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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57화 (157/605)

157화. 떡갈나무 성

157화. 떡갈나무 성

검은 숲의 지명은 근방에서 가장 흔한 나무 이름으로 지어졌다.

떡갈나무 성은 가장 수령이 짧은 떡갈나무도 세 자릿수 겨울을 보냈을 크고 깊은 숲을 등지고 있었다. 성의 남쪽은 울창한 숲이, 북쪽은 블랙우드 시티로 통하는 고갯길이 있었다.

제임스 공작은 북풍에 눈발을 휘날리는 숲을 바라보면서 질문했다.

“오늘이 며칠째지?”

“27일입니다.”

알버트 제임스 공작은 한숨을 쉬고 지난 27일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은 질문을 했다.

“지원군은?”

제임스 공작의 수행기사는 ‘영지가 죄다 박살났는데 지원군이 어디 있겠냐? 우리가 지원 가야 할 판이다!’ 외치는 대신 체념에 가깝게 말했다.

“아직입니다.”

알버트 제임스 공작은 블랙우드 시티에서 장엄하게 전사한 맏형이자 전임자인 아놀드 제임스 공작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슬퍼했지만, 나중에는 원망했고, 지금은 분노했다.

‘이 머저리 자식! 병사를 절반만 남겼어도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것을!’

그래놓고 본인은 명예롭게 산화했다. 본인은 폼 잡고 죽어버리며 끝이지만, 그 뒤처리를 해야 하는 사람은 무슨 잘못인가. 더더욱 열 받는 것은 제임스 가문의 기사들이 아직도 무모하고 무책임한 아놀드 제임스를 추앙한다는 것이다.

제임스 공작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숲을 노려봐야 소용없었다. 숲이 아니라 성벽 아래를 살펴야 했다.

해가 지기 시작한 이 시각이 가장 위험했다.

“오크가 움직입니다.”

“어김이 없군.”

인간의 군대를 흉내 낸 엉성한 방책 뒤에서 인간의 무기를 모방한 조잡한 창과 방패를 가지고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하나하나는 볼품없지만 그 수가 1천이 넘으니 공포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제임스 공작의 병사들이 마른 침을 삼키고 롱보우와 크로스보우를 재었다. 떡갈나무 성의 27번째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제임스 공작은 지난 26번의 전투를 돌이켜 보았다. 첫 전투는 전투라 부르기도 무안했다. 오크 100여 마리가 우르르 몰려와 성문에 도끼질할 뿐이라 손쉽게 격퇴했다. 그러다 7번째 공격에서 사다리를 가져왔다.

처음 가져온 사다리는 통나무에 홈을 파서 만든 원시적인 형태였다. 성벽에 세우는 것도 쉽지 않아 일제사격 한 번에 무력화되었다. 그러나 오크의 학습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교한 사다리와 갈고리를 만들었다. 지난 전투 때는 기다란 장대에 나무못을 지그재그로 박은 사다리를 사용했다. 눈 깜짝할 사이 성벽을 기어 올라와 하마터면 남문을 내줄 뻔했다.

전쟁장비뿐만 아니라 전술도 일취월장했다. 돌격대가 성벽을 오르는 동안 숏보우와 슬링으로 엄호하고, 더 나아가 시간차로 공격하거나 양동작전을 구사하기도 했다.

‘누군가 조종하는 것 같단 말이야.’

제임스 공작은 진지하게 중얼거리고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그리고 어이없어하는 수행기사에게 명령했다.

“싸울 수 있을 때까지 싸워야지. 전투준비.”

“고, 공작님!”

“가망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허나 성을 내주고 도망갈 수...”

“그게 아닙니다! 지원군! 지원군입니다!”

제임스 공작은 입을 꾹 다물고 수행기사의 손가락을 쫓아갔다. 떡갈나무 숲 동쪽이었다. 오래전에 오크와 고블린 손에 점령된 곳이라 경계를 강화한 지역이었다. 그곳이 흔들리고 있었다.

히이이잉-!

투투투투...!

저녁 그림자가 늘어진 숲 속에서 가냘프게 말울음이 흘러나왔다. 제임스 공작 이하 떡갈나무 숲 사람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크는 가축을 식용 이외에 쓰지 않았다. 말을 몰고 오는 무리라면 인간의 군대가 분명했다. 그러나 지원군의 정체가 드러나자 기쁨이 당황으로 바뀌었다.

숲 속에서 2필의 우람한 전투마와 10여 명의 중무장 병사와 너덜너덜한 수레가 등장했다. 기대와 달리 소수지만, 그래도 인간의 군대가 분명하니 환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성으로 몰려오는 오크 1천 마리를 향해 일직선으로 돌격한 것은 찬성할 수 없었다.

