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35화 (135/605)

135화. 부랑자

135화. 부랑자

리암 폴드 수사는 최소한 수재가 분명했다. 단 하루 만에 로드릭 영지의 제반 사정을 파악하고, 어린 집사의 행정업무 상당부분을 인계받았다. 어린 집사의 경계심을 허물고, 마녀 키르케와 친목을 다지며, 아야와 이야카랑 놀면서 해낸 일이니 정말 대단했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이렇게 평가했다.

“성격은 이상하지만 머리는 정말 좋아요.”

“머리 모양은 이상해도 머릿속은 착해요.”

“...너희도 만만치 않아.”

아무튼 리암 수사가 재무관리를 맡아주면서 어린 집사와 그람 형제의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작은 걱정거리가 생겼다.

“성 안에서 지낼 텐데, 괜찮을까요?”

어린 집사가 주판알을 굴리며 물었다. 마녀 키르케 한 명으로도 조심스러운데, 리암 수사까지 달라붙으면 이만저만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괜찮아. 성직자잖아.”

“성직자니까 더 큰 문제죠. 경계심이 없잖아요.”

로벨은 아무 일 없을 거라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내심 불안한지 외팔이 더치를 불러서 자물쇠를 몇 개 구해오라고 지시했다. 개인공간의 보안(?)을 철저히 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리암 수사는 어린 집사가 추진하는 ‘로드릭 시장’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제가 좀 봐도 될까요?”

“뭐, 그러시든지.”

어린 집사는 뚱하게 ‘시장 활성화를 위한 중장기 계획서’를 건네주었다. 리암 수사는 의자 위에 정좌하고 진지하게 한 장 한 장 검토했다. 학생의 시험지를 채점하는 교수 같기도 하고, 도제의 공예품을 살피는 장인 같기도 했다. 어린 집사는 괜히 초조해졌다. 잠시 뒤, 리암 수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거 잘못됐어요.”

“머, 뭐라구요?”

어린 집사가 펄쩍 뛰었다. 리암 수사는 첫 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페르젠 시티의 양모 시세랑 노스폴드 시티의 가죽 시세를 분석 중이죠?”

“영지의 자원을 활용하려면 시세를 파악해야죠!”

어린 집사는 로드릭 마을의 주력 상품을 강조했다. 그러자 리암 수사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게 잘못됐어요. 우린 장사하는 게 아니라 장사할 장소를 만드는 거잖아요?”

“시장을 활성화하려면 상인을 모아야 하고, 상인을 모으려면 경쟁력 있는 상품이 있어야 하죠!”

“상인보다 중요한 게 있어요. 사실은 가장 중요한 거죠.”

어린 집사는 굴러온 돌이 흠을 잡자 까탈스럽게 성질을 부렸다.

“흥! 그게 뭔데요?”

“교통이요.”

로벨이 흐룬팅을 닦는 손을 멈추고 어린 집사와 리암 수사를 보았다. 싸움 나면 누구를 말릴지 고민했다. 그러나 조숙한 집사와 얌전한 수사는 싸울 생각이 없었다.

“교통... 이요?”

“시장은 거래하는 장소에요. 거래는 상인만 하는 게 아니죠. 여기 인구가 몇이죠?”

“로드릭 마을은 400명 정도... 뉴 로드릭 마을이랑 주변 마을도 비슷비슷한데...”

“하루 거리, 그러니까 9마일 이내로 보면 3,000명 정도 되죠?”

“아, 아하?”

어린 집사도 똑똑하기로는 남부럽지 않았다. 리암 수사의 생각을 바로 이해했다.

“상인은 손님이 있으면 산도 바다도 가리지 않아요. 그러니까 상인이 아니라 손님을 모아야 해요.”

“그래서 교통이고요?”

“길을 만들고, 표지판을 만들고, 가능하면 역참도 만들어야죠.”

“그럼 행상인이 찾아오기 좋으니까 일석이조네요!”

로벨은 두 소년이 왜 저리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다. 창틈으로 스며드는 햇살에 칼날을 비춰보고 만족했다.

‘뭐, 알아서 잘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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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는 노스폴드 시티의 기술자를 불러와 로드릭 마을의 도로를 정비했다. 우선 잡목과 잡풀을 태우고, 롤러(Roller)로 평평하게 다진 후 1마일 간격으로 거리와 방향을 알리는 표지판을 세웠다.

“으으...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드는데...”

