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가능성
150화. 가능성
로벨은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해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별다른 위험은 없었다.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사늘한 바람과 눈덩이가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전부였다.
“이곳입니다.”
길잡이 더미의 안내는 정확했다. 딱 1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기라고?”
로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쟁 경험이라면 50대 노 기사도 부럽지 않은데, 길잡이가 안내한 이곳에서는 싸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시체 한 구, 화살 한 대 보이지 않았다. 로벨은 미심쩍은 얼굴로 되물었다.
“확실해?”
“그, 그게, 눈에 파묻혀서 그렇습니다. 그니까 여기... 그리고 여기였는데...”
길잡이 더미는 허둥지둥 눈을 파헤쳤다. 로벨이 ‘이 거짓말쟁이! 혼쭐을 내주마!’ 할까봐 걱정했다. 억센 용병들을 후드려 잡는 것을 본 직후라 더욱 그러했다.
“앗! 찾았습니다!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길잡이가 흔적을 찾고 뿌듯하게 말했다. 로벨은 플레일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갔다. 검게 그을린 나무와 흙. 모닥불을 피운 흔적이었다.
‘눈이 쌓이기 전이면, 닷새 전인가?’
로벨은 모닥불 옆을 쓸어냈다. 꽁꽁 얼어붙은 육포와 비스킷, 찢어지기 전에 부러질 것 같은 후드, 꾸겨진 채로 얼어버린 가죽 신발 등이 차례로 나왔다.
“여길 찾은 게 언제야?”
“사흘 전입니다. 폭설이 내릴 때였지요.”
“사람은 없었어? 산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그런 건 없었습니다. 무기와 옷가지가 어지럽게 널려있어서,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어 노스폴드 시장님께 가져갔습니다.”
“그래. 잘했어.”
인간을 조종하는 그림 리퍼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제 뭘 하면 됩니까?”
“기다려.”
“예? 아, 예. 생각이 끝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그게 아니야. 그냥 기다려. 그럼 찾아올 거야.”
“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로벨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웨던 남작 저택에서 마주한 그림자, 마도의 수호자가 한 말을 믿었다.
‘설마 골탕이나 먹이려고 그 소란을 피우진 않았겠지.’
로벨은 소드 벨트의 길고 짧은 칼들을 뽑기 좋게 조절하고, 아바레스트를 장전해서 플레일 안장에 걸었다. 그리고 적막한 숲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잠깐? 기다리고 있겠다더니, 기다리게 하잖아?’
아무튼, 로벨의 믿음은 보답 받았다.
숲 그림자가 꿈틀거리더니 밀물처럼 밀려왔다.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로벨을 향해 접근했다, 하늘에는 해가 환한데, 땅은 어둠에 잠겨갔다.
“백작님! 백작님! 으아악!”
길잡이 더미는 깜짝 놀라 로벨을 찾았다. 하지만 로벨이라고 상식 밖의 일에 대항할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사의 본능으로, 혹은 오랜 습관으로, 그것도 아니면 자기방어의 방편으로 흐룬팅을 뽑았다. 챙-! 그러자 의외의 효과가 있었다. 그림자는 벽에 부딪친 것처럼 로벨의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고 흐룬팅의 검광이 닿지 않는 곳에서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뭐야? 뭐야? 대체 뭐야!”
로벨과 플레일과 길잡이는 아주 작은 외딴 섬에 갇혔다. 로벨은 주변을 경계하기 위해 칼날을 이리저리 돌렸는데, 그때마다 그림자가 범람하는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전투마 플레일과 길잡이 더미가 종을 초월해서 아우성쳤고, 로벨은 별수 없이 흐룬팅을 한 곳에 고정시키고 아론다이트를 추가로 뽑아 반대쪽을 경계했다.
“그림 리퍼! 장난치지 마!”
장난치고는 무시무시하지만, 장난 이상의 효과가 없다는데 동의했다. 그림자가 숲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흡사 시간을 되감는 것 같았다.
“흐룬팅. 인지의 세계에서 빚어낸 마법의 검. 요정왕의 안배인가?”
그림자가 집중된 곳에서 사람이 불쑥 나타났다. 고행하는 수도승처럼 낡은 꼬뜨를 입고, 코까지 내려오는 깊은 후드를 쓰고, 쇠구슬처럼 탁한 목소리를 내었다. 볼프 후작이 일러준 모습과 똑같았다.
