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왕성
138화. 왕성
로벨 일행은 딱딱한 보리빵과 더 딱딱한 염장고기로 점심 겸 저녁 식사를 마치고 텅 빈 홀에 모여 앉았다. 여관주인의 정보로 짐짓 심각했다. 그러나 인간사에 관심이 부족한 아야와 이야카는 근심 없이 마룻바닥을 뒹굴었다. 재롱부리는 강아지 같기도 하고, 장난치는 고양이 같기도 했다. 어린 집사가 아야의 꼬리를 지그시 밟고 투덜거렸다.
“이것이 늑대인지, 개인지...”
“마녀 덕분이 아니겠소?”
“저요? 제가 왜요?”
애꾸눈 볼포스는 쿼럴의 깃을 다듬으며 말했다.
“드루이드는 동물을 잘 다룬다고 들었소. 아야와 이야카가 늑대의 야성을 떨치고 인간과 잘 어울리게 된 것도 드루이드의 영향이라 생각하오.”
“제가요? 전 그냥 사고 치지 않게 혼쭐, 아니, 잘 타이른 것밖에 없는데요. 히히힛.”
“무슨 사고요?”
“음... 구박만 하는 꼬마 집사를 깨물지 못하게 한다거나...”
아야가 어린 집사를 돌아보고 하품했다. 큼직큼직하고 뾰족뾰족한 이빨이 잘 보였다. 어린 집사는 슬그머니 발을 치우고 속삭였다.
“앞으로도 열심히 혼내주세요.”
“넹!”
그때, 로벨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래. 잘 됐어.”
로벨의 다섯 측근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외팔이 더치가 혹시나 해서 질문했다.
“늑대를 혼내주는 거 말입니까요?”
“응? 으응. 혼낼 수 있으면 혼내야지.”
어린 집사가 손바닥을 저었다.
“그건 마녀가 잘하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키르케가 훌륭하긴 하지만, 신경 안 쓸 수 없잖아. 시합에도 나오는데.”
“저 녀석들이 무슨 시합에 나가요?”
“응?”
“엥?”
늑대는 늑대인데, 서로 다른 늑대를 이야기했다. 어린 집사가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누구 말하는 거예요?”
“늑대의 왕?”
“아야랑 이야카가 아니고요?”
어색한 침묵이 잠깐 흐르고, 누군가의 헛기침과 함께 공통된 화제가 돌아왔다.
“아무튼, 이번 기회에 무슨 일을 꾸미는지 확실히 할 수 있겠어. 잘 된 일이야.”
“어디가 어떻게 잘 돼요? 우리 목적은 이게 아니잖아요.”
로벨은 팔짱을 끼고 턱을 당겼다.
“내 목적은 마도의 수호자가 무슨 음모를 꾸미는지 알아내는 거야.”
“도로 깔 자금 마련하려고 온 게 아니고요?
“뭐, 겸사겸사.”
로벨은 시선을 피하며 우물거렸다. 그리고 어린 집사가 화내기 전에 빠르게 말했다.
“내일 아침 왕성에 갈 거야. 집사와 애꾸눈은 따라오고, 나머지 인원은 자유행동...”
로벨은 과격하게 예쁜 척하는 마녀 키르케를 보고 잠시 말을 멈췄다. 두 눈을 초 단위로 깜박이고 있었다. 로벨은 칼 맞은 듯한 신음을 흘리고 다시 말했다.
“집사와 볼포스와 ‘키르케’는 따라오고, 나머지 인원은 자유행동 해도 좋아. 단, 일몰 전에는 돌아오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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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케틀 햇과 소드 벨트만 챙겨서 샘 포클의 왕성으로 출발했다.
샘 포클의 왕성은 포비아 왕국의 심장, 포클랜드의 상징이라 불리는 곳이지만, 화려함과 거리가 멀었다. 아성은 크고 높지만 밋밋했다. 성문 쪽에는 투석구가 툭 튀어나오고 총안이 벌집처럼 뚫려있었다. 아성을 둘러싼 여섯 개 성탑은 높지는 않지만 포격에 장시간 버틸 만큼 경사지고 두꺼웠다. 그리고 사각이 없도록 육각형으로 배치되었다. 전체적으로 평가하자면...
“그냥 요새군요?”
마녀 키르케가 솔직한 소감을 밝혔다. 어린 집사가 포비아 왕국인의 자부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샘 포클은 국왕이기 전에 기사였어요. 그나마 후대에 손 봐서 저 정도죠.”
