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안대
147화. 안대
또다시 겨울이 찾아왔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은 오전과 오후를 합쳐도 한나절이 되지 않으며, 그조차도 하얀 눈에 갇혀 잘 보이지 않았다. 북풍이 살을 에고 눈길이 발을 잡아채는 혹독한 계절이었다.
여름과 가을에 성실히 일한 사람들은 저장된 식량과 장작을 배부르게 보았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혹은 유난히 재수가 없어서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생사를 넘나드는 싸움을 시작했다. 죽음이 머리맡에 내려앉은 잔혹한 계절이었다.
한 차례 폭설이 내린 다음날, 로드릭 마을의 촌장이 죽었다.
지난겨울을 힘겹게 버티더니, 결국 올 겨울을 나지 못했다. 오랫동안 사랑받고 존경받은 촌장이었다.
루시의 울음소리가 눈 속에서 메아리쳤다. 옷을 두껍게 입은 주민들이 꽃을 대신해 은화와 빵을 가져와 위로했다. 로벨은 캐벌비어 모자를 고쳐 쓰고 제안했다.
“장례세를 면제해주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형평성이 어긋나잖아요.”
“내가 임명한 촌장이잖아. 준(准) 귀족 대우를 해줄 수 있어.”
촌장과 촌장 사위 내외 재산이면 장례세 정도는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 로벨의 제안은 오랜 세월 로드릭 마을을 위해 봉사한 공로를 인정하는 것뿐이었다. 어린 집사는 붉은 코끝을 쓱쓱 문지르고 짐짓 기운차게 말했다.
“차기 촌장은 누가 좋을까요? 여관주인 지미 씨? 아니면 사냥꾼 찰드 씨?”
“장례식이 끝나면 따로 불러서 이야기해보자.”
로벨은 하얀 콧김을 뿜으며 앙탈 부리는 전투마를 다독이고 울타리 너머 묘지를 보았다. 리암 수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장례미사를 보았다.
“그래도 성직자가 있어서 다행이야.”
“진짜가 아니라서 문제죠.”
리암 수사는 자신이 사제가 아니라 장례식을 주관할 수 없다고 설명했지만, 허풍쟁이 제이콥이 말했듯 사제와 수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로드릭 마을 주민들은 무작정 미사를 부탁했고, 마음이 약한 리암 수사는 결국 수락하였다.
“옛 신의 교단에서 알면 난리 날 걸요?”
“내가 책임지면 돼.”
로벨과 어린 집사는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가족과 지인이 슬퍼할 시간을 주었다.
어린 집사는 발걸음이 안 떨어지는 듯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강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지난 수년간 함께한 친구의 죽음이 슬픈 것은 당연했다.
“여기 남아도 괜찮아.”
어린 집사는 코를 훌쩍이고 머리를 저었다.
“아니에요. 할 일이 많아요. 마구간 공사가 끝나서 임금을 줘야 해요.”
로벨과 어린 집사는 적막한 마을을 가로질렀다. 시장에 자리 잡은 잡화상인이 화로에 손을 녹이며 무심히 쳐다보고, 어른 옷을 접고 접어서 입은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뛰어다녔다. 어린 집사는 발목을 적시는 눈덩이를 휘저어 털어내고 말했다.
“성(Keep) 안에 들여놓은 전투마를 내보낼 수 있겠어요. 아야랑 이야카만으로도 냄새나는데, 말똥까지 굴러다녀서 아주 못살겠다고요.”
“비싼 말이라고 좋아할 때는 언제고.”
“좋게좋게 생각한 거였죠. 아침마다 똥 퍼 나르는데 좋을 리가 있나요.”
바람이 불자 지붕 위에 눈가루가 꽃씨처럼 휘날렸다. 로벨은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가 고개를 들었다. 구불구불한 언덕길 끝자락에 새하얀 성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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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성문을 지나 전투마에서 내렸다. 그리고 아성에 들어가기 전에 새로 증축한 마구간을 살폈다.
기왕 공사하는 거 제대로 하기로 작정해서 기존 크기의 3배로 늘렸다. 지붕도 한층 높이고, 건초창고도 새로 지었다. 마구를 걸어놓은 받침대도 2단으로 확장했다. 실내도 넓어서 꽉꽉 채우면 말을 10마리도 들여놓을 수 있었다.
로벨은 편자를 고칠 때 쓰는 집게와 망치를 만져보고 입마개와 등자가 줄줄이 걸린 기둥을 훑어본 후 만족했다.
“깨끗해.”
“전부 새것이니까요. 어휴. 돈이 돈이 아니에요.”
