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인맥
123화. 인맥
로벨과 어린 집사는 마을 공용창고를 점검했다. 본디 촌장의 업무지만, 촌장이 몸이 불편하니 영주와 집사가 대신 일 하러 나왔다.
“성 안에만 있기 답답해서 그렇잖아요.”
“겸사겸사.”
망가진 농기구, 못 쓰는 물레, 멧돼지 창, 사냥용 덫, 귀리와 자루 등등이 쌓여 있었다. 영지민의 사유재산이라 로벨이 ‘소유’할 수 없지만, 영주로서 '관리'할 수 있었다. 어린 집사가 자루 빠진 삽을 발로 차고 툴툴거렸다.
“이런 건 빨리빨리 고쳐야지! 게을러서 원!”
로벨은 보어 스피어에 관심을 가졌다. 멧돼지를 잡기 위한 창이라 창날이 두껍고 무게가 제법 나갔다.
로벨이 창을 가지고 노는 사이, 어린 집사는 귀리와 보리자루를 확인하고 꼼꼼히 기록했다.
“이 정도면 내년 봄농사를 망쳐도 굶어 죽진 않겠어요. 근데 뭐하세요?”
“아니, 그냥...”
로벨은 창질하다가 떨어트린 염장고기를 주섬주섬 챙겨서 선반에 다시 걸었다.
“흠흠. 문제없지?”
“철없는 영주님 빼고요?”
“...빼고.”
“그럼 없어요.”
로벨과 어린 집사는 창고 문을 꽁꽁 잠그고 열쇠를 촌장의 사위 지미에게 전해주기 위해 여관으로 향했다.
해가 중천에 떴지만 사람을 보기가 힘들었다. 여름과 가을의 번화함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겨울 여행을 다닐 만큼 간 큰 상인이 없으니까요.”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
“옛날이라 해도 작년이잖아요.”
지미와 루시의 여관도 심심한 마을주민의 술집이 되어 익숙한 얼굴들만 가득했다.
겨울에 심심하기는 어른이나 아이나 마찬가지였다. 건더기가 풍부한 맥주를 꼭 쥐고 발그레해진 얼굴로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에게서 내려온 옛날이야기를 경청하는 꼬마들이 있었다.
“영주님!”
여관주인 지미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벗고 인사했고, 꼬마들은 앉은 채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도 한 잔 마셔도 될까?”
“그럼요! 집사 나리도 드릴까요?”
“전 우유 주세요. 양젖도 괜찮아요.”
로벨과 어린 집사는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영지민들은 슬금슬금 눈치 보다가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영주님이 불편해도 따뜻한 술과 포근한 공기를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린 집사가 양젖을 홀짝이며 말했다.
“술을 많이 마시네요? 주류세를 올리는 것이 어떨까요?”
여관주인 지미를 포함한 주당들이 동시에 움찔했다. 로벨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표정들이 한층 심각해졌다.
로벨은 큼지막한 치즈를 ‘마지못해’ 서비스로 가져온 여관주인 지미에게 지나가듯 물었다.
“아이는 어때?”
“헤헤, 영주님의 배려로 무탈하게 크고 있습니다.”
“그래? 다행이야.”
벽난로의 장작이 타닥- 탁- 소리를 내고, 난로 위의 냄비가 보글보글 소리를 내고, 술기운 오른 농부가 아주아주 작은 소리를 허세를 부리고, 곰처럼 꽁꽁 싸맨 할머니가 속삭이듯 옛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아이들 머리 위에는 용을 타고 싸우는 기사와 마음씨 착한 나무 거인과 요정과 춤추는 꼬마가 떠다녔다. 로벨은 아닌 척하면서도 넋을 잃고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 때문에 어린 집사의 말을 두 번 정도 놓쳤다.
“영주님? 영주님! 제 말 듣고 있어요?”
“으응?”
“아이참! 자꾸 그러면 하루 종일 일만 시킬 거예요!”
“미, 미안해.”
주인과 시종의 위치가 바뀐 듯한데, 이곳에서는 다들 익숙해서 한번 웃고 말았다.
그때, 마을 밖에서 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 로벨은 어린 집사의 경고를 깜박하고 창밖에 집중했다. 검은 말을 타고 검은 망토를 두른 채 눈 쌓인 들판을 가로지르는 모습이 옛이야기 속에서 뛰쳐나온 듯했다. 어린 집사도 신비로운 광경에 감탄했다.
“이 계절에 혼자 여행이라니? 간덩이가 부었나 봐요!”
“...역시.”
어린 집사는 어린 집사였다. 그러나 어린 집사 말대로 한겨울에 여행자, 그것도 말을 탄 여행자가 심상치 않았다.
