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해방군
161화. 해방군
검은 숲 해방군이 북쪽으로 행군했다. 총 병력 515명. 기사 52명, 병사 463명, 수레가 15대, 소와 양이 39마리였다. 기대한 것보다 적다고 해도 4~5개 영지군이 모인 규모였다.
로벨은 꾸물꾸물 걸어가는 병사들과 그들을 훔쳐보는 포스트 포레스트 지방의 농민들을 차례로 관찰했다. 낫질하는 농부와 양떼 모는 목동이 불안한 눈초리로 해방군을 힐끔거렸다.
“쳇! 기분 나쁜 것은 우리라고!”
외팔이 더치가 짜증을 부렸다. 울프 용병단은 고개를 끄덕였고, 농민병은 불안한 눈짓을 보냈다.
검은 숲 해방군의 행군속도는 대단히 느렸다. 수레에 가축에 훈련이 덜 된 농민병이 있다 보니 하루 종일 걸어도 7마일을 이동하기가 힘들었다. 사실 걷는 것은 한나절이고, 야영지 설치, 사열, 배식, 무기점검 등이 나머지였다. 오죽하면 마녀 키르케조차 투덜거렸다.
“싸울 생각이 있기는 있는 걸까요?”
하지만 검은 숲 해방군의 사령관 주드 맥켈런 남작은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다. 한 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준비가 안 된 군사로 싸울 수 없소.”
그 말에 저스티스 기사단 제4소대장 카를 브라운 경이 반발했다.
“준비만 하다가 영영 못 싸우는 수가 있소!”
로벨은 지휘막사로 들어오다가 멈칫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펜을 놓고 주름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금 싸울 수 있는 병사는 경의 저스티스 기사단 30명과 로벨 로드릭 백작의 울프 용병단 100명뿐이오.”
“그럼 나머지 병사와 무기는 장식이오?”
“저들을 보시오. 싸울 용기도, 의지도, 재주도 없소. 오크가 10마리만 나타나도 도망칠 것이오.”
뜬금없이 이제 막 들어온 로벨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로벨은 재빨리 옆으로 물러서서 막사 밖을 볼 수 있게 배려했다. 카를 경이 벌레 씹은 얼굴로 따졌다.
“그럼 어찌하자는 것이오? 죽치고 앉아서 훈련하자는 것이오?”
“훈련은 훈련이나, 한 곳에서 하지 않을 것이오.”
로벨은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영주들과 눈인사하고 슬그머니 주드 맥켈런 남작의 편지를 살폈다. 국왕 폐하, 에릭 공작, 볼프 후작 등에게 보내는 지원군 요청이었다.
“제발 쉽게 좀 말하시오!”
“최고의 훈련은 실전이란 뜻이오. 우선 작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사기를 높이고 자신감을 심어줘야 하오.”
“그럼 경께서는...”
“싸우기 좋은 곳,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소.”
로벨 이하 해방군 소속 영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해의 사자라 불리는 주드 맥켈런 남작의 전술은 흠 잡을 곳이 없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신중한 행군과 철저한 정찰을 이어갔고, 마침내 검은 숲 경계에서 농장을 약탈하는 오크 30여 마리와 조우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체구는 작지만 품위 넘치는 백마 위에서 전장이 된 보리밭을 굽어보았다.
“우선 전의를 꺾어야겠소. 누가 나서겠소?”
로벨이 손을 살짝 들었지만 카를 경이 강경하게 소리쳐서 주목받지 못했다.
“옛 신의 축복을 받은 전쟁이오! 첫 전투는 옛 신의 기사단이 나서야 마땅하오!”
결국 저스티스 기사단이 선공을 시도했다. 사람은 물론이고 전투마까지 갑옷을 갖춘 30명의 정예 기사였다. 랜스와 플레일을 꺼내 들고 일렬로 늘어서자 위용이 대단했다.
카를 경 이하 옛 신의 기사들은 자신의 모습에 자신 스스로 감탄해서 호기롭게 소리쳤다.
“옛 신의 충복들아! 한바탕 휘저어보자!”
주드 맥켈런 남작은 살심과 신앙심의 구분이 모호한 중무장 패거리를 내버려두고 로벨을 따로 불렀다.
“경의 정예병으로 저들을 섬멸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지금 그리하면 안 되오. 전공을 양보하라는 부탁이 무례한 줄 알지만...”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소.”
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두 부대로 나눴다. 풋맨과 스피어맨을 농장 좌우로 이동시키고, 크로스보우맨과 핸드 캐논 소대를 전방에 배치했다. 이렇게 되면 주력 부대는 300여 명의 농민병이었다. 펄프 대장이 흥분한 외팔이 더치를 진정시켰다.
“전투가 아니라 훈련이야. 적당히 해라.”
“엥? 무슨 뜻이오?”
