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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48화 (148/605)

148화. 거인의 숲

148화. 거인의 숲

로벨은 노스폴드 시장 웨던 남작의 편지를 읽었다. 젠트리 계급에 물든 도시 귀족답지 않게 짧고 간결했다. 펄프 대장이 잔뜩 쉰 목소리로 물었다.

“영주님, 뭐라고 합니까?”

내용이 짧다고 무게가 가볍지는 않았다. 로벨은 깊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애꾸눈 볼포스 이하 울프 용병단 12명이 전원 사망했어.”

쾅!

외팔이 더치가 성질을 못 참고 테이블을 후려쳤다. 아야와 이야카가 깜짝 놀라 도망갔다.

“어떤 놈입니까? 어떤 놈이 감히 애꾸눈을...!”

“거인의 숲 도적떼라는데, 솔직히 믿기지가 않아.”

펄프 대장도 동의했다.

“무장도 변변치 않은 난민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럼 대체 어떤 시부랄 것이 한 짓이란 말이오!”

로벨은 외팔이를 돌아보았다. 화내지도, 위로하지도 않고 그냥 보았다. 로벨과 외팔이 사이에는 그걸로 충분했다. 깊고 깊은 검은 눈에 입을 다물었다. 로벨은 편지와 외눈 안대를 상자에 넣고 명령했다.

“노스폴드 시티 주변 지리에 밝은 인원으로 10명 골라서 준비해.”

“직접 가실 겁니까?”

“응. 시신을 수습하고, 누구 짓인지 밝혀낼 거야.”

“저도 갑니다! 갈 겁니다요!”

외팔이가 다시 소리쳤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만 나가라 손짓했다.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는 상자를 가만히 보다가 묵례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마녀 키르케도 아야와 이야카를 찾아 떠나고, 리암 수사도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로벨의 집무실에는 로벨과 어린 집사와 애꾸눈의 유품만 남았다. 로벨이 나직이 속삭였다.

“이제 울어도 돼.”

어린 집사가 꾹꾹 참았던 울음을 비로소 터트렸다. 슬픔, 후회, 죄책감이 북받쳐 올랐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의뢰를 받아서... 제가 애꾸눈 아저씨를 보냈어요...!”

로벨은 어린 집사의 머리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아니에요! 제 잘못이에요! 전 도적떼가 있는 걸 알면서 보냈어요.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요.”

“펄프 대장이 말했잖아. 도적 짓이 아닐 거야.”

“영주님이, 영주님이 가겠다고 할 때 보내드렸어야 했어요.”

“그럼 나까지 위험했을 거야.”

로벨은 어린 집사의 뒤통수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앞섶이 조금씩 축축해졌다. 어린 집사는 5살 꼬마처럼 펑펑 울었다.

“이제 어쩌죠?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우선 쉬어. 따뜻한 술을 한잔하고 깊은 잠을 자.”

로벨의 위로에 어린 집사가 실소했다. 필립 로드릭이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왔을 때, 그리고 로벨 로드릭이 침실에서 목을 매었을 때 어린 집사가 한 말이었다.

“영주님은, 영주님은요?”

“난 할 일이 있어.”

어린 집사는 로벨의 품에서 조금 떨어졌다. 로벨의 반대손이 아론다이트의 폼멜을 꽉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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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꾸눈 볼포스는 울프 용병단 창단 멤버이자 최정예 크로스보우 1소대장이었다. 더불어 차분한 성격과 사려 깊은 행동으로 고용주와 동료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았다.

로벨이 컴포지트 아머를 착용하고 메인 홀로 내려오자 펄프 대장이 곤란한 얼굴로 보고했다.

“영주님을 따라가겠다는 놈들이 쉰 명이 넘습니다.”

로벨은 조그맣게 한숨 쉬고 연병장으로 나갔다. 울프 용병단이 완전무장하고 모여 있었다.

“기사 나리! 애꾸눈을 죽인 도적놈을 잡으러 간다고 들었습니다요!”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로벨은 소드 벨트의 남은 끈을 매듭짓고 울프 용병단 앞으로 걸어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이었다. 손가락 하나하나, 발걸음 하나하나가 똑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왠지 모르게 차갑고 차분했다.

“지금은 겨울이야. 여럿이 다니면 불편해.”

울프 용병단은 로벨이 뭐라 말리든 바락바락 우길 생각이었으나, 분위기에 휘말려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겁쟁이 데비, 발냄새 베커, 흉내쟁이 퍼시발, 외팔이 더치, 허풍쟁이 제이콥, 코골이 바디, 발가락 슈미츠, 곰발 베버, 그리고 과묵한 몬트. 남은 인원은 각자 자리로 돌아가.”

