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포클랜드
137화. 포클랜드
포클랜드(Falkland)는 이름 그대로 ‘샘 포클의 땅’을 의미했다. 약 300년 전, 위대한 정복왕 샘 포클이 3개 지방의 12개 부족을 통합하여 포비아 왕국을 건국했다. 국명이 정해지지 않았을 때는 하얀 숲에서 볼탄 반도까지 전부 포클랜드라 불렀으나, 지금은 샘 포클의 고향이자 샘 포클이 직접 통치한 남부 지방만 포클랜드라 불렀다.
“그럼 포클랜드 시티는요?”
“그것도 이름 그대로야.”
“샘 포클의 땅의 도시?”
“그리고 포비아 왕국의 수도지.”
로벨은 전투마의 갈기를 오른쪽으로 빗어 넘기고 허리를 쭉 폈다. 애꾸눈 볼포스는 지친 농마를 달래며 수레를 끌었고, 어린 집사는 수레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졸았고,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은 오우거와 싸운 무용담을 3배쯤 과장해서 떠들었다.
외팔이와 허풍쟁이의 무용담을 취합하면 오우거는 손이 3개고 다리가 4개일 것이다. 외팔이가 자른 오른손을 허풍쟁이가 또 잘랐으니까 말이다.
로벨은 혀를 한번 차고 전방을 보았다. 볼탄 반도를 벗어난지 닷새가 지났다. 검은 숲의 패잔병과 싸운 것을 제외하면 아무 말썽도 없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에 풍족한 먹거리가 여행보다 피크닉 느낌을 주었다. 어린 집사의 기억과 애꾸눈의 길안내가 맞다면 오늘 중에 포클랜드 시티에 도착할 것이다.
“와! 사람이다!”
마녀의 외침에 어린 집사가 눈을 뜨고 외팔이와 허풍쟁이는 잡담을 멈췄다.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에 손목을 올리고 느긋하게 ‘사람’을 보았다. 정확히는 ‘사람들’이었다.
“뭐가 저리 많아요? 100명도 더 되는데요?”
노인과 아이가 섞여 있으니 군대는 아니고, 인원에 비해 짐이 얼마 안 되니 상단도 아니었다. 로벨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피난민이야.”
“앗!”
검은 숲을 떠나온 피난민이었다. 의외로 마음씨가 착한 외팔이가 콧방울을 벌렁이며 걱정했다.
“생각보다 상황이 안 좋은가 봅니다요.”
영지민이 영지를 떠나는 것은 법적으로도 문제지만, 생존에도 영향이 있었다. 인간은 집과 땅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쳇! 세금을 칼같이 뜯어가면 엉덩이 붙이고 살게는 해줘야지.”
“언제 높으신 분이 그런 거 신경 쓰는 거 봤냐?”
로벨 일행은 피난민 행렬을 금방 따라잡았다. 노모를 업고, 코흘리개를 안고, 세간살이라 불리는 쓰레기를 끌고 가니 걸음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로벨 일행은 피난민 행렬을 지나치며 표정을 하나하나를 관찰할 수 있었다. 의외로 절망이나 분노는 보이지 않았다. 슬픔과 공포도 깊지 않았다. 아이들은 칭얼거리고 노인들은 한숨을 쉬었지만, 대부분은 로벨만큼이나 무덤덤했다.
‘농민의 삶이란...’
7살쯤 된 여자아이가 콧물을 훌쩍이며 로벨을 올려다보았다. 로벨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다행히 행렬은 길지 않았다.
로벨 일행은 평야 저편에서 다시 피난민을 돌아보았다. 햇볕에 던져진 지렁이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린 집사가 수레 난간에 두 팔이 걸치고 중얼거렸다.
“이번 겨울이 지나면...”
겨울이 지나면 좋아질 거란 소리인지, 아니면 겨울이 지나면 살아있지 못할 거란 소리인지 애매했다. 로벨은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가자.”
@
로벨 일행은 피난민을 두 번 더 만났다. 그중 마지막 피난민은 포클랜드 시티 성문 앞에서였다.
포클랜드 시티. 포비아 왕국의 수도이자 내해(內海)의 교역항이었다. 프란시스 시티도 크고 화려하지만, 감히 수도와 비교할 수 없었다. 오른쪽 언덕에는 샘 포클의 왕성이, 왼쪽 언덕에는 옛 신의 대성당이 세워져 있고, 그 아래쪽에는 성탑보다 높이 솟은 지붕이 융단처럼 펼쳐져 있으며, 마상시합을 벌여도 될 법한 포장도로가 거미줄처럼 짜여 있었다.
“와아아...”