“가만히 지켜보다가 위험하면 나서라고.”
허풍쟁이 제이콥이 느긋하게 풀이했다.
첫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적은 30마리밖에 안 되는데, 최고의 기사단이 기습하고, 최고의 용병단이 백업하니 고전하는 것이 이상했다. 사실 작정하면 저스티스 기사단이 단독으로 섬멸할 수 있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의 의도가 적중했다. 한평생 두더지보다 큰 것은 잡아본 적 없는 농민병이 첫 전투에서 무시무시한 오크를 찔러 죽였다. 흥분과 자신감이 공포와 두려움을 뛰어넘었다. 코골이 바디가 코를 팽! 풀고 중얼거렸다.
“꽁지 빠지라 도망가는 놈들 찔러놓고 좋아하기는...”
“이제 시작이니까. 괜히 초치지 말아라.”
그 말대로 전쟁은 이제 시작이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검은 숲 외곽지역을 돌면서 서너 차례 전투를 반복했다. 고지대를 점령해서 쇠뇌와 대포로 격파하고, 전면전을 치르면서 저스티스 기사단을 우회시켜 섬멸하고, 이른 아침에 야영지를 기습해서 박살냈다. 전부 10~50마리의 소규모 전투지만, 경험은 차곡차곡 누적되었다.
“벌써 22명의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그 대신 살아남은 병사들은 쓸만해졌잖소.”
로벨 이하 각 지방 영주들은 반박하지 못했다. 병사들을 살펴보면 포스트 포레스트를 떠나올 때의 비루한 모습은 사라지고 의욕과 자신감이 가득했다.
‘늙은 사자의 이빨은 아직도 튼튼하네.’
로벨은 새삼 저런 작자를 이겼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울프 용병단이 아니었으면 필패했을 것이다. 주드 맥켈런 남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히 말했다.
“이제 준비가 끝났소. 까마귀 성으로 진군합시다.”
“오오!”
“드디어!”
기사들이 흉갑을 두드리며 환호했다. 일부는 롱소드를 뽑아서 하늘을 찌르기도 했다. 로벨 역시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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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와 기사의 의욕에 비해 행군속도가 크게 빨라지진 않았다. 사기가 넘치고 행군에 숙달된 만큼 첫날보다는 빠르지만, 반평생 전장을 떠돌아다닌 울프 용병단 입장에서는 여전히 갑갑했다. 그래도 시간은 성실하고 노력은 정직해서 걷다 보니 까마귀 성이 나타났다. 로벨과 마녀 키르케 등에게는 정확히 30일 만이었다.
“오오! 로벨 백작! 로벨 로드릭 백작!”
제임스 공작이 외투도 챙겨 입지 않고 성문으로 뛰어나왔다. 기사와 병사가 모두 깜짝 놀랐다. 주종관계도 아닌 두 영주가 이 정도로 친분을 쌓기는 쉽지 않았다. 로벨은 아멧을 벗고 목례했다.
“약속보다 늦었지만 도우러 왔소.”
“아니오! 정말 잘 왔소! 아주 잘 오셨소!”
로벨의 소개로 검은 숲 영주와 해방군 영주 사이에 인사가 오갔다. 까마귀 성 영주 도너반 자작을 대할 때만 조금 어색할 뿐,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양쪽의 군사를 합치면 800명이 넘었다. 상당한 대군이었다. 하지만 뱃사공이 너무 많은 문제가 있었다.
“블랙우드 시티로 곧장 진격해야 하오!”
“상대가 인간이라면 그래야겠지. 허나 인간이 아니잖소. 도시를 탈환하는 것은 무의미하오.”
“그럼 각 성으로 군사를 보내자는 것이오?”
“검은 숲의 성이 몇 곳인지 아시오? 그리하면 50명도 남지 않소!”
로벨은 영주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드 맥켈런 남작도 탐탁지 않은지 슬그머니 바통을 넘겼다.
“로벨 로드릭 백작, 이곳에서 의견을 조율할 사람은 백작뿐인 듯하오.”
로벨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예전 같으면 당황하겠지만, 지금은 적응이 되어서 담담하게 받을 수 있었다.
“적의 침입로를 막아야 하오.”
“침입로라니?”
“검은 숲이 적의 본거지인데 어디를 어떻게 막을 수 있소?”
로벨은 왜 알면서 묻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 말했잖소? 검은 숲을 막아야 하오.”
역시나 난리가 일어났다.
“검은 숲을 포위하자는 뜻이오?”
“군사가 1만이라도 불가능하오!”
로벨은 짜증이 나서 아론다이트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소란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열을 내다보니까 잠시 잊었는데, 상대는 이곳에서 가장 막강한 군대를 가진 그랜드 챔피언이었다.
로벨은 주위가 조용해지자 한결 편안하게 설명했다.
