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검은 숲
151화. 검은 숲
봄이 가까워지자 북해의 차디찬 삭풍 위로 남해의 온화한 바람이 넘어왔다.
시절에 민감한 식물들은 땅속에서 소리 없는 무도회를 열었고,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동물들은 숨을 헐떡이며 새해를 재촉했다. 로드릭 영지의 주민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처마의 눈과 얼음이 녹아 단조로운 실로폰 소리를 내는 가운데, 겨우내 웅크리고 지낸 아이들과 가축들이 밖으로 뛰쳐나와 웃음으로 햇님을 맞이했다. 그렇게 봄을 기다리며 만물이 소생하고 있었다.
“아이고, 죽겠네. 죽겠어. 나 죽는다.”
“오, 나의 주여. 여기 어린 생명이 둘이나 찾아가나이다.”
물론, 예외는 어디에나 있었다.
어린 집사와 리암 수사는 조금 과장해서 침대로 써도 될 법한 서류 더미를 안고 골골 걸렸다.
늑대성의 관리인들은 봄을 마중 나갈 여유가 없었다. 새해 예산안을 짜고, 소금 광산, 식품공장, 로드릭 시장과 뉴 로드릭 마을의 양조장의 운영 상황을 점검하고, 여유 자금, 모자란 인력, 추가할 시설을 조율했다.
이것뿐이면 그래도 아침에 산보하고 저녁에 와인 한잔하는 여유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옛 신의 교단, 하얀 숲의 드루이드 마을, 아이란드 왕국의 비밀결사, 에르비아 시티의 왕립 도서관 등에서 보내온 방대한 자료를 확인하고 비교하고 검정해야 했다. 그림 리퍼와 악마추종자 세력을 찾기 위해서였다.
어린 집사는 ‘위대하신 주여, 이런 건 그쪽 선에서 처리해주세요’ 요지의 기도를 올리는 리암 수사를 위로했다.
“사실은 늑대의 왕과 싸우고 사악한 마녀가 저주를 걸었을 때 했어야 할 일이죠.”
“근데 왜 안 했을까요? 그럼 제가 아주 많이 편했을 텐데요.”
“...그때는 좀 힘들었어요.”
정확히는 힘이 없었다. 그랜드 챔피언 타이틀 이외에는 권력도, 직위도, 자본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로벨 로드릭 백작은 다르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을 통해 에르나 왕국 서기관의 도움을 받고, 저스티스 기사단의 더글라스 경을 통해 옛 신의 교단과 연락을 취하고, 마녀 키르케를 시켜서 하얀 숲 드루이드에게 편지를 보내고, 이안 선장에게 부탁해 아이란드 왕국의 마법-연금길드에 협조를 요청했다. 그 결과 그림 리퍼에 관한 방대한 자료와 진리탐구회라 자칭하는 악마추종자의 역사와 주요 활동을 얻어냈다.
“유라피아 대륙 곳곳에 손이 닿는 것을 보면 새삼 뿌듯하기도 하고...”
어린 집사는 고서의 사본을 뒤적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영주님은 어디 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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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로벨 나름대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로드릭 시장을 방문한 상인을 만나서 애꾸눈 볼포스를 수소문했다. 비록 애꾸눈은 찾지 못했지만 나름의 소득이 있었다.
“블랙우드 시티가?”
“예예. 북부대로에서 소문이 자자합니다요.”
“검은 숲에서 가장 큰 도시잖아?”
“그러니까 아주 난리가 났지요. 국왕 폐하가 기사들을 재소집할 거라고도 합니다요.”
검은 숲의 제임스 공작이 죽고 블랙우드 시티가 함락되었다. 에르나 왕국도, 잉그비아 왕국도 아닌, 미개하고 야만적인 몬스터의 침공이었다.
‘이건 단순한 몬스터의 난동이 아니야.’
인구 1만 명의 대도시가 사라졌다. 국가적인 재앙이며 총력을 기울여야 할 전쟁이었다.
로벨이 아론다이트 손잡이에 왼손을 걸치자 행상인은 깜짝 놀라 묻지도 않은 소리를 늘어놓았다.
“정말입니다! 진짜에요! 이틀만 지나면 볼탄 반도 전체에 소문이 날 겁니다요! 저도 그것 때문에 강철성으로 가는 중입지요!”
발빠른 상인들은 철광석을 매입했다. 전쟁이 나면 가장 큰 폭으로 값이 뛰는 것이 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벨 일행은 상재가 없어서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외팔이가 기가 차서 중얼거렸다.
“작년에 쳐 죽인 오크가 1천이나 되는데, 어디서 또 나타난 거야?”
마녀 키르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크는 몬스터잖아요.”
“몬스터는 뭐 새끼를 열 마리씩 치나?”
“어마나! 비슷해요!”