로벨은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겨냥하고 이를 갈았다.
“난 너희들이 싫어.”
길잡이 더미는 괴물이 복수로 지칭되자 당황했다. ‘저런 게 또 있다고?’ 로벨은 그림 리퍼의 무기와 복장을 살피며 조금씩 다가갔다.
“내 부하를 해친 게 네놈이야?”
“그렇다.”
생각 외로 싱겁게 인정했다.
“시체는 어디 있어?”
“먹었다.”
그런데 뒷말은 싱겁지 않았다. 로벨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인간을 먹어? 오크처럼?”
“가치를 무시하고 존재를 말살해서 양분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내가 먹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애꾸눈과 울프 용병단의 원수란 것은 알겠어!”
로벨은 땅을 박차고 뛰었다. 종아리까지 쌓인 눈과 눈 속의 숨겨진 돌뿌리, 나무뿌리 따위로 제 속도를 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상식적인 기준에서 상당히 빨랐다. 그러나 그림 리퍼는 흐룬팅이 닿기 전에 스르륵- 녹아내려 로벨 뒤쪽에 나타났다.
“내 이름은 그림 리퍼(Grim Reaper). 영혼의 수확자이자 사자의 인도자. 내 앞에서는 누구도 삶을 정의하지 못하니, 나는 존재를 부정하고, 가치를 부정하고, 의미를 부정한다.”
“타핫!”
로벨은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을까 싶은 동작으로 몸을 180도 돌렸다. 하얗고 까만 두 자루 칼도 따라 돌았다. 그러나 그림 리퍼는 또다시 로벨 뒤로 이동했다. 정말 그림자랑 싸우는 기분이었다. 무섭기보다 얄미웠다.
“나는 인간이 가진 죽음의 공포에서 태어났다. 내 앞에서 나약한 이성과 빈약한 감정은 무의미하다.”
“언제까지 피하나 보자!”
로벨도 재차 몸을 돌려 아론다이트를 휘둘렀다. 그림 리퍼는 비웃는 기색 하나 없이 다시 로벨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길잡이 더미가 답답해서 빼액! 소리쳤다.
“으윽! 저 멍청한 백작 나으리가...!”
그러나 성급한 평가였다. 그림 리퍼 가슴으로 길쭉한 쇠붙이가 파고들었다. 푹- 사람처럼 생겨서 그런지 사람을 찌를 때와 느낌이 비슷했다.
“...어떻게?”
그러나 상대는 인지의 생물일뿐 사람이 아니다. 그림 리퍼는 남의 몸뚱이 관찰하듯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어떻게 당했는지 깨달았다.
“똑같은 수법에 세 번이나 넘어갈까?”
로벨은 등 돌린 채 입꼬리를 올렸다. 길잡이 더미도 뒤늦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로벨은 오른손으로 아론다이트를 휘두르면서 왼손의 흐룬팅을 반 바퀴 돌려 잡아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로 찔러 넣었다. 완벽하게 의표를 찌른 공격이었다.
“아주 훌륭하군. 늑대의 왕과 뱀파이어 군주가 관심가질만하다.”
그림 리퍼는 흐룬팅의 칼날을 잡았다. 로벨은 칼이 뽑히게 그냥 두지 않았다. 체중을 실어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내장이 토막 나고 갈비뼈가 우드득- 부러졌다. 핏물과 살점과 조각난 장기가 꿀렁꿀렁 흘러나왔다. 그림 리퍼는 출혈을 감당하지 못해 털썩 무릎 꿇었다.
로벨은 흐룬팅을 놓고 몸을 돌렸다. 새하얀 숲에 기사와 괴물과 붉은 피가 그림처럼 새겨졌다. 길잡이 더미는 입을 쩍 벌리고 훗날 전설로 전해질 풍경을 지켜보았다.
‘생각보다 쉬운데?’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두 손으로 잡아 그림 리퍼의 목을 겨냥했다. 기사 서임식의 한 장면 같았다. 물론, 괴물을 기사 삼고 싶지 않았기에 어깨를 두드리는 대신 목을 쳤다. 써겅-! 그림 리퍼의 목이 잘 마른 짚단처럼 떨어져 나갔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발아래로 내리고 긴 한숨을 쉬었다. 긴장과 분노가 입김이 되어 흩어졌다.
‘마도의 수호자가 죽었어. 내가 죽였어. 내가 해냈어...!’
