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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63화 (163/605)

163화. 탐욕

163화. 탐욕

검은 숲 해방군의 규모가 커졌다. 몬스터를 피해 산과 계곡에 숨은 유민들이 모여들고, 전쟁상인이 찾아와 입찰을 신청했다. 그 덕분에 모자란 병력과 물자를 일부 충당할 수 있었다.

“2개 요새와 7개 성을 탈환했소.”

사실은 초토화되어서 버려진 성과 요새가 한 개씩 있었다.

“떡갈나무 성이 한 차례 습격을 받았고, 푸른 달 성에서 격렬한 저항이 있었소.”

검은 숲 해방군 지휘관 주드 맥켈런 남작의 전황 보고가 계속 이어졌다.

로벨은 테이블에 올려둔 아멧을 물끄러미 보았다. 피로를 숨기기 위해서 아멧을 쓰고 싶었다.

피곤한 것은 로벨만이 아니었다. 최고 지휘관인 주드 맥켈런 남작부터 말단 병사 촌뜨기 지미까지 스무날 이상 지속된 전투와 행군으로 지쳐 있었다.

“이제 블랙우드 시티를 탈환해야 하오.”

결국 결론에 도달했다. 눈뜨고 졸던 와트 마르셀 경도, 하품을 참느라 눈물을 짜내던 에티엘 발루아 경도 고개를 들었다.

“적의 숫자가 가늠되지 않으니 소모전을 지속할 수 없소.”

“흐음... 블랙우드 시티를 되찾는다고 저 더러운 괴물들이 자기네 소굴로 물러나겠소?”

“거기까지 바라지 않소. 그러나 제임스 공작을 중심으로 검은 숲 주민이 단결할 수 있지 않겠소.”

로벨 이하 해방군 기사들은 울 것 같은 제임스 공작을 못 본 척하려고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했다. 그 결과 주드 맥켈런 남작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맥켈런 남작은 헛기침하고 최종명령을 내렸다.

“내일 아침 제3시에 블랙우드 시티로 출발할 것이오. 선두는 카를 경이 맡아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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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지휘막사를 나와 검은 숲 해방군의 야영지를 쭉 둘러보았다. 각 영지의 군대가 끼리끼리 뭉쳐서 창날을 갈거나 갑옷을 꿰거나 낮잠을 잤다. 후미진 곳에는 병사로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무기, 옷, 고기, 술 등을 장사하는 상인과 종아리를 훤히 드러낸 창부들이었다.

손바닥만한 단검이 10페닝이고, 썩기 직전의 고기 한 덩이가 15페닝이었다. 창부들 또한 도시와 비교가 안 되는 값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전투수당을 넉넉히 챙긴 용병과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불안한 농민병은 기꺼이 비용을 지불했다.

“전쟁이 끝나면 항상 상인만 배부르지요.”

펄프 대장이 전투마 플레일을 대령했다. 로벨은 플레일의 부드러운 볼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우리 애들도?”

“아닙니다.”

펄프 대장은 히죽- 웃었다.

“마녀가 헛돈 쓰지 말라고 지팡이로 두드리는 통에 꼼짝도 못 하고 있습니다. 허풍쟁이가 가장 풀이 죽었지요.”

로벨도 덩달아 미소 지었다.

“블랙우드 시티를 탈환하면 멀지 않아 볼탄 반도로 돌아갈 거야.”

“결국 싸우기로 한 겁니까?”

로벨은 등자를 밟고 훌쩍 올랐다. 시야가 높아지니 숙영지 밖까지 멀리 보였다.

“응. 싸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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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아니, 로벨을 포함한 모두가 검은 숲 최고의 도시에서 벌어질 치열한 공성전과 처절한 시가전을 상상했다.

제임스 공작과 맥켈런 남작은 최소한의 피해로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머리를 싸맸고,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는 엉성한 농민병을 훈련시키느라 목이 쉬었다.

그러나 모두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제 오시오?”

검은 숲 최북단. 북해 한 자락을 차지하고 목재와 목공예로 부를 쌓은 도시. 제임스 가문의 300년 고향이나 오크의 침공으로 폐하가 된 도시. 그러나 오크 및 몬스터는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

로벨은 블랙우드 시티 성벽에 걸린 깃발은 한번 보고, 눈앞에 사람을 보았다. 사실 ‘사람’은 아니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

로벨은 흐룬팅 손잡이를 꽉 쥐었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검은 숲 전쟁 이면에는 악마추종자가 있다!’

하지만 로벨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진실이었다.

“내 주군이신 볼프 사트로 후작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오셨소.”