“뭐?”
“사실은 낳는 게 아니라 불러오는 거예요.”
고블린, 트롤, 오우거 등은 현실의 생물이 아니라 인지의 세계에서 넘어온 괴물이었다. 그 존재를 상상하고 인지하는 사람이 있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외팔이 등은 어리둥절해 했다. 마녀는 설명을 고심하다가 포기했다. 설명할 자신이 없고, 설명해도 소용이 없으며,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로벨은 여러 행상인을 만나 물가와 동향을 확인한 후 사실이라 판단했다.
“봄 농사가 끝날 때.”
“예?”
외팔이와 마녀 키르케는 로벨의 오른손을 보았다. 아론다이트의 폼멜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있었다.
“봄 농사가 끝날 때 전쟁이 시작될 거야.”
그 전쟁은 포비아 왕국이 둘로 쪼개지는 전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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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하나가 불타고, 수 천 명의 사람이 죽었지만, 볼탄 반도에서는 아직 먼 곳의 이야기였다. 더욱이 울프 용병단과 로드릭 마을은 오크의 침공을 막아낸 전력이 있어서 그리 무서워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먹고, 미시고, 싸우고, 웃었다. 그러나 사나운 용병도, 강인한 영지민도 봄바람 앞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겁쟁이 데비는 ‘조랑말’이라고 이름 붙인 전투마를 씻기다가 중얼거렸다.
“나 돈 좀 모을까봐.”
발가락 슈미츠와 흉내쟁이 퍼시발이 크게 놀라 걱정했다.
“왜, 왜 그래? 갑자기 왜 그런 무시무시한 생각을?”
“누가 니 아들이라고 핏덩이를 가져왔어?”
“저 얼굴에 그럴 리 없잖아. 혹시 부모님이 아픈 게냐?”
악담을 자연스럽게 담아내는 것도 용병의 재주였다. 겁쟁이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언제까지 용병짓으로 살 수 없잖아.”
발가락과 흉내쟁이는 괜한 헛소리 들었다는 듯 자신의 전투마로 관심을 돌렸다.
“그런 말 하지마라. 이만한 직장이 또 어디 있냐? 기사 나리는 무적이고, 대장은 똑똑하고, 급료 재깍재깍 나오고, 몸 상하면 소금광산이나 도시공장의 관리직으로 빼주잖아.”
“아, 맞다. 그쪽이 수당은 적어도 편하다던데?”
“너 늙다리 잭슨 알지? 그 영감이 과부 꼬셔서 늦장가 갔다더라.”
“어억? 진짜? 그 지독한 암내를 참아주는 여자가 존재한단 말이야?”
“그래 임마. 그러니까 너도 희망을 잃지 마.”
역시나 우수한 울프 용병단이었다. 발가락과 흉내쟁이는 으르렁거리다 결국 멱살잡이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보잘 것이 없네?’, ‘놔. 안 놔? 손모가지 잘라주리?’ 겁쟁이 데비는 그러거나 말거나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이 한숨 쉬었다.
“하아... 나도 장가나 갈까?”
발가락의 눈알을 파내는 시늉하던 흉내쟁이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진심이냐?”
“켁! 여자 소개해줘? 뉴 로드릭 마을의 에비라고...”
“무두장이 둘째 딸? 콱! 우리 기사 나리보다 못생겼잖아!”
“아니, 그건 우리 기사 나리가 은근히 미남이라...”
“은근히가 아니라 상당히잖아. 키도 크고, 얼굴도 곱상하니까. 작정하고 사탕발림하면 좋다고 넘어올 계집년이 열 수레일걸?”
발가락과 흉내쟁이는 언제 싸웠냐는 듯 꾸겨진 옷섶을 펴주며 낄낄거렸다. 겁쟁이 데비는 그런 전우들을 보고 깨달았다.
“이런 것들하고 살아갈 생각하니까 결혼이 간절해지지.”
봄바람은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마녀 키르케 역시 틈만 나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우리 영지와 우리 영주님 밖에 모르는 어린 집사가 심각하게 여길 정도였다.
“입 냄새나요. 저리 가서 한숨 쉬어요.”
역시 용병단의 숨은 실세다웠다. 마녀는 발끈해서 어린 집사의 손등을 꼬집었다.
“양치했거든요? 그쪽이야말로 입 냄새나네요! 오늘 양치 안 했죠?”
어린 집사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긍정했다.
“아침에 일이 많아서...”
어린 집사는 생각난 김에 양치하려고 아마포와 치약을 꺼냈다. 사슴뿔을 곱게 빻고 민트를 섞은 치약이라 접시에 풀자 상쾌한 냄새가 났다. 늑대성이 부유해진 뒤에 변한 것 중 하나였다. 예전에는 여느 농민처럼 짐승뼈를 가루 내서 치약으로 썼다.
