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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54화 (154/605)

154화. 밤바람

154화. 밤바람

까마귀 마을의 여관은 으레 그러하듯 ‘까마귀 여관’이라 불리었다. 계곡 전체에 여관이 하나뿐이라 헷갈릴 일이 없었다.

까마귀 여관은 생각보다 장사가 잘 되었다. 테이블 세 개 놓으면 꽉 차는 메인 홀에 건장한 사내 스무 명이 옹기종기 모여서 값이 떨어진 작년 맥주를 홀짝였다. 피난민이 아니라 전쟁특수를 노리는 용감한 행상인들이었다.

“손님이오?”

여관주인이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구걸하는 피난민이 많아 의심부터 던졌다. 로벨은 망토를 살짝 치우고 컴포지트 아머와 흐룬팅 손잡이를 보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빈 곳에 앉으시오.”

“빈 곳이 없는데요?”

마녀 키르케가 순진하게 물었다. 여관주인은 코를 팽! 풀고 술 취한 행상인들을 발로 찼다.

“엉덩이 좀 붙여! 바짝바짝 붙어! 야! 족제비! 위층 올라가서 자!”

여관주인의 우악스러운 발길질 덕분인지, 행상인의 자상한 배려심 덕분인지, 로벨 일행은 간신히 테이블 한쪽에 앉았다.

여관주인은 어린아이 주먹만한 코를 주무르며 물었다.

“오늘 아침에 끓인 스튜와 3일밖에 안 지난 보리빵이 있는데, 어느 걸로 드시겠습니까?”

허풍쟁이가 진지하게 물었다.

“어느 쪽을 추천하오?”

“날도 찬데 따뜻한 스튜가 좋지 않겠소?”

“그럼 보리빵을 주시오. 그리고 저 친구들이 마시는 맥주도 주쇼.”

여관주인은 입술을 실룩이다가 주방으로 향했다. 마녀 키르케가 의아해서 속삭였다.

“왜 스튜 안 먹고요?”

“이 많은 사람이 안 먹고 남은 음식이면 뻔하지. 추천까지 해서 치우려 하면 더더욱 뻔하고.”

허풍쟁이의 추리에 정신이 멀쩡한 행상인들이 소리 내어 웃었다. 로벨은 그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검은 숲에서 장사해?”

행상인은 서로 눈치 보다가 주름도 많고 흉터도 많은 경력자를 대표로 내세웠다.

“검은 숲과 포클랜드 지방을 오갑지요.”

“그럼 전황에 밝겠네?”

행상인은 보일 듯 말듯 안심했다. 선량한 상인의 주머니를 노리는 불한당 기사가 아니었다.

“어휴, 말도 마십쇼. 제가 크고 작은 전쟁을 열 번 넘게 겪었지만, 이런 전쟁은 처음입니다. 오크, 고블린, 트롤이 무리지어 다니는데, 사람만 보이면 일단 배떼지부터 쑤시려고...”

로벨은 적당할 때 허리를 끊었다.

“오크가 점령한 곳과 아닌 곳, 싸우는 곳과 아닌 곳을 알려줘. 군수물자를 조달할 테니 잘 알고 있겠지?”

행상인의 눈빛이 변했다.

“그야 어렵지 않지만... 이것도 군사정보 아닙니까요? 이런 거 누설하면 여러 사람이 다치는데...”

그리고 로벨이 아니라 로벨의 수행원을 힐끔거렸다. 무슨 뜻인지 알아달라는 제스처였다. 마녀 키르케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돈 달라고요?”

“아니, 그리 대놓고 말하면 곤란한데...”

로벨은 10페닝을 꺼내서 테이블에 놓았다. 그러자 까마귀 여관의 행상인이 모두 관심을 보였다.

“떡갈나무 성에서 전투가 한창입니다.”

“여우숲은 오크 소굴이에요! 절대 가지 마세요!”

“가만, 지도가 여기 있었는데...”

“아무튼! 초승달 강 북쪽만 안 가면 안전합니다요.”

행상인의 정보력과 10페닝의 위력은 대단했다. 고작 15분 만에 검은 숲의 전황을 대부분 파악했다.

‘열 명의 정찰병보다 한 명의 상인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지?’

로벨은 정보를 정리한 후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그럼 가장 접전지가 어디야?”

행상인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떡갈나무 성이죠.”

“제임스 공작이 직접 기사들을 이끌고 싸우고 있습니다요.”

로벨은 낯익은 이름에 의문을 표시했다.

“제임스 공작은 죽었잖아?”

“예? 아차차, 죽은 공작의 동생입니다요. 그러니까 후계자죠.”

“그래?”

악마추종자가 자주 쓰는 수법이 지역의 지배자, 그러니까 영주를 회유하거나 협박하는 것이다. 에릭 공작, 볼프 후작, 도트넘 백작, 헤르만 백작 모두 그러했으며, 심지어 로벨에게도 접근한 적이 있었다. 검은 숲 역시 다르지 않다면 제임스 공작이 표적일 것이다.

