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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33화 (133/605)

133화. 상회

133화. 상회

로벨과 로벨 로드릭 백작군은 아이언베어 요새를 떠나 볼탄 반도로 향했다.

광내고 윤내서 차려입은 갑옷은 피와 먼지로 얼룩졌고, 무기와 식량을 한가득 싣고 온 보급마차는 부상자로 채워졌다.

죽은 사람도 많고, 다친 사람도 많지만, 병사들의 표정이 어둡지는 않았다. 전쟁에서 살아남아 다행이고, 세금이 감면되어 행복했다. 마녀 키르케는 병사들의 분위기에 휘말려 실없이 웃었다.

“전쟁하면 세금을 줄여줘요?”

“영주의 재량이지만, 군역을 치렀으니 방위세를 면제하고, 농사를 짓지 못했으니 토지세를 감면하는 것이 일반적이오.”

마녀 키르케는 발끝으로 지팡이를 툭툭 차며 다시 물었다.

“이웃 나라가 또 쳐들어오면 어쩌죠?”

펄프 대장이 한숨을 쉬자 외팔이 더치가 대신 설명했다.

“저쪽도 피해가 크잖소. 병사도 많이 죽고, 기사도 많이 죽고. 뭐, 그랜드 챔피언까지 죽었으니 사기가 곤두박질쳤을 거요.”

“흐음. 그래요?”

외팔이 더치가 곰굴 같은 콧구멍을 후비며 말했다.

“그야 물론이오. 입장 바꿔서 우리 기사 나리가 죽으면 싸울 맛이... 아야! 왜 때리쇼? 아악! 악! 넌 왜 때려! 아파!”

펄프 대장과 허풍쟁이 제이콥은 눈치 주는 수준으로 안 닥치자 그냥 작정하고 두들겨 팼다. 그러나 정작 로벨은 신경 쓰지 않았다.

‘마도의 수호자들, 대체 무슨 목적이지?’

어둠 속에서 숨어 지내야 할 괴물들이 귀족이 되고 용병이 되어 세력을 불리고 있었다. 포비아 왕국, 아니, 유라피아 대륙에서 도반 도트넘 백작과 늑대의 왕 리카온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로벨은 이 전쟁조차 마도의 수호자들이 꾸민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확실한 것은 빌포이 다이첼 경을 만나야 알겠지만...

‘우선 집에 가야지.’

전쟁이 길었다. 로벨도, 울프 용병단도, 그리고 농민들도 휴식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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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탄 반도 남부는 평화를 되찾았다. 영주들은 여느 때처럼 알량한 사치를 누리고, 농민들은 언제나처럼 소소한 행복을 탐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모두가 평안하지는 않았다.

검은 숲 지방에서 몬스터가 준동하여 성 2채가 무너지고 마을 5곳이 잿더미가 되었다. 먹을 것이 풍족한 여름에는 좀처럼 드문 일이었다.

제임스 공작이 봉신들을 소집했으나 봉신들은 자신의 땅을 지키기도 버거웠다. 검은 숲의 불길은 볼탄 반도 북부로 옮겨갔다. 어두운 숲에서 뛰쳐나온 오크, 고블린, 트롤 등이 볼탄 반도 북부대로를 지나는 여행자와 행상인을 습격했다.

그러자 볼탄 반도의 수문장을 자처하는 강철성이 용병을 모아 북부대로의 몬스터를 토벌했다. 강철성의 주인 도반 도트넘 백작은 전쟁영웅에 이어서 북방의 방패란 별명이 생겼다.

로벨은 헨리 상단주가 전해준 북쪽 소식을 되뇌며 중얼거렸다.

“괴물이 괴물과 싸워서 영웅이 되었어?”

도반 도트넘 백작은 로벨 만큼이나, 혹은 로벨 이상으로 힘을 쌓고 있었다. 권력, 명예, 명성, 민심까지 끌어 모았다.

“남의 것을 훔친 도둑놈이...”

로벨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정체를 속이고, 신분을 훔쳐서 권리를 누리는 것은 로벨도 똑같았다.

서로의 비밀이 서로의 약점이었다. 로벨은 도반 도트넘 백작의 정체를 폭로하지 못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거짓된 신분. 거짓된 명성.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나와 가장 닮아 있다니...’

로벨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니, 그것마저도 닮은 걸까?’

로벨은 관점을 바꿔서 볼프 후작에게 집중했다.

도트넘 가문의 몰락은 3년 전 웨일 도트넘 백작이 북쪽 숲에서 객사할 때 시작되었다. 예정된 수순처럼 웨일 도트넘 백작과 후계자인 조지 도트넘 백작이 죽고, 오래전에 바꿔치기한 괴물, 뱀파이어 군주가 가문을 차지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10년 전에 준비했을 것이다.

