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60화 (160/605)

160화. 반역자

160화. 반역자

로드릭 마을 촌장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영주가 시찰 나와서 영지민을 소집하고 춘경지를 살피는데, 그놈의 영주가 수시로 칼자루를 움켜잡고 어금니를 부득부득 갈아대니 힘없는 촌장 입장에서 편할 수 없었다.

“저어, 영주님?”

“응.”

“그쪽은 휴경지입니다요.”

“응.”

“그쪽은 가실 필요가 없는데...”

“응.”

대충 이런 상황이었다. 어린 집사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깊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 제안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해요.”

“응... 응?”

“펄프 대장이랑 마녀랑 외팔이 더치... 는 필요 없으려나? 아무튼 사람들을 불러올게요.”

“왜?”

로벨이 의아해하자 로벨보다 로벨을 잘 아는 어린 집사가 투덜거렸다.

“검은 숲으로 갈 방법을 찾고 있잖아요? 전 방법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영주님이 원하니까 의논해봐야죠.”

“너...”

로벨은 유능한 충신이자 속마음을 알아주는 친구에게 감동했다.

“리암 수사랑 허풍쟁이 제이콥도 불러.”

“예예. 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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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의 측근이 모두 모였다. 늑대성의 군사, 경제, 정보를 담당하는 핵심 인사이기도 했다. 적어도 로드릭 령(領)에서는 명성이 자자한 거물들의 모임인데, 세간의 상상과 달리 소박하고 소탈하게 행동했다.

마녀 키르케는 식탁 아래에서, 아니, 회의실 탁자 아래에서 아야와 이야카를 끼고 뒹굴었고, 외팔이 더치는 점심 먹고 시작하면 안 되냐고 툴툴거렸고, 허풍쟁이 제이콥은 목젖이 훤히 보이는 하품을 30초마다 반복했다.

‘소탈하다는 표현도 많이 순화한 거지.’

어린 집사는 시끌시끌한 거물들을 보고 혀를 찼다. 그래도 진중한 사람이 조금 있었다. 펄프 대장은 새치로 덮여서 사실상 백발에 가까운 머리통을 퍽퍽 긁었다.

“국왕 폐하가 군대를 소집하지 않아도,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소집하면 되지 않습니까?”

어린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프란시스 가문의 기사만 모아도 1,000명에서 1,500명 정도 모을 수 있죠.”

“아니죠. 이해관계가 맞아야죠.”

리암 수사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전쟁을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해요.”

로벨이 전쟁 전문가답게 즉답했다.

“병사, 무기, 식량.”

“음... 그것도 중요하지만... 제가 말을 잘못했네요. 전쟁이 일어나는 세 가지 이유에요.”

“영토, 재화, 그리고 명분?”

“예. 맞아요. 전쟁의 조건이자 목적이죠. 그럼 검은 숲으로 군사를 보내는데 해당하는 것이 있을까요?”

로벨은 가만히 생각한 후 고개를 저었다. 리암 수사가 설명했다.

“땅을 차지할 수도 없고, 몸값을 받을 수도 없죠. 그리고 명분도 마땅하지 않아요. 왕국을 위해서? 국왕 폐하도 하지 않는 일을 왜 우리가 하냐고 따지겠죠. 가문을 위해서? 영주님도 그렇지만, 검은 숲의 가문하고 딱히 연줄이 없잖아요?”

어린 집사가 아직 맨들맨들한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가계도를 잘 뒤져보면 연결될 텐데...”

“사돈의 팔촌의 이웃의 전(前)부인까지 가면 동방대륙 황제도 친구라죠.”

허풍쟁이가 아홉 번째 하품을 하다가 낄낄 웃었다. 하지만 리암 수사는 진지했다.

“그런고로, 에릭 프란시스 공작님이 도울 이유도 없거니와 설령 돕자고 나서도 봉신들이 협조하지 않을 거예요.”

펄프 대장과 어린 집사, 심지어 생각이 없는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도 침묵했다. 그렇게 분위기가 어색해질 무렵, 어린 집사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럼 우리도 싸울 이유가 없잖아요.”

“아니죠! 우린 입장이 달라요!”

마녀 키르케가 이야카 정수리에 턱을 올리고 끼어들었다.

“우린 볼탄 반도의 입구잖아요? 검은 숲의 몬스터가 넘어오면 가장 먼저 싸우게 돼요!”

“...가끔씩 날카롭다니까.”

로벨이 걱정하는 것도 그것이었다. 검은 숲의 영지민이 불쌍한 것도 있지만, 그보다 로드릭 영지의 안전이 걸려있었다. 작년 가을의 오크 침략이 올해도 반복될 수 있었다.

