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26화 (126/605)

126화. 강철곰

126화. 강철곰

척. 척. 척. 척...

두 자릿수 인원이 모이면 많아 보이고, 세 자릿수 인원이 모이면 하나의 덩어리로 보이고, 네 자릿수 인원이 모이면 산이나 강처럼 풍경으로 보이게 된다. 로드릭 영지를 지나가는 에릭 프란시스 공작군이 그러했다.

“와, 와, 와아아!”

“에르나 왕국이랑 싸우러 간다지?”

1,300명이나 되는 대군이 로드릭 마을 남쪽 들판을 지나 서쪽으로 향했다. 페르젠 가문 깃발, 헤르만 가문 깃발, 에디즈 가문 깃발, 맥기 가문 깃발 등등 수많은 깃발이 하늘을 향해 뻗어있고, 그 아래에 각양각색의 창과 가지각색의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행군했다.

“영주님, 울프 용병단 출진준비 끝났습니다.”

로벨의 늑대성 아래에 울프 용병단 100명을 비롯한 로벨 로드릭 백작군 300명이 대기 중이었다. 로벨의 군대가 합류하면 총 1,600명의 아이언베어 요새 지원군이 완성된다.

“영주님?”

어린 집사가 걱정스럽게 보았다. 전쟁이 처음은 아니지만, 상대가 상대고, 규모가 규모라 불안했다. 더욱이 로벨은 들켜서 안 되는 큰 비밀도 있었다.

로벨은 두 가지 걱정을 한 번에 해결해주었다.

“걱정하지 마. 갑옷을 벗지 않을 테니까.”

“그럼 힘들 텐데요...?”

로벨은 빙그레 웃었다.

머를 브릭 경, 켈트 경, 바이란 경, 마튼 경, 메튜 경, 그리고 호른 경이 전투마를 타고 로벨의 본대로 다가왔다. 중무장한 기사가 7명이나 모이니까 분위기가 대단했다.

“마로드! 전군 출발준비 완료했습니다!”

로벨은 봉신들을 한 번씩 둘러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선두는 울프 용병단이 맡겠소. 출발하시오.”

“울프 용병단 출발!”

“로벨 로드릭 백작군 출발!”

로벨은 전투마를 몰아 울프 용병단을 가로질렀다. 마녀 키르케가 수송마차에서 손을 흔들었지만, 엄격한 출진 분위기 때문에 응하지 못했다.

에릭 공작의 본대가 가까워졌다. 로벨은 머를 브릭 경과 호른 경을 대동한 채 에릭 공작을 찾아갔다. 햇빛을 가장 많이 반사하는 곳이라 어렵지 않았다.

“로벨 로드릭이 주군의 소환에 응해 합류합니다.”

“오오! 로드릭 백작! 잘 오셨소!”

사흘 전부터 전령이 오갔고, 조금 전까지 지켜본 것치고 과장되게 환영했다. 부대의 사기를 위해서, 그리고 로벨의 체면을 위해서였다.

로벨은 병력, 병참, 지휘관 등등을 구두로 보고하고 부대 위치를 지정받았다. 로벨은 자신의 군대를 본대 후미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어느덧 주먹보다 작아진 늑대성을 향해, 정확히는 아직도 성문 앞을 떠나지 못했을 어린 집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잘 다녀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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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합류한 에릭 프란시스 공작군은 하루에 10마일씩 이동했다. 울프 용병단만 움직이면 15마일씩 행군할 수 있지만, 기강이 안 잡힌 징집병과 40일 치 보급품을 실은 수송마차 때문에 통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외팔이 더치가 새로 만든 바클러의 가죽끈을 잘근잘근 씹으며 투덜거렸다.

“굼벵이가 따로 없군. 도착하면 전쟁 끝나겠다.”

“그럼 좋지, 뭘 그래?”

“근데 배고프시오? 그건 왜 씹쇼?”

“이래야 부드러워진다고!”

울프 용병단은 전쟁 전문 베테랑 용병단답게 느긋했다. 로벨은 머를 브릭 경의 아만다 영지병을 쳐다보았다. 스무 명 남짓한 어부들이 무기라 부르기도 민망한 작살과 갑옷이라 생각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한 나무판자를 가지고 어린아이도 깔깔 웃을 창술 훈련 중이었다.

“하아...”

가시성의 농민이나 늪지성의 약초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바위성의 사냥꾼과 구릉성의 목동들은 활과 칼을 조금 다룰 줄 알았다. 펄프 대장이 로벨의 걱정을 이해했다.

“전쟁은 혼자 싸우는 게 아닙니다. 호흡을 맞추면 쉽게 죽지 않을 겁니다.”

“역시 그렇겠지?”

로벨은 펄프 대장, 외팔이, 애꾸눈, 허풍쟁이 등을 불러 모아 새로운 임무를 주었다. 외팔이 더치가 소심하게 반발했다.

“저 무지렁이 놈들을 훈련시키라굽쇼?”

“응. 눈 먼 화살에 맞아 죽지 않게.”

