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낌새
159화. 낌새
로벨은 까마귀 성의 좁은 복도를 지나다가 총안에서 잠시 멈췄다.
머리 하나 내밀기 힘든 작은 틈새로 거대한 뱀이 기어간 듯한 계곡이 보이고, 그 중간에 가파른 통행로가 보였다. 적이 성 아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피를 흘려야 할 것이다.
까마귀 성 수비병과 제임스 공작의 병사를 합치면 400명이 넘었다. 성벽과 계곡을 방패 삼으면 4,000명도 능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로벨은 성문에서 티격태격하는 마녀 키르케와 허풍쟁이 제이콥에게 눈을 한번 흘기고 제임스 공작이 거처하는 객실로 향했다.
제임스 공작의 수행기사가 반갑게 인사한 후 주군에게 고했다.
“마로드, 로벨 로드릭 백작이 방문했습니다.”
“로벨 로드릭 백작?”
제임스 공작은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로벨이 객실로 들어오자 건틀렛이 제대로 잠겨 있는지 유심히 살폈다. 로벨은 웃음이 나오는 것을 꾹 참고 말했다.
“지난번과 같은 무례는 두 번 다시 없을 것이오. 거듭 사과드리오.”
“사과는 충분히 받았소. 결과적으로 본인과 본인의 사람들을 구해주었으니 화낼 수 없지.”
설령 화가 안 풀렸어도, 검은 숲의 태반을 잃은 제임스 공작이 볼탄 반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세력가인 로벨 로드릭을 적으로 돌릴 수 없었다. 쉽게 말해 아쉬운 쪽이 참는 법이었다.
로벨은 창가로 자리를 옮기며 말했다.
“오늘 떠날 것이오.”
“오늘 말이오?”
제임스 공작이 불안하게 되물었다. 로벨은 출발준비를 끝낸 울프 용병단을 확인하고 말했다.
“왕의 군대와 함께 오겠소.”
로벨은 국왕이 군대를 소집하리라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임스 공작의 생각은 달랐다.
“국왕 폐하를 신뢰하시오?”
로벨은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했다.
“내 주인이신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충성했소.”
애매한 대답이었다. 제임스 공작이 본심을 꺼냈다.
“백작은 그랜드 챔피언이니 국왕 폐하를 배알할 일이 많았을 터, 솔직히 말해주시오. 국왕 폐하를 믿을 수 있겠소?”
로벨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오.”
제임스 공작은 오해하게 두지 않았다.
“우리가 구원요청을 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오?”
검은 숲의 몬스터가 준동할 때, 블랙우드 시티가 위기에 처했을 때 당연히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그때는 겨울이라... 그리고 병사를 소집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잖소.”
“그날은 285일이었소.”
로벨에게 친숙한 날짜였다. 포클랜드 시티에서 그랜드 토너먼트를 공표한 날이었다. 제임스 공작은 걱정과 격정을 담아 말했다.
“국왕 폐하는 아무런 답신도 하지 않았소. 아무런 답신도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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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제임스 공작과 까마귀 성 영주 도너반 자작과 인사한 후 울프 용병단에 합류했다.
겁쟁이 데비가 우울한 얼굴로 수레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있고, 마녀 키르케가 마부석에 앉은 허풍쟁이 제이콥의 정수리를 물어뜯고, 호른 경의 전투마가 로벨의 전투마에게 치근덕거렸다. 지극히 평범한 울프 용병단의 일상모습이었다.
“주군, 출발준비가 끝났습니다.”
로벨이 등장하자 사람이나 짐승이나 점잖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로벨은 새침한 마녀의 고깔모자를 한번 쓰다듬고 전투마 플레일 안장에 올랐다.
“볼탄 반도로, 늑대성으로 돌아가자.”
볼탄 반도 북부대로는 여전히 암울했다.
눈 녹은 자리에 숨겨진 시체가 드러나고, 겨울잠에서 깨어난 짐승들이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물어갔다. 늑대 주둥이에서 손가락이 대롱거리고, 까마귀 부리에서 눈알이 번들거렸다.
로벨 일행은 고향을 향해 힘겹게 행군했다. 괴물과 맹수는 없지만 땅이 녹아서 진창처럼 질척거렸다. 수레바퀴가 웅덩이에 빠질 때마다 구시렁거리며 밀어냈다.
코골이 바디가 흙탕물에 젖은 망토를 쥐어짜며 불평했다.
“고생만 하고 소득이 없네.”
허풍쟁이 제이콥이 반박했다.
“왜 소득이 없어? 제임스 공작을 구하고, 오크의 규모를 파악했잖아?”
“그리고 대포도 생겼고요.”
마녀 키르케가 핸드 캐논을 위로 올리자 울프 용병단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불! 불조심하시오!”