“뭐야? 미친놈들이야?”

“이봐! 그쪽이 아니야! 오크 소굴이야!”

“돌아가! 돌아가!”

떡갈나무 성 수비대가 안타까운 마음에 고함쳤다. 아무리 용감한 기사라도, 아무리 우수한 용병이라도 1천의 군세를 뚫기란 요원했다. 구 시대의 무기라면 말이다.

인간과 오크를 모두 침묵시키는 우렁찬 소리가 있었다.

콰과강-!

옛 신이 노한 듯한 천둥소리. 혹은 떡갈나무 성을 구원하는 늑대의 울음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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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 중 가장 볼만한 사람은 마녀 키르케였다. 그 모습을 형용할 단어를 찾기가 쉽지 않은데, 대강 다음과 같았다.

“엄마야!”

쾅!

“엄므아야!”

쾅!

마녀 키르케는 울상이 되어서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때마다 수레 뒤에 매달아 놓은 핸드 캐논이 불을 토했다.

천둥이 칠 때마다 소리에 민감한 말이 화를 냈고, 그 분노를 네 다리를 집중했다. 주인이 인도하는 방향으로 미친 듯이 질주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빨라졌다.

로벨이 해비 랜스를 옆구리에 끼우고 길을 뚫었다.

해비 랜스는 대(對)보병용으로 쓰기에 크고 무겁지만, 그만큼 튼튼해서 잘만 다루면 두 번, 세 번 쓸 수 있었다. 실제로 첫 번째 오크를 꿰뚫은 후에도 부러지지 않았다. 쿵! 해비 랜스의 뾰족한 꼬챙이가 오크의 가슴을 꿰뚫었다.

로벨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랜스의 균형을 잡았다. 오크 한 마리가 원뿔 중간에 꼬챙이처럼 꽂혀서 두 다리로 도랑을 파냈다.

오크의 체중은 못해도 140파운드였다. 사람의 힘으로 창에 꽂고 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랜스 레스트로 창대를 받치고, 전투마의 질주속도를 빌어서 간신히 가능했다. 그나마도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우와아아아!”

“저게 대체 뭐야!”

하지만 그 광경을 지켜본 인간과 오크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오크를 창에 꿰고 전장을 누비는 기사의 모습은 300년 전 영웅의 시대를 떠올리게 했다. 소설에서, 옛이야기에서 막 뛰쳐나온 진짜 기사의 모습이었다.

로벨은 두 번째 오크를 추가로 꿰뚫은 후 힘에 부쳐서 랜스를 버렸다. 그러나 앞서 보여준 장면이 워낙 충격적이라 인간은 여전히 환호했고, 오크는 여전히 도주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뽑아 높이 치켜들었다. 성문을 열라는 신호인데, 무슨 오해를 했는지 함성만 커졌다.

“헥헥! 나 죽는다!”

허풍쟁이 외 울프 용병단은 로벨의 뒤를 쫓느라 죽을 맛이었다. 호른 경이 뭐라고 소리쳤는데, 마녀가 네 번째 핸드 캐논을 점화해서 잘 들리지 않았다. 콰광-!

로벨과 울프 용병단을 뒤쫓던 오크가 깨진 돌 파편에 찢겨졌다. 직접 피해를 본 것은 한 마리지만, 공포는 수십, 수백 마리에게 전파되었다. 호른 경이 다시 소리쳤다.

“성문까지 150야드! 아껴라! 쏘지 마!”

허풍쟁이 제이콥은 측면에서 글레이브를 앞세우고 뛰어오는 오크를 향해 크로스보우를 당기고 수레 뒤로 집어 던졌다. 마부를 자처한 덕분에 비교적 여유로웠다.

“자작나무 기사 나리 말씀 들었지? 쏘지 마.”

“닥쳐!”

“야! 너도 내려와!”

발바닥이 찢어져라 뛰는 전우들은 악을 썼다.

오크 중에서 유난히 용감한, 혹은 어버버하다가 자리를 피하지 못한 놈들이 수레를 가로막았고, 울프 용병단은 필사적으로 찌르고, 베고, 때리고, 밀쳐냈다. 그러면서 잠시도 멈출 수 없었다. 발을 멈추는 순간 포위당할 것이다.

용병 몇몇이 침을 삼키지 못해 거품을 내며 질질 흘릴 무렵, 간신히 떡갈나무 성문 앞에 도착했다. 로벨은 말머리를 돌리고 성 밖 오크를 향해 칼날을 겨누었다.

“성문 열어! 당장!”

전쟁소설에서는 “성문을 열라!” 외치면 곧장 도르래를 감아서 “드르륵-!” 하고 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바리게이트를 치우고, 버팀목을 빼내고, 빗장을 내리려면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래서 미리 준비하라고 신호했는데 별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다.