어린 집사의 설명에 왕성 수비대원이 빙그레 웃었다. 로벨은 성문을 통과해서 마녀 키르케에게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따로 가야 해.”
“왜요? 왜요?”
“우선 국왕 폐하를 알현해야 하거든.”
그때 마침 시종이 마중 나와 로벨에게 인사했다. 로벨은 어릴 적에 늙은 집사에게 배운 궁중예법을 찾아서 마주 인사했다. 모자를 벗어서 가슴에 붙이고, 왼팔을 허리에서 살짝 띄우고, 오른다리를 조금 빼며 고개를 숙였다. 로벨의 복잡한 인사동작을 구경한 일행은 어서 가라고 손짓했다.
로벨의 왕성 방문은 단순한 인사였고, 국왕쯤 되면 어린 집사가 말했듯 ‘바쁜 척’하는 것이 일상이라 길게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충성 확인을 위한 미사여구와 볼탄 반도의 정세를 10분 정도 나눈 후 물러났다. 사실 백작의 직위와 그랜드 챔피언의 명성이 있으니 10분이나 면담한 것이지, 평범한 시골 기사들은 사나흘을 기다려서 얼굴 한번 보고 쫓겨나오기가 일수였다.
‘난 그쪽이 편하지만...’
로벨은 10시간 같은 10분에 몸을 떨었다. 수천 명의 기사 위에 군림하는 국왕과 일대일로 대면하는 것은 껄끄러운 일이었다. 그나마 국왕의 관심사가 다른 곳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로벨이 알현실을 나오자 길 안내를 맡은 젊은 시종이 정중히 물었다.
“쉬실 곳이 필요합니까?”
“아니오. 그보다 빌포이 다이첼 경을 만나고 싶소.”
시종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곤란해서가 아니라,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는 말이니 양해해 달라’는 의미였다. 국왕의 시종쯤 되니 처세술이 남달랐다.
“그건 좀 곤란합니다.”
“어째서 말이오?”
“다이첼 경께서는 건강이 안 좋아 손님을 맞이하지 못하십니다.”
로벨은 충분히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적인 변명을 들었으니, 비공식적으로 진짜 이유를 말해주시오.”
시종도 안 믿을 줄 알았기에 곧장 대답했다.
“그분을 뵙고자 하신 분이 한둘이 아닙니다. 위로한 사람도 있고, 비난한 사람도 있고, 모욕한 사람도 있지요.”
거친 것이 매력이고 막 나가는 것이 장기인 기사라지만, 귀족을 살해하고 귀부인을 겁탈한 것은 정도가 지나쳤다. 그 때문에 전쟁까지 일어났으니 명예로운 기사와 명예로운 척하는 기사 모두에게 낙인이 찍혔을 것이다.
“본인은 그런 이유가 아니오.”
“그리 말씀하신들...”
로벨은 눈동자를 움직여 주위를 살피고 나직이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본인은 다이첼 경을 조종한 자가 있지 않나 의심 중이오.”
시종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진짜였다.
“어찌 그런 생각을...”
“나 또한 비슷한 일을 겪었기 때문이오.”
시종은 로벨의 옷소매를 끌어당겨 구석진 곳으로 이동했다.
“사실은 다이첼 경도 그리 말씀합니다. 자신은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역시.”
로벨은 사람을 조종하는 ‘마법’을 말했지만, 시종은 배후의 ‘세력’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둘 다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다이첼 경은 왕성 밖에 계십니다. 연락처를 주시면 가까운 시일에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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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정원으로 나와 일행을 찾았다.
왕성에서는 시종시녀부터 수비대원까지 전부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이다. 조금만 무례해도 장갑 벗을 작자들이 넘쳤다. 어린 집사가 있으니 괜찮을 거라 안심하면서도, 마녀 키르케가 함께 있어 걱정되었다. 다행히 로벨의 일행이 먼저 로벨을 찾았다. 마녀 키르케가 정원수 아래에서 활짝 웃었다.
“기사님! 기사님! 저기 우리 기사님이 와요!”
마녀 키르케 뒤로 어린 집사와 애꾸눈 볼포스가 차례로 나타났다. 무뚝뚝하지만 자상한 아버지와 성격이 정반대인 친남매 같았다.
“기사님! 저쪽에 이따 만한 순금상이 있어요!”
“순금이 아니라 도금이라니까! 영주님! 이 정신 나간 마녀가 금인지 아닌지 확인하겠다고...”
로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팔다리에 까칠한 장신구가 생기지 않은 것을 보아 사고 치지는 않은 듯했다.
“자비에 후작님을 만났어요.”
