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46화 (146/605)

146화. 강아지

146화. 강아지

로벨은 흥분한 전투마가 너무 앞서가지 않게 고삐를 당겼다. 그리고 아론다이트를 앞뒤로 휘저으며 발바닥에 땀나게 뜀박질하는 울프 용병단을 격려했다.

“거의 다 왔어! 조금 더 힘내!”

“헥! 헥! 말씀은! 헥! 헥! 쉽지요! 헥! 헥! 직접 와서! 헥! 헥! 뛰어보세요!”

허풍쟁이 제이콥이 숨을 헐떡이면서도 할 말은 다했다. 로벨은 태평하게 ‘역시 원년 멤버야. 좀 더 빨리 뛸 수 있겠어’ 따위로 응원했다.

로벨이 응원하지 않아도 허풍쟁이 제이콥 이하 울프 용병단 별동대는 죽은 힘을 다해 뛰고 있었다. 불과 60피트 뒤에서 오크 1개 중대가 쫓아오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장을 최대한 가볍게 했지만, 계곡을 넘나들며 900야드 거리를 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간을 산 채로 잡아먹는 오크만 아니었으면 다 때려치우고 항복했을지도 모른다.

첫 번째 낙오자가 발생하기 직전, 로벨과 별동대는 간신히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다. 로벨은 전투마 옆구리를 걷어차서 한 발 먼저 버드나무 언덕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언덕 아래로 말머리를 돌려서 허풍쟁이와 오크 무리를 내려다보았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아침 해가 떠올랐다.

로벨은 태양을 등지고 숨을 헐떡이며 쫒아오는 오크 무리를 겨냥했다.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서 마치 거인이 굽어보는 듯했다.

“울프 용병단!”

언덕 위에 자리 잡은 것은 로벨 혼자가 아니었다. 버드나무를 중심으로 80여 명의 중무장 용병이 몸을 일으켰다. 오크 100마리를 유인해 온 허풍쟁이 이하 별동대 얼굴에 환희가 감돌았다.

“조준!”

로벨이 외치자 크로스보우, 롱보우, 자벨린(Javelin), 스피어 등등 각종 투사병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적의와 식욕으로 반 마일 거리를 쫓아온 오크 무리가 혼란에 빠졌다. 전술적으로 승부가 갈렸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더 높은 곳에서, 더 좋은 시야를 가지고, 더 우수한 무기를 준비했다.

“발사!”

“발사!”

살의를 탑재한 병기가 언덕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지칠 때로 지친 오크들은 피하는 시늉조차 못 하고 꼬치가 되어 우르르 쓰러졌다. 한 번의 사격으로 스무 마리가 죽었다.

지휘체계가 분명하지 못한 오크들은 혼란에 빠졌다. 유능한 지휘관이 있다면 별동대에 따라붙어 사격을 저지하거나 산개해서 후퇴했겠지만, 오크들은 어느 쪽도 시도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우왕좌왕하며 멈춰버렸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에게는 잘 차려진 밥상이었다.

“재장전! 재장전해라!”

“사격 개시!”

“스피어맨 전진!”

로벨은 80명의 울프 용병단을 손발처럼 움직였다. 수많은 전장을 헤치며 동고동락한 보람이 있었다.

울프 용병단 스피어맨 소대가 발맞춰서 언덕을 내려갔다. 두 차례 일제사격에도 용케 살아남은 오크들을 확실하고 착실하게 살해했다.

운이 좋고 판단력이 뛰어난 일부 오크는 언덕을 빙 돌아 도주했으나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대부분은 무의미한 저항 후 스피어에 박제되거나 허허벌판으로 도망치다가 크로스보우맨의 표적이 되었다.

로벨은 전투마를 몰아 피에 젖은 언덕을 내려왔다. 애꾸눈과 외팔이가 숨이 붙어있는 오크를 하나씩 처리하고, 허풍쟁이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낄낄거리며 웃었다. 흔한 전쟁 풍경이었다.

“이걸로 끝났어.”

로벨은 아멧을 벗고 머리카락을 좌우로 털었다. 늦가을 바람이 땀을 식혔다.

“이제 동부지역도 안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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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볼탄 반도 북부와 동부를 순회하며 6전 6승의 전공을 세웠다. 300마리가 넘는 오크를 학살하고 5개 영지를 구원했다. 눈이 있고 귀가 있는 볼탄 반도 주민들은 입을 모아 칭송했다.

“늑대성과 강철성이 수호하는 한 볼탄 반도는 안전해.”

