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만용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전리품을 챙겨서 아군 진영으로 돌아왔다. 적병을 열세 명 해치우고, 귀리와 호밀을 스무 자루 불태우고, 숏 스피어와 부주 등을 챙겨왔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전리품을 확인하고 실망했다.
“활은? 화살은?”
“쓸 만한 무기가 이것뿐이야.”
“에라이, 거지놈들!”
그래도 로벨 정도면 성공적인 작전이었다. 바람성의 맥기 경을 비롯해 몇몇 기사들은 기습에 실패했다. 심지어 병사 대부분을 잃고 도망친 기사도 있었다.
“에르나 왕국군도 아주 허접은 아니란 말이지?”
“혹은 저치들이 허접스럽거나.”
외팔이 더치가 침을 찍! 뱉고 패잔병으로 돌아온 검은 숲의 용병들을 비웃었다. 투구 대신 붕대를 감은 용병이 변명하듯 웅얼거렸다.
“그놈이 있었어... 그 망할 기사 놈이...”
“기사 놈들은 원래 망할 놈들 뿐이야.”
로벨이 시선을 올려 외팔이 더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외팔이 더치는 덩치가 우습게 쩔쩔매었다.
“무, 물론 우리 기사 나리만 빼고 말입죠! 암요! 암!”
로벨은 외팔이를 외면하고 패잔병에게 물었다.
“누가 있었다고?”
용병은 컴포지트 아머의 문장으로 로벨 로드릭 백작임을 알아내고 정중히 말했다.
“에르나 왕국의 그, 그랜드 챔피언, 그, 그렉 페럿입니다.”
“그렉 페럿 경?”
“그자가, 그 커다란 메서를 휘둘러서, 아, 아군을 도륙했습니다. 저희도, 저희도 저항했지만,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로벨의 매끈한 이마에 주름이 그려졌다.
“그렉 페럿 경이 참전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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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보면 작전은 성공이었다. 기사들은 자신의 주군에게 전리품을 바치고 성과를 보고했다. 허위와 과장이 섞여 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축배를 들만 한 승리였다.
“에르나 왕국 떨거지들은 쥐뿔도 없소이다! 기사란 작자가 칼 한번 안 뽑고 도망치더이다! 하하핫!”
“시나 쓰고 춤이나 추지, 어디 칼 다루는 법을 알겠소?”
로벨은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빵 대신 맥주를 마시고 물 대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기사라지만, 적을 앞뒤에 두고 취하고 싶지는 않았다.
로벨은 사트로 후작가 기사들과 담소를 나누는 도반 도트넘 백작, 아니, 뱀파이어 군주 드라카를 염탐했다. 정체를 알고 관찰해도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웠다. 잔치 분위기를 깬 것도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그만 좀 하시오! 그리 우습게 생각할 일이 아니오!”
검은 숲의 기사가 고함쳤다. 로벨과 달리 패전한 기사였다. 용감하지만 짓궂은 페르젠 백작 등이 비웃어주려고 돌아봤지만 그러지 못했다. 얼굴이 깨지고 팔이 부러진 환자를 놀리기에는 평소 쌓아놓은 적의가 부족했다.
검은 숲의 기사는 주위가 조용해지자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렉 페럿 경이 있었소.”
세상 물정에 어두운 시골 기사도 그랜드 챔피언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기억력이 좋은 기사들은 기막힌 무용담도 몇 가지 떠올렸다. 한 명이 소리 내자 모두가 웅성거렸다. 바람성의 맥기 경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로벨 로드릭 백작에게 한 번 패한 기사 아니오?”
시선이 로벨에게 집중되었다. 로벨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때는 친선시합이었소. 정식으로 싸우면 결과를 장담할 수 없소.”
그렉 페럿 경의 실력은 몰라도 로벨 로드릭 백작의 실력은 다들 알고 있었다. 전쟁에서, 혹은 토너먼트에서 한 번씩 패배를 맛보았으니까. 그런 로벨이 자신 없어하자 분위기가 심각해졌다.
