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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25화 (125/605)

125화. 에르나 왕국

125화. 에르나 왕국

마녀 키르케가 깔깔거리며 좋아했다.

“늑대의 성이요? 늑대?”

어린 집사는 로벨이 백작이 된 것과 페르젠 시티의 관세와 부두세를 면제받은 것을 제치고, 성 이름에 더 좋아하는지 의문이었다.

“아야야, 이야카야, 이제 너희들 성이야.”

“아니거든요! 영주님 성이거든요!”

로벨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아흐레 동안 이어진 여정으로 피로가 눈처럼 쌓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주군.”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이 전투마 고삐를 받으며 인사했다. 로드릭 성, 아니, 늑대의 성의 식구처럼 자연스러웠다. 어린 집사가 팔짱끼고 까칠하게 말했다.

“봉신들도 각자 집으로 갔는데, 호른 경은 왜 아직도 안 가요?”

“너무 쏘아붙이지 말거라, 나이 어린 종복아. 안 그래도 오늘 돌아갈 예정이니.”

“어? 어엇! 잘 생각하셨어요! 마님께서 애타게 독수공방할 텐데요!”

“나는 아내가 없다.”

로벨이 놀라서 눈썹을 위로 올렸다.

“결혼을 안 했소?”

“몸과 마음이 맞는 사람이 없어서 말입니다.”

“몸은 또 뭐람...”

어린 집사가 들으란 듯이 툴툴거렸다. 로벨은 마구(馬具)를 해체하며 말했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할 테니 점심 후에 출발하시오. 키르케?”

“식사 준비할게요! 백작님!”

마녀 키르케가 ‘백작님!’을 강조한 후 주방으로 달려갔다. 로벨은 새로운 호칭에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작위가 싫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알면 좋아할까? 아니면 화를 낼까?’

로벨은 가문을 위해, 자식을 위해 애써온 아버지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마도 걱정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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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는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빠르게 토해냈다. 코끝이 얼얼한 겨울도 한물가고, 따스함과 산뜻함이 담겨진 봄이 찾아왔다. 성과 성벽 위에 눈이 녹아내려 진창이 되고, 언덕길이 미끄러워서 매일 같이 사고가 나지만, 그래도 어린 집사는 웃을 수 있었다.

“이제야 정상이 되었군요!”

“언제는 비정상이었수?”

허풍쟁이 제이콥이 크로스보우의 방아쇠를 점검하며 물었다. 어린 집사는 설명하기 귀찮아서 대충 손을 저었다.

정통성 전쟁을 일으킨 페르젠 백작과 헤르만 백작은 기사 작위를 박탈당했고, 찰거머리처럼 붙어있던 호른 경도 자작나무 숲으로 돌아갔다. 류트 프란시스 공자와 도반 도트넘 백작, 그리고 악마추종자라는 걱정거리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뒤통수가 간지럽지는 않으니 대만족이었다.

“이제 마음 편히 돈이나 벌어야지. 우선 밀린 세금부터 주워담아볼까나?”

그러나 세금보다 먼저 도착할 것이 있었다. 포클랜드 시티로 향하는 순례자가 로드릭 영지를 들려서 편지를 전달했다. 자작나무 숲 저택에서 보낸 초대장이었다.

어린 집사는 호른 경의 서명을 본 후 결례를 무릅쓰고 초대장을 와락 꾸겼다.

“이 작자가 증말!”

로벨은 겨우내 쓸 일이 없어서 서운한 두 자루 명검을 손질하며 “하하!” 웃었다.

“그동안 신세 진 것을 보답하기 위해 초대한다잖아.”

“아무리 봐도 수상해요. 자기 주군을 초대하는 일이 흔치 않잖아요?”

“음. 불편하긴 하지.”

“호, 혹시 영주님에 대해 뭔가 알아챈 것이 아닐까요? 저번에 영주님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렇고...”

“그런 것 같진 않은데.”

로벨은 꾸겨진 초대장을 빼앗아 곱게 폈다. 어린 집사가 불안하게 물었다.

“어쩌시게요?”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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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 숲은 뉴 로드릭 마을을 지나 하루 반나절을 더 가야 했다. 넉넉잡고 이틀을 가야하니, 미리 사람을 보내서 출발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로벨은 길눈이 좋고 발이 빠른 허풍쟁이 제이콥을 전령으로 보내고, 외팔이 더치, 애꾸눈 볼포스, 겁쟁이 데비 등 총애하는 용병을 호위 삼아 출발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성문을 나서기 직전에 일정을 취소해야 했다.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고?”