히이잉-!
그때, 펄프 대장과 마녀 키르케가 윈필드 산 전투마 3마리를 끌고 찾아왔다.
“영주님, 벌써 오셨습니까?”
“응. 별일 없지?”
펄프 대장은 어깨를 으쓱이고 마녀 키르케를 가리켰다. 마녀는 두 팔 벌려 마구간을 소개했다.
“짜잔! 여기가 너희 집이야! 좋지? 좋아? 좋다고? 그럴 줄 알았어! 이히힛!”
초원에서 온 전투마들은 새집이 마음에 든 듯 콧김을 뿜고 앞발을 굴렀다. 차갑고 딱딱한 메인 홀보다 부드러운 흙과 마른 풀로 채워진 마구간이 편안했다.
어린 집사가 로벨의 전투마를 챙기며 새로 생긴 문제를 거론했다.
“전투마가 많으니까 전투마라고 부르기가 이상해요. 이 녀석도 이름이 있어야겠어요.”
마녀가 오른손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로시난테 3세!”
“...같은 헛소리는 잘 꾸겨서 저리 던지고, 한번 고민해 봐요.”
마녀가 삐져서 입술을 삐죽였다.
로벨은 정든 전투마를 쓰다듬었다. 그랜드 토너먼트 경기를 위해 빌려서 우승상금으로 값을 지불하고 데려왔으니, 벌써 5년 전이다. 그때가 한창때였으니, 지금은 전투마치고 나이가 적지 않았다. 지금껏 이름을 주지 않은 것이 미안했다.
“플레일(Flail)이라고 하자.”
“플레일이요? 그 쇠사슬에 작대기 달린 무기요?”
“응. 이 녀석 이름은 플레일이야.”
로벨은 플레일의 갈기를 빗겨주며 속삭였다. 펄프 대장이 플레일을 축하했다.
“가난한 자의 무기로 시작해서 기사의 무기로 발전한 도구지요. 영주님의 말에게 딱 어울리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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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와 리암 수사가 기를 쓰며 도로를 만든 덕분에 눈 쌓인 겨울에도 상인과 손님이 찾아왔다. 주된 거래 상품은 귀리와 통밀, 염장된 양고기와 순무였다.
검은 숲 몬스터로 가을 농사를 망친 인근 영지의 농민들이 겨울을 날 식량을 구하기 위해 세간살이를 가지고 로드릭 시장에 찾아왔다. 한 사람 배불리 먹기 힘든 달걀 한 줌으로 한 가족을 먹여 살릴 귀리 한 가마로 바꿔가고, 손이 부르트도록 꼰 새끼줄 꾸러미로 순무 한 포대를 얻어갔다.
로벨은 작은 잔에 티스푼과 함께 올라온 삶은 계란을 보고 한숨 쉬었다.
“사치야. 사치.”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계란 껍질을 까면서 반박했다.
“세금 대신 받은 거니까 그냥 먹어요. 오래된 거라 되팔지도 못해요.”
계란이 못 먹을 정도로 비싼 음식은 아니지만, 아침저녁으로 식탁에 올려도 될 만큼 값싼 음식도 아니었다. 로드릭 마을에는 닭이 몇 마리 없어서 더욱 그러했다.
“세금을 페닝으로 내라고 해야겠어요. 현물로 받으니까 처치 곤란한 게 너무 많아요.”
리암 수사가 까칠까칠한 정수리를 쓱쓱 긁고 반대했다.
“농사짓는 형제자매에게 돈이 얼마나 있겠어요. 보존이 가능한 거면 현물로 받으세요.”
“우리가 남의 가족까지 신경 쓸 만큼 부자는 아니거든요?”
로벨은 계란을 치우고 화재를 돌렸다.
“울프 용병단에 말을 탈 줄 아는 용병이 몇이야?”
펄프 대장은 계란을 통째로 입에 넣다가 도로 빼냈다. 어린 집사는 새로 배운 욕을 중얼거렸고, 마녀 키르케는 슬그머니 자리를 옮겼다.
“겁쟁이 데비, 발가락 슈미츠, 흉내쟁이 퍼시발 셋입니다.”
“세 명뿐이야?”
“자기도 탈 수 있다고 우기는 놈이 더 있긴 한데, 영 믿음이 안 가서 제외했습니다.”
“소속을 내 랜스로 옮겨서 기마훈련 시켜.”
펄프 대장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저희는 말을 타고 싸워본 적이 없어서...”