‘그 긴 시간 동안 볼프 후작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까?’

로벨의 최대 관심사였다.

로벨이 이마에 주름잡고 의심에 의심을 더해 갈 때, 어린 집사가 침실문을 두드리고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영주님, 뭐 하세요?”

“생각 중.”

“아이참! 아침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점심 메뉴를 고민해요?”

“...그런 거 아니야.”

“영주님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 식사 메뉴 말고 또 있어요?”

로벨은 한숨 쉬었다. 남동생이 있으면 딱 저만큼 얄미울 것 같았다.

“무슨 일이야?”

“장사할 시간... 이 아니라 알현 시간이에요.”

그리고 어린 집사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로벨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귀족과 상인이 크고 작은 선물을 보내왔다. 어린 집사에게는 불로소득이자 보너스였다. 로벨이 어깨를 조금 떨구고 말했다.

“이제 먹고살 만하잖아? 그만 욕심 부려도 되지 않을까?”

“무슨 말씀을! 세상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친구고, 하나는 돈이죠!”

“...그래?”

“옛 선지자가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니, 벌 수 있을 때 왕창 벌라고 했어요.”

“내가 아는 의미하고 조금 다른데...”

로벨은 어린 집사의 재촉을 못 이겨 새 옷을 꺼내 입고 메인 홀로 끌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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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을 만나고 싶어 하는 자유민과 행상인이 크게 줄었다. 프란시스 가문의 내전도 끝나고 치안이 안정되자 로벨의 깃발이 필요하지 않았다. 더불어 귀족들도 발길이 뜸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의 위세가 높아지니 로드릭 가문과 도트넘 가문 사이에서 저울질했다.

어린 집사는 포도주 한 상자와 모피 한 장을 끌어안고 지나간 세월을 그리워했다.

“고작 이것뿐이라니! 아아, 영화(榮華)는 한 철이니, 이것이 바로 한 철 장사구나!”

“...뭐라는 거야?”

로벨은 위엄있는 척하느라 고생한 몸을 풀었다.

로벨은 잘 구운 빵과 시원한 맥주만 있으면 만족하는 검소한 성격이었다. 검소한 사람이 대개 그러하듯 욕심이 많지 않았다. 종적을 감춘 류트 공자와 목적을 알 수 없는 마도의 수호자가 조금 걸리지만, 그 외에는 지금 상황에 불만이 없었다. 로벨은 포도주 상자를 끙끙거리며 옮기는 어린 집사를 위해 한 병 덜어주고 물었다.

“그런데 촌장이 안 왔네?”

어린 집사는 입술로 툴툴거리고 말했다.

“제가 말씀 안 드렸나요? 며칠째 앓아누워있어요.”

“또?”

“슬슬 갈 때가 됐죠. 그만하면 오래 살았잖아요?”

로벨은 어린 집사의 머리를 술병으로 콩! 소리 나게 때리고 말했다.

“키르케는 어디 있어?”

“엊그제 갔다 왔어요. 질병이 아니라 노환이라 마녀도 손쓸 수 없나 봐요. 차기 촌장을 임명할 때가 된 거 같아요. 촌장의 사위 지미도 좋고, 사냥꾼 찰드도 괜찮아요. 재산도 있고, 평판도 나쁘지 않으니까요.”

“촌장의 사위가 잇는 게 맞겠지만, 지금은 아무 말 하지 말자. 촌장이 서운할 수 있잖아.”

로벨과 어린 집사는 지하창고로 내려갔다. 더위를 피해 숨어있던 아야와 이야카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컹컹! 컹!”

“요새 통 안 보인다했더니, 여기 숨어있었네. 저리 가! 먹을 거 없어!”

어린 집사는 아야에게 발길질하다 넘어질 뻔했다. 아야는 고소하다는 듯 웃었다.

“이것들이 점점 마녀를 닮아가네!”

“난 키르케가 얘네를 닮아가는 것 같은데?”

“어느 쪽이든 쓸모없는 건 마찬가지네요!”

어린 집사 눈에는 성 안 식구 대부분이 쓸모없어 보였다. 로벨은 자신도 ‘대부분’에 포함될까봐 입을 꾹 다물었다.

포도주를 지하실 깊은 곳에 저장하고 모피를 잘 펼쳐서 벽에 걸었다. 늑대남매가 물어뜯지 못하게 조금 높이 걸었다. 어린 집사는 부드러운 여우 털을 쓰다듬다가 불현듯 말했다.

“제가 생각해봤는데, 시장을 만들면 어떨까요?”

“시장?”

“크게 하자는 것은 아니고요. 노스폴드 시티와 페르젠 시티를 잇는 징검다리 장터 정도로요.”