“에잉! 전사자 절반이 눈 먼 화살에 죽습니다요!”

“그럼 100명 살리는 거네? 와아. 열심히 해봐.”

로벨은 무미건조하게 감탄하고 외팔이를 쫓아냈다. 한 펄프 대장은 괜한 말을 했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이언베어 요새까지 보름은 걸릴 거야. 그 정도면 밀집과 산개 정도는 훈련시킬 수 있지?”

“끄으응!”

로벨은 봉신들의 이해를 구한 후 베테랑 용병을 훈련교관으로 파견했다. 정식으로 고용하려면 목돈을 줘야 하는-울프 용병단의 명성이 오르면서 울프 용병단 출신도 몸값이 크게 올랐다- 전문 용병이 공짜로 훈련시켜준다니 고마운 일이었다. 자존심 강한 켈트 경 이외에는 쌍수 들고 환영했다.

기사들이야 좋지만, 낮에는 행군하고 저녁에는 훈련하고 밤에는 불침번을 서야 하는 각 영지의 병사들은 죽을 맛이었다.

“지금 흘린 땀 한 방울이 전장에서 흘릴 피 한 방울이라고 생각해라! 시선 전방! 허리 펴! 창 올려라!”

로벨은 앓는 소리 하면서도 살기 위해 훈련에 임하는 병사들을 보고 만족했다. 그때, 로벨의 수행기사를 자처하는 호른 경이 다가와 말했다.

“내일이면 포클랜드 시티를 지나갑니다.”

“아이언베어 요새까지 얼마나 남았소?”

“지금 속도면 닷새를 더 가야 합니다.”

호른 경은 떠돌이 기사답게 발이 무척 넓었다. 포클랜드 지방뿐만 아니라, 에르나 왕국, 잉그비아 왕국, 네일 공국의 지리도 속속 알고 있었다. 볼탄 반도 토박이가 대부분인 로벨 로드릭 백작군에게는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기사 나리! 저쪽 좀 보십시오!”

발가락 슈미츠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덕분에 지칭한 기사 나리 이외에도 모두가 ‘저쪽’을 보았다. 잡초 무성한 평원 저편에 새까맣게 많은 것이 이동하고 있었다.

“와우! 저쪽도 바글바글한데?”

“어디서 온 놈들이지?”

애꾸눈 볼포스가 안대를 만지며 군대를 노려보았다. 깃발이 여럿 있는데, 거리가 멀어 식별이 불가능했다. 로벨은 깃발이 아니라 하늘을 보았다.

“사트로 후작군이야.”

“볼프 사트로 후작 말입니까? 아, 그렇군요. 북동쪽에서 저만한 병사를 동원할 수 있는 귀족이 또 있을 리 없지요.”

로벨 등은 볼프 사트로 후작군을 유심히 관찬했다. 1,200명에서 1,300명 정도 되었다. 진행방향을 보아 포틀랜드 시티 근방에서 조우할 듯했다. 마녀 키르케가 총총걸음으로 쫓아와 물었다.

“기사님, 기사님, 싸우지는 않겠죠?”

“응. 국왕 폐하의 부름을 받았으니까. 지금 싸우면 국왕 폐하의 군대를 공격한 일이 될 거야.”

그리고 젊은 공작과 젊은 후작 모두 상식이 통하는 인물이었다.

“류트 공자와 악마추종자만 없다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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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에릭 공작의 육각 막사를 찾아갔다. 하버트 페르젠 백작의 장남인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과 볼트 헤르만 백작의 조카인 몰드 헤르만 백작이 먼저 와 있었다. 기사 작위를 박탈당한 두 백작의 상속자였다.

“조금 늦었소, 로드릭 백작.”

새로운 페르젠 백작은 ‘진짜’ 로벨과 동갑인 25살의 청년이고, 새로운 헤르만 백작은 콧수염이 멋진 45살의 장년이었다. 로벨은 눈짓으로 인사하고 천막 안의 에릭 공작을 찾았다. 에릭 공작은 포클랜드 지방 지도를 펼쳐놓고 수행기사와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

몰드 헤르만 백작이 콧수염 끝을 올리며 말했다.

“생각이 많으시겠지.”

“무슨 생각?”

“경들도 그렇지만, 국왕 폐하를 보필하는 첫 전쟁이잖소? 사소한 실수가 가문에 먹칠할 수 있다오.”

페르젠 백작이 코웃음 쳤다. 로벨은 두 백작의 성격을 가늠할 수 없어 침묵했다.

“세 사람 모두 가까이 오시오.”

에릭 공작은 수행기사와 종자를 내보내고 세 명의 백작을 불렀다. 네 자릿수 군사를 통솔하는 일이 만만치 않은 듯 낯빛이 어두웠다.

“오늘 아침 사트로 후작이 제안을 해왔소.”

“이곳에서 말입니까!”

페르젠 백작이 눈을 부릅떴다. 아버지의 호전적인 기질을 많이 물려받은 듯했다.

“그런 것이 아니오. 행군속도가 너무 늦으니 우선 선발대를 아이언베어 요새로 보내자는 제안이오.”

