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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53화 (153/605)

153화. 까마귀 마을

153화. 까마귀 마을

로벨 일행은 밤이 되자 부득이하게 야영을 준비했다. 본디 북부대로에는 10마일 간격으로 역참이 있어서 오늘 먹을 것을 걱정할 정도로 가난한 떠돌이가 아니면 안전과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어디까지 평소에는 말이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불에 타서 주저앉은 대들보를 발로 툭툭 찼다. 잿가루가 섞인 눈덩이가 후두둑- 떨어졌다.

“이래가지고는 귀리 한 알 못 구하겠는뎁쇼.”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은 여관을 한 바퀴 돌아 허풍쟁이 앞에 멈췄다. 그리고 포기한 듯 물었다.

“우리가 가져온 식량은?”

“사흘 치는 됩니다.”

“모자라진 않지만, 넉넉하지도 않군.”

“우와아악!”

검은 숲의 털보가 여관 뒤뜰에서 우물을 길다가 비명을 질렀다. 몸이 퉁퉁 불은 채로 얼어 버린 처참한 몰골의 꼬마아이가 끌려 나왔다. 전쟁터에서 볼꼴 못 볼 꼴 다 보아온 베테랑 용병조차 질겁할 광경이었다.

“우물에 숨었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군.”

“제기랄! 우물도 못 쓰잖아!”

마녀 키르케가 로벨 뒤에 숨어서 빽! 소리쳤다.

“주위에 널린 게 눈인데 우물을 왜 찾아요!”

“여긴 부정한 곳이라 재수 없단 말이오!”

검은 숲의 털보가 마주 화를 냈다. 로벨 이하 볼탄 반도 출신들은 무엇이 부정한지 묻지 않았다. 옛 신의 교리가 뿌리 내린지 1천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각 지방에는 미신과 토착 신앙이 남아있었다. 사실 드루이드와 악마추종자도 그중 일부였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고참용병답게 잘 타일렀다.

“우리가 출발할 때 리암 수사님이 축복했잖아. 전혀 부정하지 않아.”

“어? 어라? 그랬어?”

그랬을 리 없었다. 리암 수사는 숙취 때문에 말구유에 머리를 박고 있었으니까.

허풍쟁이 제이콥의 의도를 알고 겁쟁이 데비와 코골이 바디가 동조했다.

“이 자식, 술이 덜 깨서 제대로 못 봤구만?”

“여행이 끝날 때까지 부정이고 나발이고 없으니까 안심해라.”

로벨은 빙그레 웃었다. 지난 세월 로벨만 성장한 것이 아니다. 시간이란 텃밭에 경험이란 씨앗을 뿌려서 연륜이란 작물을 수확했다.

로벨 일행은 폐허가 된 여관 맞은편에 야영지를 설치했다. 폐허에서 장작을 골라내 모닥불을 피우고, 냄비에 깨끗한 눈을 담아 팔팔 끓인 후 비스킷과 염장고기를 때려 넣었다. 눅눅해지고 걸쭉해지면 완성이었다. 하지만 맛은 젖은 종이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음식이라 부르기가 미안한 생명연장물질을 만드는 동안 겁쟁이 데비 등은 천막을 세웠다. 큰 지주를 중심으로 작은 지주 네 개를 놓아서 방수포를 엮는 가장 단순한 사각 막사인데, 땅이 꽁꽁 얼어서 쉽지 않았다. 얼음을 깨듯 곡괭이질을 해야 했다. 겨울 여행은 먹을 것부터 잘 곳까지 고난의 연속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간신히 천막 두 동을 완성했다. 로벨과 호른 경이 각각 하나씩 차지했다.

마녀 키르케와 울프 용병단은 천막을 거부했다. 심리적인 안전성을 제외하면 모닥불 주위가 훨씬 따뜻했다. 영주 체면, 기사 체면 때문에 수행원과 어울리지 못하는 로벨과 호른 경은 가죽 망토 위에 담요를 두르고 손바닥만한 화로에 바짝 붙어서 밤을 보냈다.

겨울밤은 깊고 조용했다.

울프 용병단 2명이 교대로 불침번을 서며 야영지와 모닥불을 지켰다. 바람소리와 장작 타는 소리가 전부지만, 가끔 겨울잠을 일찍 깬 야생짐승이 부스럭거렸다. 그때마다 흠칫해서 쇠붙이가 불안하게 올라갔다.

로벨은 소드 벨트를 둘둘 말아 끌어안고 천막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모닥불 빛과 울프 용병단의 그림자를 보았다.

