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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32화 (132/605)

132화. 예감

132화. 예감

로벨 로드릭 백작군 300명, 도반 도트넘 백작군 220명, 합계 520명으로 그렉 페럿 경이 이끄는 2천 명의 대군을 격퇴했다. 경이로운 승리고, 기적적인 성과였다. 그러나 아군의 피해가 작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기습당한 몰드 헤르만 백작군은 사실상 괴멸되었고, 로벨 로드릭 백작군도 반수가 전사자 내지 부상자였다. 가만 생각하면 첫날 당한 하버트 페르젠 백작군까지 전부 에릭 프란시스 공작 소속이었다. 그래서 에릭 공작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2개 부대가 손실되다니, 예상치 못한 피해로군.”

에릭 공작의 수행기사가 억지로 미소를 짓고 말했다.

“적은 최소 4개 부대가 와해되었습니다.”

“병력차를 생각하면 좋아할 일이 아니오.”

에르나 왕국군은 아직도 1만 명 가까이 남아있었다. 빈말로 위로해도 적은 수가 아니었다. 에릭 공작은 침울한 기사와 침울한 척하는 기사를 둘러보고 톤을 살짝 높였다.

“로벨 로드릭 백작이 그나마 체면을 살려주었소. 정말 훌륭하오. 역시 무적무패의 기사답소.”

로벨은 뒤통수로 시기, 질투, 존경, 찬양 등의 시선을 감지하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부끄러운 말씀입니다.”

에릭 공작의 표정이 조금 풀리자 하버트 페르젠 백작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이언베어 요새 공격은 어찌 됩니까?”

“예정대로 정오에 시작할 것이오. 검은 숲의 기사들이 선공을 맡기로 했으니, 경들은 구경하면서 약점을 알아내시오.”

재미있는 명령이었다. 전쟁을 구경하라는 것도 우습고, 약점을 찾으라는 것도 우스웠다.

아이언베어 요새는 지난 300년 동안 왕국을 지켜온 철옹성이었다. 뭐, 오늘날처럼 함락될 때도 몇 번 있었지만, 그래도 난공불락의 타이틀이 거짓은 아니었다.

“검은 숲의 제임스 공작, 어디 소문대로인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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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도반 도트넘 백작, 즉, 볼탄 반도 기사들이 국왕 폐하 앞에서 승전보를 올리니, 자신이 최고라 자부하는 검은 숲의 기사들은 안달이 났다. 마녀 키르케가 의아해서 물었다.

“볼탄 반도 기사님이 포비아 왕국 최고 아닌가요?”

“어느 지방이나 자기가 최고라고 주장해.”

로벨은 설명이 불만족스러워서 다시 덧붙였다.

“물론 볼탄 반도가 최고고. 그랜드 챔피언이 있잖아.”

잔잔한 웃음에 촛불이 춤을 췄다.

검은 숲은 몬스터가 멧돼지보다 자주 출몰하는 땅이다. 거칠고 사나운 땅이라 강인하고 용감한 사람이 많았다. 직업이 기사라면 두말할 것도 없었다. 펄프 대장이 촛대를 옆으로 옮기고 말했다.

“에르나 왕국은 고블린 부족하고 다를 텐데요.”

로벨은 펄프 대장의 그늘진 얼굴을 보며 말했다.

“칼 맞으면 피나고, 피 흘리면 죽는 건 같다잖아.”

“뭐 그런 무식한 말이 다 있습니까?”

“내 아버지가 한 말이야.”

“다시 생각하니까 심오한 말이군요.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로벨은 한숨을 쉬고 이어서 말했다.

“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말인데, 지금은 다른 의미로 적용될 거야.”

“하긴, 저 같은 퇴물 용병도 용병대장이 되었으니, 잘나신 기사 나리들도 뭔가 보여주겠지요.”

펄프 대장의 말대로 뭔가 보여주기는 했다.

둥! 둥! 둥! 둥!

와아아아!

와아아!

검은 숲의 제임스 공작이 이끄는 2천 5백 명의 병사가 줄기차게 성벽을 공격했다. 7문의 대포가 쉬지 않고 불을 뿜고, 7개 부대가 교대로 투입되었다.

“하지만 미동도 않는군.”

에릭 공작은 시동이 따라준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멀찍이 치웠다. 전황이 안 좋아 차 마실 기분이 나지 않았다.

