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42화 (142/605)

142화. 늑대성

142화. 늑대성

울프 용병단은 전쟁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소대장 지휘 아래 차근차근 수성준비를 마쳤다. 성탑 위에 쿼럴을 상자째 준비하고, 호딩 위에 머리통만한 돌덩이를 가득 쌓았다. 성을 증축할 때 고집부린 보람이 있었다.

“야! 기름통을 왜 거기 가져가!”

“어? 성문에 두는 게 맞잖아?”

“괴물이 공성병기라도 가져올까 봐? 북쪽 벽으로 옮겨! 여차하며 언덕길을 불바다로 만들 거니까!”

펄프 대장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용병들을 굴렸다. 오랫동안 함께한 용병도 있지만, 아이언베어 요새 전투 이후 새로 영입한 용병이 상당수였다. 좋게 말하면 활달하고, 솔직하게 말하면 제멋대로였다.

“기껏해야 오크나 고블린이잖아. 돌팔매질이나 하는 짐승 따위한테 너무 유난 떠는 거 아냐?”

“검은 숲의 성이 여럿 함락되었다잖아.”

“그쪽 종자들은 원래 오크 수준이잖아.”

신입 용병 패거리가 왁자지껄 떠들자 몇몇 용병이 얼굴을 굳히고 다가갔다.

“난 검은 숲 출신이다. 다시 짖어봐.”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물론, 말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불구경과 싸움 구경은 유서 깊은 양대 구경거리였다.

신입 용병은 기가 죽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발을 빼지 못했다. 억지웃음을 지으며 기어이 선을 넘었다.

“아, 그러셔? 생긴 것부터 그렇게 생곀-!”

검은 숲 용병은 평소 말보다 주먹이 앞섰거나 좌우명이 선수필승일 것이다. 신입 용병 안면에 다짜고짜 주먹을 꽂았다.

“휘이익-! 멋지다!”

“제대로 들어갔는데?”

신입 용병은 코를 붙잡고 비틀비틀 물러났다. 손가락 사이로 선명한 핏줄기가 흘렀다.

“오크 수준이라 부족하지?”

“이 개자식이...!”

신입 용병이 허리 뒤에서 대거를 뽑았다. 칼 한두 자루는 생활필수품 같은 거라 신기할 것도 없었다. 검은 숲 용병도 겨드랑이 아래에서 나이프를 뽑았다. 기존 용병과 신입 용병이 본격적으로 싸우자 모두가 환호했다.

“이 자식들아! 무슨 짓이야!”

“아, 대장. 잠깐 기다려봐.”

“저 건방진 꼬맹이들은 좀 잡아놓을 필요가 있어.”

펄프 대장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뛰어왔지만 분위기를 타서 쉽게 말릴 수 없었다. 펄프 대장은 고래고래 소리쳤으나 평소 쌓인 적개심에 자존심이란 불이 붙자 쉽게 꺼지지 않았다.

“계속해 봐.”

그때, 유리잔을 두드리는 듯한 고음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가장 시끄러운 펄프 대장이 가장 먼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로벨은 아론다이트와 흐룬팅 위에 양손을 얹고 용병 사이로 걸어 나왔다.

“지는 쪽은 죽을 거고, 이긴 쪽도 죽을 거야.”

“엥? 어째서요?”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코골이 바디가 질문했다. 로벨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위엄은 부족해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러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은 썩 예쁘지 않았다.

“내 용병을 해쳤으니 당연히 복수해야지.”

“...이긴 쪽도 기사 나리 용병인데요.”

“내 용병은 내 사람을 해치지 않아. 내 사람을 해치면 내 용병이 아니야. 그러니 내 손에 죽을 거야.”

머리 나쁜 용병들은 침음을 흘리며 맷돌을 굴렸다. 하지만 평균적인 이해력을 가진 용병들은 겁을 먹거나 감동했다. 겁먹은 쪽은 주로 싸움 당사자였다.

로벨은 흐룬팅 손잡이를 살짝 뽑았다. 로벨의 칼솜씨를 잘 아는 검은 숲 용병은 나이프를 팽개치고 두 손을 들었다.

“기사 나리, 오해입니다! 죽이다니요? 그냥 피 몇 방울만 짜내려고 했습니다. 제 솜씨 아시잖습니까?”

사실 솜씨는커녕 이름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싸우지 않는다는데 만족했다. 로벨은 신입 용병을 쳐다보았다. 성질이 더러운 건지, 눈치가 부족한 건지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아무리 고용주라도 죽이네 마네 함부로 떠드... 으헉!”

펄프 대장은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 문뜩 옛날 생각이 났다. 외팔이 더치도 저리 무모하게 덤빈 적이 있었다.

‘그랜드 챔피언 타이틀은 주사위 놀이로 딴 게 아니지.’

로벨은 발검과 동시에 신입 용병 대거를 쳐내고, 칼날을 회수하면서 신입 용병의 소드 벨트를 잘랐다. 면도날로 써도 될 만큼 날카로운 흐룬팅과 포비아 왕국 검술학파 공인 소드 마스터 실력이 합쳐진 묘기였다. 신입 용병 입장에서는 빛이 번쩍이자 손에 든 무기가 사라지고 칼집이 땅에 떨어졌다. 한 박자 늦게 엉덩방아를 찍었다.

