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탈출
158화. 탈출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잘 닦아서 칼집에 꽂아넣고 호른 경에게 맡긴 아멧을 받아 옆구리에 끼웠다.
“이런 상황이 아니면 사슴을 잡아서 질 좋은 와인과 대접할 텐데, 미안하오.”
제임스 공작이 머쓱하게 사과했다. 로벨은 자세를 고치고 사과를 받았다.
“마음 쓰지 마시오. 좋은 날이 오면 축배로 대신합시다.”
로벨이 도리어 위로하자 제임스 공작은 활짝 웃었다.
“그렇소! 전쟁이 끝나면 대대적으로 환영 파티를 열겠소! 하하핫! 기대해도 좋소!”
제임스 공작은 로벨에게 격한 호의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충성을 바친 국왕도, 충성을 맹세한 봉신도 오지 않을 때, 머나먼 볼탄 반도에서 찾아온 유일한 지원군이었다.
‘기사 1명과 용병 10명뿐이지만...’
로벨은 아론다이트 칼자루에 손을 얹고 분위기를 바꿨다.
“이곳 전황을 알고 싶소.”
제임스 공작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블랙우드 시티가 저 추악한 괴물놈들 손에 떨어진 이후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오. 서른 명의 기사가 죽고 거금으로 고용한 2개 용병단이 괴멸했소.”
“오크의 숫자는 어찌 되오.”
“부끄러운 일이나 본인도 알지 못하오. 어느 날은 100여 마리가 공격하고, 어느 날은 1,000여 마리가 공격하니 도무지 종잡을 수 없소.”
호른 경이 의아해서 물었다.
“정찰병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저 괴물은 거점을 가진 것이 아니오. 정찰이 쉽지 않소. 그저 추측하건데 검은 숲에서 일정 숫자가 모이면 동서남북 없이 무작정 이동하는 것 같소.”
로벨은 그 추측에 한 표 던졌다. 오크에게 전략이 있다면 볼탄 반도를 침략한 오크와 까마귀 성을 공격한 오크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추악한 것들의 생각을 어찌 짐작할 수 있겠소.”
로벨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대책이 있소?”
“봄이 올 때까지 버티고 버틸 뿐이오.”
제임스 공작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전설적인 그랜드 챔피언이 겁쟁이라 생각할까봐 세부적인 전술을 덧붙였다.
로벨은 탁상공론에 적당히 응하다가 본론을 꺼냈다.
“혹시 악마추종자라고 들어보셨소?”
“악마추종자? 옛 신의 사제와 어린아이가 좋아하는 사악한 마법사 아니오?”
제임스 공작의 반문은 로벨을 난감하게 했다. 악마추종자와 접점이 있기는커녕, 존재 자체를 모르는 듯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로벨은 조금 버벅이며 악마추종자에 관해 설명했다. 로벨의 열정에 비해 제임스 공작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백작의 말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당혹감을 감출 수 없군. 한 사람이 저 많은 몬스터를 조종한단 말이오?”
“한 사람이 아니오. 어쩌면 ‘사람’도 아닐 수 있소.”
제임스 공작은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과 달리 의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아랫사람을 통해 악마 비슷한 자가 있는지 찾아보겠소. 그동안 이곳에서 편히 쉬고 계시오.”
로벨은 결코 악마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정정해주었으나 제임스 공작은 건성으로 흘려들었다. 사실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직접 겪기 전에는 동화 속 이야기였다. 로벨은 의미 없는 당부를 몇 번하고 울프 용병단 숙영지로 향했다.
호른 경이 제임스 공작의 방을 힐끔 보고 속삭였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로벨도 대책이 없었다. 검은 숲의 제임스 공작이라면 악마추종자의 손이 닿았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어쩌면 전(前) 제임스 공작을 만나야 하는데 늦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조금 일렀거나.’
로벨은 지난 수년간 싸워온 ‘적’을 믿었다. 그들은 분명 정통성을 가진 제임스 공작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기다려야지.”
로벨은 힘없이 대답했다.
로벨이라고 뾰족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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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갈나무 성의 28일 째 전투가 시작되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가장 치열한 남문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울프 용병단은 무섭게 잘 싸웠다. 새까맣게 몰려오는 오크 무리를 향해 2인 1조로 연속사격을 가하고, 기어이 사다리에 달라붙자 워 해머와 배틀 액스로 무자비하게 내려쳤다. 전쟁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떡갈나무 성 병사들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그러나 울프 용병단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우리 성도 아닌데 우리가 왜 싸워야 하는 거야?”
“어어? 정신 나간 소리하네. 임마! 우리 용병이잖아!”
용병은 지는 싸움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졌을 때 죽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 용병이 욕을 먹는 이유 중 하나인데, 용병은 항복하거나 포로가 되면 쉽게 전향했다. 도리어 이쪽이 계약조건이 좋다고 좋아할 때도 있었다. 이것은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전향이 아니라 몸값을 지불하고 자유가 되는 차이만 있었다.
