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마법
149화. 마법
로벨은 동이 트자마자 외팔이 더치 이하 울프 용병단을 두들겨 깨웠다. 한겨울의 강행군으로 피곤할 텐데도 군말 없이 일어나 무구를 점검하고 짐을 챙겼다.
로벨은 고만고만한 전투마 사이에서 대장 노릇하는 플레일을 따로 빼내와 웨던 남작 서재에서 슬쩍한 각설탕을 먹였다. 플레일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좋아했다.
“오늘도 잘 부탁해.”
“푸르릉!”
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돌아보았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한쪽 팔이 불편한 외팔이 더치에게 망토를 씌워주었고, 겁쟁이 데비와 흉내쟁이 퍼시발은 두툼한 모직담요와 방수포를 둘둘 말아서 전투마 엉덩이에 올리고 있었다. 서두르는 기색 없이 출발 준비를 끝냈다. 웨던 남작이 가죽 망토를 여미며 배웅 나왔다.
“벌써 가시오?”
어젯밤 일로 얼굴을 마주하기가 부담되었다. 로벨은 자줏빛으로 물들어가는 아침 하늘을 올려다보고 대답했다.
“해가 짧으니까.”
“흠. 이해하오.”
대체 뭘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묻지 않았다.
웨던 남작은 하인을 향해 손뼉을 쳤다. 누구를 찾는 듯하더니, 저택 구석에서 어린아이가 나타났다.
‘응? 아이가 아니야?’
키는 로벨의 허리춤 밖에 오지 않는데,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코밑에 수염이 풍성했다. 시골에서 보기 드문 난쟁이였다.
“이 친구를 데려가시오.”
“누구요?”
“어제 말한 길잡이요. 울프 용병단의 흔적이 발견된 곳까지 안내해 줄 것이오.”
난쟁이는 키가 큰 로벨을 불안하게 올려다보았다.
“전 더미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백작님.”
로벨은 난쟁이가 익숙하지 않아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외팔이 더치가 바클러를 만지작거리며 다가왔다.
“기사 나리, 준비가 끝났습니다요.”
로벨은 외팔이에게 길잡이 더미를 소개해주고 플레일 안장에 올랐다. 웨던 남작이 기사처럼 주먹을 붙이고 인사했다.
“본인이 할 말은 아니지만, 부디 몸조심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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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무슨 일 있었습니까요?”
외팔이 더치가 로벨 옆에 바짝 붙어서 질문했다. 로벨은 아멧의 고리를 만지다가 시선을 돌렸다.
“왜?”
“그 시장이란 나리가 기사 나리를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요.”
“그럴 거야.”
웨던 남작은 마도의 수호자에게 조종당했다. 그러나 딱히 탓할 생각은 없었다. 볼탄 반도의 절반을 지배하는 볼프 사트로 후작조차 속수무책으로 당했는데, 일개 자유도시 시장이 대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애꾸눈의 흔적을 찾는 거야.”
외팔이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래서 남들 두 걸음 갈 때 혼자 세 걸음씩 가는 길잡이 더미를 닦달했다.
“이봐, 꼬맹이. 제대로 가고 있는 거 맞냐?”
길잡이는 외팔이를 힐끔 보고 뚱하게 대꾸했다.
“내 이름은 더미요. 이름으로 불러주쇼.”
“그래그래, 꼬맹이 더미. 똑바로 가는 거 맞냐고.”
길잡이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용병 패거리에게 덤빌 만큼 무모하지 않았다.
“여기서 한 시간만 더 가면 되오.”
로벨은 시야를 가득 채운 눈 덮인 나무를 훑어보고 길잡이에게 물었다.
“이 숲은 아주 넓은데, 내 부하를 어떻게 찾았어?”
“제가 자주 다니는 길에서 찾았습니다.”
“자주 다녀? 직업이 뭐야? 광대는 아닌 것 같은데?”
“난쟁이가 모두 광대는 아니지요. 사냥꾼입니다.”
외팔이 더치가 큰소리로 비웃었다.
“푸하하! 사냥꾼? 사냥감이 아니라? 그 짧은 팔로 활은 다룰 수 있냐?”
“숙련된 사냥꾼은 활보다 덫을 선호합니다. 가죽이 상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네가 숙련된 사냥꾼이다?”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아래로 끌어내리며 조용히 말렸다.
“외팔이, 조용해.”
외팔이는 입을 다물었다. 로벨은 외팔이 대신 길잡이에게 사과했다.