‘떡갈나무 성이구나.’

허풍쟁이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했다. 전쟁터에 뛰어들 때 느낌과 비슷했다.

“에구. 고생길이 훤하다. 훤해.”

@

로벨은 까마귀 여관 2층에서 하룻밤 쉬었다. 사실은 허리를 살짝 굽히고 올라가야 하는 다락방이라 1.5층이었다. 객실로 나눠지지 않아 대충 자리 깔고 대충 잠을 잤다. 그래서 오른쪽에는 마녀 키르케가, 왼쪽에는 아랫배가 볼록 나온 중년 행상인이 요란하게 코를 골았다. 어느 쪽이 시끄러운지 판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휴우...”

로벨은 자꾸 경계선을 넘어오는 마녀를 정자세로 돌려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바람을 조금 쐬어야 할 것 같았다.

쿵! 쿵! 철컥! 끼리릭-!

“으으으으... 안돼...”

“옛 신이시여, 제발 좀!”

천천히 걸어도 갑옷의 쇳소리와 마룻바닥의 비명소리를 어쩔 수 없었다. 로벨은 본의 아니게 투숙객의 절반을 깨운 후 1층으로 내려갔다.

위층에 자리가 없어서 홀에도 손님이 있었다. 누가 훔쳐갈까봐 봇짐을 베고, 깔고, 끌어안고 쿨쿨 잤다. 그중에는 허풍쟁이 제이콥도 있었다.

“나, 나으리?”

허풍쟁이는 칼집이 철컹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누가 용병 아니랄까봐 병장기 소리에 민감했다. 로벨은 망토 아래로 칼자루를 잡고 속삭였다.

“별일 아니야. 계속 자.”

그러나 책임지지 못 할 말이었다.

로벨은 여관문을 열면서 두 가지를 깨달았다. 하나는 생각보다 춥지 않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생각보다 어둡지 않다는 것이다.

‘...밝아?’

로벨은 몸을 돌려 계곡을 보았다. 계곡 위가 불이 난 것처럼 환했다. 수십 개의 화톳불이 밝혀지고, 수백 명의 병사가 횃불을 들고 뛰어다녔다.

‘이 시간에 왜?’

그 답이 금방 나왔다. 윌 오 위스프가 장난치듯 서른 개의 불씨가 피어나더니, 곧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로벨의 머리 위, 정확히는 계곡 아래 까마귀 마을을 넘어서 성문 쪽으로 사라졌다. 불화살이었다.

“싸움이야!”

로벨은 역전의 기사답게 상황을 파악했다. 소음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여관문을 벌컥 열었다.

“허풍쟁이! 키르케! 일어나!”

“머, 뭣이여?”

“어이구! 깜짝아!”

여관주인과 손님이 모두 일어났다. 성질머리가 안 좋은 사람은 상대를 확인하지도 않고 욕설부터 쏟아냈다. 잠에 취한 허풍쟁이가 허우적거리며 물었다.

“기사 나리? 왜, 왜 그러십니까요?”

“전쟁이야! 호른 경을 찾아야 해!”

로벨이 활짝 열어놓은 여관문으로 붉은 기운이 스며들었다. 귀가 밝은 사람은 피난민의 새된 비명을 들었다.

“이런 젠장! 까마귀 성은 안전할 줄 알았는데!”

“소, 소란 피울 필요 있나? 영주가 잘 막겠지?”

“그러다 뚫리면? 내가 놈들이면 저쪽 계곡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쪽부터 털 거다.”

행상인은 가진 것이 많았다. 가진 것이 많으면 몸이 굼뜨고, 몸이 굼뜨며 표적이 되기 쉬웠다. 봇짐을 쌓고 말과 당나귀를 챙기는데 대단히 느렸다. 반면, 가진 것이 몸에 붙어있는 것뿐인 로벨 일행은 홀가분했다. 즉시 까마귀 여관을 벗어나 계곡길을 올라갔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피난민이 떼로 몰려와 난동을 피우고 있었다. 성문을 공격하는 것이 인간인지 몬스터인지 모르지만, 성을 안 넘어도 성 아랫마을을 박살내는 전공을 세울 듯했다.

“마로드! 마로드!”

그때, 우람한 전투마가 계곡길을 달려 내려왔다. 로벨의 충성스러운 기사이자 자작나무 숲의 주인인 호른 경이었다.

호른 경은 말안장에서 메이스를 꺼내 길을 가로막는 피난민을 두드려 팼다. 머리를 쳐서 죽이지는 않았지만, 어깨, 팔, 등짝을 때리니 피난민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저건 좀...”

