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가시나무 성
164화. 가시나무 성
펄프 대장과 허풍쟁이 제이콥은 날 달린 것에 숫돌질하며 도란도란 이야기했다.
생김새가 험악하고 주제가 복잡할 뿐, 냇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들의 수다하고 비슷했다.
“아무리 욕심이 나도 그렇지. 후계자가 버젓이 있는데 대놓고 내꺼 하겠다니?”
“전쟁 때문에 잿더미가 되었겠다. 말릴 사람도 없겠다. 얼마든지 꿀꺽할 수 있는 거 아니오?”
“아니지. 아니야. 잿더미가 되었으니까 더 필요 없잖아. 도시 재건 비용이 더 많이 나갈 거다. 게다가 제임스 가문은 12기사 가문이잖아? 국왕이 알아봐. 당장 토해내라고 하지 않겠냐?”
“사트로 가문도 12기사 가문이잖소? 그리고 지금 국왕 꼬락서니 봐서 아무 말도 안 할 거 같은데? 우리가 여기 왜 왔는지 생각해보쇼. 국왕이 군대를 안 보내서잖소.”
펄프 대장과 허풍쟁이 제이콥은 한참 동안 떠들다가 문뜩 주위가 조용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외팔이 더치 이하 울프 용병단이 아주 몹쓸 것을 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야? 왜 그래?”
외팔이 더치가 코골이 바디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저거 공용어 맞지?”
“그런 것 같기는 한데...”
펄프 대장은 새삼 애꾸눈 볼포스가 그리워졌다.
“이 멍청한 놈들아! 용병짓 오래 하려면 세상 보는 눈부터 길러라!”
울프 용병단은 비로소 공용어를 알아듣고 왁자지껄 떠들었다.
“에이, 기사 나리만 잘 따르면 어디 가서 비명횡사하지는 않겠지.”
펄프 대장은 칼날이 새파랗게 서서 당장이라도 피를 뿌릴 것 같은 숏소드를 모닥불에 비춰보았다. 로벨과 함께한 첫 번째 전쟁에서 손에 넣어 지금껏 가지고 다닌 애병이었다.
“그 위대하신 기사 나리는 어디 가셨냐? 아까부터 안 보이는데?”
겁쟁이 데비가 외딴곳에 떨어진 사각막사를 가리켰다. 그러자 과묵한 몬트가 머리를 저었다.
“플레일이 없다.”
쇳덩이가 달린 병장기로 이해한 사람도 있지만, 펄프 대장은 푸르릉 거리거나 우적우적 거리는 갈기 달린 짐승으로 알아들었다.
“이 시간에 어디 간 거야?”
“마녀도 함께 사라졌소.”
“...아하?”
울프 용병단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염이 거뭇거뭇해지는 16살의 짓궂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펄프 대장은 피식- 웃고 명령했다.
“좋은 시간 보내게 모른 척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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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조금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의미 없는 시간은 아니었다. 검은 숲 해방군이 도시 밖에서 야영하는 이유, 성문이 굳게 닫히고 횃불이 성벽을 에워싼 이유, 그리고 로벨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이유와 대면 중이었다.
“낯에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하지 못 했소.”
“사교행사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까.”
로벨은 차갑게 대답했다. 볼탄 반도의 지배자이자 온갖 이유의 제공자, 볼프 사트로 후작이 씁쓸하게 웃었다.
“한번도 본인을 의심하지 않았소?”
“그렇소.”
로벨은 즉각 대답했다. 마녀 키르케가 떡갈나무 지팡이를 꼭 쥐고 두 명의 그랜드 챔피언을 번갈아 보았다.
볼프 후작은 하늘을 한번 보았다. 검은 연기에 가려서 달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면 얼굴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기사 종자를 북쪽 탑으로 보낸 것은 나였소.”
로벨은 그날이 언제인지 추리하다가 악마추종자를 쫓아 검은 성을 찾아간 날임을 깨달았다. 볼프 후작은 숨 돌릴 틈 없이 말했다.
“그 순진한 녀석은 진실을 감당하지 못 했소.”
“...진실?”
로벨은 심령이 제압될 만큼 충격적인 진실이 무엇인지 상상되지 않았다.
“그리고 본인은 시내에 숨어있는 경을 찾아갔소. 본인이 경이 있는 곳을 어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소?”
