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수도원
134화. 수도원
볼탄 반도에는 붉은 장미 수도원을 비롯해 크고 작은 수도원이 스무 개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옛 신의 가르침을 따라 수양하고, 봉사하고, 복종하는 장소지만, 그 외에도 고대문학을 탐구하거나, 오래된 책을 필사하거나, 건축법, 농사법, 양조법 등을 연구하기도 했다.
지금은 대도시마다 대학이 세워져서 중산층 지식인을 배출하고 있으나,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수도원이 아니면 고등교육을 받기가 어려웠다.
“옛 신의 사제를 고용하려구요?”
“사제가 아니야. 수사(修士)지.”
“뭐, 기사랑 기사 종자 비슷한 거 아닙니까요? 저희 같은 놈들한테는 그게 그겁니다요.”
로벨과 허풍쟁이 제이콥이 찾아가는 ‘검은 바위 수도원’은 바위성에서 3마일가량 떨어진 산골짜기에 위치했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 다른 돌덩이를 요령 좋게 쌓아 올린 소담한 담벼락 너머로 뾰족한 종탑을 가진 옛 신의 성당과 지붕이 낮은 건초창고가 보였다. 수도복을 입은 수도사들이 쟁기와 괭이를 걸머쥐고 줄 맞춰서 지나가고, 양떼와 오리떼가 사이좋게 모여서 울음을 토했다.
로벨은 고삐를 늘어트리고 느릿느릿 돌담길을 걸었다. 키 작은 담장 주위에는 자그마한 채소밭이 있고, 시냇가에는 물레방아와 대장간이 있었다. 세속과 떨어진 곳이라 모든 것이 평화로워 보였다.
“수사님이 대장장이 일도 합니까요?”
“아마도? 자급자족하니까.”
“이야! 여자 빼고 없는 게 없군요?”
“......”
로벨과 허풍쟁이 제이콥은 옛 신의 성당 앞에 도착해 모자와 옷매를 다듬고 노크했다. 가볍게 두 번, 조금 세게 세 번, 그러고 아주 세게 네 번 두드리려는 찰나, 두꺼운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옛 신의 영광이 함께하기를. 이곳은 검은 바위 수도원입니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허풍쟁이가 머쓱한 표정을 짓고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이분은 늑대의 성의 주인이자 로드릭 가문의 당주이신 로벨 로드릭 백작님입니다.”
로벨은 정수리만 삭발한 수도사의 머리를 빤히 보다가 조금 늦게 묵례했다.
“그 유명한 로벨 백작님이... 이런, 어서 들어오시지요.”
세속에서 떨어져도 세상일과 무관할 수 없었다. 검은 바위 수도원은 바위성의 도움을 받고 있고, 바위성의 주인은 로벨 로드릭 백작의 봉신이니, 검은 바위 수도원 역사상 세 손가락에 꼽힐 만큼 귀하고 어려운 손님이었다.
“수도원장을 뵙고 싶소.”
민머리 수사-대부분 그렇지만-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뒤뜰의 채마밭을 일구고 있습니다. 귀한 손님을 맞이할 복색이 아닌지라...”
“기다리겠소.”
수사는 로벨을 접객실로 안내한 후 옷자락을 펄럭이며 뒷마당으로 뛰어갔다.
“그리 머리가 좋아 보이지 않는 뎁쇼?”
“이걸 봐도?”
로벨은 접객실 한쪽에 빼곡히 쌓여 있는 양피지를 가리켰다. 말 그대로 ‘닳도록’ 읽어서 테두리가 새까맣게 변해있었다.
“수도원의 수사만큼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아마도 어린 집사뿐일 거야.”
“하여간 꼬마 집사를 끔찍이도 아끼신다니까.”
수도원은 학문의 요람이며 기록의 보고였다. 옛 신의 교리가 만물을 지배하던 시절과는 다르지만, 옛 전통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서 글과 숫자에 밝은 인재가 필요하면 수도원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옛 신의 영광이 함께 하기를... 로벨 로드릭 백작님이십니까?”
로벨이 기다리는 접객실로 늙수레한 사제가 들어왔다. 수도복을 입기는 했지만 소매를 어깨까지 올려 새끼줄로 묶고 꼬뜨 밑단을 둘둘 말아 허리에 감았다. 얼굴과 손이 흙투성이였다. 신발이 없어 꼬질꼬질한 발가락이 그대로 보였다. 로벨은 연로에 고생이 많다고 위로해야 할지, 나를 무시하느냐고 화를 내야 할지 고민했다.
