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36화 (136/605)

136화. 탈영병

136화. 탈영병

로벨은 여행용 짐을 챙겼다. 큰 자루에 비스킷, 수통, 기름통, 점화기, 가죽끈, 여벌옷과 신발을 넣어 전투마 엉덩이에 꽁꽁 묶었다. 그리고 모직담요를 둘둘 말아 안장에 올리는 것으로 출발준비를 마무리했다.

“좋아. 다 됐다.”

“아니죠. 아니죠. 가장 중요한 게 빠졌어요.”

어린 집사가 컴포지트 아머가 차곡차곡 담긴 상자를 가지고 나왔다. 로벨은 아차해서 전투마의 꽉 찬 엉덩이를 보았다. 오랜만에 장거리 여행이라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갑옷 실을 자리가 없었다. 로벨은 심각하게 고민 후 말했다.

“...입고 갈까?”

어린 집사는 아랫입술을 삐죽였다.

“농마 한 마리 데려가요.”

“어? 그래도 돼?”

“어차피 추수기에는 쓸모없으니까요.”

로벨보다 로벨의 수행원들이 좋아했다.

로벨은 짐을 덜게 된 전투마의 뺨을 쓰다듬으며 ‘그랜드 토너먼트 원정대’ 멤버를 확인했다. 로벨,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외팔이 더치, 애꾸눈 볼포스, 허풍쟁이 제이콥, 그리고 아야와 이야카까지 총 6명과 2마리였다.

푸르릉- 푸릉-

“아, 미안.”

전투마와 농마를 더해서 4마리였다. 외팔이 더치가 허전한 손목을 만지며 물었다.

“그런데 집사가 가면 성은 누가 지킵니까요?”

“펄프 대장이랑 리암 수사님이요.”

추수기가 가깝고, 로드릭 상회와 시장 일도 많지만, 로벨의 종자 노릇을 할 사람이 어린 집사밖에 없으니 도리가 없었다. 어린 집사는 ‘영주 대행’이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은 펄프 대장에게 당부했다.

“길어야 스무날이에요. 가을걷이할 때쯤 올 테니까 사고 치지 말고 있어요.”

펄프 대장은 부쩍 늘어난 흰머리를 긁적이고 말했다.

“사고 칠만한 사람 다 가니까 걱정하지 마시오.”

마녀 키르케는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을 번갈아보고 깔깔 웃었지만, 마녀 이외에는 모두 마녀를 측은하게 보았다.

‘자기 얘기인 줄 모르나 봐.’

‘그냥 모르게 냅둬.’

겁쟁이 데비와 코골이 바디가 힘 좋은 농마를 데려와 수레에 연결했다. 쟁기를 끄는데 익숙해서 수레를 달아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아야와 이야카는 오랜만에 나들이라 신이 나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로벨은 늑대 남매와 달리 품위를 유지하는 전투마에 올라 고삐를 휘어잡았다.

“그럼 다녀올게. 펄프 대장, 리암 수사, 나 없는 동안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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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말머리를 앞세워서 따각- 따각- 소리로 길을 인도했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말꼬리를 따라가다가 다리가 아프면 수레에 앉아 잠깐씩 쉬었다. 두 사람 몸무게를 합쳐봐야 성인 남자 한 사람 몸무게 겨우 나올 테니 그냥 앉아서 가도 될 텐데, 한 배에서 나온 남매 마냥 절대 같이 앉지 않았다.

외팔이 더치는 불편한 왼손 대신 어금니로 수통 마개를 열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에르나 왕국과 관계정리가 안 되었는데 한가롭게 토너먼트 따위나 열다니, 거 높으신 분들 생각은 통 모르겠습니다.”

“야야, 그렇게 말하면 우리 기사 나리도 한가로운 사람이 되잖아.”

허풍쟁이 제이콥이 눈치를 주었지만 로벨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한가한 거 맞아.”

어린 집사가 전투마 엉덩이를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자고로 영주라면 강한 척, 아는 척, 바쁜 척을 잘해야 한다고요.”

“나, 나도 알고 있어.”

“...적어도 아는 척은 문제없네요.”

어린 집사가 투덜거리자 마녀 키르케가 깔깔 웃었다. 그때, 애꾸눈 볼포스가 어깨에 걸친 아바레스트를 손으로 옮겼다.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도 덩달아 병장기를 잡았다. 초가을의 나른한 분위기가 한겨울의 망루처럼 얼어붙었다. 어린 집사가 당황해서 한 걸음 물러났다.

“왜, 왜 그래요?”

“쉿.”

로벨은 말머리를 옆으로 돌리고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스르릉- 칼날 미끄러지는 소리가 삭풍처럼 서늘했다.

“크르르릉...”