“히익! 마법이다!”

“마법? 마법 같은 소리한다! 푸하핫!”

“히익! 마법이다. 히익! 마법이다. 우헤헤헷!”

용병들이 낄낄거리며 비웃었다. 그러면서 새삼 로벨의 실력에 감탄했다.

“기사 나리 솜씨는 날이 갈수록 좋아지네.”

“아직 한창때잖아. 앞으로 더 대단해질걸?”

모두가 웃고 떠들지만, 로벨은 웃지 않았다. 펄프 대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펄프 대장, 실망이야.”

펄프 대장은 똥마려운 아야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영주님, 그게, 이놈들이 아직 적응을 못해서...”

부우우-우웅-!

바로 그때였다. 늑대성에서 가장 높은 성탑에서 뿔나팔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기사 나리! 북쪽 숲! 북쪽 숲입니다!”

“적이야?”

“모, 몬스터입니다! 숫자가 상당합니다!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로벨의 표정이 바위처럼 굳었다. 울프 용병단은 법석을 떨며 무기를 챙겨들고 각자 위치로 흩어졌다.

“속성으로 적응시켜. 당장.”

로벨은 펄프 대장의 어깨를 치고 성내로 뛰어갔다. 항상 그랬듯, 이번에도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지금부터 전쟁이니까.”

@

로드릭 마을주민은 미리 싸둔 봇짐을 짊어지고 언덕길을 올라왔다. 개중에는 외지인도 더러 있었는데, 어버버하면서 잘 따라왔다.

로벨은 급한 나머지 너무 꽉 쪼인 퀴스 가죽끈을 조금 풀고 성탑을 올라갔다. 펄프 대장과 애꾸눈 볼포스가 먼저 와 대기 중이었다.

“어때?”

펄프 대장은 보고를 치우고 자리에서 한발 물러났다. 직접 보라는 표시였다. 로벨은 순순히 제안을 따랐다. 그리고 펄프 대장만큼 조용해졌다.

아이언베어 요새 이후 천 단위에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숲 속에서 나오는 오크의 숫자는 엄청났다. 500마리? 600마리? 어쩌면 그 이상일 것이다.

로벨을 따라온 어린 집사가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검은 숲의 오크가 전부 여기 왔나?”

로벨은 나무 사이로 꾸역꾸역 나오는 오크 무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저게 전부가 아닐 거야.”

“어떻게 아세요?”

“오우거가 없잖아.”

안심이 되면서 소름 돋는 말이었다.

“영주님, 마을주민 대피가 끝났습니다.”

노인과 아이를 미리 성 안에 불러들인 덕분에 금방 피난이 끝났다.

“남자들은 성벽 아래에서 전투를 돕게 하고, 여자들은 지하창고로 내려보내서 아이들을 돌보게 해.”

펄프 대장이 눈짓하자 애꾸눈 볼포스가 아바레스트를 어깨 걸고 성탑 아래로 내려갔다. 성문 수비를 책임진 코골이 바디가 풋맨 소대 엉덩이를 차며 명령했다.

“성문부터 닫아! 성문을 닫으라고!”

풋맨 소대원은 구시렁거리면서 움직였다. 본디 풋맨 소대장은 외팔이 더치인데, 허풍쟁이와 함께 포클랜드 시티에 뒤처져서 아직 복귀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빈자리가 큰데...’

로벨은 오크 무리를 관찰했다. 키는 작지만 호전적인 성격에 야생에서 단련된 근육이 만만치 않았다. 베테랑 용병조차도 1대 1로 싸워서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믿을 것은 성벽과 화살뿐이구나.’

로벨은 시선을 돌려서 좌우 성벽을 보았다. 60명의 크로스보우맨이 2인 1조로 짝을 지어 대기 중이었다. 사격 솜씨가 좋은 사수와 손이 빠른 부사수로 이루어진 조수사격 전술이었다.

“놈들이 움직입니다.”

펄프 대장이 속삭였다. 로벨은 다시 성 밖을 보았다. 오크떼가 늑대성을 향해 몰려왔다.

“오, 온다! 와!”

“제길! 누가 몬스터 아니랄까봐!”

오크는 그냥 달려왔다. 소대도 없고, 대열도 없었다. 지휘관이 누군지 알 수 없을 만큼 무질서했다. 괴성을 지르고 조잡한 무기를 흔들며 늑대성이 자리한 언덕길을 올랐다.

인간이라면 숨이 차서 쉬어갈 거리와 경사인데, 오크들은 지치지 않고 뛰었다. 먹잇감을 향해 떼 지어 몰려오는 개미떼 같았다. 기가 세고 담이 강한 용병 얼굴에도 공포가 드리웠다.

펄프 대장이 여장에 한 발을 올리고 시원시원하게 외쳤다.

“체력이 끝내주네! 오크 암컷은 행복하겠어!”