로벨이 칼자루를 잡고 명령하자 울프 용병단은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슬금슬금 흩어졌다. 수행원으로 지명된 용병은 각자 전투마에 식량과 야영도구를 나눠 싣고 깃발을 높이 들었다.

“어디로 갑니까요?”

“노스폴드 시티에서 웨던 남작을 만날 거야.”

로벨은 플레일 안장에 올라 짤막하게 명령했다.

“출발.”

@

겨울여행에 필요한 물자를 몽땅 말에 실어서 행군속도가 대단히 빨랐다. 하루가 꼬박 걸릴 길을 한나절 만에 주파해서 해가 지기 전에 노스폴드 시티 성문에 도착했다.

“누, 누구요!”

노스폴드 시티가드는 석양을 등지고 나타나 무장집단에 기겁해서 포차드를 겨누었다. 로벨은 그런 시티가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웨던 남작을 만나러 왔어.”

“시, 시장님이요?”

“비켜.”

로벨은 깃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시티가드는 뾰족한 창날에 한번 놀라고, 눈에 익은 문양에 다시 놀랐다.

“로드릭 깃발?”

“로벨 로드릭 백작이다!”

시티가드는 로벨의 정체를 깨닫자마자 즉시 비켜섰다. 굶주린 사자떼, 혹은 끔찍한 역병 환자와 마주친 얼굴이었다. 화가 잔뜩 난 그랜드 챔피언과 울프 용병단이면 비슷하게 위험하긴 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제지 없이 웨던 남작의 저택으로 달려갔다.

용케 로벨 로드릭이 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는지 웨던 남작이 저택 밖으로 뛰쳐나왔다.

“로, 로벨 경...”

웨던 남작은 로벨의 얼음장 같은 얼굴과 외팔이의 쇳물 같은 얼굴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로벨은 인사를 생략하고 목적을 밝혔다.

“내 부하를 찾으러 왔소.”

“자, 잠깐 진정하시오! 우선 안으로 들어갑시다. 따뜻한 차를 대접할 테니...”

“두 번 말해야 하오?”

웨던 남작은 하인을 불러서 유품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로벨은 과묵한 몬트에게 플레일 고삐를 맡기고 외팔이와 허풍쟁이만 대동한 채 웨던 남작을 따라갔다.

웨던 남작은 실내가 어두워지도록 굽어보는 용병들이 불편해서 빠르게 해명했다.

“숲에서 발견된 것은 이게 전부요.”

아바레스트, 윈드라스, 반쯤 비워진 쿼럴통, 찢어진 사슬조각, 깨진 투구, 피 묻은 옷가지와 담요, 부러진 단검 등등...

“상대가 도적이라면 이 비싼 무기를 그냥 두고 갈 리 없지.”

“다룰 줄 몰라서 놓고 간 게 아냐?”

“그래도 팔면 돈이 되잖아.”

로벨은 아바레스트를 잡았다. 애꾸눈 것이지, 애꾸눈의 소대원 것인지 모르지만, 밥벌이 도구를 잃을 정도의 참상을 겪은 것은 분명했다.

“이걸 어디서 발견했소?”

“거인의 숲 북동쪽이오. 거인의 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금 가시려는 거요? 곧 어두워질 거요. 그러지 말고 오늘 밤은 여기서 쉬고 내일 아침 출발하시오. 길잡이를 붙여주겠소.”

로벨은 몸을 반쯤 돌린 채로 고민했다. 한밤중에 숲을 헤매는 것은 현명한 짓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정쩡한 자세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신세 지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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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핏자국이 남은 아바레스트를 쓸어 만졌다. 로벨에게 아바레스트 다루는 법을 가르쳐 준 것이 애꾸눈이었다. 재능이 없어서인지, 성격에 안 맞아서인지 잘 쏘지는 못했다.

“기사 나리, 식사하시지요.”

허풍쟁이 제이콥과 과묵한 몬트가 커다란 쟁반을 가져왔다. 갓 구운 빵과 잘 익은 닭고기, 향이 진한 치즈 한 덩이와 숙성된 와인 한 병이었다. 로벨이 저녁 초대를 거절하자 웨던 남작이 음식을 챙겨 객실로 올려주었다.

로벨은 아바레스트를 치우고 빵을 잡았다. 검고 단단한 보리빵이 아니라 희고 부드러운 밀빵이었다. 꿀이 살짝 발라져 단맛도 감돌았다.

“너희도 먹어.”

허풍쟁이가 냉큼 닭다리를 챙겨갔다. 무례하지만 탓할 수 없었다. 로벨의 저녁을 챙기느라 아직 저녁을 못 먹었다. 로벨은 빵조각을 삼키고 말했다.

“인간이 한 짓이 아니야.”

허풍쟁이는 닭고기를 씹지도 않고 꿀떡 삼킨 후 물었다.