“지팡이 빼앗아!”
“에잇! 장전도 안 됐어요!”
마녀를 살아 숨 쉬는 불씨로 취급하는 것도 검은 숲 원정의 소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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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예정보다 사흘 늦게 늑대성에 돌아왔다. 로벨은 고향의 냄새를 깊이 마셨다. 그리고 서둘러 내뱉었다.
“영주님! 영주님!”
“컹! 컹컹!”
어린 집사와 아야와 이야카가 열렬히 환영해주었다. 로벨은 온몸을 던지는 아야와 이야카를 받아내기 위해 힘을 줘야 했다.
“여어, 수고했다.”
“애꾸눈은 찾았냐? 못 찾았다고?”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도 무사히 귀환한 울프 용병단을 격려했다. 소란, 소음, 가벼운 포옹과 걸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호른 경은 소외감을 느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에릭 공작에게서 연락이 있었느냐?”
“음... 아니요.”
“아직도 없었다고?”
로벨도 살짝 놀랐다. 군대란 것이 깃발 들고 ‘전쟁이다! 모여라!’ 하면 모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최소 30일 전에는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더욱이 원정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리암 수사가 세월의 급류를 타고 온 얼굴로 말했다.
“봉신들에게 연락해두었어요. 영주님이 명령하면 300명을 소집할 수 있습니다.”
마녀 키르케가 떡갈나무 성의 오크를 떠올리고 소리쳤다.
“고작 300명이요? 그걸로 검은 숲 사람들을 어떻게 구해요!”
“구할 수도 없고, 구해도 안 되고.”
어린 집사가 중얼거렸다. 마녀가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았다.
“검은 숲의 주민들은 죽어야 한다고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우리만 희생할 수 없다는 뜻이죠. 울프 용병단과 각 영지의 병사를 보내고 나면 여긴 누가 지켜요? 요즘 잠잠해서 잊고 지내는데, 강철성과 호수성이 우리 친구는 아니에요.”
리암 수사, 펄프 대장, 심지어 외팔이마저 고개를 끄덕이자 마녀는 입술을 삐죽일 뿐 반박하지 못했다.
로벨은 먼 길을 다녀와서 지친 전투마를 달래며 중얼거렸다.
“에릭 공작을 만나야겠어.”
“네엣? 또 간다고요?”
어린 집사가 질색하며 만류했다.
“영주가 성을 비우고 자꾸 돌아다니면 직무유기에요!”
“하지만...”
로벨은 목을 조금 움츠렸다. 어린 집사가 기세를 올려서 주인을 혼냈다.
“지금 밀린 일도 산더미에요! 봄농사도 한창이고, 공사도 정신없고, 행상인도 매일 찾아오고, 새 촌장도 일을 못하는데, 영주님까지 밖으로 나돌아다니면 어떡해요!”
“그야 집사가...”
“크아아앙!”
로벨 등은 어린 집사를 진정시키느라 진땀 빼야했다. 결국 호른 경이 대안을 내놓았다.
“제가 장미성에 다녀오겠습니다.”
“경에게도 가솔이 있는데...”
“제 아랫사람은 야인이나 다름없어 걱정 없습니다.”
로벨은 새삼 자작나무 숲에 가보고 싶어졌다. 주인이 없어도 아무렇지 않은 하인이라니, 정말 이상하고 부러웠다.
호른 경은 정력만큼이나 기운이 넘치는 전투마에 올랐다. 로벨이 한 번 더 권유했다.
“며칠 쉬었다 가시오.”
“몸이 식기 전에 움직이는 편이 좋습니다. 열흘 안에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호른 경은 흉갑을 두드리고 훌쩍 떠났다. 아무리 말을 타고 오간다 해도 피곤할 텐데, 로벨을 향한 헌신이 대단했다. 어린 집사가 ‘쩝!’ 소리를 내고 칭찬했다.
“그래도 괜찮은 구석이 있네요.”
“응. 멋진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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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컴포지트 아머를 벗고 따뜻한 물로 목욕했다. 실로 오랜만에 목욕이라 행복했다. 여행 중에는 갑옷을 벗지 않아 목 아래로 씻은 적이 없었다. 겨울의 끝자락이라 망정이지, 한여름이었으면 냄새가 장난 아니었을 것이다.
“전쟁 안 했으면 좋겠어요.”
어린 집사가 침실 밖에서 중얼거렸다. 로벨은 욕조 깊숙한 곳에 몸을 숨겼다.
어린 집사는 무방비한 로벨을 지키기 위해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그랬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부끄러웠다. 오랜만이라 낯선 듯했다.
“나도 그래.”
“우리 땅을 뺏으려는 적은 당연히 물리쳐야지만, 우리 땅도 아닌데 싸울 필요가 있을까요?”
