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도둑 길드
139화. 도둑 길드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이 피에 젖은 시트에 암살자 시체를 담아 끄집어냈다. 여관주인 부녀와 옆 방 손님이 소란에 구경나왔다가 호들갑을 떨었다.
“시, 시체? 살인! 살인이다!”
외팔이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시체가 뭐? 왜? 구경났어?”
“구, 구경난 거 맞는데요?”
“...그렇네?”
외팔이와 허풍쟁이가 시체를 치우고 방을 정리할 동안 로벨과 애꾸눈 볼포스는 생포한 암살자를 심문했다. 딱 죽지 않을 만큼 때린 후 팔다리를 기둥에 묶었다.
“도둑 길드?”
로벨은 생소한 단어에 갸우뚱했다.
“도둑이 무슨 길드가 있어?”
애꾸눈이 안대를 만지며 설명했다.
“살인자, 강도, 사기꾼, 소매치기 등이 모인 집단입니다.”
“그럼 그냥 범죄자 소굴이잖아? 혹시 장인 도둑이랑 도제 도둑이 있어?”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로벨은 우습다는 듯 눈을 흘기고 다시 물었다.
“누가 시켰어?”
“저희는, 저희는 그저 돈을 받고 실행할 뿐입니다. 의뢰를 받는 사람은 따로 있어서...”
애꾸눈이 헌팅 나이프를 뽑아 암살자 아랫배에 들이밀었다.
“그자가 누군지 묻고 계신다.”
“그것은, 저기, 거시기한데...”
애꾸눈은 칼날을 천천히 밀었다. 피부가 한 마디쯤 눌리더니, 어느 순간 살 속으로 푹! 파고들었다. 붉은 촛불 아래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렀다.
“빅터! 빅터 빅쇼입니다! 잠깐! 잠깐! 하지 마! 살려줘요!”
애꾸눈은 칼날을 한마디쯤 꽂은 채 살짝 비틀었다. 암살자가 몸부림쳐서 상처가 더욱 찢어졌다. 로벨은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어디서 만날 수 있어?”
“그건 말씀 못... 아악! 못 드릴 리 없지요! 3번 부두입니다! 3번 부두 ‘바다뱀’ 선술집입니다!”
애꾸눈은 헌팅 나이프를 뽑아 피 묻은 길이를 확인하고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내장에 안 닿았어.”
“끄으윽! 저, 정말입니까?”
“아마도?”
로벨과 애꾸눈은 ‘의사 좀 불러 달라’, ‘아니면 지혈이라도 해 달라’ 조르는 암살자를 무시하고 짐짓 심각하게 대화했다.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찾아가야지.”
“도둑 길드로 말입니까?”
“무서워?”
로벨은 베테랑 용병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
“어린 집사와 마녀가 걱정입니다.”
그것은 로벨도 마찬가지였다. 로벨은 이 와중에도 깨지 않는 소년소녀를 신기하게 생각하다가 말했다.
“오늘밤 정리하자. 무기 챙겨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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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아밍 더블릿으로 갈아입고 플레이트와 그리브를 부착했다. 풀 세팅하면 야경꾼 눈에 띌 것이 분명해서 파츠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기사 나리, 준비 끝났습니다.”
로벨은 허리에 소드 벨트를 차고 피 묻은 흐룬팅과 대거를 살폈다. 피와 기름이 남아있었다. 동백유를 듬뿍 발라서 광나게 닦아주고 싶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어쩌면 또다시 피를 묻힐지도 몰랐다. 동이 트기 전에 배후를 잡아서 두 번 다시 허튼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로벨이 여관 밖으로 나가자 외팔이 더치, 애꾸눈 볼포스, 허풍쟁이 제이콥이 시내에서 가지고 다니기 무안한 무기들을 손보고 있었다.
“어떤 놈이 감히 암살자를 보냈을까요?”
“짐작 가는 사람이 하나 있어.”
로벨은 대단치 않은 추리력을 발휘했다. 로벨이 묵는 여관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그럼 그놈을 족치는 게 빠르지 않습니까요?”
“증거가 먼저야.”
애꾸눈이 아바레스트에 쿼럴을 올리고 말했다.
“증거가 필요한 용의자면 귀족이군요. 하긴, 귀족이 아니면 영주님을 노릴 이유가 없지요.”
로벨은 겁먹은 눈초리로 훔쳐보는 여급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거리 쪽으로 돌아서서 딱딱하게 말했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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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도시에서는 자정이 지나면 통행이 금지된다.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범죄를 예방하고, 화재를 방지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야심한 밤에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은 도둑이거나 도둑을 잡는 야경꾼이었다.