그냥 말을 타는 것도 힘든데, 말 위에서 창칼을 다루는 것은 몇 배 더 어려운 일이었다. 로벨은 잠깐 고민한 후 말했다.
“자작나무 숲 호른 경에게 부탁할게.”
“그 기사 나리라면 다들 좋아하니까, 괜찮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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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은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농사꾼보다 부지런한 것이 장사꾼이고, 기사보다 용감한 것이 용병이었다. 봄이 올 때까지 그저 기다리기만 한 지난겨울들과 달리 시장일과 용병일로 쉴 틈이 없었다.
“리암 수사의 말이 옳았던 거죠.”
“도로 말이야?”
“길을 닦고 표지판을 놓으니까 이런 날씨에도 행상인이 찾아오잖아요.”
로벨은 창밖을 힐끔 보았다. 먹구름이 잔뜩 끼고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졌다. 저녁이 되면 왕창 쏟아질 듯했다. 노스폴드 시장의 의뢰를 받아 늑대 사냥에 나선 울프 용병단이 걱정되었다.
“애꾸눈한테 소식이 있어?”
“예정대로면 오늘 도착해야 하는데, 눈 때문에 발이 묶였을 거예요. 사나흘 기다려야 할 걸요.”
로드릭 마을은 어린 집사와 리암 수사의 꼼꼼한 경영 아래 겨울을 나기 충분했지만, 그 외 지방은 사람도, 짐승도 먹을 것이 부족했다. 오랜 시간 몬스터가 기승을 부린 북쪽 지방은 특히 심각했다. 로드릭 마을까지 피난민이 흘러들어온 것을 보면 굳이 안 봐도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가 봐야 할 거 같은데?”
“어허! 제 말을 벌써 잊었어요?”
어린 집사가 옆구리에 양손을 얹고 엄하게 말했다. 그래 봐야 성인식도 안 치른 14살이지만...
“노스폴드 시티도 사정이 안 좋아. 늑대 때문에 울프 용병단을 불렀지만, 사실 늑대를 못 잡은 이유가 북쪽에서 온 난민 도적 때문이잖아.”
“그걸 알고 있었어요?”
“...나 바보 아니야.”
어린 집사는 14살처럼 배시시- 웃고 해명했다.
“못돼먹은 수작이죠. 도적 소탕보다 늑대 사냥이 싸니까요. 하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 도적도 눈깔이 있으면 중무장한 용병을 습격하진 않아요. 애꾸눈한테 진짜 늑대만 잡으라고 말했어요. 도적하고 엮일 일은 없을 거예요.”
로벨은 어린 집사의 눈치를 보면서 제안했다.
“도적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도망친 농민이잖아. 잘 설득해서 우리 사람으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그 사람들은 이슬 먹고 사나요? 지금은 이슬도 안 나오지만... 아무튼! 올가을에 새로 들인 영지민이 200명이에요. 창고를 늘리고 양조장을 짓는 것도 한계에요. 더욱이 겨울이잖아요? 뭘 먹이고, 어디서 재우려고요?”
“음... 여유 자금을 풀면 안 될까?”
“여유가 있을 때 여유 자금이죠. 지금 여유 없어요. 내년 사업이 어찌 될지 모르는데요.”
로벨은 한숨을 쉬고 어린 집사 말에 수긍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결국 움직이게 되었다.
로벨의 직감대로 폭설이 내렸다. 지난번보다 양이 많았다. 울프 용병단과 로드릭 마을주민은 지붕이 내려앉지 않게 수시로 쓸어내야 했다. 눈을 좋아하는 것은 철부지 어린아이랑 아야와 이야카뿐이었다. 아야와 이야카는 눈 속에 숨어서 지나가는 어린 집사와 마을 아낙을 놀래키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사흘이 지나자 마침내 폭설이 그쳤다. 그러나 로벨의 근심은 폭설과 비교가 안 되게 깊어졌다.
로벨은 노스폴드 시장이 보낸 상자를 받았다. 크지도, 비싸지도 않지만, 소중한 물건이 담겨 있었다.
“이건...”
로벨과 달리 즉흥적이고 직설적인 사람이 있었다. 외팔이 더치가 테이블을 쾅! 소리 나게 내리쳤다.
“어떤 쌍놈의 자식들이!”
“진정해라. 영주님 앞이다.”
펄프 대장이 외팔이 말렸지만, 그 역시 누구 하나 때려죽일 표정이었다. 로벨은 상자 안에 물건을 꺼냈다. 편지가 함께 있었지만 당장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볼포스?”
애꾸눈이 버릇처럼 매만지는 외눈 안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