아야와 이야카가 자세를 낮추고 송곳니를 보였다. 콧등의 주름과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이빨이 험상궂었다.

어린 집사는 늑대남매가 바라보는 방향을 보았다. 포클랜드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키 작은 관목이 무성했다.

“저기 뭐 있어요?”

“피. 그리고 반사광.”

로벨은 외팔이와 허풍쟁이에게 눈짓했다. 외팔이 더치는 손도끼를 귓가에 붙이고 오른쪽으로 나아갔고, 허풍쟁이 제이콥은 헌팅 나이프를 역수로 쥐고 왼쪽으로 이동했다. 로벨을 중심으로 삼각대형이 형성되었다.

‘도적? 아니면 몬스터?’

외팔이 더치는 로벨을 힐끔 보고 관목더미를 발로 찼다. 그러자 즉시 반응이 나왔다.

“이야아앗!”

“쳐랏!”

앙상한 가지를 꺾으며 글레이브가 튀어나왔다. 외팔이 더치는 바클러를 올려 창날을 막고 괴성을 지르며 손도끼를 휘둘렀다. 그러나 리치가 짧아 닿지 않았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왼손으로 옮기고 어린 집사에게 오른손을 뻗었다.

“랜스!”

어린 집사는 수레 위로 기어 올라가 대(對)보병용 라이트 랜스를 내밀었다. 로벨은 창대를 잡고 반 바퀴 돌려서 겨드랑이에 끼었다. 그리고 전투마의 옆구리를 박찼다.

“이럇!”

로벨과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전투마는 콧김을 한번 뿜고 땅을 박찼다. 거리가 짧아서 최고속력을 끌어내지 못했지만, 모자란 힘은 팔과 허벅지로 대신했다. 창대를 꽉 쥐고 수풀을 찔렀다.

“크악!”

창끝에서 죽음이 전해졌다. 나무나 바위와 다른 느낌. 사람을 꿰뚫는 느낌이었다.

로벨은 무리해서 창을 회수하지 않고 그대로 놓았다. 그랜드 챔피언다운 노련함이었다. 수풀 속에서 무장한 패거리가 뛰쳐나와 워 사이드를 휘둘렀다. 전투마의 장딴지를 노린 공격이다. 그러나 로벨과 전투마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멀찍이 떨어졌다.

“젠장! 기사였어!”

“아니. 아바레스터다.”

애꾸눈 볼포스가 방아쇠를 움켜쥐었다. 철제 쿼럴이 갓난아기의 비명 같은 파공음을 뿌리며 무장 패거리 가슴에 안겼다. 거친 포옹이라 애정이 없는 습격자는 속절없이 나자빠졌다.

“이 자식들! 보통이 아니야!”

“너희는 보통이고?”

로벨이 하나, 애꾸눈이 하나 처치했지만 아직도 셋이 남았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헌팅 나이프를 휘두르며 견제했다. 로벨을 쫓거나 애꾸눈에게 달려가면 뒤통수에 칼을 박아줄 작정이었다. 반대편의 외팔이 더치도 비슷한 의향을 보여주었다.

무장한 패거리는 자신이 포위되었음을 깨달았다. 숫자도, 무장도, 위치도 불리했다. 로벨은 소중한 전투마를 안전한 곳에 세우고 안장에서 내렸다.

“피를 묻히고 숨어있는 자들이 선량한 이웃은 아니겠지.”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늘어트리고 다가갔다.

“기사를 상대할 줄 아는 것 봐서 평범한 도적이 아닌데... 어디서 왔어?”

“나, 나으리...”

로벨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무장 패거리를 훑어보았다. 전쟁무기를 소지하고 갑옷을 입었는데 용병도, 도적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너희들, 탈영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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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에 소속된 농민병은 물론이고, 계약으로 맺어진 용병도 자유와 거리가 멀었다. 전쟁이 끝나거나, 계약이 끝나거나, 삶이 끝나기 전에는 전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외팔이 더치가 부들부들 떨었다. 곰처럼 생긴 떡대가 수염이 들썩일 정도로 화내니 새삼 무서웠다.

“지들만 살겠다고 도망쳐? 이놈들을 그냥...!”

어느 지방이나 탈영병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즉결처형이었다. 일례로 전투 중에 파비스를 챙기기 위해 일시 후퇴한 용병단을 집단 탈영으로 오해해 몰살한 일도 있었다.

“저희는 탈영병이 아닙니다!”

탈영병이 탈영을 부인했다. 그러나 녹슬고 망가진 병장기와 피딱지가 눌어붙은 갑옷이 설득력을 잡아먹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귓구멍을 후비고 귀지를 후- 불었다. 의미가 분명한 제스처였다.

