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24화 (124/605)

124화. 백작

124화. 백작

“후우... 후우...”

로벨은 오른손과 왼발로 몸을 지탱한 채 수평으로 오르내렸다. 근육이 뭉치고 풀리기를 반복하며 아름답게 숨을 쉬었다.

“후욱!”

로벨은 30회를 채운 후 왼손과 오른발로 바꿔서 다시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왕복 달리기와 바위 던지기를 못해서 고안한 단련법인데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기존 훈련에 추가해도 좋을 듯했다.

“우악! 여기 왜 이리 더워요?”

로벨은 좌우 30회 팔굽혀펴기를 마치고 뭍에 막 오른 물고기처럼 벌떡 일어났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과 목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 그렇게 땀 흘리니까 덥죠! 창문 좀 열어요!”

로벨은 어린 집사가 가져온 수건을 머리에 쓰고 수통마개를 어금니로 뽑았다.

“꼭 여기서 훈련해야 해요?”

“여기밖에 없잖아.”

로벨은 얼굴을 대충 훑고 창문을 열었다. 성문과 성탑이 정면에 위치하고, 연병장과 마구간이 아래에 자리했다. 로드릭 성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 로벨의 측근 중에 측근만 방문할 수 있는 곳, 로벨의 침실이었다.

로벨은 슈미즈(Chemise)를 갈아입고 우플랑드를 꺼내 머리부터 뒤집어썼다. 어린 집사는 땀 냄새난다고 투덜거리며 겨드랑이와 소매를 정리해주었다.

“오늘 일정은?”

“어제와 같아요.”

“...어제 아무것도 안 했잖아?”

“그러니까요.”

겨울이 한가한 것은 영주도 마찬가지였다. 영지를 순찰하고, 영지민을 재판하고, 우물세, 화덕세, 장례세 등등의 세금을 거두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일은 어린 집사와 그람 형제가 알아서 하고 있었다.

“호른 경은?”

“영주님이 주무신다고 하니까 마을로 내려갔어요.”

“그래?”

로벨은 바가지 긁는 아내가 친정 간 것 마냥 활짝 웃었다. 어린 집사가 찹찹하게 말했다.

“이제 겨울도 다 갔는데, 그만 돌려보내죠?”

“응. 그럴 거야.”

로벨은 어느새 성큼 다가온 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작년에는 전쟁이다 사업이다 정신이 없었지만, 올해에는 사업이 궤도에 올라서 한결 여유로울 것이다.

“이제 좀 편히 쉬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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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바로 어긋날 줄은 몰랐다.

로벨이 마녀 키르케와 아야와 이야카를 불러와 늦은 아침을 먹을 때, 애꾸눈 볼포스와 헨리 피터 상단주가 찾아왔다.

“마로드, 식사 중에 대단히 죄송합니다.”

애꾸눈과 헨리 상단주는 거친 용병과 억센 행상인 중에서 유별나게 예의가 바른 편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식사시간에 찾아온 것이 심상치 않았다.

로벨은 고기와 뼈를 한 접시에 모아 아야에게 내려주고 몸을 돌렸다.

“언제 왔어?”

“어젯밤에 도착했으나 시간이 늦어 지금 인사 올립니다. 약소하게나마 포클랜드 포도주를 한 병 가져왔습니다.”

어린 집사는 화를 내려고 벌떡! 일어났다가 ‘포클랜드 포도주’란 말에 도로 앉아 얌전히 식사를 이어갔다. 마녀 키르케가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비싼 거예요?”

“포클랜드 대수도원에서 만든 포도주에요. 값도 값이지만 맛이 아주 좋아요.”

“쓰릅-!”

마녀 키르케가 탐욕스러운 눈으로 헨리 상단주를 보았다. 이래저래 불편한 장소였다.

“술을 담글 때가 아닌데, 무슨 일이야?”

“사실 요즘 장사가 잘 되어 치즈와 햄 같은 식료품도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래? 축하해.”

“하하, 감사합니다. 허나 그 때문에 찾아뵌 것은 아니고...”

“포클랜드 시티의 율리오 추기경이 프란시스 시티에 찾아왔습니다.”

애꾸눈 볼포스가 고용주의 아침식사를 방해하기 싫어 빠르게 말했다.

“추기경이?”