우려한 것과 달리 상식적인 제안이었다. 헤르만 백작이 수염 끝을 살짝 비틀며 말했다.

“합당한 제안입니다. 에르나 왕국군의 공격이 시작된 지 벌써 열흘이 지났습니다. 지금 속도로 가면 닷새가 더 걸릴 테니, 선발대를 먼저 보내는 것이 좋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로벨이 흉갑에 손을 얹고 말했다. 페르젠 백작이 ‘정말 용맹무쌍하군?’ 따위로 비아냥거렸다. 로벨이 인상을 쓰고 돌아볼 때, 에릭 공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 되오.”

“...저로 부족합니까?”

“그런 것이 아니오. 경의 무용을 왜 모르겠소? 다만, 함께 갈 상대가 좋지 않소.”

“우리 말고 누가 선발대로 갑니까?”

“도반 도트넘 백작이오.”

로벨을 비롯한 세 명의 안색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세 가문과 모두 악연이 있었다. 특히 로벨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이면적으로 깊은 관계가 있었다.

‘뱀파이어 군주가 왜...?’

에릭 공작은 페르젠 백작을 보았다.

“다른 두 백작은 호수성의 일로 불편할 테니, 페르젠 백작이 선발대로 출발하시오. 혹시 문제 있소?”

페르젠 백작은 새로 짜 맞춘 마름모양 흉갑을 탕탕! 두드렸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오늘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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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젠 백작군 350명은 저녁식사 후 식량과 식수를 사흘 치만 챙겨서 먼저 출발했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 야영지로 돌아가다가 잠깐 돌아보았다. 석양 속으로 행군하는 군대가 어쩐지 불길했다. 젊은 페르젠 백작은 전쟁경험이 없었다.

‘괜찮을까?’

로벨은 석양빛에 걱정을 한 줌 던지고 말머리를 돌렸다. 마침 펄프 대장 등이 로벨의 원뿔 막사를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로벨이 전투마에서 내리자 펄프 대장이 투구를 벗고 말했다.

“저쪽이 선봉입니까?”

“...응.”

로벨은 염려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로벨의 성품을 잘 아는 펄프 대장은 턱을 한번 긁적이고 위로했다.

“꽤 유능한 친구들을 고용했더군요. 괜찮을 겁니다.”

“유능한 친구?”

“저쪽도 1개 중대가 용병입니다. 그것도 제법 고르고 고른 잡놈들입니다. 왼손잡이 폴, 붉은 곰 무토, 또 누구더라, 아! 코 베기 제인!”

애꾸눈 볼포스가 정리해주었다.

“이름 좀 알려진 용병을 많이 데리고 있습니다. 이번 전쟁에 아낌없이 돈을 뿌린 모양입니다.”

로벨은 페르젠 백작의 흠집 하나 없는 풀 플레이트 아머를 떠올렸다. 첫 전쟁이니 공을 세우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우린 지금처럼 행군할 거야. 무기를 틈틈이 정비하고, 각 영지병을 열심히 훈련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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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에릭 프란시스 공작군 본대는 예정대로 닷새에 걸쳐서 행군했고, 마침내 포비아 왕국의 서부 국경지역에 도착했다. 호른 경이 로벨 곁에 말머리를 붙이고 헐벗은 산을 가리켰다.

“저 산 너머가 에르나 왕국입니다.”

“그렇소?”

누가 국경이라 말해주지 않으면 동네 뒷산이라 여길 평범한 장소였다. 마녀 키르케가 심심한 듯 크게 하품했다.

“국경이라고 별거 없네요.”

호른 경은 주군 앞에서 방자한 마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군과 유별나게 가까운 사이인 것도 거슬렸다.

“이 길을 가면 아이언베어 요새가 나옵니다. 전투가 벌어진 지 보름이 지났으니...”

“잠깐! 전군 정지!”

로벨은 호른 경의 입을 막고 펄프 대장에게 명령했다. 도보로 이동하는 펄프 대장 등은 보지 못했지만, 거마에 앉은 로벨은 전방부대의 소란을 빠르게 알아챘다.

“저쪽은 헤르만 백작군이지?”

“예? 예. 이상하군요. 기습이라도 받은 걸까요?”

“...혹시 모르니 전투준비해.”

펄프 대장은 각 소대장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숙련된 울프 용병단은 큰 소리 갈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스피어맨이 앞으로 나가고 크로스보우맨이 3열로 대기했다. 후계자 전쟁부터 정통성 전쟁까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러온 역전의 용병들다웠다. 호른 경은 울프 용병단의 기강과 전문성에 크게 감탄했다. 그리고 잠시 뒤, 안 좋은 쪽으로 다시 감탄했다. 전방부대에서 온 전령이 스치듯이 통과하며 외쳤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님의 전언입니다! 아이언베어 요새 함락! 아이언베어 요새 함락! 하버트 페르젠 백작군이 대패했습니다!”

로벨의 이마에 주름이 가로 새겨졌다.

이번 전쟁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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