“여관주인이 알려준 것이...”
로벨은 기억을 더듬다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여관 밖에 병사들이 돌아다녔으나 누구도 로벨을 발견하지 못했다. 여관주인 또한 볼프 후작이 나타나자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렇다면, 볼프 후작은 어떻게 로벨이 있는 곳을 알았을까.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꽉 쥐었다.
“경이... 악마추종자였소?”
“아니오. 본인은 죄인이오.”
로벨은 분노와 당혹을 동시에 받았다. 볼프 후작은 감정 없이 고백했다.
“아비를 죽인 패륜아가 아비의 빚을 대신 갚아가는 중이오.”
볼프 사트로 후작의 친부, 후계자 전쟁에서 류트 공자를 도운 뤼크 사트로 후작이었다.
후계자 전쟁 중 버팅거 시티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그 덕분에 자칫 길어질 뻔한 전쟁이 스무날 만에 끝이 났다. 후작의 사인(死因)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일각에서는 복상사란 소문이 떠돌았다. 사트로 후작의 평소 행실과 사트로 가문의 기이한 침묵을 생각하면 그럴듯한 소문이었다.
로벨은 그 소문의 출처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볼프 후작은 친부를 살해하고 권력을 계승 받아 철수했다. 그 덕분에 전쟁은 큰 피해 없이 끝났지만, 볼프 후작은 부친과 손을 잡고 있던 악마추종자의 새로운 표적이 되었다.
승전기념 토너먼트에서 그람 리퍼의 습격을 받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볼프 후작에게 핏값을 받고, 두 가문의 화해를 방해하는 일석이조의 술수였다.
로벨은 볼프 후작의 담담한 눈에서 진실을 확신했다.
“내게 이것을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글쎄... 고해성사라 해야 할까. 누구 하나는 진실을 알아주길 바랬는지도. 물론 경이 대외적으로 범죄를 주장하면 본인은 철저히 부정할 것이오. 경에게는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까.”
그 말은 증거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로벨은 후계자 전쟁과 검은 숲과 악마추종자에 모두 얽힌 한 사람을 떠올렸다.
“류트 공자!”
후계자 전쟁 당시 류트 공자는 버팅거 시티에 있었다. 볼프 후작이 친부를 살해한 증인이나 증거를 가지고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오래전부터 영주를 매수하고 분쟁을 조장해 온 악마추종자였다. 류트 공자, 사트로 후작, 헤르만 백작 모두 악마추종자와 손이 닿아있었다. 그로 인해 후계자 전쟁이 일어났다. 회색산에서 늑대의 왕이 출현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그전부터 악마추종자가 개입해 있었다.
‘대체... 대체 언제부터 손을 쓴 거야?’
5년 전. 아니면 10년 전일까. 로벨은 역사의 뒷면에 숨겨져 있는 짙은 그림자에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래서요?”
그때, 마녀 키르케가 입술을 떼었다.
“악마추종자의 충직한 종이 되어서 그토록 막고 싶어 했던 전쟁을 시작할 건가요?”
로벨과 볼프 후작이 동시에 마녀를 내려다보았다.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들이자 마도의 길에 발을 담근 가엾은 영혼들이었다.
“오해하지 마라, 어린 마녀야.”
마녀 키르케는 입술을 삐죽였다.
“내가 검은 숲을 가지려는 것은 류트 공자나 악마추종자 때문만은 아니다.”
“그럼 무엇이오? 무엇 때문에 또다시 피를 갈구하는 것이오?”
볼프 후작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로벨과 마녀도 덩달아 시선을 쫓았다. 시체 태우는 연기가 달빛을 집어삼킨 블랙우드 시티가 있었다.
“더 많은 피가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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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드 맥켈런 남작이 영주와 기사를 소집했다.
어떤 기사는 분개해서 씩씩거리며 찾아왔고, 어떤 기사는 소심하게 눈치를 보면서 찾아왔다. 로벨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로벨과 친분이 있는, 혹은 친분 있다고 믿는 기사들이 인사했지만 제대로 받아주지 못했다. 볼프 후작의 말이 신경 쓰여서 밤잠을 이루지 못한 탓이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영주들이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블랙우드 시티를 공격하자는 제안이 있었소.”
모두가 예상한 만큼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저스티스 기사단의 카를 경이 가장 먼저 반대했다.