포클랜드 시티가 처음인 마녀 키르케는 감탄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로벨은 4년 전 어린 집사와 함께 처음 포클랜드 시티에 왔을 때를 떠올리고 미소 지었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성문 앞을 가득 메운 피난민 때문이다.
“푸르릉!”
로벨은 인파에 놀라 흥분한 전투마를 달래며 성문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피난민 한 명이 로벨의 신발을 붙잡았다.
“나으리! 나으리!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로벨은 화들짝 놀라서 발을 뺐다. 그러나 신발은 시작이었다. 한 명이 매달리자 열 명, 스무 명이 달라붙었다.
“제 아이가 사흘째 굶고 있어요! 먹을 것 좀 나눠주세요!”
“아이고, 기사 나으리! 살려주세요! 저희 좀 살려주세요!”
로벨이 누군지 모를 것이다. 그저 고급진 옷과 고급스러운 전투마를 보고 ‘높은 분’이라 지레짐작해서 애원하는 것뿐이다.
“이놈들이! 저리 떨어져라!”
“저리 비켜라! 앞을 막지 마라!”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이 억센 힘으로 피난민을 밀어냈다. 성깔 있는 사내 몇이 욱해서 주먹을 쥐었지만 애꾸눈이 아바레스트를 꺼내자 덤비지 못하고 물러났다.
로벨은 고개를 조금 숙이고 도개교를 건넜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따라왔다. 성문 경비병이 할버드를 치우고 로벨을 올려다보았다. 화려한 칼과 늠름한 말로 기사임을 짐작했다.
“어디서 오신 누구십니까?”
어린 집사가 수레에서 뛰어내려 당당히 소리쳤다.
“볼탄 반도의 정당한 주인 에릭 윌리엄 폰 프란시스 공작님의 첫 번째 기사이자 늑대의 성의 하나뿐인 주인이며 영광스러운 포비아 왕국의 그랜드 챔피언이신 로벨 로드릭 백작님입니다.”
기사의 장엄한 소개에 익숙한 성문 경비병은 ‘볼탄 반도’와 ‘백작님’이란 두 단어만 기억하고 동료에게 손짓했다.
“백작님, 대단히 죄송하지만 쪽문으로 지나가실 수 있겠습니까?”
“저들 때문에?”
“성문을 열면 흥분해서 달려들지도 모릅니다. 저희로서는 쇠붙이 쓰는 일을 피하고 싶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로벨은 성문 경비대와 울프 용병단 너머에서 애절하게 쳐다보는 피난민을 힐끔 보았다.
“왜 들여보내지 않는 거야?”
“하루에 100명씩 불어나고 있습니다. 저들 전부를 받아들이면 수도가 난장판이 될 겁니다.”
“그럼 무슨 대책이 있어?”
“난민촌을 세워서 식량을 배급할 거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게 언제일지는 옛 신과 자비에 후작님만이 아시겠지요.”
오우거도 무리 없이 들락거릴 수 있는 커다란 성문 한쪽 귀퉁이에 수레 하나 겨우 지나갈 작은(!) 쪽문이 열렸다.
로벨은 성문을 통과하며 정신과 육체가 굶주린 피난민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로벨의 힘으로는 구원할 수 없었다.
‘천 명의 적을 죽이는 것보다 천 명의 이웃을 구하는 것이 천 배 더 어려워. 죽이고, 빼앗고, 군림하는 것은 정말 보잘것없는 힘이야.’
@
로벨 일행은 포클랜드 시티 동쪽 시가지를 거닐었다. 성 밖 사정과 달리 성 안은 밝고 활기찼다. 좋은 옷을 입은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뛰어다니고, 양산을 꺼내 든 어여쁜 아낙들이 옷과 장신구를 자랑하고, 품위 있는 사내들이 지팡이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담소를 나누었다.
마녀 키르케는 자신의 꼬질꼬질한 꼬트를 내려다보며 웅얼거렸다.
“다들 부자 같아요.”
“성 안의 사람은 원래 부자들이오.”
“꼭 그렇진 않죠. 쥐와 빈민은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어린 집사의 말은 불편해도 정확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 운하 다리 아래, 부두로 이어지는 샛길 등에 삐쩍 골아서 갈비뼈가 보이는 꼬마들이 숨어있었다. 마녀 키르케가 호기심과 측은지심을 보였다.
“저기서 뭐하는 거죠?”
“가까이 가지 마시오.”
가난하다고 선한 것은 아니다. 소매치기 정도면 얌전한 편이고, 살인과 강도질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것이 도시의 빈민이었다.
“크르르르르...”
아야와 이야카가 친구를 지키기 위해 따라붙었다. 거리의 아이들은 사냥개와 비교가 안 되는 토종 회색늑대에 겁을 먹고 흩어졌다.