“프란시스 가문의 창과 사트로 가문의 방패잖아.”

“그런데 어느 쪽이 강할까?”

“당연히 늑대성이지! 전적이 있잖아!”

“그건 무능한 조지 도트넘 백작 때잖아.”

세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떠도는 가운데, 검은 숲 몬스터의 볼탄 반도 침공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그러나 로벨의 일정은 빡빡했다. 로벨의 도움을 받은 영주들이 연거푸 승전축하 파티를 열었기 때문이다.

“고명하신 로벨 백작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소.”

“사흘 만에 추악한 괴물들을 퇴치할 줄은 더욱 몰랐지.”

“으하하핫! 맞소! 맞소이다!”

로벨은 어색하게 웃으며 술잔을 받았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구원한 볼탄 반도 동부지역 영주들은 기뻐하며 아부를 늘어놓았다.

남부나 북부에 비해 가난한 이미지인 동부 지방치고 대접이 나쁘지 않았다. 귀한 소와 양을 잡고 새 술통을 뜯었다. 울프 용병단 100여 명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을 정도였다. 계곡성의 나이 든 기사가 쇠고기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북쪽에서는 강철성 영주가 오크 무리를 소탕 중이라고 하오. 그 누구더라, 얼마 전에 기사 작위를 받은 자가...”

“서 리카온 말이오?”

“서Sir는 무슨, 근본도 없는 용병 나부랭인데...”

“아무튼 그 자의 무용이 대단한 모양이오. 소문에는 맨손으로 오우거를 때려잡았다는군.”

로벨은 오우거를 위해 묵념했다. ‘먼 곳에서 와서 고생이 많구나.’

“그런 소문이야 흔하지 않소. 어떤 자는 인간이 아니라고 하더이다. 그 뭐라더라,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늑대의 기사라고 하던데...”

“늑대의 기사는 로벨 로드릭 백작이 아니오?”

“로벨 경은 늑대를 부리는 기사잖소. 가만, 리카온이란 작자가 늑대면 로벨 경의 애완동물인가? 크하하!”

로벨은 자꾸 자신의 눈치를 보는 나이 든 기사들이 불편했다. 에릭 공작, 볼프 후작, 페르젠 백작 같은 역동적인 기사들과 어울리다 보니 자리보존에 연연하는 시골 기사들이 답답하고 짜증났다. 저들이 다스리는 영지민도 구울처럼 생기가 없었다. 애꾸눈 볼포스는 평범한 시골농민의 모습이라 위로했지만, 로벨은 그 평범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계곡성의 주인이자 파티의 호스트인 지벨 남작이 말했다.

“우리 가문은 로드릭 가문과 인연이 깊소. 선대와도 자주 거래했었지.”

“그렇지요! 자식 자랑이 대단했었습니다. 그때는 으레 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이리 대단한 아들일 줄 누가 알았습니까?”

“삼남 일녀라고 들었는데, 누이가 하나 있지 않소?”

정신이 번쩍 드는 질문이었다. 로벨은 술잔을 내려놓고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에게 써먹은 수법을 시도했다.

“그 아이는 옛 신의 품으로 귀의했소.”

“주, 죽었단 말이오?”

“멍청한 소리! 수녀원에 들어갔다는 뜻이겠지!”

“아, 그렇소이까?”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술잔을 채웠다. 옛 신의 권위가 예전만 못하다고 하나 모태신앙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수녀를 대상으로 왈가왈부 할 작자는...

“그거 잘 됐군! 우리 가문이 누대에 걸쳐 후원하는 수녀원이 있소. 여러 가지로 편의를 봐줄 수 있을 듯하오. 백작이 원한다면 차기 수녀원장 자리도 가능하오.”

...있을 수 있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로벨의 지나친 호의에 적잖이 놀랐다.

“그건 좀... 그 아이는 도움 받는 것을 싫어해서... 그 뭐라고 해야 할지... 정말 심각한, 아니, 충실한 신앙인이라...”

“오호라! 참된 신앙을 가진 모양이오?”

“로벨 백작이 매번 승리하는 것이 옛 신의 가호 덕분이었군!”

“이거, 내 딸아이도 수녀원에 보내야 하나?”

“으하하핫!”

다들 취기가 오른 탓에 로벨의 당황한 모습에도 의심하지 않았다. 로벨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늑대성으로 돌아가는 즉시 어린 집사와 상의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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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의 진단은 명료했다.

“한동안 대외활동을 하지 마세요.”