여기저기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역시 대장이야’, ‘저 영감은 간땡이가 없나?’, ‘넌 살 만큼 살았잖아!’ 등의 잡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 자연히 긴장감이 해소됐다.

성탑보다 낮은 성벽의 용병은 보지 못하지만, 펄프 대장 옆에 선 로벨은 똑똑히 보았다. 펄프 대장의 큼직한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군보다 7배 많은 적은 34년 차 용병에게도 두려운 상대였다.

‘원래 허풍쟁이가 할 일이지만...’

로벨은 여장쪽으로 한 걸음 나가서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체력만큼 머리도 좋은지 보자! 사격 준비!”

30명의 사수가 장전된 크로스보우를 여장 위로 올렸다.

정오 햇살에 철제 촉이 반짝반짝 빛을 냈다.

“쿠오오오!”

“죽인다! 죽인다! 인간! 죽인다!”

오크의 고함이 가깝게 들리기 시작했다. 로벨은 하늘을 향한 칼날을 오크에게 돌렸다.

“발사!”

파파파-팡-! 파앙-!

살의로 채워진 쿼럴이 성벽 아래로 비행했다. 피와 고함과 죽음과 욕설로 이루어진 늑대성의 수성전이 시작되었다.

@

로벨은 성탑 위에서 목이 쉬어라 소리쳤다. 쉴 새 없이 지시하고, 지명하고, 지휘했는데,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전투는 긴박하고 긴급하게 돌아갔다.

오크들은 갈고리와 사다리로 성벽을 넘고자 했다. 크로스보우맨은 사다리를 가져오는 놈들을 우선 저지해야 했다. 그래서 성문에 대형망치를 휘두르는 덩치들은 호딩에 배치된 스피어맨 담당이 되었다.

성벽 밖으로 돌출된 호딩에는 돌과 기름이 준비되어 있었다. 펄프 대장의 명령에 따라 스피어맨은 창을 집어던지고 기름통을 가져왔다.

“하나! 둘! 세에엣!”

투석구를 통해 기름이 뿌려졌다. 망치를 치켜든 오크가 검은 기름을 뒤집어쓰고 비명을 질렀다. 오크 한 마리를 흠뻑 젖히고 남은 기름은 경사로를 따라 언덕 아래 오크에게 흘러갔다.

“좋아! 불화살을 쏴라!”

“미친놈아! 우리가 불화살이 어디 있냐!”

“횃불 가져와! 횃불!”

겁쟁이 데비가 부싯돌을 긁어서 화톳불을 밝히고 장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급조된 횃불은 두어 사람 손을 타고 펄프 대장에게 전달되었다.

“불 맛 좀 봐라!”

투석구로 활활 타는 불덩이가 떨어졌다. 망치질하던 오크는 진작에 피신했지만 꼬리가 길게 남아있었다. 성문 앞에 불의 장막이 생겨났다. 펄프 대장의 강요로 불 맛을 본 오크들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효과가 있어! 북쪽 벽에 기름통도 몽땅 부어! 싸그리 태워버리자!”

“잠깐! 잠깐! 기름값도 생각하세요!”

어린 집사가 흥분한 펄프 대장을 뜯어말렸다. 예산문제가 아니어도 첫 전투에 기름을 다 쓸 수 없었다.

애꾸눈은 갈고리를 빙글빙글 돌리는 오크 가슴에 쇠뿌리 나무를 심어주고 시위 풀린 아바레스트를 부사수에게 던져주었다. 검은 숲 출신 부사수가 장전된 아바레스트로 교체해주며 너무 빠르다고 투덜거렸다.

애꾸눈은 전장을 폭넓게 살핀 후 잠시 숨을 돌렸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오크는 거의 정리되었고 혓바닥을 무기 삼은 오크만 남았다.

“숫자는 많지만 수준은 형편없군.”

“그러게요. 활을 가진 놈도 얼마 안 되고. 이런 놈들한테 성을 빼앗긴 검은 숲의 영주들은 뭘 까요?”

“글쎄... 이유가 있겠지.”

로벨은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100마리의 오크를 처단한 아론다이트를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어린 집사가 용감하게 여장 밖으로 상체를 내밀었다.

“어? 어엇! 영주님! 저것들이 도망가요!”

로벨은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가 조금 줄였다.

“응. 우리가 이겼어.”

어린 집사는 활짝 웃었다.

“왜 그리 맥이 없어요? 승리했잖아! 이겼다! 우리 영주님 만세!”

어린 집사가 소리 지르자 쿼럴과 돌덩이를 나르는 영지민이 성탑을 올려다보았다.

“오크가 도망가요! 우리가 이겼어요!”

“그, 그래?”

“승리다! 승리했어!”

“영주님이랑 울프 용병단이 이겼어요!”

어린 집사의 외침이 다양한 목소리로 바뀌어 늑대성 곳곳으로 퍼졌다. 성 안에 숨은 영지민은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승리의 주역인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웃지 않았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칼집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이겼어.”

오크가 되돌아가는 북쪽 숲은 여전히 어둡고 음침했다. 로벨은 더 크고 더 무서운 적을 예감했다.

“하지만 전쟁은 이제 시작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