허풍쟁이가 땅바닥에 마른 짚을 깔아줬지만 눕지 않았다. 컴포지트 아머 때문에 누워도 편하지 않았다. 몸을 웅크리고 두 다리를 끌어안았다. 마음이 안정되었다.

‘숲... 괴물... 애꾸눈 볼포스...’

거인의 발에서 늑대의 왕과 싸운 밤이 떠올랐다. 오크가 야영지를 습격해서 처절하게 싸워야 했다. 헤르만 백작과 휘하 기사들은 진작에 도망쳤고, 몇 안 되는 울프 용병단은 로벨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죽었다.

그날 밤 로벨을 구한 것은 애꾸눈 볼포스였다.

“마로드, 아직 주무십니까?”

잠깐 졸았다. 아니, 제대로 졸았다. 로벨은 비몽사몽해서 고개를 들었다.

“아침이야?”

숨죽인 웃음이 떠돌았다.

“이제 곧 해가 뜹니다.”

로벨은 정신을 차렸다. 울프 용병단이 아니라 호른 경이었다.

로벨은 마른세수를 하면서 슬그머니 눈곱을 떼었다.

“...미안하오.”

“아랫사람들이 식사준비 중입니다.”

로벨은 담요를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절이 찌뿌둥했다. 호른 경은 천막을 걷고 밖을 보였다. 어스름한 새벽빛이 꾸물거리는 인간과 칭얼거리는 전투마를 비추었다. 가장 따뜻한 곳에서 가장 편안하게 밤잠을 잔 마녀 키르케가 냄비를 두드리며 사람들을 깨웠다.

“기상! 기상! 둥근 해가 떴어요! 모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세요!”

“으윽... 난 전번초야... 10분만 자자...”

“지금 안 일어나면 아침밥 없어요!”

로벨은 아침밥을 위해서 모닥불로 나갔다. 울프 용병단이 투구를 쓰며 인사했다. 로벨은 간밤의 특이사항을 살핀 후 짧게 통보했다.

“오늘 북부대로를 빠져나갈 거야.”

“네엣? 20마일 가까이 남았는뎁쇼?”

“응. 그러니까 서둘러야지.”

로벨의 목적지는 분명했다. 검은 숲의 시작이자 북부대로의 끝자락인 까마귀 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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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키르케가 수레 뒤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까마귀요?”

“옛날부터 까마귀가 많이 살았소. 그리고 독수리도.”

“까마귀... 독수리... 에잇! 설마?”

“생각한 게 맞소. 그곳 특산품이 시체요. 그쪽으로 장인이 많지.”

마녀 키르케는 의미 모를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저녁 무렵 실제로 까마귀 성에 도착했을 때는 무덤덤했다.

성문에 내걸린 인간과 오크 시체가 겨울철 배고픈 까마귀의 먹이가 되어주고 있었고, 그 점에서 충분히 이름값을 했다. 그러나 북부대로에서 워낙 많은 시체를 보아서 감흥이 부족했다. 더불어 20마일을 주파한 강행군으로 지치기도 했다.

마녀 키르케는 시체 아래를 지나며 드루이드 방식으로 기도했다.

“그래도 오크한테 함락되진 않았네요?”

호른 경이 로벨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다 마녀에게 관심을 돌렸다.

“성을 봐라. 함락 당하게 생겼는지.”

예전 버팅거 시티에서 본 폭풍성이 떠올랐다. 규모는 폭풍성과 비교할 수 없으나, 성 구조가 얼추 비슷했다. 그리 높지는 않아도 군사적 가치를 이루 말할 수 없는 계곡 아래에 성벽을 두르고, 구불구불한 계곡길을 따라 두 자릿수의 바리게이트를 설치했다.

계곡 아래 성문을 돌파하는 것도 계곡 위의 지원 화력 때문에 만만치 않지만, 설령 성문을 뚫어도 계곡길을 따라 아성으로 올라가는데 100이면 100명, 1,000이면 1,000명 다 죽을 지경이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호승심을 담아 물었다.

“배후를 치면 어떻습니까요? 측면이나요. 우리는 그런 식으로 재미 좀 봤는데요.”

호른 경은 허풍쟁이를 힐끔 보고 말했다.

“주군과 너희들의 무용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리일 것이다. 동쪽은 절벽이고, 북쪽은 여기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진 않다.”

로벨은 호른 경의 설명을 들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어린 시절 첫째 오라비와 둘째 오라비가 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검은 숲의 최후의 보루이자 포클랜드 지방을 지키는 방패야.”

로벨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호른 경이 헛기침했다.

“크흠. 흠흠. 그리 말하는 사람도 있지요.”