“우리 기사단의 목적은 검은 숲의 몬스터를 몰아내는 것이오. 제임스 가문과 사트로 가문의 싸움에 관여할 이유가 없소.”
제임스 공작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하지만 제임스 가문의 기사도, 포비아 왕국의 기사도 아닌 카를 경이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다. 와트 마르셀 경과 에티엘 발루아 경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합시다. 볼프 후작의 행동이 도리에 어긋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군사력으로 싸울 수 없소. 2,500 대 500이란 말이오.”
“싸울 이유도 없고, 싸워서도 안 되오. 인간끼리 싸워서 누구 좋으란 말이오?”
검은 숲의 몬스터가 자신의 영지를 침범할까봐, 혹은 기회를 틈타 자그마한 땅이라도 가져볼까 참전한 기사들이었다. 소기의 목적만 이룰 수 있다면 검은 숲의 지배자가 제임스 가문이든 사트로 가문이든 상관없었다.
“로벨 경의 생각은 어떻소?”
로벨은 피로와 졸음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고 말했다.
“전투는 안 되오.”
제임스 공작이 고개를 떨구었다. 카를 경에 이어서 로벨까지 반대하면 이미 결정이 난 것이다.
로벨은 강경함 속에 미안함을 담아 제임스 공작을 설득했다
“제임스 공작, 떡갈나무 성으로 돌아가시오.”
“내 도시를 포기하란 말이오?”
“공작이 다스려야 할 땅은 도시 하나가 아니잖소.”
로벨은 숨을 깊이 마시고 짧게 토했다.
“그날의 실수를 반복하지 마시오. 지금은 물러나야 할 때요.”
제임스 공작은 겨우 아물어 가는 턱을 만졌다. 이번에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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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숲 해방군의 해산이 결정되었다.
와트 마르셀 경을 비롯한 몇몇 영주들은 조촐하게 승전축하 파티를 열었지만, 로벨과 제임스 공작은 참석하지 않았다.
제임스 가문의 기사들은 대부분 전사했다. 심지어 일가가 통째로 몰살당하기도 했다. 인간과 달리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몸값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 잃은 성은 전공에 따라 새로 배분되었다. 그 성을 노리고 제임스 가문에 충성하는 기사도 다수 있었다. 그리고 제임스 가문과 무관한 기사에게도 성이 하나 주어졌다.
“가시나무 성에 주둔해 주시오.”
로벨은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했다.
“본인이 말이오?”
“본인을 도와준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나 성을...”
“본인의 군사로 검은 숲의 성을 모두 방어할 수 없소. 그리고 볼프 사트로 후작을 견제할 동맹이 필요하오.”
볼프 사트로 후작을 견제하자면 사트로 가문의 오랜 숙적인 프란시스 가문이 적당했다.
로벨은 오랜만에 맷돌을 굴렸다. 어린 집사 덕분에 쓸 일이 많지 않은 맷돌이었다.
‘머를 브릭 경이 남겨야 하나?’
성을 관리하려면 최소한 기사 한 명을 남겨야 한다. 로벨의 기사는 머를 브릭 경과 앤드류 마튼 경인데, 나이로 보나 충성심으로 보나 머를 브릭 경이 적합했다.
로벨은 문뜩 호른 경의 제안이 떠올랐다. 아만다 성을 회수하고 새로운 봉토를 하사하라고 넌지시 말했었다.
‘한번 이야기해 봐야지.’
전쟁으로 황폐해지기 했지만, 영지의 규모만 보면 가시나무 영지가 아만다 영지보다 2배쯤 컸다. 땅도 비옥하고 자원이 풍부하니 잘만 설득하면 가능할 듯했다.
‘그럼 아만다 성은 호른 경에게 하사해야 하나?’
로벨은 머리를 앞뒤로 굴리다가 제임스 공작의 초조한 눈길을 깨닫고 화급히 대답했다.
“고맙게 받겠소.”
제임스 공작은 안도의 한숨은 쉬었다. 주인 없는 성 하나로 검은 숲의 몬스터와 사트로 후작을 견제할 세력을 얻었으니 나쁘지 않았다.
“지금은 힘이 없어서 참지만,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오.”
제임스 공작은 블랙우드 시티를 항해 이를 갈았다. 로벨은 싸우고 토라진 친구 사이에서 난감한 소녀의 심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