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62화 (162/605)

162화. 굽은 바위 요새

162화. 굽은 바위 요새

연전연승.

검은 숲 해방군은 큰 피해 없이 떡갈나무 성을 탈환하고 가시나무 성을 점령했다. 한번은 300마리가 넘는 오크 무리와 조우하기도 했으나 울프 용병단을 중심으로 두터운 창벽을 만들고 저스티스 기사단이 측면을 때려서 간단히 격퇴했다.

로벨은 플레일과 전투마를 한 번씩 살펴보고 울프 용병단 숙영지를 가로질러 기사들의 막사를 찾아갔다. 머를 브릭 경, 앤드류 마튼 경, 그리고 기사 종자가 병장기를 깔고 앉아 싸구려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마, 마로드!”

브릭 경이 깜짝 놀라 술병을 숨겼다. 로벨은 허술한 연기에도 못 본 척했다. 보급도 넉넉하지 않고, 약탈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술까지 금지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병사들은?”

“2인 1조 3개 조로 경계하며 휴식 중입니다.”

로벨은 기사 종자들을 힐끔 보았다. 14살에서 16살 사이로 어린 집사와 비슷했다. 로벨과 눈을 마주치자 경이로운 뭔가를 목격한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모습이 부담스러워 재빨리 본론을 빼들었다.

“머를 브릭 경, 아만다 성 병사들과 함께 가시나무 성에 주둔하시오.”

“저희...만 말입니까?”

“와트 마르셀 경의 병사도 일부 남을 것이오.”

브릭 경은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검은 숲의 접견지역이라 대단히 위험하거니와 성의 수비를 맡으면 40일 의무 종군일과 무관하게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지 알 수 없었다.

구릉성의 마튼 경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질문했다.

“가시나무 성의 영주는 어찌 되었습니까?”

“현재 행방불명이오.”

사실상 사망이고, 십중팔구 오크 위장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럼 장기적인 계획을 가져야 하지 않습니까?”

구릉성의 마튼 경은 로벨의 봉신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만큼 생각도 많았다. ‘장기적인 계획’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되었다.

“지금은 욕심 부릴 상황이 아니오.”

로벨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마튼 경은 피하지도 미루지도 않았다.

“이 전쟁에 참전한 기사들은 주군처럼 순수하지가 않습니다.”

“그만. 그만하시오. 오늘 밤은 편히 쉬시오.”

로벨은 머를 브릭 경과 눈인사하고 조촐한 술자리를 떠났다. 마튼 경은 등 뒤에 숨겨놓은 술잔을 꺼내서 단숨에 비우고 거하게 트림했다.

“우리 주군은 실력도 있고 인망도 있지만 정치 감각이 부족하오.”

“그래서 존경받는 것이오.”

머를 브릭 경이 소리 내며 웃었다. 하지만 마튼 경은 웃지 않았다.

“호른 경이 왔으면 좋겠군.”

“아, 그러고 보니 호른 경은 왜 안 오지?”

머를 브릭 경은 봉신 중 유일하게 영지와 병사가 없는 기사를 생각했다. 정말 깊이 생각해 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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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와 고블린은 수성하지 않았다. 인간과 가축을 잡아먹고, 무기와 농기구를 수집하기 위해 성을 점령하지만, 유지 및 보수는 일절하지 않았다. 굽은 바위 요새 또한 마찬가지였다. 성문은 망가진 채 활짝 열려있고, 성벽에 걸린 사다리와 갈고리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기마 소대 소속 과묵한 몬트와 발가락 슈미츠가 굽은 바위 요새 정찰을 마치고 지휘부로 돌아왔다.

“오크입니다! 오크가 바글바글합니다!”

“최소 300마리 이상입니다.”

로벨은 플레일의 고삐를 늘어트리고 주드 맥켄런 남작을 보았다. 남작은 전쟁 중에 까칠하게 자란 수염을 만지고 있었다.

“고작 300마리! 우리 기사단이 몰아내겠소!”

카를 경이 자신만만하게 제안했다. 그러나 주드 맥켈런 남작은 거부했다.

“좋은 생각이 아니오.”

“우리를 못 믿소이까?”

“요새 안은 길이 좁고 장애물이 많소. 난전이 되면 피해가 커질 것이오.”

주드 맥켈런 남작은 400명 남은 검은 숲 해방군을 돌아보았다. 제임스 공작군과 도너반 자작군이 합류해서 총 700명이 출진했으나, 떡갈나무 성과 가시나무 성에서 일부 전사하고 수비병을 배치하니 지금 숫자로 줄었다.

“이 전투가 끝이 아니오.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하오.”

