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43화 (143/605)

143화. 동쪽

143화. 동쪽

어둠이 내렸지만 성 안 사람은 잠들지 못했다. 한낮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탓도 있지만, 낮보다 밤에 더 활발한 몬스터 때문이었다.

쿵! 쿵! 쿵! 우직-!

달빛이 내려앉은 북쪽 숲에서 소음이 날아들었다. 새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사방팔방으로 날아가고, 숲 그림자가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그리고 거목이 쓰러졌다.

“저 귀한 참나무 숲을!”

어린 집사가 숲을 내다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애꾸눈 볼포스가 심드렁하게 위로했다

“더 귀한 농장이 무사하니 만족하시오.”

그리 넓지 않은 로벨의 집무실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로벨,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펄프 대장, 애꾸눈 볼포스, 아야와 이야카 등이었다.

펄프 대장은 나무 넘어가는 소리에 움찔했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투덜거렸다.

“제길. 공성병기라도 만드나?”

가장 유력한 가설이었다. 어린 집사가 전적으로 동의했다.

“밤눈이 밝으니까 이 시간에도 작업이 가능하군요.”

마녀 키르케가 신경 날카로운 아야와 이야카를 와락 끌어안고 물었다.

“밤눈이 좋은데 왜 안 싸우죠?”

“낮에 크게 당한 탓이겠죠. 시체를 확인하니까 102마리가 죽었어요. 부상자를 데려갈 의리 같은 것은 안 보이니까, 600마리쯤 남았겠네요.”

“그것도 끔찍히 많소.”

쿵! 쿵! 쿠르르...!

마녀 키르케가 어깨를 움츠리고 아야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숲이 우는 것 같아요.”

로벨은 소드 벨트를 벗어 칼집에 둘둘 말았다. 길고 짧은 두 자루 칼이 나란히 붙었다.

“밤새 계속될 모양이야. 인원을 둘로 나눠서 교대로 자도록 해.”

“그리하겠습니다.”

“호른 경이 지원군을 이끌고 올 거야. 우린 충분히 이길 수 있어.”

펄프 대장은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집무실을 나갔다. 어린 집사가 펄프 대장의 의구심을 대신 물었다.

“정말 지원군이 올까요?”

“...몰라.”

로벨은 힘없이 대답했다. 이야카가 ‘끼잉... 낑...’ 울며 로벨의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로벨은 이야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희망을 가지는 게 나쁘진 않잖아.”

@

새벽이라 하기는 늦고, 아침이라 하기는 조금 이른 시각. 오크 군대가 다시 나타났다.

뿌우우웅-!

초병의 나팔에 한숨도 못 잔 용병과 간신히 잠든 용병이 모조리 뛰쳐나왔다. 투구가 바뀌어서 티격거리고, 내 무기 못 봤냐고 소리치는 한심한 작자가 몇 명 있지만 대체로 신속했다.

로벨은 눈을 뜨자마자 아멧을 뒤집어쓰고 침실을 나섰다. 건틀렛과 아멧 외에는 갑옷을 벗지 않아 시간 끌 것이 없었다. 노인과 아이들로 가득 찬 메인 홀을 지나 성탑 오르는 동안 전투준비가 끝났다.

“마로드.”

펄프 대장이 손바닥을 비비며 인사했다. 은유가 아니라 진짜 손바닥을 비볐다. 완연한 가을 날씨라 바람이 차가웠다.

로벨은 성탑 끝으로 이동해서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린 집사의 짐작대로 600마리가 조금 안 되었다. 어제와 차이점은 무작정 달려들지 않는다는 것과 통나무를 엮어 놓은 기괴한 장비를 어깨에 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 통나무가 밤샘 노동의 결실일 것이다. 머리를 뾰쪽하게 깎고, 몸통에 밧줄에 감아놓았다. 마녀 키르케가 전쟁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이름을 붙였다.

“충차?”

“바퀴가 없으니 차(車)는 아니죠.”

어린 집사가 용어에 집착했다.

“그럼 충각?”

“...이름은 모르겠지만, 성문을 부술 작정인 것은 분명하네요.”

펄프 대장이 성문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소리쳤다.

“버팀목을 추가해라! 성문을 노린다!”

풋맨 소대와 영지민이 다급히 움직였다. 각목, 수레 손잡이, 창날이 빠진 창 등을 성문에 비스듬히 세웠다. 빗장이 받는 충격을 줄여줄 것이다.

그 사이 오크가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학습능력이 있는지 무작정 뛰지 않고 방패를 머리 위로 올렸다.

“듣던 거 하고 달리 머리 좀 쓰는데요?”

“기름 한 통 가져와. 화약은 얼마나 있냐?”