로벨은 떨떠름하게 되물었다.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잖아? 우리 마을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보리랑 맥주가 있잖아요!”

“그걸로 될까?”

“그리고 로드릭 마을만 우리 마을이 아니에요. 아만다 마을의 물고기, 바위성의 야생동물, 늪지성의 약초, 구릉성의 목장이 있잖아요.”

“그건... 음...”

“고기를 잡고 약초를 캐면 페르젠 시티와 버팅거 시티에 팔고 있어요. 그걸 이쪽으로 가져오게 하는 거예요. 자릿세 없이 장사를 허가하고, 거래세를 절반 이하로 낮추면 혹 할 거예요.”

“하지만 물건을 사갈 사람이 없잖아?”

“행상인을 불러 모아야죠. 깃발 장사하면서 우리 마을을 널리 알렸으니까, 값싼 상품이 있다는 소문만 내면 벌떼같이 몰려올 거에요. 벌떼는 조금 지나친가? 아무튼 제법 올 게 분명해요.”

로벨은 창고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아야와 이야키의 머리가 로벨을 따라 좌우로 움직였다.

“그럴듯하긴 한데...”

“뉴 로드릭 마을에 양조장을 세워서 맥주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도 가능해요. 그럼 상품이 늘어나잖아요?”

로드릭 마을과 뉴 로드릭 마을의 곡물, 아만다 성의 어류, 바위성의 가죽, 구릉성의 양모, 늪지성의 약초와 목재가 한 곳에 모이면 제법 메리트가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해?”

“우선 상회를 세워야 해요.”

“우린 상인이 아니잖아?”

“친한 상인이 하나 있잖아요.”

로벨은 자신의 짧은 인명록을 펼쳐 보았다. 직업이 ‘상인’으로 나온 사람은 많지 않았다.

“헨리 상단주?”

“어차피 맥주 독점권을 가진 양반이니, 편하게 장사하라고 자리 깔아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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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어린 집사, 헨리 상단주, 이안 선장, 그람 형제를 모아서 로드릭 마을 시장 운영을 의논하게 했다. 로벨의 우려와 달리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상당히 좋은 곳입니다. 북부대로와 멀리 떨어져서 조명 받지 못할 뿐이죠. 교역로만 생기면 포클랜드 지방과 거래할 수 있습니다.”

“아만다 항을 통하면 아이란드 왕국의 사치품도 거래할 수 있습니다. 위치적으로 노스폴드 시티보다 가깝지요.”

“인구도 많이 늘었고, 자금도 나쁘지 않으니까, 한번 시도해볼 만합니다.”

어린 집사는 그거 보란 듯이 콧대를 세웠다. 로벨은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했다.

“언제 시작할까?”

어린 집사가 육지 상인, 바다 상인, 세금 관리인을 대신해서 말했다.

“오늘 당장이요!”

그날 저녁 로벨 로드릭의 이름으로 ‘로드릭 상회’를 설립했다. 로벨이 주인이고, 로벨의 영지에 자리한 만큼 그냥 선언하면 끝이었다. 상회 소속은 헨리 상단 하나뿐이지만, 금방 늘어날 거라 서로 격려했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로드릭 마을광장을 확장하고, 울프 용병단 주둔지 옆에 커다란 창고를 건설했다. 살 곳을 빼앗긴 소수 영지민이 반발했으나, 어린 집사가 덩치 좋은 용병들을 대동하고 후한 보상금을 제시하니 빠르게 진정되었다.

이어서 이웃 영주와 봉신들에게 로드릭 시장을 알리고, 행상인을 통해 소문을 내었다. 그러나 사람이 모이고 상품이 모이고 거래가 활성화되려면 최소 반년은 걸릴 것이다. 어쩌면 야심만 많은 영주들처럼 실패할지도 모른다.

“올해도 심심하진 않겠네.”

“과로사하지 않을까 걱정하세요!”

어린 집사의 일이 과하게 많았다. 행정관, 재무관, 서기관 일을 동시에 하는데다, 광산관리와 공장관리, 그리고 시장관리까지 해야 하니 하루가 부족했다. 펄프 대장과 그람 형제가 열심히 돕고 있지만, 세 명으로 역부족이었다.

“옛날처럼 혼자 다 할 수 없지.”

로벨은 생각난 김에 무기와 전투마와 허풍쟁이 제이콥을 챙겼다. 허풍쟁이가 불안해하며 물었다.

“오늘은 어디 갑니까요?”

“응?”

“기사 나리가 저만 따로 부르면 뻔하잖습니까요.”

로벨은 불만이 많은 부하를 점잖게 달랬다.

“맛있는 맥주 마시게 해줄게.”

“맛있는 맥주요?”

“응. 수도원으로 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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