“우리는 뭐야?”
“뭐긴 뭐야? 야경꾼이지. 도둑놈 잡으러 가는 거잖아?”
“아, 그런가?”
“쉿!”
로벨 일행은 사람 하나 없는 대로를 지나갔다. 달빛이 비추는 고요한 거리는 한낮의 열기로 들끓는 거리와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개소리와 고양이 소리와 기타 정체 모를 소리가 간간이 들려올 뿐, 무섭도록 조용했다.
“3번 부두랬지?”
“이쪽입니다.”
길눈이 밝은 허풍쟁이가 앞장섰다. 랜턴을 밝힌 야경꾼을 피해가느라 조금 지체했지만, 새벽공기가 내려앉기 전에 3번 부둣가를 도착했다.
“시 스네이크 펍. 여깁니다.”
“이 시간에 불을 밝히고 장사하다니. 역시 수상합니다요.”
로벨 일행은 어둠 속에서 무기를 점검했다. 기습을 기습으로 되갚아줄 시간이었다.
로벨은 외팔이와 허풍쟁이에게 눈짓했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호흡을 맞춰온 용병답게 동시에 움직였다. 펍 치고 두꺼운 문을 박차고 뛰어들어가 쇠못이 박힌 클럽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돼지 잡는 소리가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창문으로 탈출을 감행하다가 뒷다리가 잡혀서 끌려들어가는 극적인 장면도 연출되었다.
로벨은 1부터 10까지 천천히 숫자를 세고 일행을 따라 들어갔다. 혹시 몰라 흐룬팅 손잡이를 역수로 쥐었는데, 외팔이와 허풍쟁이가 깔끔하게 정리해 놔서 손을 쓸 필요 없었다. 술집주인이 깨진 코를 움켜쥐고 로벨을 올려다보았다. 눈치가 좋아서 로벨이 이 끔찍한 불한당의 주인임을 알아챘다.
“누, 누구십니까? 누구신데 저희를...”
“로벨 로드릭이야.”
로벨은 이름을 밝히며 얼굴을 살폈다.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당황이 절반, 공포가 나머지 절반이었다.
“네가 빅터 빅쇼야? 도적두목?”
“제가 빅터가 맞지만, 도적두목은 무슨 말씀인지...”
빅터 빅쇼는 의아함과 억울함을 동시에 표시했다. 처음에 흔들리는 눈을 보지 못했으면 깜박 속았을 것이다.
“도둑 길드 아니야?”
“예! 예! 그런 곳 아닙니다!”
“그럼 쓸모없네? 미안.”
로벨은 흐룬팅을 뽑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관심 없는 표정과 주저함 없는 동작이 진짜 죽일 것처럼 느껴졌다. 흐룬팅의 까만 칼날이 떨어지기 직전, 빅터 빅쇼는 살고자하는 욕망으로 힘껏 소리쳤다.
“젠장! 맞습니다! 맞다고요! 아, 안 돼! 엄마아!”
깡!
로벨은 흐룬팅을 카운터에 꽂았다. 쇠도 베는 명검이라 목재가구는 우습게 갈라졌다.
“누구야?”
뒷골목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길드 마스터라도 기사와 용병을 거느린 대영주 앞에서는 일개 도둑놈이었다.
“빌포이 다이첼 경입니다! 빌포이 다이첼 경이요! 젠장! 칼 좀 치워주십쇼, 나으리!”
로벨은 이미 짐작하고 있어서 놀라지 않았다. 오늘만 사는 도둑이라도 대영주를 암살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암살자를 보냈다면, 로벨 이상의 권력자가 지시한 것이 분명했다. 이제 남은 의문은 ‘왜?’였다.
“어디 가야 만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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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명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수도 경비대도 건드리지 못하는 도둑 길드를 하룻밤에 박살내고, 왕국 전역에 악명 떨치는 빌포이 다이첼 경의 은신처로 쳐들어가니 말이다.
“그런데 그자가 왜... 영주님이 도우려는 것 아닙니까?”
“글쎄? 만나보면 알겠지.”
로벨 일행은 거인과 난쟁이 여관보다 2배쯤 크고 화려한 저택에서 멈췄다. 2층 창가에 촛불인지 랜턴인지 불빛이 비치지만, 깨어있는 사람보다 잠든 사람이 많은 듯 고요했다. 애꾸눈이 아바레스트를 아래쪽으로 내리고 노커를 두드렸다. 쾅쾅! 잠귀 밝은 개가 요란하게 짖어서 두 번 두드릴 필요 없었다.