“의관을 갖추지 않은 무례와 의관을 갖출 동안 기다리게 하는 무례 중 어느 쪽이 더 큰 무례인지 몰라 이대로 찾아왔습니다. 어차피 둘 다 무례라면 오후에 일하기 좋은 무례가 편해서 말입니다. 으하핫!”
“아, 그런 거였소?”
로벨은 고민거리가 사라져서 활짝 웃었다. 허풍쟁이가 ‘역시 우리 기사 나리는...’ 어쩌고 중얼거렸지만 못 들은 척했다.
수도원장은 손바닥을 꼬뜨 자락에 쓱쓱 닦고 술잔을 꺼냈다. 로벨에게 한 잔, 그리고 허풍쟁이 제이콥에게도 한 잔 주었다.
“먼 곳에서 오셨는데 달리 대접할 것이 없군요. 리암 수사가 만든 맥주입니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술잔을 받고 감탄했다. 농가에서 빗은 평범한 맥주와 달리 황금빛으로 빛이 났다. 물처럼 깨끗하고 빵처럼 향기로웠다.
“이게 맥주라굽쇼? 건더기가 없잖아!”
“기존 그루트(Gruit) 대신에 홉을 넣어 만들었습니다. 맛이 깔끔하고 보관하기도 좋지요.”
로벨은 맥주를 한 모금 맛본 후 작게 감탄했다.
“정말 좋군. 와인보다 낫소.”
“으하하! 지체 높은 백작님께서 그리 평해주시니 뿌듯하군요. 수사님에게 전해주면 좋아서 공중 2회전을 돌 겁니다.”
로벨과 허풍쟁이는 맥주맛에 심취해서 수도원장의 농담에 제때 반응하지 못했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맥주잔을 깨끗이 비우고 로벨의 맥주에 눈독 들이고 있었다. 수도원장은 쩝! 소리를 내고 방문목적을 물었다.
“귀하신 분께서 이 비루한 수도원에는 무슨 일입니까?”
로벨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가 사과했다. ‘옛 신의 축복이 가득한 곳이 어찌 비루할 수 있소’ 따위의 입 발린 소리를 조금 한 후 목적을 밝혔다.
“영지의 일을 도울 사람을 소개해 주실 수 있겠소?”
“신앙적인 일입니까?”
“세속적인 일이오.”
수도원장은 맥주를 한 잔 더 따랐다. 허풍쟁이가 입술을 핥으며 손을 내밀었지만 수도원장은 무심하게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벌컥- 벌컥- 옆 사람이 목이 탈 정도로 시원하게 들이부었다.
“크윽-! 일꾼을 소개해주는 거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만?”
“로벨 백작님은 푸른 언덕 수도원에서 교육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잘 아는 수도원에 도움을 청하지 않느냐는 질문이다. 로벨은 예상한 질문이라 쉽게 대답했다.
“본인은 친구가 아니라 조력자가 필요하오. 검은 바위 수도원에는 성실하고 학구적인 인재가 많다고 들었소.”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옛 신에게 몸과 마음을 맡긴 수도원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도원장은 어미 소처럼 웃으며 성호를 그렸다.
“그저 옛 신의 가르침을 따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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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바위 수도원장이 잠시 기다려 달라 말한 후 자리를 떠났다. 로벨과 허풍쟁이 제이콥은 기다렸다는 듯 술통을 징발해서 위장에 숨겼다. ‘기사 나리! 두 잔이나 마셨잖습니까!’, ‘난 고용주고, 넌 고용인이야.’ 다행히 큰 추태를 부리기 전에 수도원장이 돌아왔다.
“조금 전 말씀드린 리암 수사입니다.”
로벨은 입가를 쓱쓱 닦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새로 온 수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짝 놀랐다. 나이가 상당히 어렸다. 17살? 18살? 많아 쳐줘야 19살이었다.
“이 자가?”
“이 기사가요?”
리암 수사도 로벨만큼이나 놀란 눈치였다. 볼탄 반도 최강의 기사가 계집처럼 곱상한 청년이라 실망했다. 아닌 척해도 충심이 가득한 허풍쟁이가 화를 냈다.
“이 건방진 수사님이...!”
동료들 사이에서 순둥이로 통하지만, 그건 어디까지 ‘울프 용병단’ 기준이고, 일반인에게는 흉터 가득한 야인 중에 야인이었다. 리암 수사는 즉시 몸을 돌려 도망칠 자세를 취했다. 수도원장이 목덜미를 잡아채지 않았으면 진짜 도망쳤을 것이다.