“외지인이 오면 저리 염탐하오. 어리숙해 보이면 돈주머니를 훔치고, 허약해 보이면 봇짐을 강탈하오.”
“아... 아아.”
마녀 키르케는 안타까움이 담긴 신음을 흘렸다. 로벨은 마녀 키르케를 위로하고 어린 집사에게 말했다.
“예전에 머문 여관 기억해?”
어린 집사가 아니라 허풍쟁이가 물었다.
“여관이요? 왕성으로 안 가십니까요?”
“성은 좀... 불편하잖아.”
로벨 정도의 직위와 명성이면 왕성의 방 한 칸 얻는 것은 일도 아니지만, 남다른 비밀과 까다로운 대인관계 때문에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직설적으로 설명했다.
“똥 누러 갈 때마다 기사와 마주치고, 그 기사가 왕족인지 아닌지 염탐하고 싶어요?”
“그건 별로... 여관이 좋겠습니다요.”
기사에게 안 좋은 감정이 많은 외팔이 더치가 진저리쳤다.
로벨은 기억을 더듬어서 4년 전에 방문한 ‘거인과 난쟁이’ 여관을 찾아갔다. 어린 집사가 그림 간판을 올려다보며 갸우뚱했다.
“오랜만에 와서 그런가? 왜 이리 낡았죠?”
“옛날에도 이랬어.”
지미와 루시의 여관보단 크고 화려하지만, 로벨 정도되는 귀족이 일부러 찾아올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는 가난했으니까. 1페닝으로 전투마를 돌봐주는 여관이 여기뿐이었잖아.”
로벨은 추억이 공유하는 전투마를 이끌고 대문을 통과했다. 말울음을 들었는지 마녀 키르케 또래의 여급이 달려 나왔다.
“어서 오세요! 자이언트 앤 드워프입니다! 에, 여섯 분이신가요?”
“컹! 컹!”
“어머나! 잘생긴 멍멍이 형제들까지 여덟 분이군요?”
“멍멍이 아닌데... 형제도 아닌데...”
마녀 키르케가 정정해주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로벨은 전투마 고삐를 넘겨주고 물었다.
“주인장은?”
“카운터에 있어요. 아버지랑 아는 사이에요?”
“조금.”
울프 용병단은 수레에 실린 짐을 내리고 농마를 풀어주느라 바빴다. 로벨은 ‘그쪽보다 10배 비싼 말이니까 10배 좋은 거 먹여라’ 어쩌라 훈계하는 어린 집사의 뒷덜미를 잡고 실내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 어억?”
여관주인이 장사꾼의 미소로 인사하다가 깜짝 놀라 말을 삼켰다.
“그랜드 챔피언! 그랜드 챔피언이 아니십니까?”
“날 기억해?”
“하모요! 하모요! 우리 여관에 머문 손님 중 가장 유명하신 분을 어떻게 잊습니까?”
로벨은 빙그레 웃었다.
“방 3개. 그리고 식사할 수 있지?”
“예예! 이쪽으로 오시지요.”
여관주인은 카운터를 비우고 손수 로벨을 안내했다. 로벨은 낮은 천장과 어두운 계단에 조심하며 따라갔다. 마루가 삐그덕- 삐그덕- 소리내고 촛불이 앞뒤로 흔들렸다.
“3년 전, 어이구, 4년 전인가요? 기억이 생생하군요. 젊은 나리가 그랜드 챔피언이 될 거라고 호언장담하시더니, 정말 그랜드 챔피언이 되어서 돌아오셨지요. 올매나 신기하고 놀랍던지... 여기입니다요.”
로벨은 열쇠를 받고 호수를 확인했다. 여관주인은 그 잠깐 사이에도 쉬지 않고 떠들었다.
“올해도 그랜드 토너먼트 때문에 오셨습니까요?”
“응.”
“이야, 올해도 대단하겠군요! 지난 그랜드 챔피언과 늑대의 기사도 나온다고 합니다.”
“누구라고?”
로벨이 깜짝 놀라서 돌아왔다.
“보, 볼프 사트로 후작 말입니다. 저도 소문으로 들었습,,.”
“그거 말고! 늑대의 기사라니?”
로벨이 칼자루를 쥐고 윽박지르자 여관주인은 찔끔해서 눈동자를 굴렸다.
“저, 저번에 에르나 왕국과 싸울 때 활약한 기사님이라고 합니다. 이름이... 이름이 리카... 리카 뭐였는데... 아무튼 늑대의 기사라고 소문이 퍼다합니다. 어이구! 나으리! 괜찮으십니까?”
로벨의 낯빛이 햇빛이 안 드는 깜깜한 실내에서도 알아볼 정도로 안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