렸다.

“이 국왕 폐하가 어디를 간 거야?”

“가출? 가출 아닐까요?”

마녀 키르케가 진지하게 의심했다. 외팔이 더치는 어이가 없어서 소리 질렀다.

“이 마녀는 왜 이리 가출을 좋아해?”

“그야 다른 이유가 없으니까... 가만! 깜빡할 뻔했네! 나 없는 동안 우리 꼬맹이들 구박했죠!”

마녀 키르케가 어린 집사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어린 집사는 당황해서 몸을 피했다.

“누, 누가 구박해요? 구박은 제가 받고 있죠!”

“거짓말하지 마요! 저 쪼그만 꼬맹이가 왜 성 밖에 싸돌아다녀요!”

아야는 곰발 같은 손을 테이블에 올리고 절구통만한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어린 집사, 펄프 대장, 외팔이 더치가 동시에 소리쳤다.

“저게 어딜 봐서 쪼끄매!”

호른 경은 국가 중대사 앞에서도 촐싹거리는 동지들을 한심하게 보고, 자신만이라도 품위를 지키기로 했다.

“차라리 암살이면 좋았을 텐데, 실종이라 골치가 아픕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으니, 새 국왕을 뽑을 수 없었다. 로벨은 팔짱을 끼고 경고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으나 표현을 조심하시오.”

“...유의하겠습니다.”

아무튼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검은 숲을 장악한 볼프 후작을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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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에서는 국왕을 찾아 사방을 헤매고, 검은 숲에서는 모 공작과 모 후작이 이빨을 갈아도, 볼탄 반도의 늑대성은 평화로웠다.

로벨은 구릉성의 마튼 경을 증인 삼아 호른 경에게 아만다 성과 마을을 하사했다. 새 영주는 즉석에서 포부를 밝혔다.

“아만다 항을 로드릭 항이라 명명하고, 중형 갤리선이 10척 이상 정박할 수 있는 대형 부두를 건설하고자 합니다.”

로벨은 첫 마디부터 의문을 가졌다.

“왜 로드릭 항이오?”

“로드릭 시장의 연장선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집사가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냈다.

“그거 좋죠. 그런데 공사비가 있어요? 영지민을 동원해도 자재까지 구하지는 못할 텐데요?”

호른 경은 헛기침을 섞어서 단기계획을 밝혔다.

“우선 투자를 받아야지.”

“누구한테요?”

그리고 어린 집사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어린 집사가 펄쩍 뛰었다.

“악! 악! 이런 속셈이었군요!”

호른 경은 교역항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어린 집사와 리암 수사는 깐깐한 은행원으로 빙의해서 심사했다. 로벨은 두 사람에게 몽땅 위임하고 슬그머니 메인 홀을 빠져나왔다.

원정에서 막 돌아온 울프 용병단은 물자를 정리하느라 바빴다. 무기와 갑옷은 개인 재산이지만 수레, 방수포, 취사도구 따위는 늑대성의 재산이었다. 펄프 대장이 꼼꼼하게 체크해서 각 창고로 보냈다.

“3소대! 3소대는 왜 냄비가 하나야!”

“그거 푸른 달 성에서 싸우다 잃어버렸다고 했잖수.”

“...제기랄! 유실물이 너무 많은데? 코골이! 아랫마을 가서 양철냄비랑 모직담요 좀 구해 와라!”

“엥? 내가?”

“그래! 너 임마! 꼬마 집사 나오기 전에 빨리 가!”

어린 집사가 알면 사흘 밤낮을 잔소리할 것이다. 코골이 바디는 투덜거리면서 성화에 못 이겨 로드릭 마을로 출발했다. 시장이 생겨서 좋은 점이 있지만, 이렇게 나쁜 점도 있었다.

로벨은 성내를 한 바퀴 돌았다. 마녀 키르케는 아야와 이야카를 닭 쫓듯이 쫓아다녔고, 겁쟁이 데비는 바람이 안 드는 곳에서 핸드 캐논을 정비했고, 과묵한 몬트는 마구간에서 먼지투성이 전투마를 시원시원하게 씻기고 있었다.

욕설을 동반한 ‘니 탓이다!’, ‘아니! 내 탓이다!’ 말다툼이 조금 들려왔지만 대체로 평화로웠다. 집에 돌아와서 모두들 기분이 좋아보였다.

로벨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푸른 하늘을 향해 뿜었다.

“역시 평화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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