“호른 경이 돌아와야 확실해지겠지만, 지금 분위기를 볼 때 검은 숲 원정은 없을 거에요. 그럼 우리가 시도할 일은 두 가지에요.”

로벨이 반색을 하고 끼어들었다.

“싸우느냐 마느냐?”

“싸우는 건 안된다니까요! 국왕 폐하를 설득하느냐, 귀족원을 설득하느냐죠.”

“귀족원이라...”

귀족원의 힘은 대단하지만, 이해관계가 얽힌 만큼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니까 호른 경이 올 때까지 기다려요. 어느 쪽을 공략할지 그때 생각해 봐요.”

로벨은 만족스럽지 않지만 납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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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호른 경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울프 용병단을 재정비했다.

겁쟁이 데비 이하 예전 포병 소대를 핸드 캐논 소대로 편성했다. 화약과 화승을 다루는 훈련이 잘되어 있어서 금방 적응했다. 다만 화약값이 만만치 않아 실사격을 자주 하지는 못했다.

겁쟁이 데비가 빠진 기마 소대 자리에는 과묵한 몬트가 들어갔다. 기마 소대는 고작 3명이지만, 로벨을 호위하는 랜스라 자부심이 대단했다. 일단 말을 타고 훈련하는 것부터 특별했다.

“기마병에 포병까지 추가되다니! 세상에!”

“응! 멋져!”

“멋진 게 아니라 끔찍하죠! 으으으...! 죽어라 돈을 벌면 뭐해요! 저 식충이들이 다 잡아먹는데!”

3필의 기마병과 5문의 소구경 화포지만, 그것만으로 전술적인 활용도가 대폭 늘어났다. 로벨과 펄프 대장은 머리를 맞대고 운영방법을 고민했다. 그렇게 열흘이 훌쩍 지나갔다.

호른 경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호른 경보다 먼저 온 전령이 있었다.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낯이 익은 기사였다. 사파이어 섬의 주인 주드 맥켈런 남작의 수행기사였다.

“귀족원 회의라고?”

“그렇소. 검은 숲 해방군을 조직할 생각이오.”

로벨은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자신 외에도 위기의식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기쁘고, 그 사람이 북해의 사자 주드 맥켈런 남작이라 다행이었다.

“잠깐만요! 우리 빼고 몇 명이나 참가하나요?”

주드 맥켈런 남작의 수행기사는 주인과 손님의 대화에 끼어든 건방진 몸종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로벨 휘하의 기사들은 어린 집사가 단순한 몸종이 아니란 것을 알지만, 외지에서 온 기사가 속사정을 알 리 없었다. 습관처럼 칼자루를 쥐었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꼬마가...”

“손 치워.”

로벨이 칼집으로 칼자루를 막았다. 주드 맥켈런 남작의 수행기사가 움찔했다.

로벨은 수행기사가 칼을 뽑지 못하게 칼끝으로 폼멜을 꾸욱- 눌렀다. 말은 쉽지만, 그 짧은 순간에 칼끝을 정확히 붙이는 것은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억지로 뽑으려고 하면 뽑을 수 있으나 기세와 기교에 눌려서 주춤했다.

“으음...”

수행기사는 슬그머니 손을 놓았다. 사실 칼을 뽑을 생각도 없었다. 아무리 불쾌해도 남의 성에서 남의 몸종을 살해할 수 없었다. 로벨도 흐룬팅을 치우고 어린 집사의 질문을 반복했다.

“몇 명이나 함께하오?”

“...숫자는 중요하지 않소. 뜻 있는 자가 모이면 충분하지. 내 주군이신 맥켈런 남작은 혼자라도 싸울 분이시오.”

“그건 알고 있소.”

로벨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조금 걸었다. 열두 개의 눈알이 로벨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로벨은 이미 결론을 내렸다. 다만 어린 집사와 리암 수사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고민하는 시늉을 했을 뿐이다.

“어디로 가면 되오?”

주드 맥켈런 남작의 수행기사 표정이 밝아졌다. 생각보다 동조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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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봄이 오기 전부터 벼르고 벼르던 각 영지의 군사를 소집했다. 울프 용병단까지 합쳐서 총 병력 420명. 하지만 전군을 동원할 수 없으니 3개 부대로 나누었다. 바위성과 가시성의 병사는 북쪽을 수비하기 위해 남겨두고, 늪지성의 병사는 헤르만 백작을 견제하기 위해 빼고 나니, 실제로 출진하는 것이 울프 용병단 112명과 구릉성의 징집병 55명과 아만다 성의 징집병 20명이었다.