공성용 구포(臼砲)가 아니라 소구경 팔코넷 7문이었다. 성문은 옹성(甕城) 안쪽에 있어서 노릴 수 없고, 성벽은 아무리 때려봐야 부스러기만 날릴 뿐이었다. 성벽을 허물기 전에 대포가 망가질 지경이었다.

“우리 쪽 대포를 지원하면 어떻습니까?”

에릭 공작도 최신형 팔코넷을 8문 가져왔다. 소구경이라도 15문을 동원하면 효과가 나올 것이다. 그러나 에릭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공을 나누기 싫어할 거요. 무엇보다 국왕 폐하와 볼프 후작이 가만히 있는데 우리가 도울 이유는 없잖소?”

로벨은 아론다이트와 흐룬팅 손잡이에 손에 나란히 올리고 아이언베어 요새를 보았다. 불화살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 요새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성벽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 숫자만큼이나 바위와 기름이 떨어지고, 화살이 연기처럼 솟았다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수천 명이 지르는 함성과 수천 명이 달리는 발소리에 몸이 떨릴 정도였다.

“제임스 공작 성격상 전멸 직전까지 공격할 테지.”

“우리가 아니라 다행이오.”

에릭 공작의 기사들이 피식- 웃었다. 주인을 잘 만나야 인생이 편한 것이 기사나 노예나 마찬가지였다.

비명, 고함, 쇳소리, 돌소리, 대포소리, 불타는 소리 등등으로 시끄럽다가 어둠과 함께 고요해졌다.

로벨은 낮에 있었던 자리에서 전장을 보았다. 전쟁의 열기가 가시지 않아 바람이 뜨거웠다.

‘몇 명이 죽었지?’

눈앞에 너부러진 시체만 족히 100구가 되었다. 성문과 반대쪽도 만만치 않을 테니, 아마도 200명에서 300명이 전사했을 것이다.

‘내일은 얼마나 죽을까?’

로벨은 어둠에 싸인 성루를 올려다보았다. 그깟 자존심이, 그깟 명예가 요구하는 값이 만만치 않았다.

검은 숲의 제임스 공작은 아침 해가 뜨자마자 공격을 재개했다. 밤 새워 회의했으나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은 듯 어제와 똑같은 전개를 이어갔다. 성벽을 오르다 창에 찔려 죽고, 성문을 두드리다 돌에 맞아 죽고, 쇠뇌를 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그러나 정오가 지나자 변화가 생겼다. 성벽 위에 무사히 오르는 병사가 조금씩 늘어나고, 비명이 조금씩 멀어졌다.

“오호? 나무꾼 주제 제법 하는군.”

페르젠 백작이 기쁜 건지 안타까운 건지 떨떠름하게 말했다. 최고의 전공이 다른 기사에게 돌아간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금... 이상한데?”

로벨이 칼자루에서 손을 치우고 한 걸음 나섰다. 에릭 공작을 비롯한 프란시스 가문 기사들이 로벨을 보았다.

“왜 그러시오?”

“어제와 너무 다르오.”

로벨이 의심스럽게 말하자 별 소리 다한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타박했다.

“저놈들도 지친 거겠지.”

“두 번이나 대패했으니 사기가 바닥일 테고요.”

로벨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대포 소리가... 안 들리잖소.”

“무슨 말이오? 아까부터 열심히 쏘고 있잖소? 저러다 포신이 터지지 않을까 걱정되오.”

“아군 말고, 적군 말이오.”

로벨의 말에 에릭 공작과 봉신들은 비로소 귀를 기울였다. 검은 숲 제임스 공작의 대포만 간간이 굉음을 토해낼 뿐, 에르나 왕국군의 대포는 조용했다. 페르젠 백작이 순진하게 추리했다.

“고장 난 것 아니오?”

헤르만 백작이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전부 말이오?”

“그럴 리야... 없겠지요?”

그 순간, 로벨을 비롯한 볼탄 반도 사람은 대포가 사라진 이유를 알게 되었다.

콰과광-! 쾅-!

아이언베어 요새 중심부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평범한 불이 아니었다. 성탑만한 불길이 일어나고, 붉은 산을 가릴 정도로 연기가 피어났다. 요새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까지 땅이 흔들렸으니 그 위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에릭 공작은 깜짝 놀라 일어났고, 기사들은 칼자루를 잡았다.

