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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30화 (130/605)

130화. 창벽

130화. 창벽

아이언베어 요새 기습작전을 펼친 지 어느덧 닷새째, 로벨과 울프 용병단 6전 6승의 전공을 세웠다. 소규모 전투라도 연전연승의 성과는 대단했다. 울프 용병단, 더 나아가 로벨 로드릭 백작군 전체가 기세등등했다. 사기가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우리 영주님은 무적이라니까!”

“지금껏 싸워서 진 적이 없다잖아.”

“난 패하지 않는다. 나를 따르면 너희도 패하지 않는다. 캬아! 멋지다!”

로벨 로드릭 백작군 만큼은 아니어도 포비아 왕국군 대부분이 비슷했다. 아이언베어 요새에서 패전한 페르젠 백작군도 자신감을 되찾고 웃음을 보였다. 그러나 생각이 깊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마냥 기뻐하지 않았다.

“이제 한계죠?”

로벨, 펄프 대장, 애꾸눈 볼포스가 마녀 키르케를 곤혹스럽게 보았다. ‘생각이 깊은’이란 표현을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마녀가 호기심 많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직 아니에요?”

로벨은 짧게 한숨 쉬고 모두에게 말했다.

“그 말이 맞아. 이제 싸움은 힘들어.”

외팔이 더치를 제외한 소대장이 일제히 동조했다.

“아군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저놈들이 물자를 요새 안으로 옮겨서 건질 것이 없습니다요.”

로벨은 내일 출진할지 말지 차분하게 고민했다. 반면 펄프 대장은 근본적인 해결을 찾았다.

“이놈의 국왕은... 이 아니라, 위대하신 국왕 폐하께서는 언제 오십니까?”

로벨도 주군을 모시는 기사라 주군의 주군인 국왕 폐하를 욕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국왕 폐하의 수행기사들은 상관없었다.

“포클랜드의 기사들은 느려터졌으니까.”

로벨이 표적을 제시하자 이구동성으로 포클랜드 지방의 기사들을 탓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눈알을 부라리고 외쳤다.

“거리가 우리보다 열흘은 가까운데 닷새가 늦는다니! 얼마나 느리면 그리됩니까요?”

로벨도 그것이 궁금했다. 그리고 동시에 결론 내렸다.

“내일은 나가지 말자.”

로벨이 결정하자 울프 용병단은 군말 없이 따랐다.

“애들한테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래도 경계를 늦추지 마. 적은 약이 바짝 올라있으니까. 봉신들한테도 그리 전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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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판단이 옳았다. 다음날 출진한 부대의 절반이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더 이상 국지전이 필요 없었다. 오전이 막 지난 제6시 경, 포비아 국왕이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도착했다.

에릭 공작, 볼프 후작, 제임스 공작 등을 비롯한 100여 명의 기사가 우르르 나와 포비아 왕국의 진정한 주인을 맞이했다.

“Your majesty.”

로벨은 고개를 살짝 숙인 후 국왕을 보았다. 수년 전 그랜드 토너먼트에서 인사한 후 처음이었다. 그 당시 13살이었으니, 지금은 17살이나 18살이 되었을 것이다.

“고개를 드시오. 잘들 싸워주었소.”

변성기가 갓 지난 목소리가 삭막한 판금갑옷 사이로 울려 퍼졌다. 로벨의 목소리보다 굵고 낮았다.

로벨은 국왕 뒤의 기사들을 살폈다. 포클랜드 시티의 기사들과 포클랜드 지방의 강성한 영주들이었다. 사교계와 인연이 없는 로벨도 몇몇 가문은 알았다.

‘사자성의 돌체 백작, 얼음성의 데이브 백작, 그리고 왕실 수비대장 자비에 후작.’

이 전쟁에서 국왕보다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이 자비에 후작이었다. 나이 어린 국왕을 대신해서 포클랜드 시티 군사를 지휘하는, 실질적인 포비아 왕국군 총사령관이었다.

국왕은 먼 곳에서 온 공작과 후작에게 치하의 말을 조금 한 후 쉬어야겠다며 주둔지로 돌아갔다. 적의 전력, 전략, 보급사정 등을 물을 줄 알았던 기사들은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국왕 폐하의 성품을 잘 아는 공작과 후작은 놀라지도 실망하지도 않았다. 엎어지면 코 닿을 아이언베어 요새를 지원하는데 한 달이 걸린 것도 국왕의 게으른 성격 탓이 컸다. 이곳에 오는 며칠 동안에도 수차례 ‘땡깡’을 부렸을 것이다.

로벨의 시선을 따라 자비에 후작에게 관심이 집중되었다. 어린 왕을 모시느라 고단한 기사가 나직이 말했다.