“20파운드 정도... 근데 오래 방치한 거라 불이 붙을지는...”

“일단 가져와. 눈깔에 뿌리는 용도라도 쓰게.”

펄프 대장은 소대장을 이리저리 보내고 로벨을 돌아보았다. 추위와 긴장으로 떠는 여타 사람들과 달리 석상처럼 굳건했다.

“영주님, 따로 지시하실 것이 있습니까?”

로벨은 고개를 조금 들었다.

“해가 뜰 거야.”

“예?”

펄프 대장은 무심코 동쪽을 보았다. 하늘이 보랏빛에서 자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에 왼손을 올리고 나직이 말했다.

“전투 준비.”

@

오크가 언덕길을 올라왔다. 애꾸눈 볼포스 이하 숙련된 아바레스터가 1차 사격을 가했다. 방패에 가려지지 않은 손과 발을 겨냥했는데, 일부는 그냥 급조된 방패를 뚫고 머리와 몸통에 꽂히기도 했다. 아바레스트가 위력적이기도 하지만 오크의 방패가 형편없기도 했다. 그러나 600마리의 오크를 모두 죽일 수는 없었다.

충차, 혹은 충각이라 불러야 할 공성병기가 성문 앞에 도달했다. 펄프 대장이 바클러를 우산처럼 쓰고 성벽 위로 상체를 내밀었다.

“기다려! 아직 아니야!”

호딩 위의 병사들은 기름통을 기울이다 움찔해서 멈췄다. 그때, 오크 사수가 시위를 당겼다.

“인간을 죽여라!”

“활 쏴라!”

주목도 아니고, 물푸레나무를 복잡한 공정과정 없이 휘어서 만든 조잡한 숏보우였다. 위력과 사거리 모두 형편없으며 정확도도 낮았다.

로벨은 엄폐하지 않고 성탑 위에 그대로 서 있었다. 컴포지트 아머의 방어력을 믿기에 가능한 행동이지만, 성 아래에서 지켜보는 병사들에게는 정신이 나갈 만큼 용감하게 보였다. 실제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기도 했다.

돌촉과 나무촉의 화살이 성벽을 때렸다. 성벽을 넘어 성내에 떨어지는 화살도 있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질 만큼 재수가 없는 병사들이 눈 먼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쿵-!

화살비가 끝나자 성문이 흔들렸다. 오크의 공성병기가 성문을 두드렸다. 펄프 대장은 바클러에 꽂힌 화살을 보고 식겁하며 소리쳤다.

“지금이다! 부어!”

“기름을 부어라!”

호딩 아래로 검은 기름이 쏟아졌다. 어제의 전투를 기억하는 오크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불씨가 튀자 공성병기는 한때 공성병기라 불리던 장작더미가 되었다. 화르륵-!

울프 용병단은 병장기를 머리 위로 휘두르며 환호했다.

“아주 잘 탄다!”

“머저리들아! 더 가져와봐!”

오크들은 요청에 충실히 따랐다. 숲 속에서 제2, 제3의 공성병기를 차례로 옮겨왔다. 울프 용병단은 즉시 책임을 떠넘겼다.

“더 가져오라고 한 놈 누구야!”

“성 밖으로 던져버려!”

로벨은 언덕을 올라오는 제2진을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영주님?”

“계속 화살을 쏴. 성문은 내가 막을 테니까.”

어느덧 아침 해가 떠올랐다. 노랗고 불그스름한 얼굴이 지상의 참사를 한심하게 훔쳐보고 남쪽 하늘로 여정을 떠났다.

울프 용병단이 자랑하는 크로스보우 소대는 50여 마리의 오크를 사살했다. 그 대가로 2명이 죽고 9명이 부상을 입었다.

용감한 영지민 청년들은 쉬지 않고 화살과 돌을 날라왔다. 그 과정에서 용병보다 큰 피해를 보았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옆구리에 화살이 박힌 청년을 성벽 아래로 끄집어내려 지혈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피도 많이 안 나네.”

“끄아아! 그럼 집사님이 대신 맞으세요!”

“에이, 그런 못된 농담을...”

성벽 아래도 안전하지 않았다. 기어이 끌고 올라온 충차가 성문을 두드렸다.

풋맨 소대가 성문에 달라붙어서 막고 있지만, 빗장에 금이 가고 버팀목이 하나둘 부러지는 것이 오래가지 못할 듯했다.

“저 빌어먹을 충차를 태우라고!”

“기름이 부족해!”

“젠장! 화약도 불량이야!”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뽑아서 아래로 내렸다. 성문이 뚫려도 병력을 집중하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내 뒤에서 나를 지탱해.”

“영주님...?”

“절대 밀리면 안 돼.”

콰광!

