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나이
122화. 나이
로벨은 기사답지 않은, 페르젠 백작답지 않은 요청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성벽 위에서 펄프 대장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풋맨과 스피어맨을 출격 준비하는 듯했다. 로벨은 북풍에 흔들리는 백기 너머로 페르젠 백작의 병사들을 훑어보았다. 하나 같이 지치고 힘겨워 보였다.
“누가 죽인다고 하오?”
“그런 자는 많소. 지금 앞에도 하나 있고.”
“그걸 알면서 본인에게 부탁하는 거요?”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에 왼손을 올렸다. 페르젠 백작은 오랜 정적인 헤르만 백작의 무구를 힐끔 보고 말했다.
“오늘 저녁, 늦어도 내일 아침이면 연락이 올 거요.”
“본인은 수수께끼를 좋아하지 않소.”
로벨이 서늘하게 추궁하자 페르젠 백작은 신음처럼 대답했다.
“반란이 일어났소.”
“지금 진행 중인 반란 말고?”
본의는 아니지만 비꼬는 말이 되었다. 페르젠 백작은 신경 쓰지 않았다.
“본인의 성이, 페르젠 시티가 위험하오.”
로벨도 앞서 나눈 대화를 잊었다. 파도성이 위험할 정도면 봉신 한두 명의 반란이 아닐 것이다.
“...누가?”
“바람성의 맥기 남작을 필두로 대, 대다수 봉신들이오.”
“명분은?”
“에릭 공작을 음해하여 반기를 든... 본인의 불명예 때문이오.”
페르젠 백작의 주름진 얼굴이 불붙은 숯덩이처럼 달아올랐다. 봉신들이 불명예를 이유로 충성맹세를 거둔 것은 군주로서, 기사로서 최악의 사건이었다. 로벨은 시치미 뚝 떼고 물었다.
“이제 와서?”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정통성을 회복할 것이란 소문이 파다하오. 옛 신의 교단에서 재조사를 명령했다고 하니, 아마도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오.”
“소문 한번 빠르군.”
‘그리고 행동은 더욱 빠르고.’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정통성을 되찾아 볼탄 반도의 지배자가 되면, 가장 먼저 반기를 들어 스톤헤드 요새를 공격한 페르젠 백작은 척살대상 1순위였다. 페르젠 백작의 기사들도 그 사실을 알기에 일제히 돌아섰다. 정치와 권력의 냉혹한 민낯이었다.
이제 페르젠 백작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에릭 공작뿐이고, 에릭 공작의 자비를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충신’ 로벨 로드릭 남작뿐이었다.
로벨은 기왕 충신이 된 김에 좀 더 충신 흉내를 내보았다.
“내가 주군을 공격한 자를 비호할 거라 생각하시오?”
“경이 믿어줄지 모르나, 본인은 에릭 공작과 볼탄 반도 주민을 보호하려는 의도였소. 볼프 사트로 후작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누군가 질서를 회복해야 하지 않았겠소?”
“제 자리를 지키며 귀족원을 소집하는 방법도 있었소.”
“...음험한 헤르만 백작과 야심 가득한 루카스 자작을 믿을 수 없었소.”
“변명이 구차하오.”
페르젠 백작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로벨은 적당히 놀리기로 마음먹었다. 페르젠 백작은 죄가 깊으나, 백작의 병사들은 죄가 없으니 가급적 죽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과 울프 용병단이 질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처벌은 피할 수 없을 거요.”
“각오하고 있소.”
로벨은 숨을 조금 들이마신 후 물었다.
“원하는 것이 명예요, 아니면 목숨이오?”
“둘 다 원하나,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 목숨이오.”
로벨은 솔직하고 담백한 성격이라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페르젠 백작은 바이저의 이음새를 만지며 씁쓸하게 덧붙였다.
“본인의 목숨이 아니오. 본인의 식솔과 본인에게 충성한 기사들의 목숨 말이오.”
“가족과 기사...”
“경이 맺어준 내 딸과 사위도 포함되오.”
그 두 사람이 거론되자 더 이상 야박하게 굴지 못했다.
“바람성의 맥기 남작이라 했소?”
“그, 그렇소이다.”
“본인이 설득해보겠소. 그리고 주군의 뜻도 한번 알아보겠소.”
이 정도면 적에게 베풀 수 있는 최상의 호의였다. 페르젠 백작은 깊은 주름을 펴고 열정적으로 말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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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가 페르젠 백작의 사정을 듣고 뚱하게 말했다.
“그래도 땅과 재산이 몰수되는 것은 각오해야 할 텐데요?”