“국왕 폐하께는 따로 전할 테니, 우선 전황보고를 해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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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에 후작은 흰 머리와 검은 수염을 가진 독특한 중년 기사였다. 머리가 셀 때 수염도 같이 세는 것이 일반적인데, 후작은 눈썹 위로만 노화가 진행되었다. 포클랜드 시티의 호사가 중에는 자비에 후작이 수염을 염색한 게 아닐까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

자비에 후작은 소문의 수염을 쓸어내리며 전황을 정리했다.

“사기가 높은 이유가 있었군. 정말 잘해주었소.”

“경에게 치하받고자 한 일이 아니오.”

에릭 공작 등은 일개 수행기사 따위에게 ‘보고’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비에 후작은 분위기를 읽고 부드럽게 응했다.

“불쾌했다면 사과하오. 그러나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시오. 본인의 역할은 경들의 생각을 모아 국왕 폐하에게 전달하고, 폐하의 명령을 경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니, 본인이 무례하다 생각하지 말아주시오.”

자비에 후작이 한 수 접어주자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로벨을 수행하는 호른 경이 조용히 속삭였다.

“제 잘난 맛에 사는 포클랜드 기사 중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기사입니다.”

“그나마 말이지.”

비교적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아이언베어 요새 공략이 논의되었다.

포비아 왕국군 총병력 8천 2백 명, 에르나 왕국군 추정병력 1만 1천 5백 명으로 근 20년 동안 없었던 대규모 전쟁이었다.

“1만 명은 무슨! 요새 안의 병력은 많아야 2, 3천이오! 나머지 병력은 붉은 산에 흩어져 있으니 큰 위협이 되지 않소! 군사를 총동원해서 요새를 포위하면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소!”

검은 숲의 제임스 공작이 강경하게 주장했다. 전술개념이 해비 랜스가 좋을지 라이트 랜스가 좋을지 고민하는 수준인 기사들이 열렬히 호응했다.

‘일리는 있어. 하지만 좋지 않아.’

로벨은 붉은 산의 기사들을 생각했다. 얼빠진 기사도 많지만, 영리하고 행동력 있는 기사도 많았다. 요새를 공격하는 동안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그렉 페럿 경이 마음에 걸려.’

그랜드 챔피언이라고 전략, 전술이 뛰어나거나 용병술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애써 무시했다. 그러나 지난 5일 간 아군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입힌 것이 그렉 페럿 경이었다. 메서를 다루는 솜씨만큼이나 전술도 우수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로벨처럼 생각하고 걱정하는 기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공을 다투는 다수의 기사들이 공성을 주장했고, 마침내 자비에 후작을 설득했다.

“내일 오후 진격하겠소. 검은 숲의 군사가 앞장서고, 이어서 에릭 프란시스 공작과 볼프 사트로 후작이 따라가시오. 폐하께도 그리 전하리다.”

그러나 전쟁은 상호작용이라 상대방의 의견도 고려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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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이 늦은 점심식사 후 두 자루의 창과 세 자루의 칼을 점검할 때였다. 겁쟁이 데비가 헐레벌떡 막사로 들어와 다짜고짜 소리쳤다.

“기사 나리! 적입니다! 적이 쳐들어왔습니다!”

“지금?”

“지금이 아닌데 지금 보고하겠습니까요? 지금입니다!”

에르나 왕국군은 내일 오후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꽤 현명한 판단이었다.

검은 숲과 볼탄 반도 병사들은 상당수가 공격을 나가 아직 귀환하지 않았다. 포클랜드의 병사들은 지금 막 도착해서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2배로 늘어난 군사 때문에 위기감을 가지지 못했다. 규모가 커지면서 생긴 방심 혹은 허점을 찌른 것이다.

로벨은 아멧을 뒤집어쓰고 소드 벨트를 챙겨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펄프 대장이 낮잠 자다 깬 용병을 걷어차다가 로벨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북쪽에서 공격 중입니다! 헤르만 백작군이 이쪽으로 후퇴 중입니다!”

“숫자가 몇이야?”

“아까 지나간 놈 말로는 2천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 많은 병력이 올 때까지 몰랐어?”

“헤르만 백작의 기사들이 대부분 출진한 상태라...”

로벨은 헤르만 백작을 욕하고, 잠시 뒤 가까워지는 에르나 왕국군을 욕했다.

“여기서 막아야 해.”

“우린 다 해봐야 300명입니다.”

“그래도 막아야 해. 여기가 뚫리면 에릭 공작과 페르젠 백작이 단절될 거야.”

펄프 대장은 아군의 위치를 떠올린 후 수긍했다.