“숲 전체를 포위할 필요는 없소. 할 수도 없지. 숲을 감시하고 시간을 벌어줄 거점만 확보하면 충분하오.”
“그런 곳이 있소?”
“떡갈나무 성, 가시나무 성, 굽은 바위 요새요.”
가래 끓는 목소리와 잔기침이 이어졌다. 까마귀 성의 주인 도너반 자작이었다. 로벨과 다른 의미로 침묵했다.
로벨은 예의상 펼쳐놓은 검은 숲 지도를 적극 활용했다.
“자작의 말씀이 옳소. 이 세 곳을 확보해서 굳건하게 지키면 전선의 확장을 막을 수 있소. 그리하면 블랙우드 시티와 각 영지를 수복하고 원활하게 지원받을 수 있을 것이오.”
“말은 쉽지만...”
“세 곳이나 점령하려면 얼마나 걸리지...”
주드 맥켈런 남작이 웃음을 띠고 거들었다.
“간단하오. 전격전으로 가면 되오.”
“전격전?”
“오늘 출발해서 내일 점심에 떡갈나무 성을 탈환하겠소. 그리고 최소한의 수비병과 부상병을 남겨두고 곧장 가시나무 성으로 가는 것이오.”
“과연 병사들이 버틸 수 있겠소?”
“체력이 약한 병사부터 수비병으로 빼야 하오. 어쩌면 굽은 바위 요새는 저스티스 기사단과 울프 용병단만으로 공략해야 할지도 모르오.”
영주들이 일제히 로벨과 카를 경을 보았다. 국왕의 기사 중 가장 용맹한 기사고, 옛 신의 기사 중 가장 무모한 기사일 것이다. 두 사람 다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 방법이 최선이라면 그리하겠소.”
“옛 신의 가호가 함께하는 한 당연히 승리할 것이오!”
그렇게 검은 숲 해방군의 작전이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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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숲의 몬스터는 오크, 고블린, 트롤, 그리고 소수의 오우거로 이루어져 있었다. 개개인의 전투력은 우수하지만, 결코 인간보다 유리하지 않았다.
“사격 준비!”
100개의 쇠뇌가 수평으로 세워졌다. 동시에 고블린 100여 마리가 조잡한 병기를 흔들면서 괴성을 질렀다. 깨진 유리를 모아놓고 짓밟는 듯한 끔찍한 소리였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소음을 잠재우기 위해 명령했다.
“발사!”
파파팡-! 파팡-!
쇠로 된 빗방울이 휘몰아쳤다. 고블린 상당수가 우수수- 쓰러졌다.
“파이크 준비!”
10피트에서 16피트 길이의 들쭉날쭉한 장창이 쇠뇌를 대신해 앞으로 나왔다.
“전진!
“우하!”
“전진!”
“우하!”
200여 명의 스피어맨이 한 걸음씩 나아갔다. 겁 많은 청년은 부들부들 떨면서 한 걸음 늦게 따라왔고, 주의력이 부족한 노인은 과감하게 한 걸음 먼저 나갔다. 펄프 대장 이하 중간 지휘관은 전열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노력 덕분에 고블린 앞까지 질서정연하게 도착했다.
“우루루루! 우루룩!”
고블린이 부러진 낫을 휘둘렀지만 길이가 짧아 병사에게 닿지 않았다. 용감한 창병이 반걸음 나서서 롱 스피어를 찌르자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절명했다.
“전진!”
“우하!”
용감한 용병은 씨익- 웃었고, 소심한 농민병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뎠다.
푹-!
고블린 십여 마리가 창에 찔려 부들부들 떨었다. 절명한 고블린은 창을 아래로 끌어내렸고, 운 좋게 급소를 피한 고블린은 창날을 빼기 위해 바동거렸다.
“풋맨! 앞으로!”
창대 사이로 숏소드, 팔치온, 클리버 등의 단병기를 가진 울프 용병단이 뛰쳐나갔다. 날붙이가 위아래로 휘둘러지고 끈적한 핏물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끼리릭!”
“카악!”
고블린은 별다른 힘을 못 쓰고 패주했다. 힘이 좋고 몸이 날래도 무기와 전술의 격차를 넘을 수 없었다.
로벨은 라이트 랜스를 반 바퀴 돌려서 겨드랑이에 끼우고 주드 맥켈런 남작을 보았다. 긴말이 필요 없었다. 눈짓 한번과 고갯짓 한 번이면 충분했다.
“위대한 해방군의 기사들이여! 돌격!”
로벨 휘하의 브릭 경, 마튼 경을 비롯한 왕의 기사들과 카를 경을 비롯한 옛 신의 기사들이 패주하는 고블린을 뒤쫓았다. 만약 고블린 문명에 역사가나 기록관이 있다면 대참사로 길이 남겼을 대학살이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