로벨은 소심하게 항의했다.

“어떻게 활동을 안 해.”

그러나 어린 집사의 생각은 확고했다.

“영주님의 정체를 의심하는 사람이 하나둘 나올 거예요. 그럼 언젠가 펑! 하고 터질 테죠. 설마하니 프란시스 공작의 봉신 가문을 어찌하지는 않겠지만, 백작위와 통치권은 뺏길 게 분명해요.”

“기사 직위도?”

“그야 당연하죠!”

로벨은 비로소 심각해졌다. 백작위와 통치권보다 기사 자리에 연연하는 것이 로벨다웠다.

“그러니까 몸을 사리자고요. 손님도 받지 말고, 연회도 가지 말고, 외부업무는 저랑 리암 수사가 알아서 할게요.”

“아, 알았어...”

로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본래 바깥출입이 잦은 편은 아니지만, 스스로 안 나가는 것과 강제로 못 나가는 것은 차이가 컸다. 숨죽이고 지낼 생각 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그렇게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콧등에 떨어졌다. 검은 숲 몬스터 잔당이 출몰했다는 소식이 종종 들렸으나 볼탄 반도의 질서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본격적인 겨울나기가 시작되기 전에 희소식이 연달아 전해졌다.

회색산의 소금광산에서 새로운 광맥이 발견되어 채굴량이 대폭 늘어났고, 버팅거 시티의 식품공장에서 처음으로 1만 페닝이 넘는 수익을 올렸으며, 푸른고래 호와 청새치 호가 항해를 무사히 마치고 아만다 항에 입항했다. 그리고 로드릭 시장의 상인이 두 자릿수를 넘겼다.

어린 집사는 볼탄 반도 각지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정리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오크 때문에 가을추수를 망쳐서 근심했는데, 타 지역 수익이 가을농사를 메꾸고도 몇 배가 남았다.

“성을 수리하고 울프 용병단 급료를 지급해도 3만 페닝이 남아요! 3만 페닝이요!”

“와아!”

로벨과 어린 집사는 갑자기 생긴 목돈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걸로 뭐하죠? 동방비단을 살까요? 영주님도 이제 비단옷을 입어야죠!”

“아냐. 아냐. 그것보다 대포를 사자.”

어린 집사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대포가 얼마나 비싼데요. 그거 청동으로 만들잖아요? 청동이 강철보다 3배 비싼 거 아세요? 게다가 유지비는 어쩌고요? 석공도 고용해야 하고, 화약도 조달해야 하고, 또...”

로벨은 고개를 가로젓고 떼를 썼다.

“그래도 대포가 있으면 좋아.”

“그럼 푸른고래 호의 대포를 빼 와요.”

“이안 선장이 싫어할 거야.”

“저도 싫거든요? 아무튼 안 돼요! 절대 안 돼!”

어린 집사는 차라리 비단이나 보석을 사라고 권했다. 그건 되팔 수 있으니까 자산가치가 높았다. 그러나 로벨의 생각은 확고했다.

“대포가 안 되면 말을 사자.”

“농마요? 지금 있는 녀석들도 충분한데...”

“농마 말고. 전투마 말이야.”

어린 집사의 표정이 또다시 심각해졌다.

“전투마도 만만치 않게 비싼데... 오베리아 산은 말할 것도 없고, 블랑크 산이나 윈필드 산도 최소 2천 페닝인데...”

“그럼 10마리만 사자.”

“그리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 말을 돌보는 비용도 생각해야죠. 개네가 하루에 먹어치우는 곡물양이 얼만데요. 게다가 마구(馬具)값도 만만치 않아요. 편자도 자주 갈아줘야 하고요.”

“내가 잘 키울 수 있어. 먹이도 주고, 산책도 시킬게.”

“에잇! 강아지 키우는 게 아니잖아요! 강아지도 아이들이 졸라서 데려오며 어머니가 혼자 돌본다고요! 책임지지 못할 소리 하지도 마요!”

“나 어머니할게. 할 수 있어.”

로벨은 열정적으로 설득했다. 어린 집사는 마지못해 가장 값싼 윈필드 산 전투마 3마리를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마구간을 확장하고, 마구간지기도 고용해야죠. 에휴. 이게 다 얼마야.”

그래도 대포보단 낫다고 위안했다. 여차하면 밭 갈고 수레 끄는데 쓸 수 있으니까. 그리고 로벨의 표정도 한몫했다. 로벨은 강아지를 선물 받은 꼬마 소녀처럼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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