어린 집사의 주판알은 쉴 틈이 없었다. 예상치 못한 지출이라 재정에 타격이 컸다. 로벨이 어깨를 다독였다.

“내 용돈을 줄여도 돼.”

“그건 진즉에 줄였어요.”

“뭐?”

어린 집사는 가을이 오기 전에 도로 공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큰마음 먹고 50명의 인부와 5마리의 짐말을 고용했다.

“주변 마을로 확장하려면 영주님의 허락이 있어야 해요.”

“내 허락?”

“주변 마을 영주님의 허락이지만, 그냥 영주님 허락이면 되겠네요.”

로벨의 봉신은 물론이고, 로벨에게 충성하지 않는 영주와 지주도 로벨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게다가 공짜로 길을 뚫어준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누가 공짜래요?”

어린 집사는 각 영지에서 노동력을 차출했다. 강단 있는 몇몇 영주가 반발했지만 설득은 어렵지 않았다. 로벨이 울프 용병단 50명을 거느리고 한 바퀴 순회하자 크나큰 관용과 넓은 이해심을 보여주었다.

밀밭이 노랗게 익어갈 무렵, 어린 집사와 리암 수사의 노력이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바위성 등에서 올라온 상품이 거래되면서 로드릭 상회에 가입하는 상단이 점차 늘어났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몇 푼 안 되지만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

“투자금 회수하려면 10년쯤 걸리겠는데요? 히힛!”

어린 집사는 툴툴거리면서 기뻐했다. 거래세와 통행세가 직접적인 수익이지만, 그 외에도 부가적인 수익이 있었다. 바로 ‘사람’이었다.

로벨은 2층 집무실에서 1층 메인 홀로 내려가며 소란을 감지했다. 펄프 대장과 과묵한 몬트가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을 데리고 방문했다. 삐쩍 마른 몸과 누더기 같은 옷이 영락없는 부랑자였다. 손가락을 쪽쪽 빠는 3, 4살 꼬마와 허리가 90도 가까이 굽은 노인이 섞인 것이 조금 특이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앞으로 당기며 물었다.

“내 성에서 왜 소란이야?”

로벨이 불쾌해 하자 펄프 대장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영주님, 이자들은...”

“영주님?”

“영주님! 살려주십시오!”

펄프 대장이 설명하기도 전에 부랑자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로벨은 메인 홀로 내려가는 것을 보류하고 계단 중간에 멈췄다. 저들의 태도를 보아 가까이 가면 쇼오스가 벗겨질 듯 했다.

“너희는 누구야?”

로벨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살려 주세요!’, ‘거두어 주십시오!’, ‘영주님 만세!’ 따위에 묻혀서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로벨은 펄프 대장에게 눈짓했다. 펄프 대장은 숏소드를 뽑아 계단 난간을 두드렸다.

“조용! 조용해라, 이 무지렁이들아! 영주님이 하문하신다!”

법보다 가까운 것이 칼인데,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코앞에서 칼을 휘두르니 끔찍했다. 삽시간에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조용해졌다. 로벨은 한결 편하게 질문했다.

“어디서 왔어?”

부랑자 중 한 명이 대표로 말했다.

“검은 숲, 검은 숲에서 왔습니다.”

“검은 숲? 제임스 공작의 사람들이야?”

“제임스 공작이 아니라, 필터 자작님입니다.”

검은 숲 출신인 과묵한 몬트가 나직이 아뢰었다.

“제임스 공작의 봉신입니다.”

자기 주인은 알지만, 주인의 주인은 모르는 것이 전형적인 시골 농민이었다.

“가만, 무단이탈이잖아?”

로벨은 도망친 농민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러나 남다른 사정이 있었다. 갓난아기를 업은 중년 아낙이 횡설수설 말했다.

“영주님이, 우리 영주님이 죽고, 일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서, 저희보고 도망가라 해서, 검은 숲은 어디도 안전하지 않으니까...”

중간중간 내용이 잘려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펄프 대장이 짜증을 부리자 찔끔해서 다시 설명했다. 서너 차례 이야기를 들으니 대강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몬스터의 습격으로 성이 함락되었다고?”

“예예.”

“너희 영주가 도망치라고 했고?”

“예. 그렇습니다.”

“검은 숲에도 기사다운 기사가 있었네.”

로벨은 자신을 희생해서 영지민을 살린 얼굴 모를 기사 필터 경을 위해 묵념했다. 그리고 다시 질문했다.

“그런데 왜 여기로 온 거야? 포클랜드가 더 안전할 텐데?”

부랑자가 눈알을 굴리며 말했다.