“가만, 짐승처럼 날뛰는 리카온이란 용병이 있지 않소?”
“그래 봐야 용병인데, 그랜드 챔피언을 상대할 수 있겠소?”
“그 괴물이 싸우는 것을 보지 못한 모양이오.”
도반 도트넘 백작이 부드럽게 친구를 비호했다.
“그 놈의 실력이라면 로벨 로드릭 백작이 가장 잘 알 것이오. 전적이 1승 1패라 하오.”
기사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놀랐다.
‘저 그랜드 챔피언 비슷하다고?’
‘그 괴물과 대등한 인간이라니!’
엇갈린 반응만 봐도 1승 1패가 맞는 듯했다. 그때 페르젠 백작이 기뻐하며 말했다.
“가만, 가만, 그럼 로벨 백작은 ‘무적무패’가 아니잖소? 그렇잖소? 으하핫!”
기사들은 젊은 페르젠 백작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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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울프 용병단 야영지로 돌아왔다.
펄프 대장이 로벨의 천막 앞에서 졸다가 말 울음소리에 깨어났다. 하품을 크게 하고 다소 늦은 저녁 보고를 올렸다.
“어디서 이상한 거 주워 먹고 배탈난 멍청이 한 놈 빼고 이상 없습니다.”
로벨은 그 멍청이가 허풍쟁이 제이콥이라 확신했지만 따로 묻지 않았다.
“내일은 저녁에 공격할 거야. 지원자 위주로 스무 명 선발해. 포상금은 오늘이랑 같아.”
“두 번은 위험하지 않습니까?”
“두 번이 끝이 아니야. 국왕 폐하가 도착할 때까지 반복할 거야.‘
로벨이 착잡하게 말했다. 적에게 지속적인 피해를 주는 동시에 3개 세력의 갈등을 외부로 돌리기 위함이었다. 펄프 대장은 생각이 깊어진 고용주가 새삼 대견했다.
‘하기야, 그 동안 치른 전쟁이 몇 번인데.’
로벨은 전쟁 지휘관답게 명령했다.
“국왕 폐하가 본대를 이끌고 도착하면 본격적인 아이언베어 요새 공성전이 시작될 거야. 그때까지 죽거나 다치지 않게 잘 챙겨줘.”
펄프 대장은 명령에 충실해서 눈앞에 기사부터 챙겼다.
“요깃거리를 가져오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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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어둡고 조용한 개인천막으로 들어와 코로 한숨 쉬었다. 고향을 떠난 지 벌써 20일이 지났다. 이 작은 천막이 늑대성의 침실만큼이나 익숙해졌다.
“기사님, 오셨어요?”
로벨은 흐룬팅 손잡이를 잡았다가 슬그머니 놓았다.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마녀 키르케가 건초 침대에 걸터앉아 짧은 다리를 번갈아 흔들었다. 새하얀 종아리가 달빛에 닿아 반짝였다. 자고로 정숙한 여인이라면 발목조차 함부로 보이지 않는 법이다. 로벨이 정상적인 사내라면 낯 뜨겁고 남사스러운 밤을 상상했을 것이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로벨은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마녀 키르케는 아랫입술을 삐죽이고 침대를 팡팡 두드렸다.
“제 방에는 침대가 없어요. 마녀의 방이라고 아무도 안 들어온다고요! 제가 아끼는 베개랑 이불도 없는데, 너무해요.”
마녀 키르케가 애용하는 침구류는 지금쯤 늑대성의 차가운 부엌을 뒤적이고 있을 것이다.
“건초를 가져다주라고 말할게.”
전장에서 사치스럽게 침대를 쓰냐는 용병도 있지만, 기사가 이끄는 군대는 말먹이로 쓰일 건초가 필수라 침대로 쓰고도 남았다.