어린 집사가 손수건으로 입안을 골고루 닦는 동안 마녀는 연거푸 한숨을 쉬었다.
“대체 와 그라요?”
마녀는 품위를 찾을 수 없는 어린 집사를 힐끔 보고 또다시 한숨을 토했다. 어린 집사는 기분이 상해서 치약물을 퉤! 뱉었다.
“아, 왜요! 할 말이 있으면 빨리하고 나가요!”
“제가 누구 때문에 이러는데요!”
“누구 때문인데요?”
“기사님이랑 집사님 때문이죠!”
어린 집사는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영주님은 그렇다 치고, 저요?”
“이제 성인식이잖아요.”
어린 집사는 두 눈을 깜박이면서 손가락을 접었다. ‘새해가 지나고, 보름달이 차고, 사흘이 지났으니까...’ 이틀 뒤가 로벨과 어린 집사의 생일이었다.
“아앗! 영주님!”
“영주님?”
로벨의 생일은 대외적으로 여름이었다. 진짜 로벨의 생일이 여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로벨은 어린 집사와 생일이 같았다. 그 사실은 로벨과 어린 집사만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매년 그냥 넘어가니까 제 생일을 잊은 것 같다고요.”
그리고 올해 생일은 특별했다. 어린 집사가 15살 성인이 되는 해였다.
“제 말이 그거에요! 성인식은 결혼식 다음가는 중차대한 행사인데! 너무너무 무심하잖아요!”
“그야 애꾸눈 일도 있고... 검은 숲 일도 있고... 정신이 없으니까요.”
“그래도 아니죠! 기사님은 자신과 주변 사람을 살필 필요가 있어요. 싸울 때 빼고는 맨날 멍해가지고...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 있는데 전혀 모르는 눈치잖아요.”
“...마지막이 본론인 거 같은데요?”
어린 집사는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마녀 키르케는 아랫입술을 삐쭉였다.
“칫! 저 말고요.”
“그쪽 말고 누가 우리 영주님을 좋아해요?”
마녀 키르케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아야와 이야카가 귀를 쫑긋 세우고 쳐다보았다.
“정말 몰라요? 와! 정말 바보천치네요!”
“누가 누구보고 바보라는 건지...”
어린 집사는 더 들을 가치가 없다는 듯 나가라고 손짓했다. 하지만 호기심을 막을 수 없어 귓구멍은 활짝 열었다. 마녀는 진짜 마녀처럼 속삭였다.
“그 사람은 남자에요.”
“나, 남자?”
어린 집사는 홀라당 넘어갔다. 마녀는 음흉하게 웃었다. 승리의 웃음이었다. 그러나 어린 집사는 맞상대할 정신이 없었다.
‘설마? 설마 들킨 거야? 그런 거야? 그러면 안 되는데? 설마?’
어린 집사가 무척 당황하자 마녀가 ‘쯧쯧!’ 혀를 찼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게 이상해요? 뭐, 일반적이진 않지만 종종 있는 일인데요.”
“에... 엥?”
“아이참! 우리 기사님도 순진하다니까. 그래서 기사님을 좋아하는 거지만...”
“내가 뭐 어쨌다고?”
“으기약!”
로벨이 방문을 벌컥 열고 어린 집사의 방으로 들어왔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로벨은 두 사람을 이상하게 보았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주위에 무심하다는 마녀의 평가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나 검은 숲에 갈 거야.”
어린 집사는 조금 전 걱정을 말끔히 지웠다.
“거길 왜 가요! 거기 사는 사람도 도망 나오는데!”
“거기 가야 알 수 있으니까.”
로벨은 혀끝에 확신을 담았다.
“지금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은 악마추종자야. 왕국의 힘이 약화시키고, 자신의 힘을 꾸준히 늘리고 있어. 볼프 후작을 회유하고, 도트넘 가문을 차지하고, 모몬트 가문을 조종해서 볼탄 반도 북쪽을 장악했잖아.”
“그건... 그렇지요?”
“그 다음은 에릭 공작을 음해하고, 페르젠 가문, 헤르만 가문, 에디즈 가문을 공격했어.”
“하지만 영주님이 막았잖아요.”
“그럼 지금은 어디일까?”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동시에 대답했다.
“아하! 이쪽에서 일이 안 풀리니까 검은 숲을 노린 거군요?”
“남쪽으로 못 오니까 북쪽으로 갔어요!”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일어난 일이 검은 숲에서 일어난 거야. 에르나 왕국 전쟁부터 블랙우드 시티 함락까지 모두 악마추종자와 연관되어 있어.”
“우와! 영주님이 생각한 거 맞아요?”
칭찬이 아니지만 칭찬으로 받아들여 콧대를 세웠다. 그리고 처음으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검은 숲으로 가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