“아성 쪽입니다!”

“저 미친놈들! 화약을 한 번에 터트렸어!”

로벨은 눈을 부릅뜨고 검은 연기를 살폈다. 센 바람이 한번 불자 반쪽이 된 성채가 잠깐 드러났다. 아성에 화약을 모아놓고 포비아 왕국군이 들어오는 순간 폭파한 것이 분명했다. 어림 잡아도 100여 명이 휘말렸을 것이다.

쿠르르- 쿠르릉-!

대체 얼마나 많은 화약을 모았는지 작은 폭발이 몇 차례 더 이어졌다. 이어서 성문 밖으로 뛰쳐나오는 기사와 병사들이 보였다. 에릭 공작이 힘없이 의자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이건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전술이군.”

로벨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우리의 패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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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비아 왕국군이 아이언베어 요새를 탈환했다. 그러나 누구도 승리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성만 무너트린 것이 아니었다. 무기고, 저장고, 마구간, 심지어 변소까지도 불태우고 퇴각했다. 성벽만 남아있을 뿐, 사실상 폐허였다.

국왕은 요새 안을 한번 둘러보고 말없이 주둔지로 돌아갔다. 이 요새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 전쟁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군의 피해도 크지만, 검은 숲의 피해는 더욱 막대했다. 기사는 15명 죽고, 병사는 200여 명 폭사하거나 매장되었다. 한낮에 죽은 병사까지 합치면 600명이 희생되었다. 어지간한 장원의 인구였다.

“개 같은 놈들! 도망갈 거면 곱게 갈 것이지!”

“이거 다시 쓸 수 있을까?”

에릭 공작을 비롯한 여러 기사들이 수습을 도왔지만, 그리 오래 할 수 없었다. 고향을 떠난 지 30일이 되어갔다. 여름이 코앞이었다. 영주들은 영지를 걱정했고, 병사들은 가족을 걱정했다. 농사를 지어야 먹고 살 수 있는 것은 기사나 농민이나 똑같았다.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펄프 대장이 현실을 수치화해서 보여주었다.

“고향으로 돌아갈 식량이 아슬아슬합니다.”

로벨은 남은 식량을 확인한 후 한숨 쉬었다. 애당초 40일 치 식량만 가지고 나왔다. 요새에 비축된 식량이 있으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새는 적에게 넘어갔고, 지금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정 안 되면 근처 마을에서 징발할 수 있지만, 영주들이 곱게 보지 않겠지요.”

“응.”

적은 사라졌고, 머물 곳은 마땅치 않다. 외지에서 온 군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제 돌아가야겠지?”

“그게 옳을 듯합니다.”

로벨은 에릭 공작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회군하기로 결정했다. 펄프 대장에게 철수준비를 시키고 살이 부쩍 빠진 전투마에 올랐다. 애꾸눈 볼포스와 외팔이 더치가 호위로 따라붙었다.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에르나 왕국군의 잔당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로벨은 돌무더기가 된 성과 흙무더기가 된 집을 지나며 애꾸눈과 외팔이에게 물었다.

“이 전쟁에 승자가 누굴까? 에르나 왕국?”

“범죄자를 돌려받은 것도 아니고, 땅을 점령한 것도 아니고, 애꿎은 병사만 수천 명 죽었잖습니까.”

“그럼 포비아 왕국일까?”

“이 꼴을 보면 아닌 것 같은뎁쇼?”

요새를 재건해야 하는 포클랜드도, 장정이 수백 명 희생된 검은 숲도, 그리고 의무를 다한 로벨 이하 에릭 공작도 전화를 입었다.

애꾸눈 볼포스가 안대를 만지다가 불쑥 말했다.

“승자가 있다면 그자들입니다.”

“그자 누구?”

“인간이 아닌 자들.”

로벨은 볼프 사트로 후작군을, 그중에서 도반 도트넘 백작군이 주둔하는 곳을 보았다.

‘볼프 후작군은 도반 도트넘 백작을 제외하면 피해가 거의 없어. 반면에 검은 숲은...’

검은 숲의 특산물은 유라피아 대륙 전체에서 유명하지만 탐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인간과 닮았으나 인간이 아닌 생물, 바로 몬스터이기 때문이다.

‘설마... 설마?’

로벨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여자의 직감인지, 기사의 육감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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