장미성에서 온 전령이 머리를 조아렸다. 에릭 공작의 기사 종자인 젊은 전령은 살아 숨 쉬는 전설, 로벨 로드릭 백작과 대면하여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전령을 상대한 것은 나이 어린 집사였다.

“이번에는 또 누구에요? 사트로 후작? 도트넘 백작?”

“에르나 왕국입니다.”

예상치 못한, 그리고 예상보다 거대한 상대에 어린 집사와 울프 용병단이 웅성거렸다.

“에르나 왕국이 왜요?”

“에르나 왕국의 기사가 노상에서 남편을 살해하고 아내를 겁탈한 후 도망친 사건이 있었습니다.”

로벨은 눈살을 찌푸렸다. 끔찍하고 지저분한 소식이었다. 겁쟁이 데비가 혹시나 해서 애꾸눈에게 속삭였다.

“귀족을 말하는 거겠지?”

“...당연히.”

농민이나 떠돌이 가족이면 화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린 집사는 황당해서 빼액! 소리쳤다.

“에르나 왕국의 기사?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에요? 에르나 국왕이 처벌하면 되잖아요?”

“처벌을 못했습니다.”

“그니까 왜요?”

“범죄를 저지른 기사가 국경을 넘어서, 그러니까 포클랜드 지방으로 도망 왔습니다.”

“그럼 체포해서 돌려보내면 되잖아요?”

전령은 좌우로 눈알을 굴렸다. ‘천한’ 용병들을 신경 쓰는 태도였다. 로벨은 그냥 말하라고 손짓했다.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도망친 기사, 빌포이 다이첼 경은 국왕 폐하의 외삼촌입니다.”

로벨은 체통을 잊고 입을 떡! 벌렸다. 충성스러운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 등이 더욱더 크게 입을 벌려서 그리 추하지 않았다. 애꾸눈 볼포스가 안대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귀족들의 족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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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호른 경의 초대뿐만 아니라 어린 집사가 세운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

에르나 왕국과 전쟁이 시작되면 포비아 국왕은 에릭 공작을 비롯한 각 지방의 제후를 소집할 것이고, 에릭 공작은 로벨을 비롯한 봉신을 소집할 것이고, 로벨은 머를 브릭 경을 비롯한 기사들을 소집해야 할 것이다.

“역시 다단계라니까요.”

로벨은 충성맹세한 다섯 개 성에 보낼 소환장을 준비했다. 울프 용병단과 각 영지의 병력을 합치면 약 300명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다. 마녀 키르케가 숫자에 관심을 가졌다.

“그럼 총 몇 명이나 모일까요?”

“글쎄요. 에릭 공작님이 1,500명 정도 모을 테고, 볼프 후작님도 비슷하게 모을 테니까, 볼탄 반도에서만 3,000명 정도 모이겠죠.”

“우와! 엄청 많네요?”

“포클랜드 지방과 검은 숲 지방에서도 병력을 소집할 테니까, 다 모이면 1만 명 정도 되지 않을까요?”

어린 집사도 1만이란 숫자가 감이 잡히지 않았다. 1천 명만 모여도 우글우글한데, 1만 명이 모이면 어떨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어지간한 도시 인구였다.

“총력전을 펼칠 때 그러하오.”

펄프 대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8년 전, 아니, 9년 전 에르나 왕국과 전쟁 때는 포클랜드 지방 영지민만 참전했소.”

그 당시 참전한 외팔이 더치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에르나 왕국군 4천 명 대 포비아 왕국군 3천 명이었지.”

“그것도 많아요.”

“와! 그럼 이번에도 포클랜드 지방만 징집할지 모르겠네요?”

어린 집사가 기뻐서 소리쳤다. 포클랜드 출신이 있으면 얄미워서 한 대 때렸을지도 모르겠다. 애꾸눈 볼포스는 때리지 않았지만 초를 쳤다.

“에릭 공작이 괜히 전령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오.”

어린 집사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야카의 꼬리의 잡아당기며 불특정 대상에게 분통을 발산했다.

“이제야 영지가! 볼탄 반도가 진정되었는데! 난데없이 외국과 전쟁이라니!”

“깨갱!”

어린 집사와 달리 이야카는 명확한 대상에게 분노를 보냈다. 송곳니를 드러내고 으르릉거렸다. 그러나 최강의 기사 모시며 최고의 용병을 굴리는 어린 집사는 늑대의 항의 따위에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았다.