“이런 젠장! 크로스보우 소대 사격 준비! 3열 사격한다! 바위성의 사냥꾼도 준비하십쇼!”

“명령하지 마라!”

로벨의 지시를 받기 위해 달려온 바위성의 켈트 경은 주제 넘는 펄프 대장에게 화를 내고 되돌아갔다. 뒤따라 온 가시성의 바이란 경과 구릉성의 마튼 경은 로벨과 켈트 경을 번갈아 보며 우왕좌왕했다. 로벨은 깔끔하게 할 일을 정해주었다.

“이곳에 병력을 집결시키시오. 적이 지나가지 못하게 막아야 하오.”

로벨은 소드 벨트를 차고 라이트 랜스를 잡았다. 그러나 랜스를 함께 찌를 전우가 없음을 깨달았다.

“이 녀석 찾아요?”

마녀 키르케가 전투마의 고삐를 잡고 다가왔다. 쇠와 가죽을 두른 수염쟁이 무리 속에서 고깔모자와 꼬뜨 차림의 작은 마녀는 이질적이었다.

“고마워.”

로벨은 마녀의 볼을 어루만지고 전투마에 올랐다. 시야를 넓히고,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함도 있지만, 그보다 위엄을 보이기 위함이 컸다.

오베리아 산 거마 위에서 깃발 달린 랜스를 하늘 높이 치켜드는 로벨의 모습은 300명의 병사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로벨은 바이저를 내려 입을 가리고 말했다.

“키르케, 에릭 공작의 진영으로 피해. 네가 누군지 아니까 보호해줄 거야.”

“제가 가는 것보다 그쪽이 오는 게 빠르지 않을까요?”

그때, 북쪽 길 너머로 에르나 왕국군이 등장했다. 무기와 갑옷에 피칠한 기사가 하나 보이고, 이어서 살인과 폭력에 흥분한 병사들이 속속 나타났다.

“지원군이 오는 것보다 적이 오는 게 빠르니까. 어서 가.”

로벨은 마녀를 괜히 전장에 데려왔다고 후회했다. 이 전쟁은 볼탄 반도의 작은 내전과 규모가 달랐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2천 명의 적군은 천생 기사인 로벨에게도 무시무시했다. 펄프 대장이 숏소드와 바클러를 챙겨들고 소리쳤다.

“영주님, 저 깃발은...!”

“응. 그렉 페럿 경이야.”

그렉 페럿 경이 붉은 산의 주둔 중인 기사와 병사를 긁어모아 반격한 것이다.

로벨은 랜스를 높이 올려 깃발이 잘 보이게 흔들었다.

“조금만 버텨라! 금방 지원군이 올 거야!”

에릭 공작이든, 볼프 후작이든, 국왕의 친위대든 제때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로벨이 지원군을 기다리는 만큼 적도 여유를 부리지 않았다.

“1열 발사!”

“2열 사격 준비!”

“으아악! 적의 공격이다!”

로벨은 파비스 밖으로 쏘아지는 쿼럴과 파비스에 꽂히는 쿼럴을 동시에 보았다. 사실 파비스에 못 미쳐서 맨땅에 꽂히거나 파비스를 넘어서 엄한 스피어맨을 괴롭히는 쿼럴이 더 많았다.

울프 용병단은 숙련된 솜씨로 3열 사격을 실시했다. 10초 간격으로 쉬지 않고 쿼럴을 날려보냈다. 그러나 2천의 군사를 막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적이 가깝습니다!”

“50피트 앞!”

펄프 대장은 사격이 끝난 크로스보우맨을 철수시키고 스피어맨을 정면으로 불렀다. 용병과 징집병이 뒤섞여서 바리게이트 위로 창을 내밀었다. 펄프 대장은 겁에 질려 벌벌 떠는 병사를 힐끔 보고 큰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

“영주님! 영주님의 친구가 아닙니까? 대화로 해결해 보시죠!”

겁 없는 용병들이 웃음을 흘렸다.

“그게 좀 어려워... 난 교우관계가 안 좋거든...”

로벨은 사교성이 좋지 않은 편이라 전장에서 만난 친구를 어찌 대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로벨이 그러한 사정을 설명하자 펄프 대장 이하 용병들이 일제히 아우성쳤다.

“사교성 문제가 아니잖습니까요!”

로벨은 좀 더 그럴듯한 이유를 덧붙이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그렉 페럿 경이 이끄는 2천의 에르나 왕국군이 해자를 건너 창벽 위로 몸을 던졌다. 펄프 대장이 숏소드를 휘두르며 사납게 명령했다.

“찔러!”

창과 창이 엇갈리고, 동시에 피가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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