“이해해줘. 가장 친한 친구가 죽어서 신경이 날카로워.”
“이해합니다. 우리 난쟁이들은 옛 신에게 버림받은 추악한 괴물이니까요.”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로벨이 진심으로 위로했다. 길잡이는 사회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하늘처럼 높은 로벨을 올려다보았다.
“거짓말인 줄 알지만, 거짓말을 해줄 정도로 상냥한 기사 나으리인 것도 알겠습니다.”
로벨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해명하지 않았다. 해명할 이유도 없지만, 해명할 시간도 부족했다.
“웬 놈이냐!”
“사, 사람인가?”
울프 용병단 우측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로벨은 플레일을 멈추고 말머리를 돌렸다.
눈이 내려앉은 앙상한 숲 저편에서 다수의 사람이 걸어왔다. 소리 없이 나타난 탓에 무기가 마중 나왔다.
로벨은 말수 없는 숲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마감이 안 좋아서 실오라기가 나풀거리는 지퐁(Gipon:남성용 조끼)을 입고, 무두질이 엉성한 가죽 모자를 쓰고, 대형 낫, 쇠스랑, 생나무로 만든 클럽 따위를 하나씩 꼬나들었다. 과묵한 몬트가 싱겁다는 듯이 정체를 밝혔다.
“난민 도적입니다.”
팽팽한 긴장이 빠르게 늘어졌다.
“하! 겁대가리 상실한 놈들일세. 우리가 누군 줄 알고...”
“가만, 저 새끼들이 우리 애들 해친 거 아냐?”
“야! 너거들! 이리 와봐! 못 들은 척하지 말고!”
울프 용병단은 난민 도적을 잡기 위해 다가갔다. 로벨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표정이 없어?’
어지간한 강심장도 긴장할 만큼 흉흉한 분위기인데, 난민들의 표정은 건조했다. 꼭 영혼이 빠진 것처럼...
‘영혼? 마법? 마도의 수호자! 그림 리퍼!’
로벨은 플레일에서 뛰어내리며 경고했다.
“잠깐! 멈춰!”
경고가 너무 늦었다. 혹은 너무 빨랐다. 곰발 베버는 생각 없이 로벨을 돌아보았고, 그 때문에 머리 위로 떨어지는 대형 낫을 보지 못했다.
푹-!
쇠가죽으로 만든 투구가 허무하게 뚫렸다. 피와 뇌수가 정수리에서 턱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어? 어라?”
곰발은 눈동자를 위로 올렸다. 머리 위에 꽂힌 낫을 보는 듯하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베버!”
발가락 슈미츠가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군용 클리버를 뽑았다. 도적이 낫을 회수하기 전에 오른팔을 자르고 복부를 걷어찼다.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서 눈밭을 붉게 물들였다.
“이 개자식들이!”
붉게 물든 것은 눈(雪)만이 아니다. 울프 용병단의 눈(目)도 새빨갛게 충혈되었다.
“죽여! 다 죽여!”
“죽여 버려!”
울프 용병단이 무기를 앞세우고 달려들었다. 살인의 프로답게 겁 없는 난민들을 둘, 혹은 셋으로 쪼개주었다. 고요한 숲 한켠에 피와 살점이 난자되었다.
“미쳤어! 전부 미쳤어!”
길잡이 더미가 새하얗게 질려서 뒷걸음질 쳤다. 로벨도 일부 동의했다.
‘정상이 아니야.’
난민 도적은 확실히 이상했다. 팔이 잘려서 피가 솟구치고, 배가 찢어져서 내장이 쏟아지는데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다. 마법으로 조종되는 것이 분명했다.
‘울프 용병단도 이상해.’
누가 어떻게 봐도 정상이 아닌데 울프 용병단은 이상함을 알아채지 못했다. 정신줄을 놓고 살인에 몰두했다.
로벨은 유일하게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길잡이에게 고삐를 주었다.
“저리 피해 있어.”
“예?”
로벨은 두 번 말하지 않았다. 눈밭에 팽개쳐진 깃발 창을 잡고 학살의 현장으로 걸어갔다.
“외팔이! 허풍쟁이! 정신 차려! 발가락! 발냄새! 이건 마법이야!”
그때 흉내쟁이 퍼시발이 로벨을 향해 워 해머를 휘둘렀다. 로벨은 왼팔로 머리를 감싸며 카우터로 공격을 튕겨냈다.