로벨은 전투마를 구유통 앞에 묶고 어린 집사가 가져온 수통을 받았다. 기사와 말이 동시에 목을 축였다. 펄프 대장은 로벨의 가느다란 목을 훔쳐보며 말했다.
“그걸로 교수형을 피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잖소?”
마구간 구석에서 아야와 이야카를 약 올리던 외팔이 더치가 놀랍다는 듯 물었다.
“귀족도 교수형에 처합니까?”
“반란죄면 가능하다. 불명예 중의 불명예니까.”
애꾸눈 볼포스가 로벨 대신 대답했다. 역시 귀족문화와 정서에 밝았다. 애꾸눈은 목소리를 한 단계 낮춰서 속삭였다.
“페르젠 시티가 몰수되면... 그걸 누가 가지겠습니까?”
어린 집사, 펄프 대장, 애꾸눈 볼포스가 빠르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마녀 키르케가 순진무구하게 되물었다.
“누가 가지는데요?”
어린 집사가 음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도 끝까지 충성하고, 권좌를 되찾아준 사람이 가지지 않을까요?”
마녀 키르케는 두 눈을 깜박였다. 펄프 대장이 쉽게 설명했다.
“페르젠 시티가 로드릭 시티가 될지도 모르오.”
“아... 아앗! 그런 거예요?”
“기사 나리가 도시를 가진다고!”
로벨은 남보다 한 박자 늦게 흥분한 마녀와 외팔이를 진정시키고 말했다.
“난 아닐 거야.”
“어어? 어째서요?”
“난 볼탄 반도의 5분의 1을 가졌잖아. 그런 내가 페르젠 시티까지 가지면 아무도 견제할 수 없어.”
로벨은 빈 수통을 치우고 돌아섰다. 로벨의 최측근 5인방이 경악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어린 집사 눈에서는 공포심마저 엿보였다.
“왜, 왜들 그래?”
“영주님께서 그런 ‘생각’을 하시다니...”
“우리 영주님이 아니야!”
“혹시 악마추종자 아니오? 마녀 아가씨, 확인 좀 해보시오.”
“카악! 마녀 아니고 마법사라니까요!”
로벨은 지성을 무시 받았음에도 화내지 않았다. 그저 머쓱해하며 오해를 풀었다.
“내 생각이 아니야. 페르젠 백작의 생각이야.”
“에엥?”
“어차피 가지지 못할 땅이니까, 자신의 가문을 보존시켜주면 관세면제부터 부두이용권한까지 온갖 특혜를 주겠데.”
칼잡이와 요술쟁이는 그게 좋은 건지, 좋다면 얼마나 좋은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시선이 어린 집사를 향했다. 어린 집사는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거... 나쁘지 않은데요?”
소금광산, 식품공장, 그리고 교역선 2척을 운영하는 로벨과 어린 집사에게 이러한 특혜는 엄청난 이익이 될 수 있었다.
“그치만 페르젠 백작이 자리보전할 때 이야기잖아요. 에릭 공작님은 교수형이 좋을까, 참수형 좋을까, 행복한 고민 중일 것 같은데요.”
“그건 그때 생각하고. 우선 반란군 손에 목이 떨어지지 않게 도와주자.”
로벨이 결정하자 모두가 우려했다.
“또 전쟁이에요?”
“이제 겨울이라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고요!”
로벨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저쪽도 싸울 생각은 없을 거야. 에릭 공작에게 용서받으려는 제스처니까. 내가 중재하면 못이기는 척 받아들일 거야.”
그리되면 로벨의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말 한마디로 전쟁을 끝낼 수 있으니 볼탄 반도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로벨을 경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녀 키르케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그것도 페르젠 백작님 생각이죠?”
“이건 내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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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바람성으로 보낼 전령을 고민하다가 그럴듯한 인물을 찾았다. 얼마 전 충성맹세한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이었다. 마녀 키르케가 의아하게 물었다.
“허풍쟁이 아저씨가 아니고요?”
성문 앞에서 마을처녀와 노닥거리던 허풍쟁이 제이콥이 오한을 느꼈다. 어린 집사가 손가락을 좌우로 까닥이며 말했다.
“이번 일은 단순한 소식전달이 아니니까요. 예의와 격식을 갖춰서 설득해야 하니까, 최소한 기사 작위를 가진 사람이어야 해요. 명예와 명성이 높으면 더욱 좋고요.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이 딱 좋아요. 우리 영주님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명예로운 기사 소리 들으니까요.”
로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보다 못하다는 소리에 동조하는 듯해서 조금 이상했다.