허풍쟁이조차 질겁할 정도였으니 효과가 있었다. 옛 신의 사도가 바다를 가른 것처럼 피난민을 두 쪽으로 몰아냈다. 호른 경과 울프 용병단이 로벨 앞에 이르러 플레일을 대령했다.

“오크 군대가 성문을 공격 중입니다! 서둘러 피하셔야 합니다!”

로벨은 주위 사람이 듣지 못하게 나직이 물었다.

“숫자는?”

“어두워서 확신할 수 없으나, 1천은 넘을 듯합니다.”

“1천...?”

인간이라도 엄청난 대군인데, 오크라면 말할 것이 없었다. 성문이 위태로울 것이다.

“성문이 뚫리면 까마귀 성은 몰라도 이곳 사람은 모두 죽어.”

고민은 깊지만 짧고, 결정은 빠르지만 단호했다.

“성문으로 가자.”

“기사 나리!”

울프 용병단이 질색했다. 금화 한 닢 받지 않고 남의 성, 남의 영지 지키는 일이 달갑지 않았다. 더욱이 오크는 전리품을 챙길 것도 많지 않았다.

“이 계곡이 점령당하면 검은 숲은 보급로를 잃게 되고, 그러면 올해 전쟁이 몇 배로 어려워져.”

“그래도 왜 우리가...”

“집에 가야 할 거 아니야.”

피난민도, 그리고 울프 용병단도 집이 있었다.

“에잇! 기사 나리 말씀 따라서 손해 본 적 있었냐! 가자!”

“원래 추가수당을 받아야 하는데... 어린 집사가 없으니 당장 요구할 수 없고...”

“저 마을 놈들 쌈짓돈을 털든가 하자.”

지휘관이 결정하고 병사가 받아들였다. 표정이 밝아지고 사기가 올라갔다.

“자, 오크 멱을 따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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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전쟁은 고대 전쟁과 달리 전문화, 정예화된 전문 직업인의 잔치였다. 잘 훈련된 용병 한 명이 농민병 열 명의 위력을 내고, 풀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기사 한 명이 용병 열 명의 힘을 발휘했다. 물론, 기사 한 명이 농민병 백 명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느냐고 진지하게 물으면 그건 아니지만, 그 정도로 잘 싸운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로벨과 호른 경과 울프 용병단은 단순히 12명의 지원군이 아니었다. 성문 뒤에서 온몸으로 버팀목을 자처하는 병사도, 성벽 위에서 주먹보다 큰 것은 모조리 집어 던지는 병사도 로벨 일행의 참전에 환호했다.

로벨은 까마귀 성 병사들의 환호성을 가로질러 저녁 무렵에 스치듯이 본 기사를 찾아갔다. 전투가 급박해서 간략히 자기소개했다.

“늑대성의 로벨 로드릭이오. 이곳 영주는 어디 있소?”

“로벨 로드릭? 그랜드 챔피언이란 말이오?”

성문 기사의 표정이 환해졌다. 복덩어리 같은 지원군이었다.

“영주를 찾고 있소.”

“아! 영주님은 성에 계시오!”

“아직도 출정을 안 했단 말이오?”

“그게 아니라...”

쿠궁!

성문이 크게 흔들렸다. 빗장 하나가 부러지고, 버팀목 중 부실한 것은 튕겨나갔다. 성벽 위에서 보고를 가장한 비명을 질렀다.

“제길! 오우거다!”

더 이상 한가롭게 떠들 시간이 없었다. 로벨은 아론디이트를 뽑으며 명령했다.

“성문이 뚫리면 기선을 제압해야 해. 오우거를 우선 쓰러트릴 거야.”

성문 기사가 어이없어서 중얼거렸다.

“그 무서운 괴물을 무슨 수로...”

“에잉! 또? 오우거는 이제 지겨운데!”

“이제 나도 오우거 사냥꾼이 될 수 있겠군!”

허풍쟁이를 필두로 울프 용병단이 호기롭게 소리쳤다. 오우거를 무슨 뒷골목 고양이처럼 대하는 태도였다. 사실 한두 번 싸운 거로 적응할 만큼 만만한 괴물이 아니었다. 울프 용병단도 겁이 나지만, 더욱 겁먹은 까마귀 성 병사를 위해 허세를 부렸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늘어트리고 앞장섰다.

쿵! 쿵! 콰직-!

오우거가 바위를 휘둘렀다. 빗장이 전부 부러지고, 성문이 빠끔히 열렸다. 어깨와 등에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힌, 그래서 더욱 무섭고, 더욱 화가 난 오우거가 보였다. 허풍쟁이의 허풍이 빠르게 쪼그라들었다.

“내가 괜한 말을 했나?”

로벨은 바이저를 내려서 웃음을 감췄다. 그리고 아론다이트를 양손으로 잡아 세우고 자세를 한껏 낮췄다. 성문 틈새로 피 냄새, 기름 타는 냄새,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이제 익숙한 냄새였다.

“자,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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