“...이거 집사가 알면 감봉이야.”
“죽어! 죽어!”
로벨은 유구한 세월 동안 삶의 지혜로 전해진 격언을 떠올렸다.
“매가 약이라지?”
로벨은 깃발 창을 머리 위로 한 바퀴 돌려 사랑과 우정과 원심력을 담아 흉내쟁이를 후려쳤다. 퍽-!
이후 로벨은 번거롭게 말을 걸지 않고 그냥 두드려 팼다. 제대로 싸우면 아무리 로벨이라도 울프 용병단 8명을 이길 수 없지만, 지금은 다들 정신이 나가 있어서 어렵지 않았다.
여섯 번째로 겁쟁이 데비를 때려눕히고, 일곱 번째로 허풍쟁이 제이콥을 향해 피 묻은 깃발을 돌렸다.
“자, 잠깐만요! 저는 멀쩡합니...!”
퍽! 퍽!
로벨은 공정한 성격이라 예외를 두지 않았다. 허풍쟁이에 이어서 도망치려는 외팔이까지 때려잡은 후 너덜너덜해진 깃발 창을 치웠다.
“정신 좀 들어?”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요! 제정신이라고!”
허풍쟁이가 정수리를 부여잡고 항의했다. 로벨은 비로소 안심했다.
“멀쩡해졌구나! 정말 다행이야!”
과묵한 몬트는 피 묻은 헌팅 소드와 죽어 나자빠진 난민 도적을 번갈아 보고 깜짝 놀랐다.
“내, 내가...?”
로벨은 다른 용병들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딱 한 사람만 빼고 평소의 모습이었다. 발가락 슈미츠가 피 묻은 클리버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곰발이 죽었습니다! 죽었다고요!”
“...시체부터 수습해.”
로벨은 착잡하게 말했다. 결과만 보면 대승이었다. 울프 용병단은 한 명 전사했고, 난민 도적은 스무 명이 학살되었다. 하지만 승리를 기뻐할 수 없었다.
“사악한 마법이 작용하고 있어. 잘은 몰라도 사람의 감정을 조종하는 모양이야.”
로벨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볼프 사트로 후작과 빌포이 다이첼 경이 겪은 것과 비슷했다. 심리적으로 동요하거나 감정이 불안해지면 지배당하는 듯했다. 바꿔 말하면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저항할 수 있다. 과거 마녀 키르게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병에 걸리지 않듯, 정신이 건강한 사람은 마법에 걸리지 않는다.
“키르케를 데려올걸 그랬어.”
“기사 나리, 애꾸눈을 살해한 놈이 마, 마법사일까요?”
“그럼 우린 어찌합니까요?”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경외하고 두려워한다. 마법이 그러했다. 마법사가 아닌 이상 마법사를 무서워하지 않을 수 없다.
“이대로 가는 것은 위험해.”
로벨은 겨울바람으로 빠르게 차가워진 곰발과 난민 도적을 한 번씩 보았다.
“너희는 숲 밖에서 대기해.”
“기사 나리 혼자 가시려고요?”
“혼자가 아니야.”
로벨은 플레일 이하 전투마 고삐를 꼭 쥔 채 부들부들 떠는 길잡이 더미를 가리켰다
“길잡이가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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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 용병단은 전사자의 시신을 챙겨서 철수했다. 외팔이가 몇 번이고 남겠다고 우겼지만 로벨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볼프 후작이 겪었던 일이 로벨에게 일어날 수 있었다.
로벨의 곁에는 언제나 충직한 전투마 플레일과 위험이 되지 않는 길잡이 더미만 남았다. 길잡이가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또 도적이 나타나면 어찌합니까?”
“방해하면 죽이고, 아니면 놔둘 거야.”
“아니... 제 목숨이 어찌 되냐는 질문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그리 중요한 질문이 아니군요.”
로벨은 플레일 안장에 올라가자고 손짓했다. 길잡이는 머뭇거리다가 발을 떼었다. 로벨은 평균보다 조금 작은 새 친구를 위로했다.
“도적은 문제가 아닐 거야.”
“도적이 아니면 뭐가 문제입니까?”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하늘을 보았다. 여름이나 가을에 왔으면 울창한 나뭇잎이 지붕이 되었겠지만, 지금은 앙상하게 뼈대만 남아 햇살과 눈송이를 뿌리고 있었다.
“괴물이 숨어있거든.”
의도와 달리 위로가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