“고작 187명... 영주님이랑 호른 경이랑 마녀랑 다 해도 200명이 안 되네요.”

“우리만 싸우는 게 아니니까.”

로벨은 열하루 만에 다시 컴포지트 아머를 입었다. 어린 집사가 백 플레이트를 잠그며 걱정 가득한 한숨을 불어넣었다. 로벨은 15살 청년의 뜨거운 숨결을 느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한두 번 싸우는 게 아니잖아.”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제발 부탁인데 앞에서 싸우지 말고 몸 사리세요.”

로벨은 아멧을 옆구리에 끼우고 성 밖으로 나갔다. 성문과 성문 사이에 로벨을 호위하는 기마 소대와 브릭 경과 마튼 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로드, 출진준비가 끝났습니다.”

로벨은 전투마 플레일에 사뿐히 올라 성 아래 집결한 로벨 로드릭 백작군에게 명령했다.

“고통받는 이웃을 구원하자.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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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숲 해방군.

주드 맥켈런 남작과 로벨 로드릭 백작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검은 숲의 영지민은 물론이고, 정의감과 도덕심이 평균 이상인 사람들은 모두 박수를 보냈다. 옛 신의 교단에서는 정의의 군대라고 칭송하며 저스티스 기사단 30명을 지원했다.

“로벨 로드릭 백작군 190명, 주드 맥켈런 남작군 120명, 와트 마르셀 자작군 100명, 에티엘 발루아 남작군 60명, 저스티스 기사단 30명...”

그러나 명성에 비해 실질적인 군사는 얼마 되지 않았다. 로벨도 남말할 처지가 아니지만 군사를 총동원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성 한두 개 정도는 탈환할 수 있겠지만, 독버섯처럼 퍼진 몬스터를 일거에 소탕하기는 부족하오.”

“보급 사정도 좋지 않소. 당장은 올해 수확한 보리와 귀리로 충당해도, 여름이 지나면 식량을 구하기가 마뜩치 않소.”

로벨은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에 모인 영주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토록 다양한 지방의 군대가 모인 것은 아이언베어 요새 전투 이후 처음이었다. 가장 낯이 익은 영주가 주드 맥켈런 남작인데, 그조차도 바다 건너서 왔으니 할 말 다했다.

‘볼탄 반도에서 참전한 기사는 나뿐이야?’

에릭 공작 및 여러 봉신에게 내심 실망했다.

로벨은 마음을 다잡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금이 간 석벽 사이로 잡초가 보였다.

이곳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는 포클랜드 북부의 오래된 성이었다. 정복왕 샘 포클 시대에는 국경요새였지만, 볼탄 반도가 부속된 이후에는 요새의 가치를 잃고 병참기지로 사용되었다. 지금처럼 포비아 왕국 각 지역의 군사가 모이기 딱 좋은 장소였다.

“우리를 소환한 것이 맥켈런 남작이니, 남작이 지휘하시오.”

전체적으로 동의하는 분위기지만 몇몇 영주가 로벨의 눈치를 보았다. 작위, 명성, 병력을 볼 때 로벨도 지휘관에 적합했다. 로벨이 대장 하겠다고 나서면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파벌이 나눠져 붕괴할 것이다. 로벨은 다행히, 로벨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반대하지 않았다.

“이의 없소.”

로벨이 지휘권을 인정하자 알게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주드 맥켈런 남작이 크고 화려한 판금갑옷들을 둘러보고 입술을 떼었다.

“우선 여러분의 용기와 의기에 경의를 표하오.”

사실 사심과 이해관계가 다 있지만, 지금만큼은 순수한 마음으로 치하를 받았다.

“우리는 까마귀 성으로 진격해서 검은 숲의 정당한 주인인 제임스 공작과 합류할 것이오.”

‘그래야 살인과 약탈 따위의 불미스러운 사고를 무마할 수 있을 테니까.’

로벨도 쉽게 이해했다. 주인이 있는 땅에 허락 없이 들어가면 침략자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다음 이 전쟁을 일으킨 원흉이자 악랄한 마술사의 앞잡이인 류트 프란시스 공자를 처단할 것이오.”

그때 익숙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이름이 나왔다. 로벨이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누구라고?”

주드 맥켈런 남작은 로벨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대의 주군인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친동생이자 국왕 폐하의 반역자 류트 프란시스 공자요. 그자가 이 전쟁을 일으킨 원흉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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