로벨은 허풍쟁이 제이콥을 자작나무 숲으로 보냈다. 허풍쟁이는 하마터면 바람성까지 갈 뻔한 사실을 모르고 툴툴거리며 떠났다. 어린 집사가 기지개를 펴고 활기차게 말했다.
“이걸로 일단락되었죠?”
“긴 겨울이 남았지만.”
로벨은 성 밖을 보았다. 지평선을 넘어가는 페르젠 백작군 머리위로 겨울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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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혹독하나 준비된 자에게는 여유로웠다. 벽과 찬장에 염장된 고기와 치즈가 가득하고, 부뚜막에 장작이 가득하며, 푹신한 짚 침대와 두툼한 모직 담요가 준비되었다면, 이제 시간을 때울 즐거운 놀이만 고민하면 되었다.
로드릭 마을은 어느 때보다 여유로웠다. 가을 농사가 잘 되어 집집마다 식량이 가득하고, 행상인과 기사들이 뿌린 재화가 흘러넘쳤다. 배부르고 따뜻하면 여유가 생기는 법이라 어디가나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으이구. 좋단다. 좋아 죽네.”
어린 집사는 심기가 불편해서 투덜거렸다. 웃음소리를 들으니 세금을 좀 더 걷어둬 됐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년에는 인두세를 올려서 재정확보에 주력하는 게 어떨까요? 이참에 남들처럼 정원도 꾸미고, 그림도 갖추고...”
“그런 걸 왜해?”
“그럼 성벽을 높이고, 해자를 파고...”
“그건 괜찮은데?”
로벨은 진지하게 해자를 파면 물을 어디서 끌어올지 고민했다. 아무래도 고지대라 쉽지 않았다.
“물이 안 되면 쇠못이나 나무창을 박아서...”
“으이구! 됐어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어린 집사는 속이 근육으로 꽉 찬 주인에게 질려서 소리 질렀다. 저 나잇대면 예쁜 것에 관심을 보일 법한데, 유년기 환경 탓인지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만 좋아했다. 사실 뾰족한 것을 좋아할 나이인 어린 집사는 반짝이는 것만 좋아하니 피장파장이었다.
로벨은 전투마에서 내려 가죽 망토를 여몄다. 어린 집사가 한 발 먼저 집 앞으로 다가갔다. 로벨은 창문에 시선을 주었다. 눈 덮인 처마 아래에 고드름이 창살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이 살기는 하는데, 자주 나오지 않는 집이었다.
“이봐요! 촌장님! 영주님이 오셨어요! 좀 나와 봐요!”
어린 집사가 문을 두드렸다. 고드름에서 물방울이 세 번 떨어지고서야 겨우 문이 열렸다.
“마로드... 쿨럭... 추운 곳에 계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
로벨은 집주인의 안색을 살폈다. 눈은 초점을 잃어 허공을 헤매고, 입술은 하얗게 질려서 파르르- 떨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정했는데.’
로벨은 촌장의 어깨를 감싸 쥐고 안으로 들여보냈다. 손녀 내외가 잠깐 다녀간 집안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몸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어.”
“이런, 이런 영광스럽고 불미한 경우가...”
“키르케를 보낼 테니까 진찰받아.”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나이 때문입니다. 겨울나기가 힘겨운 노구지요. 그래도 영주님과 영주님의 아버님 덕분에 살 만큼 살았습니다.”
로벨은 촌장의 손을 꼭 쥐었다. 거칠지만 따뜻한 손이었다.
“고기를 조금 가져왔어. 냄비에 끓여서 먹어.”
“이리 배려해주시니 쿨럭! 쿨럭!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로벨은 촌장이 쉴 수 있게 격려 몇 마디만 하고 서둘러 일어났다. 촌장은 지팡이를 챙겨서 배웅 나오려 했으나 보기가 괴로워서 뜯어말렸다.
로벨은 전투마의 고삐를 끌며 마을광장으로 걸어갔다.
“나이는 속일 수 없구나.”
“왜 갑자기 노인 같은 말씀이세요?”
“또 한 해가 지나가잖아.”
양조장 차남 데니의 집이 엿보였다. 로벨이 영주가 될 때 태어난 꼬마가 어느덧 5살이 되어 아장아장 돌아다녔다. 재롱을 부리는지 창문 너머로 큰 웃음이 흘러나왔다.
“우리 생일이 언제였지?”
“생일이라고 딱히 하는 것도 없으면서...”
어린 집사가 눈덩이를 발로 툭 찼다.
이 겨울이 지나면 로벨은 21살, 어린 집사는 14살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