“그럼 늑대한테 당했단 말입니까요?”

“늑대일 수도 있고, 그보다 더한 것일 수도 있어.”

과묵한 몬트가 와인을 따르며 조용히 물었다.

“증거가 있습니까?”

목소리와 달리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벽난로의 불이 반사된 탓은 아닐 것이다.

“무기를 놓고 시체를 가져갈 인간은 없으니까.”

“...그렇군요.”

“그럼 오크일까요?”

“아니. 오크도 무기를 챙겨갔을 거야. 인간의 무기를 좋아하니까.”

“그럼 대체 누굽니까요?”

로벨은 짚이는 것이 있지만 말하지 않았다.

“글쎄. 내일이면 알겠지. 외팔이들한테 식사가 끝나는대로 일찍 자라고 말해.”

로벨은 허풍쟁이와 과묵한 몬트를 내보내고 남은 빵을 마저 먹었다. 그리고 소리 없이 객실을 나섰다. 전장에 나왔을 때처럼 갑옷을 벗지 않았다. 오른손에는 장전된 아바레스트가, 왼손에는 칼날이 파랗게 선 대거가 쥐어져 있었다.

로벨은 예전 기억을 더듬어서 웨던 남작을 찾아갔다. 저녁 시간이 지난 탓에 주위를 서성이는 하인은 없었다. 로벨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웨던 남작 침실에 도착했다.

‘노크할까?’

웃기는 생각이었다. 예의를 차릴 거면 무기를 꺼내 들고 오지 않았다. 로벨은 대거를 입에 물고 방문을 열었다. 웨던 남작은 책상에서 숫자 가득한 서류를 검토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응? 누구... 로벨 백작?”

로벨은 혹시 다른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웨던 남작 혼자였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오? 그리고 손에 든 것은... 대, 대체 무슨 생각이오?”

로벨은 웨던 남작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중장갑 기사가 거침없이 움직이자 위압감이 대단했다. 로벨은 책상 위에 아바레스트를 놓고 대거를 꽂아 넣었다. 쾅! 웨던 남작은 화들짝 놀라 의자 끝으로 물러났다. 로벨은 조용히 속삭였다.

“누구 짓이오?”

“누, 누, 누구 짓? 무, 무, 무슨 말씀이오?”

“애꾸눈의 안대를 보낸 자 말이오.”

로벨은 책상 너머로 상체를 기울이고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릉거렸다. 사납고 아름다운 맹수의 하울링이었다.

“울프 용병단의 전사 소식을 전할 거면 편지로 충분하고, 유품을 보낼 거면 가장 비싼 무기를 보냈을 거요. 그런데 당신은 외눈 안대를 보냈소.”

“그, 그것은...”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오. 이미 알고 있으니까. 나를 화나게 해서 불러내려는 것이지. 지금 궁금한 것은 그게 누구 생각이냐는 것이오.”

웨던 남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의자에 몸을 파묻고, 겁먹은 얼굴로 눈치를 보았다.

‘어디를 보는 거야?’

로벨은 웨던 남작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로벨이 들어올 때만 해도 활짝 열려있던 커튼이 어느새 어두컴컴하게 닫혀 있었다. 달빛이 비치는 얇디얇은 천 뒤로 사람 그림자가 얼른거렸다. 이곳이 2층이란 사실을 자각하지 않아도 수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누구야!”

로벨은 아바레스트를 잡아 창문을 쏘았다. 그러나 어떤 사수도 그림자를 맞힐 수는 없었다.

쿼럴은 커튼을 찢고 창밖으로 사라졌다. 찢겨진 천 사이로 그림자가 스며들어왔다.

“듣던 대로 과격하군.”

유리창을 긁는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 어둡고 차가웠다. 로벨은 빈 아바레스트를 치우고 흐룬팅을 뽑았다. 챙-! 새까만 칼날에 불빛이 새겨졌다.

마녀 키르케는 흐룬팅이 인지의 세계에서 벼려낸 마법의 검이라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인간이 아닌 것도 벨 수 있었다.

그림자가 실내로 들어오지 않고 멈췄다.

“이걸 무서워하는 걸 보니까 그놈이구나?”

“나를 아는가?”

“너희 족속들을 알아. 마도의 수호자. 맞지?”

그림자는 고민하는 듯하더니 창밖으로 물러났다. 로벨은 신경질적으로 쫓아갔다.

“도망가지 마! 이리 와!”

그러나 하늘을 나는 재주가 없어 창밖까지 따라가지는 못했다. 그림자는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다 연기처럼 흩어졌다.

‘거인의 숲으로.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로벨은 잘못들은 건가 싶어 웨던 남작을 보았다. 웨던 남작은 눈송이보다 하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것을 암시하는 동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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