“지, 진짜입니다! 고용주가 죽고, 용병단이 와해되어서 도망, 아니아니! 빠져나왔습니다! 패잔병이라면 모를까, 탈영병은 아닙니다!”

로벨은 자칭 패잔병의 복장을 살피고 판단을 보류했다.

“어디서 도망쳤어?”

“그러니까 도망이 아니라...”

“아, 좀 닥치고! 우리 나리가 질문하잖아!”

외팔이 더치가 손도끼를 휘두를 시늉하자 찔끔해서 크게 대답했다.

“검은 숲입니다!”

“하긴, 거기밖에 없지.”

로벨은 계속해보라고 손짓했다.

“저희는 피바람 용병단 소속으로-‘푸웁! 피바람이래!’, ‘조용히 좀 하쇼!’- 가시나무 성의 영주에게 고용되었습니다.”

“가시나무 성?”

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돌아보았다. 애꾸눈 볼포스가 작게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었지?”

“오우거가, 오우거가 공격했습니다.”

오우거와 싸운 경험이 있는 로벨, 외팔이, 허풍쟁이는 동시에 움찔했다.

“저는 본래 포클랜드 출신입니다. 먹고 살려고 용병노릇을 하다 보니 검은 숲까지 흘러갔지요.”

나이 좀 있는 패잔병이 넋두리를 시작했다. 그러자 어린 집사가 딱 잘랐다.

“그건 됐고요. 오우거 이야기나 해봐요.”

“...가시나무 성 영주가 몬스터가 날뛰니까 숲을 경계하라고 고용했습니다. 예전부터 몬스터가 자주 출몰한 곳이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오크나 고블린 부락이 세력 다툼에서 밀려나 숲 밖으로 나온 거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아니었다?”

“예... 예. 아니었습니다. 그건 몬스터 부락이 아니었습니다.”

패잔병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심장이 안 좋은 병사는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지난 일을 떠올리는 것치고 격한 반응이었다.

“그건 군대입니다. 수백 마리, 어쩌면 수천 마리의 몬스터로 이루어진 군대 말입니다. 오우거가 성문을 부수자 갑옷을 입은 오크가 성 안뜰로 밀려들어왔습니다. 저희는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기사 나리가, 가시나무 성 영주가 오우거 발에 밟혀 죽는 것을 보고, 해자로 뛰어내려 탈출을...”

로벨은 ‘수 천 마리 몬스터’ 부분부터 제대로 듣지 못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이 부리던 고블린 군대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연일 리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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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잔병은 로벨 일행의 말과 식량이 필요했노라 고백했다. 가시나무 성에서 도망친 이래 사흘째 제대로 먹지 못했다. 로벨은 보리빵과 맥주를 조금 나눠주고 아론다이트를 세웠다.

“그래도 기사를 공격한 죄는 물어야지?”

빵조각으로 입에 욱여넣으며 함박웃음을 짓던 패잔병이 마지막 말에 기침을 토했다. 로벨은 빙그레 웃고 아론다이트를 칼집에 넣었다.

“동쪽으로 10마일 쯤 가면 로드릭 영지의 늑대성이 나올 거야. 거기서 펄프 대장을 찾아.”

“늑대성... 펄프 대장...”

“로벨과 어린 집사가 보냈다고 하면 될 거야.”

허풍쟁이 제이콥이 낄낄거리며 한 마디 덧붙였다.

“‘신병 받아라!’ 외치는 거 잊지 말고. 우리 용병단 전통이니까.”

“우리 용병단이라 하시면...?”

“울프 용병단에 입단하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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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잔병 무리는 거듭거듭 감사인사하고 동쪽으로 떠났다. 포비아 왕국에서 용병 노릇하는 칼잡이 중에 울프 용병단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악명 높은 까마귀 용병단과 붉은 수염 용병단을 꺾고 최강의 용병단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용병단이었다. 어린 집사가 뽀로통하게 말했다.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아요. 그렇게 쉽게 용서가 돼요?”

“아이언베어 요새에서 죽은 결원을 보충해야 하잖아. 그리고 아까 보니까 솜씨가 나쁘지 않아.”

로벨은 패잔병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솜씨 좋은 용병이 많이 필요해질 거야.”

로벨의 말뜻을 이해한 것은 애꾸눈 볼포스 뿐이었다.

검은 숲의 가시나무 성은 사흘거리에 불과했다. 바꿔 말해, 검은 숲 몬스터가 사흘거리로 접근했다는 뜻이다.

“우리 쪽으로 바람이 안 불면 좋겠는데.”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바람이요? 바람 잘 부는데요?”

“이 계절에는 항상 북서풍이 불죠.”

“......”

로벨은 두 사람을 째려보고 하늘을 보았다. 검은 숲에서 볼탄 반도로 바람이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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