로벨 일행은 영주가 있는 아성을 올라가지 않고 계곡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울프 용병단은 이제 좀 편히 쉴 수 있겠구나 좋아했지만 오산이었다. 계곡을 내려가자 피난민이 바글바글했다. 까마귀 마을주민보다 피난민이 더 많았다. 수레 하나 지나갈 공간 빼고 꾀죄죄한 부랑자로 가득했다. 거대한 말을 타고 으리으리한 갑옷을 입은 기사를 보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기사 나으리! 나으리! 한 푼만 줍쇼!”

“젖을 못 뗀 아기가 있습니다!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동생이 사흘째 굶었어요! 제발 먹을 것을 주세요!”

피난민은 겁도 없이 전투마 앞으로 몸을 던졌다. 로벨은 화급히 고삐를 당겼다. 사람을 짓밟고 달리도록 훈련된 말이라 까닥하면 갓난아기를 안은 아낙을 살해할 뻔했다. 겁쟁이 데비와 코골이 바디가 로벨 앞으로 뛰쳐나와 피난민을 막았다.

“저리 비켜라! 물러나!”

“이분이 누구신지 알고 길을 막아!”

피난민은 수백 명이 넘지만, 대부분 환자와 아이들이라 어렵지 않았다. 젊고 건강한 사람들은 진즉에 다른 곳으로 떠나고 약자만 남았다.

로벨은 오래 있어 봐야 혼란만 가중된다고 판단하고 서둘러 거리를 통과했다. 일부 피난민이 끝까지 따라왔지만 호른 경이 롱소드를 반쯤 뽑자 기겁해서 주저앉았다.

로벨 일행은 외진 샛길을 지나 피난민이 뜸한 마을 외곽에서 멈췄다. 허풍쟁이가 장탄식을 터트렸다.

“이래서는 마음 놓고 쉬지도 못하겠습니다요.”

“주군, 성으로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호른 경이 조심스레 제안했다. 로벨의 신분이면 까마귀 영주도 내쫓지 못할 것이다. 로벨은 계곡 위의 까마귀 성을 한번 올려다보고 말했다.

“호른 경, 말과 수레를 가지고 성으로 올라가시오. 내 이름으로, 안 되면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이름으로 보호를 요청하시오. 거절하지 못할 것이오.”

“주군께서는 어찌하시려고...”

로벨은 계곡 아래 까마귀 마을로 시선을 옮겼다.

“난 알아볼 것이 있소. 키르케, 제이콥, 두 사람은 따라와.”

마녀 키르케는 좋아서 어깨를 들썩였고, 허풍쟁이 제이콥은 슬퍼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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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전투마 플레일을 호른 경에게 맡겨 성으로 보내고 망토를 꽁꽁 여며서 갑옷을 감춘 다음 마을을 지나갔다. 그래도 몇몇 피난민이 달라붙었지만, 아까처럼 우르르 몰려드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여관이 있을 거야.”

“저쪽에서 간판을 보았습니다요.”

북부대로에 자리한 마을이라 그럴듯한 숙박시설이 있었다. 허리 높이의 나지막한 울타리 너머로 지붕 씌워진 우물이 보이고, 그 뒤로 1.5층짜리 판잣집이 있었다.

“숲지기 오두막 같은데요?”

“저건 뭐지? 다락방인가?”

검은 숲은 나무가 풍부해서인지 전부 목재로 집을 지었다. 흙으로 벽을 쌓고 짚으로 지붕을 얹는 볼탄 반도의 민가와 사뭇 달랐다.

“비가 오면 난리 나겠는데...”

아무튼, 맥주와 침대 간판이 걸려있는 것을 보아 여관이 분명했다.

로벨은 망토 자락을 잡아당기는 어린아이를 살며시 뿌리치고 여관으로 들어갔다. 피난민 꼬마는 여관 안까지 쫓아오지 못해 밖에서 손가락을 빨며 쳐다보았다. 여관주인이나 종업원에게 호되게 당한 적이 있는 모양이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녀 키르케가 슬그머니 돈주머니를 꺼내자 허풍쟁이가 만류했다.

“거리 나가자마자 뺏길 거요.”

“그치만...”

“어설픈 호의는 악의보다 못하오. 그냥 두쇼.”

허풍쟁이의 말에 보기 드물게 무게가 있었다. 허풍쟁이가 고아로, 빈민으로 자랐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로벨은 허풍쟁이의 생각에 동의했다.

“가장 큰 호의를 보일 거야.”

“어찌 말입니까요?”

로벨은 어두컴컴한 여관 안으로 들어가며 홀로 약속했다.

“집에 보내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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