빗장이 부러지고, 풋맨 두어 명이 튕겨나갔다. 성문 사이로 불붙은 통나무가 빼꼼히 들어왔다. 코골이 바디가 소리쳤다.

“이제 됐어! 뒤로 빠져!”

풋맨들이 허겁지겁 좌우로 흩어졌다. 그리고 통나무 위아래로 성난 오크가 나타났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두 손으로 잡고 위로 쳐올렸다. 통나무를 뛰어넘은 오크의 목이 날아갔다. 이어서 통나무 아래로 기어들어오는 오크의 머리를 걷어차고 짓밟았다. 가녀린 목은 무쇠발을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다.

세 사람 이상 들어오기 힘든 좁은 공간이 공성병기로 더욱 좁아졌다. 로벨이 사력을 다해 사수하자 성문을 뚫을 때만큼이나 사상자가 발생했다.

“꾸르륵! 밀어라!”

“인간 죽여라!”

멋진 참격도 처음 몇 번 뿐이었다. 오크들이 숫자로, 무게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롱소드를 휘두를 거리가 나오지 않았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놓치고 맨손으로 오크 ‘파도’에 맞섰다.

“꾸르륵! 킁! 킁킁!”

구정물이 흐르는 오크 얼굴을 한 뼘 거리에서 보았다. 오른쪽 눈은 주먹만하고, 왼쪽 눈은 엄지손가락만 했다. 콧구멍이 훤히 드러난 들창코와 입술로 감춰지지 않는 송곳니가 퍽 개성적이었다.

“냄새나잖아!”

로벨은 건틀렛을 말아 쥐고 오크의 옆구리를 두드렸다. 자세가 안 좋아서 큰 타격을 줄 수 없었다. 오크도 지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지만, 쇳덩이를 때려봐야 주먹만 아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주님! 위험해요!”

“기사 나리를 지키자!”

인간과 오크가 서로를 밀어내기 위해 힘싸움했다. 약간의 틈만 생겨도 쇠붙이를 쑤셔 넣는 무자비한 힘싸움이었다.

로벨도 대거를 뽑아 오크의 옆구리와 턱을 쉴 새 없이 찔렀다. 그렇게 한 마리 해치우면 또 한 마리가 밀려왔다. 언제부터인가 땅이 아니라 오크 시체를 밟고 있었다.

“하악... 하악...”

로벨은 피에 흠뻑 젖은 대거를 고쳐 잡았다. 칼끝이 한 마디쯤 부러졌다. 발아래 깔린 오크 갈비뼈 어딘가에 박혀 있을 것이다.

“기사 나리! 오크가 물러납니다!”

“저놈들이 도망간다!”

로벨은 바이저를 올리고 허리를 폈다. 현기증이 핑- 돌았다. 코골이 바디가 급히 부축했다. 자신도 모르게 넘어질 뻔한 모양이다.

“기사 나리! 우리가 이겼습니다요!”

“...응.”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성문 밖으로 걸어갔다. 코골이가 소리치자 아직 살만한 풋맨들이 우르르 나와 너덜너덜한 성문을 열었다. 칼 맞고 화살 맞은 오크 시체가 걸리적거려 쉽지 않았다.

로벨은 숯이 되어버린 공성병기를 힐끔 보고 성 밖으로 나왔다. 오크들이 북쪽 숲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작전상 후퇴라고하기에는 지나치게 조급하고 난잡했다.

“왜 저래? 누가 쫓아오나?”

때로는 생각 없는 말이 진실을 꿰뚫기도 한다. 성벽 위의 울프 용병단이 다시 환호성을 질렀다.

“지원군이다!”

“지원군이야! 지원군이 왔어!”

“영주님! 동쪽입니다!”

펄프 대장이 성 밖으로 뛰어내릴 듯이 매달려 소리쳤다. 존경하는 대장을 ‘승전 후 투신자살’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크로스보우맨들이 필사적으로 허리띠를 잡아당겼다. “이 늙은이가 미쳤나!”, “노망이야! 노망이 분명해!” 로벨은 억센 용병들을 믿고 동쪽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훑고 지나간 동남쪽 언덕으로 사람과 말 그림자가 드리웠다. 깃발도 몇 개 펄럭이는데, 역광에 그늘이 져서 보이지 않았다. 코골이가 코를 훌쩍이고 물었다.

“페르젠 백작군일까요?”

로벨은 깃발보다 사람에 집중했다. 거리가 멀고 음영이 짙지만, 그래서 잘 보이는 것이 있었다.

“아니야.”

열정적으로 한손을 흔드는 거인과 열광적으로 양손을 휘젓는 홀쭉이가 있었다. 풋맨 소대가 반가운 실루엣에 마주 손을 흔들었다.

“외팔이와 허풍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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