로벨은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한 뼘씩 뽑아본 후 여관 밖으로 나갔다. 여관주인 지미를 비롯한 영지민들은 추위와 호기심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따라 나왔다.
여행자는 천천히 가까워졌다. 거리감이 없는 새하얀 배경 탓일지도 모른다. 추위에 약한 몇몇 술꾼들은 싫증을 내고 실내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중에 후회했다.
검은 기사가 로벨과 로벨의 영지민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소녀와 처녀 중간쯤에 위치한 아이들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무서운 것을 봤을 때 반응과 비슷하지만, 이어지는 웃음이 공포감을 덜어냈다. 로벨과 조금 다른 형태로, 그러니까 선이 굵고, 눈썹이 짙고, 이목구비가 큼직한 미남이었다. 오랜 여정으로 행색이 지저분하나, 그조차도 고귀한 임무를 수행하는 위대한 기사의 자태처럼 보였다.
“저 사람은 자작나무 숲의...”
“응. 호른 경이야.”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에 왼손을 척! 걸치고 앞으로 나갔다. 검은 기사,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은 주군을 보고도 느릿느릿 전투마에서 내렸다.
“마로드,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귀환했습니다.”
로벨은 호른 경에게 무슨 임무를 줬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행정관과 서기관 역할을 도맡아 수행하는 유능한 어린 집사가 있었다.
“맥기 경을 설득하는 임무요?”
호른 경은 어린 집사를 힐끔 보고 차갑게 대꾸했다.
“그렇다, 어린 종복아.”
어린 집사는 어이가 없어서 빽! 소리쳤다.
“그 일을 맡긴 게 언젠데 이제 보고해요! 맥기 경과 반란군이 바람성으로 철수했다는 소문이 벌써 쫘악- 돌았거든요!”
“그들과 함께 새 시대를 논하느라 조금 늦었다.”
로벨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까지?”
“제게는 보살필 가솔도, 가꿀 땅도 없으니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건 좀 부러운데?”
어린 집사가 매서운 눈으로 주인을 노려보았다. 로벨은 헛기침하고 호른 경에게 말했다.
“예상보다 조금, 음, 조금 많이 늦었지만, 성실히 수행한 공적을 치하하오. 고향으로 돌아가 편히 쉬도록 하시오.”
호른 경은 두 팔을 살짝 벌리고 허리를 숙였다. 켈트 경이나 바이란 경 같은 토종 기사와 사뭇 다른 우아함이었다. 마을 처녀들이 까르륵- 웃었다. 처녀가 아닌 촌장 손녀딸 루시도 얼굴을 붉혔다. 지미의 뿔난 표정을 보아 호른 경은 로드릭 여관에서 좋은 서비스를 받기는 그른 듯했다.
“마로드, 송구하오나 청이 하나 있습니다.”
“응?”
“제 고향집은 겨울을 보내기가 마땅치 않아 따뜻한 봄이 올 때까지 몸을 의탁할 곳이 필요합니다.”
“...으응?”
로벨과 어린 집사는 불길한 낌새를 감지했다. 호른 경은 저 들판의 눈처럼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런 이유로 주군의 성에 잠시 머물러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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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심기가 안 좋았다. 정기적으로 안 좋을 날이 있지만, 오늘은 다른 이유로 안 좋았다.
“벌써 나흘째야.”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폼멜을 만지작거렸다. 적의와 살의의 경계가 아슬아슬했다.
“나흘째 훈련을 못 하고 있어.”
“그야 아침마다 찾아와서 밥 달라고 징징거리니까요”
어린 집사도 양젖을 한 사발씩 축내는 불청객이 달갑지 않았다.
“그냥 쫓아내도 되잖아요. 축객령을 내릴까요?”
“갈 곳이 없는 기사를 말이야?”
“하긴, 봉신들이 안 좋게 보겠군요.”
자작나무 숲의 호른경은 로벨과 어린 집사의 최대 골칫거리가 되었다.
사실 옛날과 달리 먹고 살만해서 끼니 챙겨주고 잠자리 봐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호른 경은 먹고 자는 것 외에도 관심이 많았다. 아주 많았다.
“허풍쟁이 제이콥 패거리를 홀라당 벗겨 먹었어요.”
“벗겨서 뭘 먹어?”
“그게 아니라 돈주머니를 털었다고요. 아니, 기사란 작자가 용병 패거리랑 주사위 게임을 하다니요?”
“재주가 많네.”
“그뿐만이 아니에요. 호른 경의 전투마가 영주님의 전투마를 덮치려고 했어요.”
“...내 전투마 수컷인데?”
