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52화 (152/605)

152화. 성인식

152화. 성인식

로벨은 검은 숲으로 출발할 준비를 갖췄지만, 한동안 길을 나서지 않았다. 겨우내 쌓인 눈이 녹지 않아서 장거리 여행에 적합하지 않거니와 누구 말대로 중차대한 행사가 남아있었다.

“우하핫! 마셔! 마셔! 마시라고!”

“자, 잠깐... 욱-! 우욱!”

늑대의 성은 겨울에 꽁꽁 얼어버린 땅을 하루만에 녹여버리듯 후끈했다. 로벨 로드릭의 충직한 가신이자 울프 용병단의 소중한 벗인 어린 집사의 성인식이 거창하게 열렸다.

마녀 키르케의 강도 높은 요구도 있었지만, 로벨 역시 어린 집사에게 고맙고 미안한 감정이 커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울프 용병단, 로드릭 마을주민, 로드릭 상회 소속 상인까지 초대해서 로드릭 가문 역사상 유례없는 잔치가 되었다. 추수제 못지않은 술과 고기가 나왔다. 리암 수사가 시험 삼아 만든 홉 맥주가 아주 호평이었다. 그리고 로시난테 2세가 도축된 것은 중요한 비밀이었다.

파티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펄프 대장이 중요한 쟁점을 끄집어냈다.

“가만가만. 그럼 이제 어린 집사가 아닌가?”

“뭐, 아직 늙은(Old) 집사는 아니니까?”

“그럼 그냥 집사라고 해야지!”

로벨은 술기운에 발그레진 얼굴로 정의해 주었다.

“후계자가 생기기 전까지는 어린 집사야. 예전 집사도 그랬거든.”

어린 집사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손가락으로 따닥! 소리를 냈다.

“진짜 대장은 아니지만, 용병 대장인 펄프 대장하고 비슷하군요?”

“...무슨 비유가 그래?”

“왜요? 맞잖아요? 기사 나리가 우리를 고용했으니까 기사 나리가 우리 대장이죠!”

“이 자식아! 바지사장도 사장이다!”

로벨은 술잔을 꼭 쥐고 고개를 주억였다.

‘진짜 로벨은 아니지만, 내가 로벨 로드릭인 것처럼...’

“아무튼! 성인이 됐어도 ‘어린’ 집사인 걸로! 건배!”

어린 집사는 술을 한잔씩 받고 취해서 생글생글 웃었다.

“자꾸 이러면 안 되는데... 그만 마셔야 되는데... 아이고, 고맙습니다.”

술에 취한 어린 집사는 성질 고약한 고양이에서 순진무구한 강아지로 변신했다. 로벨도 처음 보는 모습이라 신기했다.

“으... 기분이 좋아요. 근데 왜 좋은지 모르겠어요. 어라? 영주님? 왜 누워 계세요? 에헤이, 이런 곳에서 주무시면 감기 걸려요.”

“...뭐라는 거야? 일어나서 말해.”

파티의 주인공이 나가떨어져도 파티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모든 주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펄프 대장은 애꾸눈 볼포스의 이름을 부르며 술독에 잠수했고, 외팔이 더치는 그런 펄프 대장을 위로한다 치고 등을 두드리다 기어이 오바이트하게 만들었고, 발가락 슈미츠는 곰발 베버와 전사한 전우들을 위해 즉석 시를 지었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아 의기소침해졌고, 허풍쟁이 제이콥은 요즘 우울증을 앓는 겁쟁이 데비를 위해, 정확히는 놀리기 위해 해괴한 고향노래를 불러주었고, 과묵한 몬트는 자꾸 몸을 더듬는 코골이 바디를 피해 주방으로 도망쳤다.

“마로드, 한잔 하시지요.”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이 새 잔에 새 와인을 가져왔다. 로벨은 웃음으로 반겨주었다.

“호른 경, 고맙소.”

로벨은 새 와인으로 입술을 적시고 감탄했다. 헨리 피터 상단주가 제공한 싸구려 포트 와인과 맛이 달랐다. 극상품이었다. 로벨을 위해 직접 챙겨온 에르나 왕국산 와인이 분명했다.

호른 경은 로벨 옆자리에 앉아서 이런저런 말을 시작했다.

“날씨가 풀려서 영지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렇소? 참 부지런하시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로벨은 와인을 홀짝이며 건성건성 대꾸했다.

“아만다 항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조금 진지한 대화가 되었다. 로벨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딱. 벽난로 때문인지 주석잔이 붉었다. 호른 경은 진지하게 말했다.

“아만다 항구가 주군의 땅을 번영하게 할 열쇠입니다.”

“지금으로 부족하오?”