어린 집사가 숟가락을 놓고 쳐다보았다. 헨리 상단주가 굽신거리며 말했다.

“사흘 전 소식이라, 지금쯤 무언가 발표가 났을 겁니다.”

눈꼬리가 내려가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민감한 시기임을 감안할 때 추기경의 방문은 정치적으로 여러 가지를 시사했다. 정통성 시비가 걸린 에릭 프란시스 공작에게 해로울 것이 없었다. 어린 집사와 애꾸눈과 마녀 키르케가 활달하게 말했다.

“붉은 장미 수도원의 거짓말쟁이를 처벌하기 위해서겠죠!”

“그게 아니더라도,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정통성을 정식으로 인정하는 모양새가 됩니다.”

“옛 신의 교단이, 그것도 교황 다음가는 사람이 인정했으니까, 아무도 트집을 잡을 수 없을 거예요.”

“와아! 정말 잘 됐어요!”

로벨은 봄처럼 싱그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볼탄 반도의 내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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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칼집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걸음을 떼었다. 문무백관이 모인 자리가 처음은 아니지만, 그 속에서 주인공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랜드 챔피언이 되었을 때보다 더 떨렸다.

“로벨 로드릭 남작!”

에릭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로드릭 마을 외곽 느티나무 아래에서 보았을 때와 사뭇 달랐다. 표정이 밝고, 의상이 화려하며, 자신감이 가득했다.

“나의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기사 로벨 로드릭이여!”

로벨은 시종이 일러준 대로 단상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에릭 공작이 성큼성큼 내려와 로벨이 미리 맡겨둔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호수의 요정이 선물한 명검에 욕심 많은 기사들이 숨을 죽였다.

“옛 신과 국왕 폐하를 대행하는 나의 정당한 권한으로 로벨 로드릭 남작을 ‘백작(Count)’에 봉하고, 백작의 성을 ‘늑대의 성’이라 명명한다.”

기사 작위를 받아 3년 만에 남작이 되더니, 2년 반 만에 백작까지 올라갔다. 전례를 찾을 수 없는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장미성에 모인 기사 중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호른 경이 콧수염을 위로 말며 말했다.

“힘으로 보니, 공으로 보나, 실리로 보나, 반대할 이유가 없으니까.”

어린 집사가 의아하게 물었다.

“힘이랑 공은 알겠는데, 실리는 뭔가요?”

호른 경은 주군이 총애하는 작은 종복을 존중해서 친절히 설명했다.

“페르젠 백작과 헤르만 백작의 날개가 꺾였으니, 국경을 지킬 새로운 방패가 있어야지 않겠느냐.”

“국경이요? 네일 공국?”

“사트로 후작 말이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받아 허리에 차고 몸을 돌렸다. 에릭 공작의 기사와 로벨 로드릭 백작의 기사가 일제히 축하했다. 머를 브릭 경은 울 것 같은 얼굴로 휘파람을 불었고, 구릉성의 마튼 경은 껄껄 웃으며 물개박수를 쳤다.

“로벨 백작! 축하하오!”

“로벨 로드릭 백작 만세! 로드릭 가문 만세!”

창밖에서 눈 녹은 물이 뚝... 뚝... 떨어지는 가운데, 장미성의 사람들은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승리 및 로벨 로드릭 백작의 축하 파티였다.

로벨은 쉴 새 없이 술을 마시고 정신없이 춤을 추었다. 영리하고 꼼꼼한 어린 집사가 말하길 총 22명의 레이디와 춤을 추었다고 한다. 펄프 대장이 어이없어서 되물었다.

“그걸 세었소?”

“...흥!”

어쩌면 질투일지도 모른다.

영광을 누리는 승자 뒤에는 볼품없는 패자가 있었다. 길고 긴 축하연회가 끝나자 하버트 페르젠 백작과 볼트 헤르만 백작이 귀족원 회의에 소환되었다.

로벨은 영주들과 기사들이 참석한 원탁에서 두 백작을 맞이했다. 볼탄 반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영주가 칼도 차지 않고 죄인처럼 서 있었다.

“반역죄를 다스리는 형벌이 교수형 말고 또 있소이까?”

“이 일은 경우가 다르지 않소.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니...”

“미치광이 사제의 말을 진의도 확인하지도 않고 군사를 일으킨 것이 오해요?”