“국왕 폐하의 외삼촌이건 외사촌이건 그냥 돌려보내면 좋을 텐데요. 흉악범죄자 때문에 선량한 사람이 죽으면 얼마나 억울해요.”

“세상은 원래 억울한 것 투성이오.”

“동감이야.”

로벨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게으른 늑대남매를 제외한 모두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로벨은 가까운 자리에 대충 앉아 대화에 동참했다.

“에르나 왕국의 사정을 알아봐야겠어.”

“어떻게요?”

“정보를 줄 만한 사람이 있어.”

“영주님한테요?”

그랜드 토너먼트를 위해 큰마음 먹고 포클랜드 시티를 다녀온 것 외에 볼탄 반도를 벗어난 적 없는 로벨이었다. 유라피아 대륙 저편인 에르나 왕국에 지인이 있을 리 만무...

“아앗! 그랜드 챔피언이요!”

“기사 나리?”

“우리 챔피언 말고요! 저쪽 그랜드 챔피언이요! 그렉 페럿 경! 맞죠?”

로벨은 빙그레 웃었다.

“편지를 써야겠어. 아마도 도움을 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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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로벨의 성에서 그렉 페렛 경의 저택이 있는 에르비아 시티까지 열흘하고도 사나흘이 더 걸렸다. 그것도 최단거리로 갈 때 시간이었다. 로벨이 편지를 맡긴 교역상인은 여러 도시를 방문하며 짧게는 하루, 길게는 사흘을 체류했다. 그 결과 그렉 페럿 경의 답장이 도착한 것은 봄 농사가 한창인 올해 95일이었다.

로벨은 창밖의 구름 낀 하늘을 불길하게 올려다보고 빼곡히 적힌 편지를 읽었다.

“에르나 국왕이 대단히 화가 났다는데?”

“...그렇게 쓰여 있어요?”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왕 폐하가 심기 불편해 똥도 못 누고 있다는 게 그런 뜻 아닐까?”

“으으으...! 정말 기사들이란!”

마녀 키르케는 재미있는지 ‘히히힛!’ 웃었지만 로벨은 웃지 않았다.

“옛 신이 현신해서 바짓가랑이 잡고 말리지 않는 이상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다나 봐. 귀족원도 주전파가 득세해서 ‘전쟁’과 ‘복수’란 말을 아침저녁 방귀처럼 뀐다고... 왜 표현이 이 모양이지?”

로벨은 그렉 페럿 경을 친구 삼는 것을 조금 고려했다. 아무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전쟁을 막고 싶거든 범죄자 빌포이 다이첼 경을 돌려보내라고 해.”

“으으... 심각하군요.”

펄프 대장이 목을 쭉 빼고 편지를 훔쳐보며 물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없습니까? 용병을 모집한다거나, 대포와 화약을 준비한다거나...”

“그런 건 없어. 아무리 친구라 해도 군사기밀을 발설할 수 없잖아.”

로벨은 그렉 페럿 경의 편지를 고이 접어서 벽난로에 집어넣었다. 자그마한 불이 그랜드 챔피언의 흔적을 집어삼켰다. 이 편지로 곤란해질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말했다.

“에릭 공작님, 아니, 국왕 폐하를 만나봐야 하지 않을까요?”

“만나서?”

“그 기사님을 돌려보내... 는 것은 안 할 테니까, 금이든 은이든 값나가는 것을 대신 보내서 사과하라고 해야죠.”

“그게 될까?”

“전쟁보단 낫잖아요.”

“그게 아니라, 내 말을 들을 것 같지 않다고.”

“영주님은 백작님이잖아요? 그랜드 챔피언 백작이 말하면 고민은 해보겠죠!”

아무리 그래도 국왕 폐하를 찾아가기는 부담되었다. 로벨은 우선 에릭 공작과 대화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결심이 조금 늦었다. 구체적으로 닷새가 늦었다.

로벨이 에릭 공작을 찾아가기 전에 에릭 공작이 보낸 전령이 먼저 찾아왔다. 그 간 살이 쏙 빠진 전령이 격식과 품위가 빠진 편지를 주고 떠났다. 로벨은 에릭 공작의 장미 인장을 확인하고 겉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단 두 줄 읽고 얼굴을 찌푸렸다.

“에르나 왕국이 아이언베어 요새를 공격했어.”

“예예옛?”

“그곳은 포비아 왕국의 국경요새잖습니까!”

로벨은 과열된 관심 속에서 에릭 공작의 편지, 아니, 소환장을 마저 읽었다. 그리고 측근들을 위해 두 마디로 요약했다.

“...전쟁이 시작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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