“볼프 후작이 참전했단 말이오?”

영주들이 웅성거렸다. 로벨이나 주드 맥켈런 남작은 명성이 높다 해도 일개 지방 영주였다. 반면 볼프 후작은 한 지방을 다스리는 제후였다. 사실 제임스 공작도 비슷한 급이긴 하지만 전쟁 당사자라 예외로 쳤다.

“병력은 2천 5백 명이오.”

“2천 5백!”

생각이 짧은 기사들은 좋아했지만, 로벨을 비롯한 몇몇 기사들은 근심을 안았다. 이 시기에 저만한 병력을 이끌고 온 것이 의심스러웠다. 도반 도트넘 백작은 별거 아니란 듯 말했다.

“주인 잃은 땅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사람이 많이 필요하잖소.”

그때, 성문에서 키 작은 꼬마가 뒤뚱뒤뚱 뛰어왔다. 해진 튜닉을 입고 구멍 난 후드를 썼는데, 특이하게 신발이 없었다. 피부에 주름이 많고, 코가 휘어졌으며, 입술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가장 못생긴 사람보다도 못생겼다.

“고블린!”

기사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꺼냈다. 고블린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카아학!” 울부짖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이 전투마를 몰아 앞을 가로막았다.

“하하! 진정하시오. 내 종복이오.”

“뭐요? 고블린을 수하로 부리다니!”

와트 마르셀 경이 히스테리를 부렸다. 그동안 시달린 것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모든 인간이 선량하지 않듯 모든 괴물이 사악하지 않소. 이처럼 인간을 잘 따르는 놈들도 있소.”

‘인간이 아니야. 더 무서운 괴물을 따를 뿐이야.’

로벨은 이를 부득 갈았다. 하지만 지금 도반 도트넘 백작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자폭이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은 통행증을 가져온 고블린에게 물러가라 손짓하고 추가 설명했다.

“2,500명 중 500명은 몬스터로 이루어져 있소. 우리는 항마병(降魔兵)이라 부르오.”

“그, 그래도 몬스터인데...”

“괴물로 괴물을 죽이면 그만큼 인간의 피가 적게 흐르지 않겠소?”

기사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성적으로 이해되지만, 심리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제임스 공작이 앞으로 나왔다.

“볼프 후작은 어디 계시오?”

“흑단성에서 기다리고 계시오.”

제임스 공작의 표정이 특히 안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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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숲은 고목으로 우거진 그늘 때문에 생긴 이름일 뿐, 실제로 검은 나무가 자라지 않았다. 검은 나무는 인어의 바다 남쪽 아이란드 왕국에서 겨우 자라며, 정말 질 좋은 품종은 외해를 지나 야만의 땅을 가야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흑단성은 검은 나무를 대량으로 사용해서 지어졌다.

마녀 키르케가 마부석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물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로벨은 도반 도트넘 백작의 뒤통수를 노려보면서도 호기심 많은 친구를 위해 친절히 설명했다.

“검은 숲이라 하면 인구가 적고 문명이 낙후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목공예 기술이 엄청나게 발달한 곳이야. 돌보다 단단하다는 흑단 나무를 가공하는 것도 검은 숲 장인들이야.”

“아하! 외국에서 자재를 가져오는군요?”

마녀 키르케는 흑단 나무 성의 비밀이 깨닫고 손뼉 쳤다. 하지만 로벨은 즐거움을 공유할 수 없었다.

‘무슨 속셈일까?’

도반 도트넘 백작의,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마도의 수호자 속셈을 알 수 없었다.

‘후계자 전쟁 때도, 정통성 전쟁 때도, 에르나 왕국 때도, 그리고 이번 검은 숲도... 전쟁을 일으키고 해결하기를 반복할...’

로벨은 불현듯 깨달았다. 포비아 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주면서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고작 그것 때문이라고?’

인간에게는 ‘고작’일 수 없지만, 수백 년을 살아온 괴물에게 권력이 중요할까 의심되었다. 조금 비참한 비유지만, 개나 고양이의 서열이 인간에게 중요하지 않듯이 말이다.

‘권력이 아니면 뭐야? 명예? 명성? 취미?’

로벨은 머리가 복잡해서 아멧을 벗었다. 지금의 로벨은 답을 알 수 없었다.

‘볼프 후작을 만나야 해.’

전화(戰火)가 휩쓸고 지나간 시내는 처참했다. 볼프 사트로 후작군이 나름대로 정리한 모양인데, 어중간하게 처리해서 참상이 더욱 잘 드러났다. 팔다리가 잘린채 몸부림치다 죽은 노인, 두 아이를 품에 안고 불에 타서 죽은 젊은 어미, 내장이 파헤쳐진 소년과 건물 잔해에 깔려 죽은 소녀 등이 작은 동산처럼 쌓여있었다.