“그니까 환장할 노릇이죠. 주인이나 말이나 제정신이 아니에요.”
로벨과 어린 집사만 괴로울 뿐, 펄프 대장 이하 울프 용병단은 잘 생기고 재미있는 불청객을 좋아했다. 심지어 아야와 이야카도 간식을 잘 챙겨주는 객지 기사를 좋아했다.
점심 먹을 시간이 되자 잘생기고 인기 많은 문제의 기사가 집무실로 찾아왔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호른 경이 올 줄 알고 있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어제도 왔고, 그제도 왔고, 엊그제도 왔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혼자 오지 않았다. 아야와 이야카를 줄줄 달고 찾아왔다. 두 늑대는 뭘 받아먹었는지 꼬리를 풍차처럼 돌리며 헥헥- 거렸다. 호른 경이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하하! 주군을 닮아서 똑똑하기 이를 데 없군요.”
늑대를 칭찬하는 건지, 로벨을 칭찬하는 건지 모호했다.
“아야, 이야카, 이리와.”
로벨은 두 마리 배신자를 불렀다. 그러나 빤히 쳐다볼 뿐 선뜻 오지 않았다.
“쓰읍!”
로벨이 눈꼬리를 치켜뜨자 마지못해 털레털레 다가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꼬리를 땅바닥에 질질 끄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 모습이었다.
로벨은 아야와 이야카를 좌우에 두고 목덜미를 긁어주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오?”
“오늘은 긴히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도 지난날과 똑같았다. 로벨은 맥이 빠져서 말했다.
“긴히 여쭤보시오.”
“주군께는 과년한 누이가 한 명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내용이 똑같지 않았다.
로벨의 얼굴에 긴장이 가득 찼다. 그래도 그 정도면 준수했다. 어린 집사의 안색은 파리가 미끄러질 만큼 창백했다.
“그... 렇소?”
“혹시나 레이디를 뵐 수 있을까 하여 여러 사람에게 물어봤으나, 이 성에서 가장 오래 일한 종복조차 얼굴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럴 것이오.”
“어째서입니까?”
‘그 레이디가 네 주군이니까!’ 라고 차마 말할 수 없어서 침묵했다. 로벨을 대신해 어린 집사가 해명했다.
“오, 오, 오래전에 수녀원으로 가셨어요!”
“수녀가 되셨단 말이냐?”
호른 경은 거뭇거뭇 자란 수염을 만지면 중얼거렸다. 로벨은 수염을 부럽게 쳐다보고 어설프게 턱을 쓸어 만졌다.
“귀족 가문에서는 나이가 차면 환속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레이디를 불러오는 것이 어떻습니까?”
‘환속이 아니라 환생을 해야 돼!’
로벨과 어린 집사는 속으로 소리를 질렀지만 겉으로 애써 침착함을 가장했다.
“어째서 그런지 물어도 되겠소?”
호른 경은 로벨의 집무실을 동에서 서로 왕복했다.
“주군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맥’입니다. 영토도, 병사도 이만하면 충분하나, 정치적으로 힘을 실어줄 친구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끈끈한 인맥을 쌓기에 결혼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주군의 관심이 다른 곳에 있다면, 주군의 가까운 친족도 나쁘지 않습니다.”
로벨의 눈이 가늘고 깊어졌다. 지난 나흘간 놀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로벨에 관해 자세히도 조사했다.
“내... 동생 말이오?”
“그렇습니다.”
로벨은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고민하는 척, 고려하는 척, 갈등하는 척하고 정해진 대답을 내놓았다.
“안 되오.”
“어째서 말입니까?”
“자신의 발로 자신의 길을 찾아간 아이요. 남들이 그러한다고 멋대로 강요하고 싶지 않소.”
“허나...”
“두 번 말하지 않겠소. 내 사람을 정치와 모략에 이용하지 마시오.”
호른 경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로벨을 보았다. 짧은 순간 복잡한 생각을 하는 듯 싶더니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주군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로벨은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호른 경은 어제와 달리 군말 없이 집무실을 나갔다. 찰칵- 집무실 문이 닫히자 로벨과 어린 집사가 동시에 축- 늘어졌다.
“휴우... 나 어땠어?”
“영주님치고 아주 좋았어요!”
“그치? 그치?”
“그럼요! 완전히 여동생을 아끼는 오라비 그 자체였다니까요?”
로벨과 어린 집사는 호들갑스럽게 좋아했다. 그리고 점점 골치 아파지는 자작나무 숲의 기사를 쫓아낼 방법을 고민했다.
“내 사람을 정치와 모략에 이용하지 않겠다라, 실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기사가 아닌가!”
그러나 호른 경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