“코오록! 코루루! 쿠룩!”

오크가 희한한 말로 소리쳤다. 추리하자면, ‘저 빌어먹을 놈들이 성에 못 들어가게 막아!’ 정도 같았다. 오크 수십 마리가 길고 짧은 글레이브를 꼬나들고 달려왔다.

“Fire!”

“에잇!”

마녀는 두 눈 질끈 감고 마지막 핸드 캐논에 불을 붙였다. 콰광! 제일 용감한 오크들이 제일 먼저 죽었다.

“크로스보우!”

크로스보우의 장점은 재장전이 빠르다는 것이다. 기계장치가 굳이 필요 없어서 등자를 밟고 시위를 당겼다. 오크가 접근하기 전에 10개의 크로스보우가 장전되었다.

“사격 준비! 사격 준비!”

4명은 한쪽 무릎 꿇고, 5명은 꼿꼿이 서서 쿼럴이 얹어진 크로스보우를 앞으로 내밀었다.

“발사!”

파파팡-!

성문으로 접어드는 좁은 길목이 쿼럴로 뒤덮였다. 포격에 움츠린 오크들은 쇠촉에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성벽 위에서 화살을 쏟아냈다. 오크들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고쳐 잡고 바이저 아래로 송곳니를 드러냈다.

“호른 경!”

“예스, 마로드!”

로벨과 호른 경이 도망가는 오크 무리를 강타했다. 소음, 폭음, 피 냄새, 화약 냄새로 흥분한 플레일은 오크를 몸통으로 치고 앞발로 짓밟았다. 로벨은 그랜드 챔피언 타이틀이 부끄럽지 않게 안장 위에서 상체를 비틀며 칼날을 뿌렸다. 오크 머리가 하늘로 치솟고 핏물이 성 앞에 가로세로로 수놓아졌다. 볼탄 반도에서, 아니, 포비아 왕국 전체에서 내로라하는 기사들이니 활약을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울프 용병단이 2차 일제 사격을 가할 때, 마침내 떡갈나무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허풍쟁이와 마녀가 짐말을 때리며 소리쳤다.

“기사 나리! 기사 나리!”

“이제 돌아오세요!”

로벨과 호른 경은 서로를 한번 보고 동시에 말고삐를 잡아챘다. 철저하게 훈련된 전투마들이라 흥분한 가운데도 반사적으로 명령을 따랐다.

“히얏!”

“이럇!”

로벨과 호른 경이 자리를 떠나자 오크들이 병장기를 휘두르며 야유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칠갑한 기사들을 쫓아가지는 못했다. 성벽 위에서 화살을 퍼붓자 알량한 야유마저 접고 줄행랑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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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떡갈나무 성 안마당까지 뛰어와 플레일을 정지시켰다. 주위에 창을 꼬나든 병사들이 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경계심보다 경외심이 더 커서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제 됐어. 진정해. 수고했어.”

로벨은 콧김을 마구 내뿜는 플레일을 달랬다. 그사이 휘황찬란한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기사가 수행원을 대동하고 다가왔다. 수행원 중 기사 종자로 보이는 16, 7살 청년이 뒷짐을 지고 우렁차게 말했다.

“이분은 검은 숲의 공작이자 블랙우드 시티의 주인이며 떡갈나무 성의 지배자인 알버트 제임스 공작님이시오. 투구를 벗고 신분을 밝히시오.”

로벨은 아멧을 벗어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좌우로 털었다. 숨죽인 비명이 흘러나왔다.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 잡티 없이 하얀 피부, 붉게 상기된 두 뺨과 가느다란 입술이 남자도 반할 만큼 아름다웠다. 굉장한 무용을 보고 난 직후라 더욱 그러했다. 우락부락한 거구를 생각했는데, 키는 크지만 선이 가는 미남이라 기묘한 갭이 느껴졌다.

제임스 공작이 속눈썹에 닿는 일자머리를 옆으로 걷으며 말했다.

“본인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볼탄 반도의 로벨 로드릭 경인 것 같소만.”

“본인을 아시오?”

“아이언베어 요새에서 보았소. 형님을 수행하느라 제대로 인사하지 못해 내심 아쉬웠지.”

로벨은 활짝 웃었다. 기억은 안 나도 같은 곳에서 싸운 전우라니 반가웠다.

“로벨 로드릭이오.”

제임스 공작은 두 팔을 벌리고 떡갈나무 성의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환영했다.

“내 성에 온 것을 환영하오, 로벨 로드릭 백작. 볼탄 반도의 용장이 함께하니 매우 든든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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