“저 역겨운 놈들이!”

고블린 병사, 항마병이 시체더미를 기웃거리며 군침을 삼켰다. 고블린 눈에는 온갖 음식을 쌓아놓은 잔칫상일 것이다.

“시체를 훼손하지 못하게 통제 중이오. 조만간 화장을 치를 테니 신경 쓰지 마시오.”

로벨은 하반신이 불에 그슬린 소녀와 눈을 마주쳤다. 눈물이 말라서 탁하게 변한 눈동자가 화상보다 끔찍하게 느껴졌다.

“피의 길... 피의 역사...”

“기사님?”

흑단성으로 가는 길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로벨은 슬픔을 감추기 위해 아멧을 다시 뒤집어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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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이 수리 중인 흑단성 안쪽에서 불프 후작이 마중 나왔다.

볼프 후작은 얼굴 이외에는 모두 철판으로 덮인 어마어마한 필드 아머를 입고 나왔다. 로벨의 컴포지트 아머가 구닥다리 고철갑옷으로 보일 만큼 정교하고 화려한 갑옷이었다. 조금 과장해서 성 한 채 값은 나올 듯했다. 구릉성의 마튼 경이 잇소리를 냈다.

“기를 죽일 생각인가?”

그럴 의도라면 성공이었다. 로벨은 잦은 전투로 잔금이 가득한 자신의 흉갑을 내려다보고 의기소침해졌다.

“어서 오시오, 주드 맥켈런 남작.”

“볼프 사트로 후작.”

로벨은 볼프 후작을 항해 눈인사했다. 하지만 화답을 받지 못했다. 강력한 영주와 쟁쟁한 기사가 여럿 모였으니 그럴 수 있었다. 아니, 있다고 생각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소. 성 안에 쉴 곳을 마련했으니 그동안의 피로를 풀도록 하시오.”

볼프 후작은 흑단성의 주인처럼 행동했다. 로벨을 포함한 영주와 기사가 모두 어이없어했다. 원주인인 제임스 공작은 말할 것도 없었다.

“본인은 제임스 가문의 당주 알버트 제임스 공작이오.”

“공작?”

볼프 후작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의도가 빤히 보이는 행동이었다.

“제임스 가문의 주인은 작년에 전사한 아놀드 제임스 공작이오. 경은 아직 공작이 아니오.”

“형님은 후사가 없이 돌아가셨소. 승계순위를 볼 때 친동생인 본인이 공작위를 계승하는 것은 당연한...”

“국왕 폐하의 인가가 있었소?”

제임스 공작은 그만 당황해버렸다.

“전시 중이라 국왕 폐하를 뵙지 못했소. 허나 관례대로...”

“관례라? 국왕 폐하께 충성 맹세 하지 않은 자를 어찌 믿고 성과 영지를 맡기겠소?”

성미 급한 기사들은 반박하기에 앞서 병장기부터 쥐었다. 탓할 일은 아니었다. 누가 봐도 트집이고 명백한 시비였다.

주드 맥켈런 남작이 조용히 중재했다.

“제임스 공작은 제임스 가문의 합법적인 후계자이며, 제임스 가문은 누대에 걸쳐 왕가에 충성한 공신가문이오. 상호 오해할 말은 하지 마시오.”

말보다 주먹이 빠른 기사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하지만 볼프 후작은 조소로 답했다.

“자기 땅, 자기 백성을 지키지 못하는 가문의 정통성이 무슨 의미가 있소.”

이쯤 되면 아무리 좋게 받아들이려 해도 불가능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이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삭였다.

“옛 신의 충직한 종이 아니더라도, 탐욕은 응당 경계해야 할 악덕이오.”

“핍박받는 선량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어찌 탐욕이 될 수 있겠소.”

로벨은 늙은 사자와 젊은 후작의 어려운 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로벨식으로 질문했다.

“이 도시를 가지겠다는 것이오?”

“...검은 숲의 영지민을 구할 수 있다면.”

볼프 후작은 차갑게 대답했다. 로벨은 흠칫 놀랐다. 지금껏 보아온 볼프 후작과 달랐다. 제임스 공작이 잇소리와 뼈소리를 동시에 내며 소리쳤다.

“국왕 폐하가! 왕가가 허락할 듯 싶은가!”

볼프 후작은 그 반응을 기다린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글쎄. 그건 두고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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