하지만 몬스터와 싸움에서는 불가능했다. 지금처럼 승산이 안 보이는 전쟁에서는 발을 빼야 마땅했다. 그런데 로벨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버럭! 화를 내었다.
“우리 기사 나리를 못 믿어? 기사 나리는 무적이야! 그냥 따르면 된다고!”
허풍쟁이가 성질을 내자 울프 용병단은 기가 죽었다. 겁쟁이 데비가 우물쭈물 말했다.
“하긴, 기사 나리도 생각이 있겠지.”
기사 나리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이 로벨의 객실을 찾아갔다. 로벨은 마녀 키르케와 늦은 저녁식사 중이었다. 제임스 공작이 특별히 제공한 돼지고기를 썰며 호른 경을 맞이했다.
“호른 경, 식사하셨소?”
호른 경은 마녀 키르케를 힐끔 보고 말했다.
“긴히 상의드릴 것이 있습니다.”
로벨은 고기와 니이프를 조용히 내렸다. 마녀 키르케가 가장 큰 고깃덩이를 냉큼 집어갔지만 아쉬워하지 않았다. 호른 경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철수하자는 말이오?”
“예.”
로벨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로벨이 갈등하자 호른 경이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주군께서 말씀하셨듯 눈이 녹으면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될 겁니다. 이곳에서 어설프게 함께 싸우는 것보다 영지로 돌아가서 제대로 된 출진준비를 갖추는 것이 현명합니다.”
로벨은 일부 동의했다. 하지만 동조하지 않았다.
“악마추종자를 처치하지 않으면 이 전쟁은 끝나지 않소.”
“주군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적의 규모는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전쟁은 장기화 될 것입니다. 사악한 마법사가 장기전을 생각하고 있다면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겁니다.”
로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소.”
호른 경은 영리하고 수완이 좋은 사내였다.
“제임스 공작 때문입니까?”
“그리고 공작의 병사 때문이오.”
지원군이라 믿은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도로 빠져나가면 크게 실망할 것이다. 군대는 사기로 싸우는 만큼 로벨 일행이 오기 전보다 큰 타격을 입을 게 당연했다.
“제가 남겠습니다.”
“경이?”
“주군은 더 많은 지원군을 이끌고 오기 위해 잠시 떠난 겁니다. 실제로도 그렇지 않습니까?”
로벨의 수행기사인 호른 경이 남으면 로벨이 도망갔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로벨은 고민하지 않고 반대했다.
“그건 안 되오.”
“이게 최선입니다.”
“경이 위태로운 것이 어찌 최선이란 말이오.”
“주, 주군?”
호른 경은 울컥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마녀 키르케가 양쪽 볼때기에 고기를 채우고 번갈아 보지만 않으면 꽤 감동적인 장면이었을 것이다.
호른 경은 부풀어 오른 가슴을 진정시키고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정말, 정말 감사한 말씀이나,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아니오. 한 가지 방법이 더 있소.”
로벨은 호른 경의 제안에서 결론을 얻었다. 한 명을 남겨두고 떠날 바에 모두 떠나는 것이 나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두’였다.
“제임스 공작군과 함께 탈출하는 것이오.”
호른 경은 깜짝 놀라 따졌다.
“성 수비대만 200명입니다. 민간인까지 합치면 500명이 넘습니다. 저 많은 사람을 어찌 데리고 탈출할 수 있습니까?”
로벨은 마녀 키르케를 힐끔 보고 말했다.
“바람. 그리고 불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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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호른 경과 마녀 키르케와 검은 숲 출신 털보와 함께 장시간 토론한 끝에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남은 문제는 성 주인의 허락이었다.
“내 성을 버리란 말이오?”
제임스 공작이 불쾌하게 반응했다. 쉽게 허락하지 않을 줄 알았다.
“까마귀 성에서 지원군을 기다리면 승산이 있소. 그곳은 포클랜드와 가까워 한결 수월하게 지킬 수 있소.”
“이곳은 내 땅, 내 성이오. 경이라면 영지를 팽개치고 도망갈 수 있겠소?”
“버리는 것이 아니오. 잠시 비우는 것이지. 100일도 지나지 않아 되찾게 될 것이오.”
“이 작은 성을 지키기 위해 더 큰 땅을 잃어서 안 되오.”
로벨과 호른 경이 적극적으로 설득하자 제임스 공작의 기사들이 하나둘 넘어왔다.
“주군, 로벨 경의 말이 일리 있습니다.”
“주군께서는 검은 숲의 지배자입니다. 이 작은 성에 연연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임스 공작은 휘하 기사들을 보며 이를 갈았다.