“응. 필요해.”
로벨은 물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큰 수건으로 몸을 감싸고 작은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검은 숲 다음은 포클랜드와 볼탄 반도 남부야. 결국은 싸우게 될 거야.”
“자기가 살 땅을 차지하면 멈출지도 모르잖아요.”
“그렇지 않을 거야.”
“왜요?”
“사악한 마법사잖아.”
어린 집사는 킥!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사악한 마법사들은 무슨 생각일까요?”
“글쎄, 우리한테 이롭지 않은 것은 분명해.”
로벨은 몸을 옷장에서 새 옷을 꺼냈다. 두툼한 슈미즈를 뒤집어쓰고 폭넓은 우플랑드를 걸쳤다. 몸매는 숨길 수 있지만, 목욕 후 발그레진 고운 얼굴은 숨기지 못했다. 그래서 로벨이 방문을 열었을 때 어린 집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버, 벌써 끝났어요?”
“응. 바쁘잖아.”
로벨은 어린 집사의 도움을 받아 옷매를 정리하고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을 한 덩이로 모아 묶었다.
“머리 좀 잘라야겠어요.”
“작년에 잘랐는데...”
“그럼 올해도 잘라야죠.”
로벨은 아쉬운 듯 기다란 머리카락을 쓸어 만졌다.
“우선 로드릭 상회 상인을 만나야 해요. 헨리 피터 상단주, 아니, 상회장이 잘 처리하고 있지만, 그래도 눈도장은 찍어줘야 해요. 상인은 교활하고 얍삽해서 영주가 무관심하다 생각하는 순간 뒷주머니를 만들어요.”
“응... 그리고?”
“새 촌장을 만나고 춘경지를 시찰해야 해요.”
“사냥꾼 찰드?”
“장남 찰드가 사냥꾼 찰드고, 늙은 찰드가 촌장 찰드에요. 나이 먹어서 나다니기도 힘든데 잘 됐죠.”
로벨은 외출준비를 마치고 마구간으로 향했다. 플레일, 포니, 울프테일, 퍼니스 등이 주인 혹은 주인의 주인을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어린 집사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이놈들이 먹어치우는 콩과 보리가 어마어마해요.”
“그래도 줘야 해. 여물을 먹이면 힘을 못 써.”
전투마가 농마나 짐말보다 비싼 이유에는 먹이값이 한몫했다. 순발력이 있는 근육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곡물을 먹여야 했다.
로벨은 플레일에 손수 안장을 얹었다. 플레일은 거만한 얼굴로 다른 전투마를 내려다보았다. ‘난 주인이랑 매일 산책하는 말이야! 까불지 마!’ 아닌 게 아니라 한 성깔 하는 윈필드 산 전투마들이 기가 죽어서 눈을 피했다.
로벨은 플레일을 마구간 밖으로 꺼내서 사뿐히 올라탔다. 플레일은 바깥공기를 깊이 들이마신 후 푸르릉- 웃었다. 가벼운 안장에 가벼운 주인이라 발걸음도 가벼웠다.
헨리 피터 상회장은 로벨과 어린 집사가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철저히 준비했다.
건물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고 델 포니산 와인과 동양차를 각각 준비했다. 상회 소속 상인들은 정치, 군사, 경제에서 급성장한 로드릭 가문의 주인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선물을 챙겨왔다.
로벨은 추운 날씨에도 활짝 열어놓은 정문을 보고 어이가 없어 한마디 했다.
“왜들 저래?”
“영주님을 환영하는 거죠.”
“내 땅이고 내 사람이야. 자기 집에서 환영인사 받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로드릭 시장 상인과 행상인이 열댓 명 모여서 로벨 로드릭 만세를 열창했다. 로벨이 추우니까 그만하라고 말렸지만 기어이 선물을, 정확히 말하면 뇌물을 넣어주었다. 어린 집사의 입꼬리가 귓가에 걸렸다. 분명 이걸 노리고 오자고 했을 것이다.
한 차례 소동 후 로드릭 상회의 핵심적인 인사만 남았다. 헨리 피터 상회장과 가장 손이 큰 상단주였다.
“이 누추한 곳에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
“시간이 나서 인사차 방문했어. 검은 숲으로 출정하면 여름까지 못 올 테니까.”
“검은 숲... 이요?”
헨리 상회장과 상단주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로벨이 의아해서 먼저 물었다.
“왜 그래?”
헨리 상회장이 괜히 목소리를 낮춰서 보고했다.
“포클랜드에서 온 행상인 말이, 검은 숲 원정이 없을 거라고 합니다.”
“뭐?”
“전쟁에 가장 민감한 것이 상인과 용병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봐도 포클랜드 지방에서 전쟁을 준비하는 낌새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