“지난날에는 어촌과 거점항으로 충분했지만, 로드릭 시장을 운영한다면 교역항이 필수입니다.”

“머를 경에게 맡기면 되겠소?”

“머를 브릭 경은 충성스럽지만 무능력합니다.”

로벨은 자신의 첫 번째 기사가 모욕받자 기분이 나빠졌다.

“난 이미 봉토를 하사했소. 그것을 빼앗을 수도, 빼앗을 생각도 없소.”

“영지를 몰수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하면 다른 봉신들이 가만있지 않겠지요.”

“그러면?”

“새 영지를 하사하고 반환받으면 됩니다.”

로벨은 잠깐 생각했다. 성, 영지, 통치권 등도 거래 가능한 ‘상품’이기 때문에 불가능하지 않았다. 물론, 브릭 일가가 납득할 만한 선물을 줘야 할 것이다.

“어느 성을 말이오?”

“올해 갖게 될 성입니다.”

로벨은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며 자신이 취했는지 고찰했다.

마녀 키르케가 술 취한 어린 집사를 이야카에 태워서 조리돌림했다. 저기 동참하고 싶지 않은 것을 보아 아직 취하지 않았다. 호른 경이 빠트린 설명을 덧붙였다.

“올해 전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적은 몸값을 원하지 않으니, 아주 많은 기사가 죽을 겁니다.”

“검은 숲의 몬스터, 그리고 악마추종자.”

호른 경은 술잔을 비우는 걸로 긍정했다.

로벨은 떠들썩한 파티 이후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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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숲과 북부대로의 치안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안 좋았다. 로벨이 검은 숲에 다녀오겠다고 밝혔을 때 어린 집사를 비롯한 대다수 사람이 만류했다. 그러나 힘으로나 직위로나 로벨의 고집을 막을 사람이 없었다. 결국 허풍쟁이 제이콥을 포함해 솜씨 좋은 용병 10명을 경호원 삼는 것으로 타협했다. 완전무장한 기사와 울프 용병단 10인이면 오크 중대나 오우거 일가족이 아닌 이상 위험이 되지 않을 것이다.

“봄 농사가 끝나기 전에 올 거야.”

어린 집사는 로벨의 약속 때문인지, 아니면 처음 겪는 숙취 때문인지 긴 신음을 흘렸다.

“그때쯤 전쟁이 날 거라면서요?”

“그러니까 돌아와야지.”

로벨은 빙그레 웃었다. 어린 집사는 전투마를 손질하는 호른 경과 야전도구를 점검하는 허풍쟁이를 한 번씩 보고 속삭였다.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이 동행하니까 안심이긴 한데... 조심해야 해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로벨은 브레스트 플레이트를 탕! 소리 나게 두드렸다.

“걱정 좀 하지 마. 지금껏 잘해왔잖아?”

로벨은 플레일의 편자를 확인한 후 안장에 훌쩍 올랐다. 로벨을 기다리던 기사와 용병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깃발을 높이 들었다.

2명의 중장갑 기사와 10명의 중무장 용병은 실로 위풍당당했다.

“자! 준비됐어요! 출바알!”

마녀 키르케가 수레에 앉아 떡갈나무 지팡이를 휘둘렀다. 로벨 로드릭 군의 품위가 조금 떨어졌다.

“...저것도 데려가요?”

“...저래 봬도 유능해. 악마추종자와 싸울 때 큰 도움이 되었어.”

“어쩌다 도움이 됐겠죠.”

로벨은 플레일을 몰아 맨 앞으로 나섰다.

“그럼 다녀올게.”

“앗! 잠깐만요!”

어린 집사가 성문 밖까지 따라 나와 손나팔로 소리쳤다.

“정말! 정말 조심하세요! 그리고 빨리 돌아오세요! 봄 농사 끝나면 쫓아갈 거예요!”

로벨은 어린 집사를 위해 성이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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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로는 볼탄 반도의 정문이었다. 포클랜드 지방과 검은 숲 지방에서 들어와 사트로 시티를 거쳐 네일 공국으로 이어졌다. 남해항로가 개척된 뒤로 소위 말하는 큰 손들은 해양무역으로 넘어갔지만, 그럼에도 북부대로를 오가는 행상인과 여행자 숫자가 작지는 않았다. 이러한 북부대로는 전통적으로 강철성의 영주가 관리하였다.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이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추가 설명했다.

“주군의 영토가 지정학적으로 좋은 위치임에도 오랫동안 발전하지 못한 것은 북부대로와 동떨어진 탓입니다. 육상교역은 강철성이, 해상교역은 페르젠 시티가 주도하는데, 그 중간에서 방치되었지요.”

어린 집사가 로드릭 시장을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사람이 지나다니고, 물자가 오고 가야 제대로 발전할 수 있었다.