“허허! 예의가 모자라긴 해도 재주까지 모자라진 않습니다. 조금 전 맛보신 맥주도 이 수사님의 솜씨지요.”
농사로 단련된 수도원장의 힘은 술을 빚고 필사나 하는 어린 수사가 떨칠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로벨과 허풍쟁이에게 번갈아 사과했다.
로벨은 허풍쟁이 제이콥에게 눈짓했다. 허풍쟁이는 눈알을 부라리며 리암 수사를 노려본 후 돈주머니를 꺼냈다.
“옛 신에게 봉헌하는 약소한 성금입니다.”
수도원장은 정중하게 성금을 받은 후 아무렇지 않게 품 안에 쑤셔 넣었다. 로벨은 빙그레 웃고 리암 수사를 보았다.
“정식으로 인사할게. 난 늑대성의 영주 로벨 로드릭이야. 잘 부탁해.”
리암 수사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삭발한 정수리에 거뭇거뭇 자란 머리털이 재미있었다.
“리암 폴드 수사에요. 그냥 리암이라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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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허풍쟁이 제이콥은 새로운 식구와 함께 늑대성으로 향했다.
새 식구 리암 수사는 무척 밝고 쾌활해서 보통은 어려워하기 마련인 기사와 용병에게 서슴없이 잡담을 던졌다. 로벨과 허풍쟁이는 선물로 받은 맥주를 홀짝이는 중이라 기분이 좋았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준비하고 있었어요. 우리 원장님은 저처럼 머리 좋고 능력 좋은 수사를 세상으로 내보내고 싶어 하거든요. 작년 가을에 폴로 형제님이 나갔으니, 이제 제 차례란 것을 짐작했죠.”
허풍쟁이는 트림을 크게 하고 신기한 듯 물었다.
“고향을 떠나는데 섭섭하지 않소?”
“제 고향은 바위성이 아니에요. 음, 바위성일 수도 있지만 아마 아닐 거예요.”
“그럼 어디요?”
“저도 몰라요. 힛! 어릴 때 수도원에 버려졌거든요. 흔한 일이죠. 미망인보다 흔한 게 버려진 고아라잖아요.”
로벨은 위로할까 하다가 관뒀다. 표정이 해맑아서 위로하면 어색할 듯했다.
“제가 할 일은 뭐지요?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전 사제가 아니라서 미사를 못 해요. 고해성사도 못 받고요.”
“그런 거 안 해.”
“맙소사! 그럼 아침 기도는 언제 해요? 안 해요? 저녁 기도도 안 하고요? 성독(聖讀)도 건너뛰나요?”
“...미안.”
리암 수사는 충격 받은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어깨와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로벨과 허풍쟁이는 불안한 눈초리를 주고받았다. ‘괜히 데려왔을까?’, ‘지금이라도 돌려보낼까요?’ 그때, 리암 수사가 두 팔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할렐루야! 천국에 가는구나!”
“처, 천국?”
“옛 신이시여! 제가 이래서 당신을 좋아합니다! 빌어먹을 수도원아! 영원히 굿바이다!”
“비, 빌어먹을 이라니...”
“탁발을 하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리암 수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흙을 털고 소리쳤다.
“자! 출발하죠! 우리의 천국으로!”
그리고 씩씩하게 앞장서서 걸어갔다. 길도 모를 텐데 참 용감했다. 로벨과 허풍쟁이는 서로를 보고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재미난 식구가 들어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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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암 수사는 늑대의 성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거대한 성탑과 드높은 성벽과 빼곡한 총안 등이 산골짜기에서 자란 젊은 수사를 감격시켰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웃으며 조롱했다.
“장미성이나 폭풍성을 보면 기절하겠네.”
“...내 성 무시하지 마.”
로벨은 허풍쟁이에게 핀잔주고 새삼 뿌듯하게 늑대성을 보았다. 큰 돈 들여서 증축한 보람이 있었다. 마녀 키르케를 데려왔을 때와 반응이 달라 감개무량했다. 그러다 깜박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참, 성 안에는 키르케라고...”
설명이 조금 늦었다. 로벨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화급히 뛰쳐나온 마녀와 성을 구경하느라 정신없는 수사가 딱 마주쳤다. 3초간의 정적 후 3초간 비명을 질렀다.
“우와악! 마녀잖아!”
“아앗! 사제다!”
“사제 아니고 수사인데요!”
“저도 마녀 아니고 마법사예요!”
“우아악! 마법사다!”
“으앙! 수사잖아!”
로벨은 처녀라고하기에 철이 없고 청년이라하기에 경박한 두 남녀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잘 지낼 거 같아.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