여론이 사형 쪽으로 기울어졌다. 거칠고 단순한 것을 매력으로 삼는 기사들이라 결론도 빨랐다. 로벨은 페르젠 백작을 힐끔 보고 의견을 보탰다.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오.”

로벨이 입을 열자 볼탄 반도의 내로라하는 기사들이 일제히 쳐다보았다. 로벨은 과도한 집중에 당황했다.

“그렇지! 로벨 로드릭 백작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옳소! 저 둘과 싸운 것은 로벨 백작이 아니오?”

로벨은 야영지로 삼아도 될 만큼 커다란 원탁에 두 손을 올리고 기사들의 시선을 하나하나 마주했다.

“지난 수백 년간 페르젠 시티와 버팅거 시티를 관리해 온 가문이오. 처벌은 신중히 해야 하오.”

바람성의 맥기 경을 비롯한 몇몇 기사가 즉시 반발했다.

“잠깐! 죄를 덮자는 말이오?”

“에릭 공작께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것이오!”

주로 막판에 돌아선, 그래서 에릭 공작에게 충성을 증명해야 하는 기사들이었다. 로벨은 그들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로벨을 따라 귀족원에 참석한 호른 경이 헛기침하고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로벨 백작님을 모시는 패트릭 호른이오. 자작나무 숲의 호른이라 부르기도 하오.”

작위도, 영지도 없는 기사지만, 로벨의 이름 때문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친분 때문인지 침묵했다.

“내 주군의 뜻은 죄를 묻기는 하되, 개인에게 묻자는 것이오.”

“개인?”

“두 도시를 다스릴 새 주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소? 그 주인이 자신일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는 사람이 있소?”

야심이 많거나, 주제를 모르는 일부 기사가 얼굴을 붉혔다. 그 반응이 여러 가지를 암시했다.

“새 주인이 필요하다면, 가장 유력한 후보는 내 주군이신 로벨 로드릭 백작이오.”

“허나 백작은...”

“물론.”

호른 경이 짧고 굵게 말을 막았다. 그리고 다시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사려가 깊고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주군은 노력 이상의 소득을 탐하지 않으시오.”

“험험! 험!”

“커험!”

노력 이상의 것을 탐한 기사들이 헛기침했다. 그중에는 로벨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주군 이외에 누가 자격이 있는지 따져 봅시다. 맥기 경, 상주인구 1만 명의 대도시를 하사받을 자격이 있소이까?”

“보, 본인은 아니...”

“버질 경? 막스 경? 매튜스 경은 어떻소?”

“본인은 그런 생각한 적 없소.”

“본인도 마찬가지요!”

호른 경은 비로소 활짝 웃었다.

“역시 명예로운 볼탄 반도의 기사들이오. 그러나 두 도시는 볼탄 반도의 좌우 허파라 할 수 있으니 외지인에게도 맡길 수 없소.”

“그러니 페르젠 가문과 헤르만 가문이 다스리게 두자는 뜻이오?”

“물론 지금의 백작이 다스리게 할 수는 없소. 두 가문에서 적절한 인물을 찾아 작위를 계승케 하고, 새로이 충성을 받아내야 하오.”

장황하게 떠들었지만, 결론은 두 가문을 유지하자는 제안이었다. 원탁에 모인 기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새 주인을 알 수 없는데, 자신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탐탁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로벨은 페르젠 백작과 헤르만 백작을 쳐다보았다. 연륜이란 표현이 자연스러운 두 백작은 세상 평온했다. 페르젠 백작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고, 헤르만 백작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크게 아쉬울 것이 없었다.

“죄인의 신분으로 벌을 고를 수 없으나, 기사의 직위를 내놓고 촌부로 살아가라는 것이 경들의 뜻이라면 군말 없이 따르겠소.”

“본인도 그리하겠소.”

생각이 많아 걱정도 많은 기사들은 슬그머니 안심했다. 최악의 경우 두 가문이 연합해서 ‘정통성이고 나발이고 죽기 싫으니 한 번 붙어보자!’ 나올 수도 있었다. 맥기 경이 맥 빠진 몸짓으로 자리에 앉았다.

“로벨 로드릭 백작의 제안으로 의견이 일치된 것 같으니, 그대로 에릭 공작에게 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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