주드 맥켈런 남작은 블랙우드 시티 수복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눈앞의 적만 생각하는 ‘말똥 찬’ 기사와 달랐다.

‘대단한 기사야.’

로벨은 늙은 사자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전략, 전술, 부대 운영, 그리고 마음가짐까지. 그중 전술을 꺼내보였다.

“적을 유인해서 싸우는 것이 좋겠소.”

주드 맥켈런 남작은 늘그막에 사귄 친구를 온화하게 보았다.

“좋은 작전이 있소?”

“본인에게는 아바레스트 사수 20명과 핸드 캐논 사수 5명이 있소.”

“과연. 그럼 북쪽을 맡기겠소.”

카를 경 이하 여러 기사들은 어리둥절해서 두 기사를 번갈아 보았다. 로벨은 최고 지휘관에게 설명을 맡기고 일선에 배치된 펄프 대장과 겁쟁이 데비를 찾아갔다.

“제1소대와 제7소대를 이끌고 따라와.”

“어디로 갑니까?”

“요새 뒤를 습격할 거야.”

겁쟁이 데비가 덜컥해서 움츠렸다.

“우리끼리 말입니까요?”

“더 필요해?”

로벨은 외팔이 더치 뒤에 숨어있는 마녀에게 손짓했다.

“키르케, 같이 가자.”

마녀 키르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도요?”

“네 도움이 필요해.”

마녀 키르케는 무척이나 좋아했다. 외팔이 더치가 ‘적진에 침투하는데 좋아? 정말 멍청한 마녀야!’ 외쳤지만 쳐다보지도 않았다.

로벨, 펄프 대장, 마녀 키르케, 겁쟁이 데비, 그리고 20명의 아바레스트와 5명의 핸드 캐논 사수가 조용히 본대를 이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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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 바위 요새는 이름 그대로 허리가 크게 굽어 있었다. 아성이 있는 북쪽과 연병장이 있는 남쪽이 L 모양으로 구부러져 있으며 약 20피트의 높낮이가 있었다. 따라서 고지대인 북쪽을 차지하면 남쪽을 손쉽게 공격할 수 있었다.

펄프 대장은 고개를 한껏 젖혀서 높디높은 아성을 올려다보았다.

“저길 오르라고요?”

“힘들까?”

“힘들고 말고가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안 합니다! 안 해! 정말 시키면 계약 파기입니다!”

로벨은 성벽 위로 삐쭉 솟은 최후의 방어시설을 올려다보고 수긍했다.

“좀 힘들겠네.”

펄프 대장 이하 울프 용병단 2개 소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벨은 요새 안으로 침투할 방법을 고심했다. 마녀 키르케가 단순한 해결책을 주었다.

“그냥 북문으로 들어가요.”

펄프 대장이 실소했다.

“오크가 암만 멍청해도 인간과 오크를 구분 못 할 것 같지 않은데?”

“지금은 대낮이잖아요. 오크한테는 새벽이나 마찬가지에요. 소란만 피우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보통은 웃기지 말라고 하겠지만, 마녀가 하는 말이라 신빙성이 있었다.

“그 정도로 눈이 안 좋소?”

“그야 오크마다 다르죠. 그런데 대체로 안 좋아요.”

“그리 말하면 신뢰가 안 가잖소!”

로벨은 시선을 아래로 내려서 북문을 보았다. 한쪽 문이 기울어져서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듯했다.

“때로는 당당할 필요가 있어.”

펄프 대장은 투구를 벗고 머리를 퍽퍽 긁었다.

“정신줄 놓을 필요겠지요. 오크 소굴에 제 발로 뛰어들어가는 게 제정신입니까?”

“그렇게 말해도 할 거잖수.”

펄프 대장은 눈치 없는 부하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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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행동은 당당함과 거리가 멀었다. 몸을 바짝 낮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종종 네 발로 기었다. 누가 기사 체통을 거론하면 숯불처럼 새빨개진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체통 때문에 위기를 자초할 만큼 무모하지 않았다.

로벨은 흐룬팅을 왼손으로 옮기고 대거를 뽑았다. 성문에 기대서 꾸벅꾸벅 조는 오크와 땅바닥에 엉덩이 깔고 하품하는 오크가 목표였다.

“쏠까요?”

펄프 대장이 아바레스트를 준비하며 물었다. 로벨은 고개를 가로젓고 대거를 귓가에 붙였다.

활이나 쇠뇌는 잘 못 다뤄도, 대거 만큼은 자신 있었다. 처음 칼을 잡았을 때 연습한 것이 그것이었으니까.