로벨 일행은 문 앞에서 잠시 기다렸다. 개 짖는 소리가 잦아들 무렵, 눈높이 맞춰진 피프홀을 열리고 주름진 얼굴이 등장했다.
“이 시간에 뉘십니까?”
허풍쟁이가 주인을 소개하기 위해 한 걸음 나섰지만 로벨이 제지했다. 예의를 차릴 시간도, 장소도 아니었다.
“볼탄 반도에서 온 로벨 로드릭이야. 빌포이 다이첼 경을 만나야겠어.”
늙은 몸종은 잠시 침묵 후 되물었다.
“...이 시간에 말씀입니까?”
로벨은 미소 지었다. 그런 사람 없다고 하면 난감했을 텐데, 순진한 건지 순박한 건지 순순히 자백했다.
“내게 받아야 할 것이 있을 거야. 아니면 반대로 줘야 할 거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피프홀이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졌다. 로벨은 외팔이와 허풍쟁이에게 눈짓했다.
“후문을 지켜.”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외팔이와 허풍쟁이는 무기를 빼들고 저택 뒤로 이동했다. 로벨은 칼자루에 손을 얹고 하늘을 보았다. 이제 막 2경이 지나고 있었다. 보름달 아래로 구름 한 덩이가 지나갔다. 지루함이 가득차서 잡생각이 하나둘 떠오를 무렵, 저택 뒤편에서 예의범절과 거리가 먼 소음이 터져 나왔다.
“이놈들! 내가 누군 줄 알고! 죽고 싶은 게냐!”
“저희가 뭘 어쨌다굽쇼? 그냥 저희 나으리가 기다린다고 말씀드렸을 뿐인뎁쇼?”
“썩 꺼져라! 이 미천한 잡것들이...!”
로벨은 코로 한숨을 쉬고 소란을 찾아갔다. 주로 아랫사람이 출입하는 남루한 후문에서 중년 기사가 대거를 뽑아들고 외팔이와 허풍쟁이를 위협하고 있었다. 기사란 것은 깨끗한 옷과 가죽 신발로 짐작했을 뿐이고, 몸뚱이만 보면 로드릭 마을의 늙은 촌장보다 부실해 보였다. 외팔이와 허풍쟁이는 어이가 없어서 막는 시늉조차하지 않았다.
“에르나 왕국의 빌포이 다이첼 경 되시오?”
로벨과 애꾸눈이 다가가자 대거를 확 돌렸다.
“볼탄 반도의 로벨 로드릭 백작이오.”
“너... 너... 사악한 이단자! 괴물! 참회하라!”
빌포이 다이첼 경은 대거로 삿대질했다. 본인은 찌르는 시늉이라 생각하는 것 같지만, 로벨이 볼 때는 그냥 삿대질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애꾸눈이 아바레스트를 양손으로 파지하고 속닥였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로벨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무척 난감했다. 괴물, 야만인, 무법자 등을 상대하는 방법은 잘 알지만, 정신 나간 기사를 상대하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그분의 적! 죽여라! 멸살하라! 그분이 함께하신다!”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잡았다. 왕가의 사람이니 죽일 수는 없지만, 팔다리 하나쯤 부러트리는 것은 정당방위로 넘어갈 수 있을 듯했다. 어쩌면 혈액순환이 잘 되어서 정신을 차릴지도 몰랐다. 로벨이 큰마음 먹고 손쓰기 직전, 외팔이가 호기심을 못 참고 물었다.
“그분이 대체 누굽니까요? 옛 신? 국왕 폐하?”
“이놈! 닥쳐라!”
그 순간, 로벨은 검은 성에서 볼프 후작이 한 말을 떠올렸다.
“죽음의 관리자, 영혼의 수확자, 사자의 인도자, 사신(死神) 그림 리퍼.”
로벨이 마도의 수호자 이름을 주문처럼 외우자 빌포이 다이첼 경의 손에서 대거가 떨어졌다. 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하늘 높이 들어 경배했다.
“위대한 분이여. 거룩한 분이여. 그 영광된 이름으로 축복을 내려주소서.”
로벨을 제외한 울프 용병단은 서로를 보았다. 어리둥절함과 황당무계함을 반반씩 섞어서 아침 메뉴로 배급받을 표정이었다.
‘미쳤네.’
‘미쳤어.’
‘미친 거 맞아.’
로벨은 입술을 모아 한숨 쉬었다.
“이런 경우는 예상 못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