“어디서?”
“샘 포클의 도금상에서요. 도금이라고요!”
로벨은 어린 집사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길이 엇갈린 듯 보이지 않았다.
“기사들하고 이야기하는 걸 들었는데, 그랜드 토너먼트를 개최하는 것에 반대하더라고요.”
“응. 그렇겠지.”
포비아 왕국의 재정이 부실한 것은 아니지만, 에르나 왕국과 전쟁, 아이언베어 요새 재건, 검은 숲의 피난민 문제 등을 생각하면 그랜드 토너먼트 같은 유흥에 큰돈을 쓸 상황이 아니었다.
“가신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로벨은 흐룬팅의 폼멜을 만지면서 말했다.
“소식이 있을 거야.”
“그럼 토너먼트 개최 전까지 기다리면 되나요?”
로벨은 빠트린 것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한 후 대답했다.
“응.”
분명 빠진 일정은 없지만, 새로운 일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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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로벨의 일행은 재밌고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어린 집사의 서슬 퍼런 감시 탓에 먹고 마시는 것에 제약이 있었지만, 그래도 세계 최고의 도시 중 하나를 관광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샘 포클의 광장, 12기사의 조각상, 포클랜드 명물시장, 거리공연과 연극 등등. 하루 종일 신나게 놀고 거인과 난쟁이 여관으로 돌아왔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낮에 본 유랑극단을 흉내 내며 깔깔거리다가 초저녁에 기절하듯 쓰러져 잠이 들었다. 하지만 로벨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천장에서 쥐 소리가 요란하고, 오래된 건초에서 이상한 냄새가 풍기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그런 이유도 있기는 한데, 그것보다 늑대의 왕 때문이었다.
‘늑대의 왕과 마상시합이라니?’
잡생각이 많으니 수마가 찾아오지 못한다. 그래서 방문이 열리는 작은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끼리릭-!
“누구야?”
로벨이 말을 걸자 문 열리는 소리가 멈췄다. 로벨은 베게 밑에 숨겨둔 대거를 잡고 오른쪽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렸다.
“대답하지 않으면 쏠 거야.”
로벨의 일행은 로벨이 투사무기를 가지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외부인이라면 다르다.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달빛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로벨은 침대 아래로 굴러 내려왔다. 그와 동시에 로벨이 누워있던 자리로 길고 하얀 것이 꽂혔다.
‘암살자!’
로벨은 대거를 위로 그었다. 정체 모를 암살자의 겨드랑이를 날카롭게 베었다. 싸구려 갑옷으로는 보호하지 못하는 위치였다. 동맥이 잘린 듯 핏물이 왈칵 떨어졌다.
“크으윽!”
암살자가 신음을 내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로벨은 손바닥 안에서 대거를 반 바퀴 돌려 역수로 쥐고 신음이 나온 위치에 휘둘렀다. 칼날이 목젖을 자르고 경추를 부러트렸다.
“습격이다!”
쾅!
방문이 활짝 열리고 그림자 몇 개가 더 들어왔다. 정황상 로벨의 부하들은 아니었다. 로벨은 피 묻은 대거을 집어 던지고 의자 등받이에 걸어놓은 소드 벨트를 잡았다.
“윽!”
대거에 맞은 한 놈이 쓰러지고, 그 뒤로 두 놈이 따라 들어왔다. 달빛이 비치는 벽면에 숏소드와 배틀액스가 그려졌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뽑아 수직으로 휘둘렀다. 그러나 실수였다. 거인과 난쟁이 여관의 천장은 롱소드를 휘두를 만큼 높지 않았다. 칼날이 대들보에 덜컥 걸렸다. 암살자의 입술이 들썩였다. 비웃음이었다.
“건방져!”
로벨은 소드 벨트를 집어 던지면서 흐룬팅의 손잡이를 당겼다. 소드 벨트를 걷어차고 뛰어든 암살자 복부에 저절로 칼날이 박혔다. 칼이 한 자루 더 있는 줄 몰랐을 것이다.
“꾸르륵...”
로벨은 천장에 걸린 아론다이트와 시체에 찔린 흐룬팅을 동시에 회수하며 남은 한 명을 보았다. 동료들이 속절없이 당하자 섣불리 덤비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로벨은 팔뚝으로 얼굴을 한번 훑고 말했다.
“살려줘.”
“머, 뭐?”
암살자가 황당해서 되물었다. 그러나 암살자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초라해진 밤손님 뒤로 곰과 늑대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 노옴...”
“크르릉...”
성난 용병과 성난 늑대가 정말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