“내 형님이 죽기를 각오하고 전장에 나설 때도 그리 말리지 그랬소.”
기사들은 말을 잃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가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였다.
“그때와 사정이 다릅니다. 블랙우드 시티에는 8천 명의 시민이 있었지만, 이곳은 고작해야...”
“시끄럽소! 다 떠들었으면 내일 전투를 준비하시오!”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플랜B에 들어갔다.
“제임스 공작.”
“아직도 할 말이 남았소?”
로벨은 할 말이 없었다. 대신 할 짓이 있었다. 로벨은 반쯤 풀어놓은 건틀렛을 빼서 제임스 공작의 턱을 후려쳤다. 빠각-!
‘퍽!’ 이나 ‘딱!’ 이 아니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였다. 쇳덩이 장갑으로 후려쳤으니 사실상 해머로 때린 수준이었다. 제임스 공작은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기절했다. 제임스 공작의 수행기사들이 깜짝 놀라 병장기를 꺼냈다.
“이게 무슨 짓이오!”
로벨은 건틀렛을 고쳐 끼우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결투신청이오.”
“...뭐요?”
호른 경이 한숨을 푹 쉬고 제임스 공작을 살폈다. 눈알이 기이한 곳으로 돌아가 있지만 호흡은 멀쩡했다.
“주군, 결투신청이 과했습니다. 다음부터는 가죽장갑을 사용하시지요.”
“유념하겠소.”
저잣거리 삼류 배우의 대본 연습도 이보다 활기찰 것이다. 제임스 가문 기사들은 입을 버금거렸다. 너무 황당하니까 소리가 안 나왔다.
로벨은 기절한 제임스 공작을 발 아래 두고 제임스 공작의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었으니, 지금부터 동맹군 최고지휘관인 본인이 통솔하겠소. 불만이 있는 자는 성을 떠나거나 결투를 신청하시오.”
둘 다 똑같은 의미였다.
‘오크에게 죽거나, 그랜드 챔피언에게 죽거나.’
로벨은 10명 남짓한 기사들과 차례로 눈을 마주친 후 다시 말했다.
“좋소. 불만이 없는 듯하니 즉시 움직이시오. 무기와 식량 외에는 모두 버리고, 말과 마차에는 부상자를 태우시오. 시간이 없소. 서두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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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태양이 가장 높이 뜬 제6시에 떡갈나무 성 측문을 통해 몰래 빠져나왔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오크에게는 한낮이 한밤중보다 경계가 소홀한 시간이었다.
“쟤네가 정찰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괜히 오크입니까요?”
겁쟁이 데비가 별명답지 않게 낄낄거렀다.
울프 용병단은 평소 소지하고 다니는 무기 이외에도 기름주머니와 짚단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검은 숲의 털보가 숨을 작게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작전이야... 말도 안 된다고...”
“그럼 우리 전문이잖아?”
허풍쟁이가 허풍을 치자 고참 용병들이 웃었다. 성 안에서 언제 올지 모를 지원군을 기다리는 것보다 이 작전이 좋았다. 로벨은 흐룬팅을 뽑아들고 속삭였다.
“조용해. 가자.”
로벨 일행은 떡갈나무 숲 북쪽 경계면에 불을 질렀다. 눈이 내려앉은 숲은 쉽게 타지 않았으나, 기름과 짚단을 쏟아붓자 기어이 화재로 번지기 시작했다. 큰 불은 아니지만 바람이 좋았다. 북풍을 타고 연기가 떡갈나무 성으로 흘러갔다.
“꾸루룩! 꾸루루룩!”
“카아아악!”
숲 속에 숨어있는 오크와 고블린은 소란을 피우며 숲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나 반대로 숲 속으로 들어가는 무리도 있었다.
떡갈나무 성의 병사와 주민이 남문을 열고 밀려나왔다. 오크가 상황을 파악하고 몰려오기 전에 숲에 숨어야 했다.
제임스 공작을 들쳐업은 기사가 하늘을 가린 새하얀 연기를 보며 중얼거렸다.
“저 피해를 복구하려면 몇 년이 걸릴지...”
“저 정도 불길로 다 타지는 않을 거요.”
숲에서 자란 호른 경이 위로했다. 푸른 하늘과 붉은 불길과 검은 성과 하얀 숲이 대비되었다.
“자, 서둘러 갑시다. 오크가 눈치를 채고 몰려올 겁니다.”
“이곳 지리는 내가 잘 알고 있소. 여우강 나루터로 안내하겠소.”
이날 제임스 공작은 떡갈나무 성을 잃었다. 하지만 영지민을 구한 단호한 결단에 수많은 기사가 찬사를 보냈다. 이후 알버트 제임스 공작의 이름이 유라피아 대륙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 기사님이 한 거라고요! 저 공작이 아니야!”
마녀 키르케가 억울해했지만, 그건 나중에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