로벨은 소드 벨트를 풀어 의자등받이에 걸고 깜박한 부분으로 돌아갔다.
“잘 지냈어?”
로벨이 자상한 목소리로 묻자 마녀 키르케는 유혹이라도 당한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잘못 지냈어요.”
“왜?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
“제 앞에 한 명 있어요.”
로벨은 진담인지 농담인지 관찰한 후 진담이라 판단했다. 역시 침대가 없어서 불편한 모양이다.
“그러게 따라오지 말라니까.”
“마도의 수호자가 둘이나 있는데, 어떻게 안 와요?”
“그건... 그렇네?”
늑대의 왕이나 뱀파이어 군주와 싸우게 된다며 어느 기사, 어느 용병보다 마녀 키르케가 도움이 될 것이다.
로벨은 펄프 대장이 오면 깨끗한 건초를 어린 집사 키 높이로 쌓아놓으라고 명령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마녀 키르케의 불만은 침대만이 아니었다.
“이번 전쟁은 이상해요.”
로벨은 의자에 앉아 먼지투성이 머리카락을 풀어헤치며 말했다.
“전쟁은 항상 이상해.”
그러나 원론적이고 철학적인 주제가 아니었다. 마녀 키르케는 로벨의 앞자리로 이동해 말했다.
“이건 목적이 없잖아요.”
로벨은 머리끈을 풀어 입에 물고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모았다. 앞머리와 귀밑머리가 흘러내려 묘하게 여성스러웠다.
“범죄를 저지른 다이첼 경의 죄를 묻는 거잖아?”
“아니죠. 아니죠.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계기죠. 계기? 핑계? 명분? 아무튼! 살인을 벌주기 위해 수백, 수천 명의 살인을 강요하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국왕쯤 되면 이성과 논리보다 자존심이 중요할 수 있어.”
“자존심이요?”
“자존심 때문에 30년을 싸운 전쟁도 있으니까.”
마녀 키르케는 생각할 것이 많은 듯 떡갈나무 지팡이로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로벨은 생각을 덜어줄 겸 평소 궁금한 것을 질문했다.
“그 지팡이는 뭐로 만들어진 거야?”
마녀 키르케는 이마를 붙은 떡갈나무 지팡이를 올려다보고 난감한 듯 말했다.
“그건 마법사의 비밀인데... 기사님이니까 특별히 알려줄게요.”
로벨은 ‘마법사의 비밀’이란 말에 홀딱 넘어갔다. 누구라도 그럴 테니 로벨을 팔랑귀라 탓할 수 없었다. 로벨이 귀를 가져가자 마녀 키르케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사실... 나무에요.”
“......”
“떡갈나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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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매일 같이 적군을 습격했다. 해가 막 뜰 때도 습격하고, 해가 막 질 때도 습격하고, 달빛 한 점 없는 야밤에도 습격했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첫째 날보다 둘째 날이 어렵고, 둘째 날보다 셋째 날이 어려웠다. 계속되는 기습으로 방어가 철저해졌을 뿐만 아니라, 역으로 기습하거나 함정을 팔 때도 있었다.
로벨은 핏물이 흐르는 바이저를 올리고 얼굴을 거칠게 닦았다. 시야는 환해졌지만 얼굴은 피칠갑이 되어 흉해졌다.
“아군 피해는?”
“두 놈이 당했습니다!”
“으악!”
“...세 놈이 당했습니다!”
가사 중의 기사 로벨과 정예 중의 정예인 울프 용병단이 고생할 정도면 다른 부대는 볼 것도 없었다. 로벨은 왼쪽 폴드런으로 부주의 칼날을 튕겨내고 아론다이트를 길게 찔렀다. 피와 기름을 잔뜩 먹은 칼날은 날카롭지 못해 뼈를 끊지 못했다. 그 결과 어중간하게 상처만 입혔다.
“끄아아!”