로벨은 하품을 참으며 새로 질문했다.

“경은 내 땅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오?”

호른 경은 당황해서 조금 떨어졌다. 저의를 의심받을 수 있었다.

“제가 관심 있는 것은 땅이 아니라 주군입니다!”

“흐음? 역시는 역시야.”

마녀 키르케가 수레 난간에 턱을 올리고 중얼거렸다. 호른 경이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역시라니? 무슨 뜻이냐?”

마녀는 고깔모자를 아래로 눌러쓰고 음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 뜻도 아니에요옹.”

호른 경은 짜증이 나서 ‘되었다! 잠이나 자거라!’ 혼내고 로벨이 관심 없어 하는 정치와 경제문제를 이어갔다.

“북부대로를 장악할 수 있으면 좋지만, 도트넘 가문과 사트로 가문이 버티고 있는 한 불가능합니다. 차선책으로 북부대로의 유통망을 남쪽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꼴을 보면 그러고 싶지도 않수다.”

마녀 키르케가 조용하자 허풍쟁이 제이콥이 끼어들었다.

호른 경은 주군과 가신의 대화를 자꾸 방해하는 수행원이 못마땅했지만 마녀처럼 혼내지 않았다. 허풍쟁이의 지적도 일리가 있었다.

지난가을부터 줄기차게 몬스터의 습격을 받은 북부대로는 처참했다. 길가에는 나무보다 시체가 많았다. 오크가 먹고 남긴 시체도 있지만, 온전한 상태로 얼어 죽은 시체도 상당했다.

마녀 키르케는 옹기종기 모여서 동사한 일가족을 보고 한탄했다.

“저런 어린아이까지...!”

허풍쟁이가 침을 탁! 뱉고 짜증냈다.

“봄이 오기 전에 싹 다 치워야 하는데, 이곳 영주들은 뭐하는 거야?”

잔인하고 무신경해도 옳은 말이었다. 시체를 방치하면 쥐와 벌레가 들끓고 전염병이 창궐했다. 로벨은 어머니 품에서 죽은 10살 남짓한 소녀를 안쓰럽게 보았다.

“여유가 없을 거야.”

“에이, 게을러서 그렇지요.”

“아니. 주군의 말씀이 옳다.”

호른 경은 시선을 돌렸다.

“강철성을 넘어온 오크 무리는 주군이 격퇴했지만, 이쪽 지방은 겨울내내 방치되었다. 영주들은 자신의 성을 지키기도 급급했지.”

로벨 일행은 피난민 일가족을 두고 떠났다. 장례를 치러주고 싶어도 시체가 너무 많았다. 매장은 불가능하고, 화장해도 며칠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검은 숲 출신의 털보가 불안한 눈초리로 물었다.

“그나저나 안전하긴 할까?”

“뭐가?”

“너희들도 알겠지만, 겨울에 피난을 떠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잖아.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나온 건데, 그 말은...”

한겨울에도 몬스터가 활개치고 다녔다는 뜻이다.

털보의 불안감은 적중했다. 로벨 일행은 1마일을 안 가서 또다시 시체 더미를 발견했다. 그러나 이전 시체와 사뭇 달랐다.

“피가 있어!”

시체에 피가 고인 것은 당연하지만, 그 피가 얼지도, 마르지도 않았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사냥꾼 출신인 털보가 시체의 온기, 핏자국, 주변에 쌓인 눈 등을 살핀 후 보고했다.

“30분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숫자는?”

“다섯 놈은 넘고, 열 놈은 되지 않습니다.”

울프 용병단은 무기를 스르륵- 내리고 안도했다.

“그 정도면 위협이 되지 않네.”

“죽기 싫으면 피해가겠지.”

그러나 로벨은 안심하지 않았다. 털보의 판단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열 명이 아닐 거야.”

검은 숲의 사냥꾼이란데 자부심이 강한 털보가 반박했다.

“하지만 족적이 열이 넘지...”

“주방에서 쥐가 한 마리 보이면, 창고에는 열 마리가 숨어있어요.”

로벨 대신 마녀 키르케가 설명했다. 어렵지 않게 이해되었다. 마녀는 덧붙일 말이 없자 아무렇게 마무리했다.

“보통은 아야랑 이야카가 잡아요. 똑똑해서 아주 잘 잡아요.”

“응? 그런 거였어? 어쩐지 요즘 쥐가 안 보이더라.”

로벨은 늑대성의 숨겨진 진실을 깨닫고 감탄했다. ‘걔네가 사냥도 하는구나!’ 그러나 울프 용병단은 다른 의미로 이해했다.

“우리가 ‘울프’ 용병단이잖아?”

“우리보고 잡으란 뜻이야?”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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