“볼탄 반도에는 검은 숲 괴물을 퇴치하는 훌륭한 기사님이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북쪽의 방패라 불린다고... 저희를 받아주세요!”

로벨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외팔이 더치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임마, 너희들 잘못 찾아왔어. 그건 우리 기사 나리가 아니라 옆 동네 도반 도트넘 백작... 커헉!”

어린 집사가 쏜살같이 달려와 외팔이 더치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부랑자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집이야 지으면 그만이고, 일이야 만들면 그만이죠. 우리 마을에 온 걸 환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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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여러 사람이 찾아왔다. 검은 숲 지방의 피난민이 대부분이지만, 그 외에도 빚에 쫓겨 도망친 소작농 일가, 몸이 성치 못한 퇴물 용병, 굶주림을 참지 못해 떠나온 도시 빈민 등도 있었다. 로벨의 명성과 로드릭 마을의 발전 소식을 전해 듣고 새 출발을 꿈꾸었다. 정착 희망자가 세 자릿수에 이르자 영지 경영에 무심한 로벨조차 걱정했다.

“저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어?”

어린 집사가 손가락을 불쑥 내밀어 가로저었다.

“영주가 영지민을 먹여 살린다는 것은 구닥다리 발상이에요!”

“하긴, 영지민이 영주님을 먹여 살리는 게 일반적이죠.”

“아네요! 우리 기사님은 그런 악덕 영주랑 달라요!”

리암 수사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마녀 키르케가 발끈했다. 어린 집사는 두 사람에게 조용하라 다그치고 이어서 설명했다.

“시장이 커지면 일손이 많이 필요할 거예요. 더 이상 농사일만 하는 게 아니니까요. 여관도 지어야 하고, 마구간도 늘려야 하고, 경비와 짐꾼도 필요하죠. 울프 용병단이 창고를 지킬 수 없으니까요.”

로벨이 듣지 못하게 ‘용병은 너무 비싸요’ 등을 중얼거렸다.

“그래도 계속 늘어나면 감당이 안 될 텐데?”

“뉴 로드릭 마을에 양조장을 지을까 해요.”

리암 수사와 마녀 키르케가 두 눈을 반짝였다

“양조장! 역시 맥주죠!”

“전 포도주가 좋아요!”

“여기 포도가 어디 있어요!”

어린 집사는 빽! 소리 질렀다. 마녀는 삐져서 새로 온 형제님만 좋아한다며 징징거렸다. 로벨은 지하창고에 포도주가 있으니까 한 병 꺼내 마시라고 위로하고 어린 집사에게 물었다.

“그것도 돈이 많이 들어갈 텐데. 괜찮아?”

어린 집사는 돈 이야기에 깊은 시름을 보였다.

“사실 안 괜찮아요. 소금광산과 식품공장의 수익 전부를 쏟아 붓고 있어요. 봄 농사가 잘되어서 버티고 있지만, 가을 농사를 망치면 그 칼을 팔아야 하지도 몰라요.”

로벨은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곰 인형처럼 꼭 끌어안았다. 어린 집사가 빼앗아갈까 진심으로 경계했다.

“안 돼! 절대 안 돼!”

로벨의 강경한 태도에 어린 집사는 입맛을 다졌다.

“그거 하나 팔면 포장도로를 깔 수 있는데...”

어린 집사의 생각에는 칼 한 자루보다 시장이나 도로가 가치 있지만, 주인 나리가 질색하니 일개 집사가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닦달할 수는 있었다.

“그럼 돈 벌 방법을 궁리해 봐요!”

어린 집사가 기대감을 보였다. 깃발 보험처럼 돈 나올 사업을 내놓으라 강요했다.

“나, 난 딱히... 음... 그러고 보니 그랜드 토너먼트가 코앞인데?”

“앗! 그랜드 토너먼트!”

어린 집사는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로벨이 그랜드 챔피언이 된 지 햇수로 4년이 지났다. 올해 가을, 늦어도 내년 봄에는 각 지방의 챔피언을 모아 그랜드 토너먼트를 개최할 것이다. 로벨은 현역 그랜드 챔피언이라 참가자격이 있었다.

“올해 참가하시려고요?”

“응. 포클랜드 시티에 볼 일도 있고.”

“수도에요? 왜요?”

로벨은 포식자의 관심에서 멀어진 두 자루 명검을 아래로 내리고 말했다.

“국왕 폐하의 외삼촌, 빌포이 다이첼 경을 만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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