수염도 안 난 17, 8살 병사가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왼손으로 옮기고 흐룬팅을 역수(逆手)로 뽑아 머리를 내리찍었다. 썩어가는 장기를 붙잡고 시름시름 앓으며 죽는 것보다 단칼에 죽는 편이 행복할 것이다.
로벨은 이름 없는 청년 병사에게 슬픈 눈빛을 놔주고 아론다이트를 뒤로 뻗었다.
“이 정도면 됐어! 철수해!”
“철수! 철수한다!”
“외팔이! 돌아와! 너무 들어갔어!”
그러나 화가 난 에르나 왕국군은 잘 가라고 손수건 흔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핏발선 얼굴로 울프 용병단에게 달려들었다. 로벨은 흐룬팅을 반 바퀴 돌려서 정수(正手)로 잡고 에르나 왕국군을 향해 몇 걸음 다가갔다. 발가락 슈미츠가 다급하게 고용주를 불렀다.
“기사 나리!”
“됐어! 이쪽으로 와!”
“우리 기사 나리잖아? 저런 잡병들한테 안 당한다!”
로벨은 부하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기합을 지르며 찌르는 롱 스피어를 아론다이트를 걷어내고 한 걸음 다가가 흐룬팅으로 목을 쳤다. 한 손으로는 힘이 부족해서 목뼈를 자르지 못했지만, 절명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기사를 잡으면 기사가 될 수 있다!”
“나도 팔자 좀 고쳐보자!”
에르나 왕국군은 보물을 빼앗긴 고블린떼처럼 달려들었다.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나, 피와 죽음과 전쟁으로 정신이 뒤집혀서 감히 기사에게 덤빌 용기가 있었다.
‘아니야. 만용이야.’
컴포지트 아머는 고사하고 가죽갑옷도 뚫긴 힘든 조잡한 병장기였다. 로벨은 얼굴로 날아오는 무기만 쳐내고 나머지는 갑옷으로 받아넘겼다. 수천 번의 담금질로 완성된 강철과 수천 일의 훈련으로 단련된 근육은 농기구를 녹여 만든 무른 쇠를 우습게 튕겨냈다. 에르나 왕국군은 ‘진짜 기사’가 어떤 존재인지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깨달음을 실천하는 것보다 아론다이트의 칼날이 빨랐다.
퍽! 퍽! 깡-!
로벨은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신체의 일부가 하늘로, 땅으로, 혹은 누군가의 품으로 날아가고, 피와 내장이 풍경을 장식했다.
“우아악! 물러나! 물러나라고!”
“밀지 마! 이 새끼들아! 밀지 말라니까!”
세 명의 머리와 팔을 자르고, 추가로 한 명 더 배를 가르니 에르나 왕국군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로벨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고 한 걸음 더 내디뎠다. 쉰 명의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로벨은 기대한 반응에 만족하고 재빨리 몸을 돌려 도망쳤다. 전설의 검과 장인의 갑옷도 다루는 것은 사람이라 수십 명을 상대로 싸울 수 없었다. 우선 체력적으로 불가능하다.
“제길! 속았다!”
“놓치면 안 된다! 쫓아라!”
로벨은 턱까지 올라온 숨을 빠르게 내뱉었다. 전투 중에는 든든한 컴포지트 아머가 도망칠 때는 족쇄처럼 거추장스러웠다. 고향에서 유명했을 준족의 병사가 팔이 닿을 거리까지 좁혔다. 그러나 로벨은 혼자가 아니었다.
“영주님이 오신다! 사격 준비!”
“기사 나리 맞히는 놈은 대갈빡을 쪼개놓을 거다! 조준 잘해라!”
로벨은 2열로 도열한 울프 용병단을 보고 웃었다. 쿼럴의 뾰족한 촉이 보석처럼 빛났다. 애꾸눈 볼포스가 발이 빨라 불쌍한 에르나 왕국군 병사를 겨냥한 채 소리쳤다.
“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