로벨은 무릎 꿇은 채로 꽁꽁 얼어가는 몸뚱이를 지나 눈밭에 구르는 머리통으로 다가갔다. 칼끝으로 후드를 살짝 벗겼다. 그리고 심히 당황했다.
“이게 마도의 수호자라고?”
앞머리가 정수리까지 벗겨지고, 옆머리에 새치가 희끈희끈하며, 움푹 파인 눈두덩이 주위로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살짝 구부러진 매부리코와 축 처진 입꼬리가 인상적이지만, 전체적으로 평범했다. 기사와 용병을 인형처럼 주무른 공포의 존재라 믿기지 않았다.
“외모로 판단할 일이 아니지만, 아니지만... 사신(死神)의 얼굴이 이럴 것 같지 않은데?”
로벨을 속되다고 비난할 수 없었다. 길잡이 더미가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눈길을 헤집고 가까이오다가 화들짝 놀랐다.
“어엇! 나무꾼 존이잖아!”
“응?”
“가만... 가만... 이런! 맞습니다! 이 친구는 노스폴드의 나무꾼 존입니다. 3년 전에 실종되어서 늑대밥이 된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런 짓을...!”
로벨은 길잡이 더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한참 뒤에 흠칫 놀랐다.
“그렇다면 진짜 그림 리퍼가 아니잖아?”
사람을 조종하는 것이 특기인 마도의 수호자라 이런 일이 가능한 모양이다. 로벨의 사고의 영역을 넓혔다.
‘시체가 없어. 죽이지 않았어. 해치고, 먹었어. 그래, 먹은 거야. 죽은 게 아니야.’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꽉 쥐고 소리 없이 소리쳤다.
‘애꾸눈이 아직 살아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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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혹시나 해서 애꾸눈의 야영지 주위를 살펴보고, 해가 저물 때 숲 밖으로 나왔다. 야영지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울프 용병단은 모닥불을 크게 피우고 기다리고 있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순무, 양배추, 치즈, 소시지, 비스킷 등을 때려 넣은 일명 ‘영원의 냄비’에 국자를 휘젓다가 말 울음에 벌떡 일어났다.
“기사 나리?”
산만한 덩치를 웅크리고 꾸벅꾸벅 조는 외팔이 더치와 전투마가 감기 걸리지 않게 꽁꽁 싸주는 겁쟁이 데비 등도 몸을 일으켰다.
“기사 나리!”
“영주님!”
로벨은 10년 만에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는 용병들을 향해 멋쩍게 손을 흔들었다.
“나 왔어.”
로벨은 노스폴드 시티로 복귀하기 전에 몸을 녹이고 허기를 채울 겸 잠시 쉬기로 했다.
외팔이는 플레일의 고삐를 나무에 묶는 잠깐을 못 견디고 로벨 뒤를 기웃거렸다.
“애꾸눈의 시체는 찾았습니까요? 어떤 놈이 저지른 짓인지 알아냈습니까요?”
로벨은 발가락 슈미츠와 발냄새 베커를 힐끔 보았다. 차갑게 얼어버린 친구 옆에서 따로 이야기 중이었다. 로벨은 코로 한숨을 쉬고 짧게 말했다.
“애꾸눈이 살아있을지도 몰라.”
설명이 짧아서 반응이 수 초 뒤에 나왔다.
“예? 예옛?”
“차, 참말입니까요?”
외팔이 더치가 덩치에 안 어울리게 펄쩍 뛰었다.
“확실하지 않아. 하지만 가능성이 있어.”
과묵한 몬트는 실처럼 가느다란 눈을 주먹만 하게 치켜떴고, 허풍쟁이 제이콥은 춤을 출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로벨은 미안한 감정을 담아 덧붙였다.
“그리 기뻐할 일이 아니야.”
“어째서요? 아! 어디 숨었는지 몰라서입니까요?”
“그것도 그거지만...”
로벨은 길잡이의 참견을 받아가며 나무꾼 존과 싸운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이해력이 떨어지는 외팔이만 빼고 모두가 심각해졌다.
“애꾸눈이... 그 난민 도둑놈처럼 이상해졌을까요?”
“그럼 우리를 공격할지도 모르네?”
로벨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두 번 가로저었다.
“우리를 공격하면 그나마 다행이야.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짓을 하다가 죽을 수 있어. 아니면 빌포이 다이첼 경처럼 미쳐버릴 수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