휘리릭-!

묵직한 칼날이 두 바퀴 반을 회전한 후 꿈나라를 헤매는 오크를 영영 보내주었다. 그 모습을 본 하품하는 오크가 벌떡 일어났다.

작은 눈이 주먹보다 커지고, 윗입술을 압박하는 송곳니가 숨겨진 자태를 드러내며, 폐에서 응축한 공기를 토해내기 시작할 때, 로벨이 단숨에 걸음을 좁혀 흐룬팅을 휘둘렀다. 써겅-! 살을 찢고 뼈를 자르는 소리가 서늘했다.

로벨은 흐룬팅을 8자로 휘둘러 핏물을 털어내고 오크 가슴팍에서 대거를 회수했다. 펄프 대장이 절반쯤 뽑은 숏소드를 슬며시 밀어 넣고 중얼거렸다.

“저럴 때 보면 멋있다니까.”

“아니거든요? 기사님은 항상 멋있거든요?”

로벨은 속닥이는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울프 용병한 큼직한 발사체를 어깨에 짊어지고 총총걸음으로 쫓아왔다.

“보루 위로 올라가. 포성이 끝나면 순차사격해. 할 수 있지?”

로벨은 아성을 지키는 좌우 보루를 지정했다. 요새에 들어온 적을 막기 위한 시설이라 사격범위가 상당히 넓었다.

“우리 목적은 적을 요새 밖으로 쫓아내는 거야. 지휘관으로 보이는 놈을 우선 저격해.”

“누가 지휘관인지 어떻게 알죠?”

“가장 목소리 큰 놈을 쏴.”

펄프 대장은 깨달음을 얻고 아바레스터와 함께 보루를 올라갔다. 마녀 키르케가 기대감에 차서 자신을 가리켰다.

“저는요? 저는 뭐해요?”

로벨이 설명할 필요 없이 겁쟁이 데비 이하 핸드 캐논 소대가 일제히 화승을 내밀었다.

“불이나 붙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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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도 상당수 그렇지만 오크에게 화기(火器)는 생소한 무기였다. 불꽃, 연기, 작고 빠른 쇠구슬 모두 무시무시하지만, 진정한 공포는 폭음이었다.

콰광-!

천둥소리와 비슷하나 조금 달랐다. 게다가 한번이 아니라 연달아 내리쳤다. 콰콰쾅! 쾅쾅! 평범한 천둥도 연속으로 터지며 무서운데, 천둥보다 가깝고 천둥에게 없는 살의까지 담겨있었다. 말가죽을 벗기느라 끙끙거리던 오크가 천둥이 불러온 벼락에 맞았다. 얼굴의 반쪽이 사라져서 나자빠졌다.

“꾸루루룩!”

“뀌이익!”

오크들이 놀라서 날뛰었다. 사실 오크만큼이나 인간도 놀랐다. 펄프 대장이 감탄 반 경악 반으로 겁쟁이 데비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걸 맞혀? 저걸? 이야아!”

“운이야. 운이 좋아.”

겁쟁이 데비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두 번은 못할 럭키 샷이었다.

아무튼 행운의 여신이 따랐다. 포성이 끝나자 울프 용병단 최정예 아바레스터가 여장 위로 몸을 일으켰다. 덩치가 큰 놈, 목소리가 큰 놈, 깃발 비슷한 것을 가진 놈을 향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파파팡-! 파팡-!

오크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오크들은 갑자기 쏟아지는 포탄과 쿼럴에 정신을 못 차렸다. 적의 숫자와 위치를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

‘한 놈만 가라. 한 놈만...’

로벨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작전의 성공 여부는 최초의 한 마리에게 달려있었다. 로벨 일행을 잡겠다고 북쪽으로 올라오면 실패일뿐더러 모두가 위험했다. 반대로 남쪽으로 도망가면 확실한 승리였다.

“뀌이이잇!”

행운의 여신에 이어서 승리의 여신까지 함께했다. 오크들이 성문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쾌재를 부르며 2차 사격을 시작했다. 통제 따위 필요 없었다. 겁쟁이 데비 등은 준비되는 대로 자율사격을 실시했고, 그 덕분에 실제 사수보다 숫자가 많아 보이는 효과를 내었다.

로벨은 마지막 한 마리가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고 성벽 넘어 검은 숲을 등진 인간의 군대를 보았다.

수백 개의 화살이 철새떼처럼 날아오르고, 수백 개의 창이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웠다.

“본의 아니게 최고의 관람석이 되었군요.”

펄프 대장이 히쭉- 웃었다. 요새 밖에서 펼쳐진 싸움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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