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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21화 (121/605)

121화. 백기

121화. 백기

로벨 일행은 여드레에 걸친 여정을 마치고 털레털레 돌아왔다.

소리 없이 떠났다가 소문 없이 돌아와서 별 다른 환영인사를 받지 못했다. 성문을 지키는 용병들이 한가롭게 아침인사를 건넬 정도였다.

“영주님, 어디 다녀오십니까?”

“식사 하셨습니까, 영주님!”

로벨은 어색하게 ‘하하... 하아...’ 웃었다. 좋게 생각하면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이 일을 잘하고 있는 뜻이고, 평범하게 생각하면 로벨과 외팔이 더치가 평소에 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간과 달리 ‘존재’ 자체에 의미를 두는 생물도 있었다.

“컹! 컹!”

“컹컹! 컹!”

아야와 이야카가 달려와 코를 들이밀며 좋아했다. 로벨은 말 못 하는 네발짐승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래서 개를 키우는구나!”

“아니... 이제 그냥 개라 생각하시는데?”

“사실 개 수준이긴 해.”

“와아! 영주님! 영주님!”

그리고 늑대남매를 빼닮은 어린 집사도 주인의 귀환을 반겼다.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은 꼬리와 꼬리 비슷한 것을 흔드는 세 꼬마를 보며 머리를 저었다.

로벨은 안기다시피 달라붙는 어린 집사를 적당히 달래고 마구간으로 향했다. 주인만큼이나 전투마도 집에 와서 무척 좋아했다.

“별일 없었지?”

로벨은 전투마의 머리끈과 안장끈을 차례로 풀며 물었다. 어린 집사는 재빨리 거들면서 대답했다.

“왜 없어요? 추수제를 치르고, 진상품을 정리하고, 겨울 물자를 정리하고, 늑대 사냥, 곰 사냥, 구울 사냥 등등 하고...”

“그걸 다 했어?”

“얼마나 바빴다고요.”

로벨은 안장을 거치대에 올리고 어린 집사의 어깨를 두드렸다. 로벨 딴에는 진지한 칭찬이었다. 어린 집사는 어깨를 조금 움츠리고 말했다.

“아참, 그리고 페르젠 백작이 조만간 보자고 했어요.”

“뭐?”

로벨은 크게 놀랐지만, 어린 집사는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다.

“영주님하고 싸울 생각은 아닐 테고, 십중팔구 평화협상을 가장한 생존구걸일 테죠.”

“음... 그 작자 성격상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어린 집사는 고삐를 풀어 벽에 걸고 돌아섰다.

“아쉬운 쪽은 저쪽이니 때 되면 찾아오겠죠. 그것보다 가신 일은 어떻게 됐나요? 악마추종자는 찾았나요?”

“응. 생각보다 잘 해결됐어.”

로벨은 모몬트 성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어린 집사는 고스트, 오우거, 저스티스 기사단, 악마추종자로 이어지는 장엄한 모험담에 입을 떡! 벌렸다.

“영주님이 더 바빴잖아요!”

“그런가?”

“세상에! 오우거라니! 아니, 그것보다 누명을 벗길 수 있다고요?”

그때, 지루한 목소리가 들뜬 목소리를 잘랐다.

“저기, 기사 나리, 저희들은 어쩝니까요?”

로벨과 어린 집사는 마구간 밖을 내다보았다. 마녀 키르케는 아야와 이야카와 한 덩이가 되어서 뒹굴고 있고,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은 수레 위에 걸터앉아 하품하고 있었다. 어린 집사가 허리에 손을 얹고 명령했다.

“농마는 아랫마을로, 수레는 건초창고로 가져가세요.”

“그거 말고, 그러니까, 그것이 있잖습니까요?”

“그거 말고?”

로벨은 어린 집사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고생했으니까, 포상금을 줘도 될 거 같아.”

“포상금? 포오상그음?”

오우거 앞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싸운 기사와 용병들이 오우거 한쪽 다리도 안 되는 어린 집사 앞에서 쩔쩔매었다.

“어어, 거시기, 꼭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사 나리가 약속한 것이 있으니까, 기사 나리 체면을 위해서 주십사...”

“나? 나 그런 적 없는데?”

“으아닛! 치사하게 발뺌이라니!”

어린 집사는 주인과 고용인을 몹시 못마땅하게 보다가 마지못해 타협했다.

“10페닝 씩 줄게요.”

“고작?”

“싫으면 말구요.”

“아니! 싫지 않소!”

어린 집사는 벨트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5페닝 짜리 은화 2개와 1페닝 짜리 은화 4개를 꺼내 나눠주었다. 외팔이와 허풍쟁이는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왜 7페닝이오?”

“우리 영지 관세가 30%잖아요. 몰랐어요?”

외팔이와 허풍쟁이가 이구동성으로 항의했지만 어린 집사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로벨의 참스승다운 단호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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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이 추수제에 쓰고 남은 고기와 싸구려 맥주를 앞에 두고 기사와 집사를 물고 뜯는 시각, 로벨은 여드레 치 밀린 업무에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양모 시세 변동에 따른 판매세 부과... 세금을 올린다고?”

“그럼요! 가격이 오르면 세금도 올라야죠! 저들이 누구 덕분에 먹고 사는데요?”

“...잘 모르겠어.”

“무슨 생각인지 알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요즘 돈을 많이 벌어서 굶는 사람도 없어요.”

로벨은 한숨을 쉬고 펜촉에 잉크를 묻혔다. 어린 집사가 까칠하긴 해도 모질지는 않으니 배를 곪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버팅거 시티의 공장 허가증이랑 올해 예산안에요. 시설관리비 95페닝, 인건비 232페닝, 재료비 580페닝, 운송비 102페닝 지불했고요. 작년 시세로 거래하면 3,800페닝 정도 이문이 남을 거예요. 가장 비싼 소금을 자체생산해서 원가를 상당히 아낄 수 있었어요.”

로벨은 세 자리 숫자가 연거푸 나오자 패닉에 빠졌다. 허공에 떠도는 숫자들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꽤, 꽤 많네?”

“도시 관세랑 길드 상납금을 지불해야 하니까, 실제 수익은 조금 떨어질 거예요. 그래도 영지 운영자금을 충당하기는 충분하죠.”

어린 집사는 다음 서류를 내밀었다. 식품공장 지출서보다 한층 더 복잡했다.

“청새치 호 수리비 청구서에요. 상부갑판이랑 하부갑판의 재료가 왜 다른지도 모르겠고, 타르가 왜 필요한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거의 2,200페닝이에요. 흉터 선장은 꽤 아낀 거라는데, 이거 뭐 믿을 수가 있어야죠.”

로벨은 선박용어를 대충 훑어보고 사인했다.

“그래도 갤리선 한 척 값치고는 싸잖아.”

로벨은 목돈이 쓰고도 흐뭇했다. 이제 푸른고래 호와 청새치 호 두 척을 가지게 되었다.

“아, 맞다. 맥켈런 남작은 좀 어때?”

“사흘 전에 떠났어요.”

“...죽었다고?”

“자기 집으로 갔다고요. 몸값을 달라니까, 갤리선을 가져갔으면 됐지 뭘 또 바라냐며 우기는데, 정말 어이가 없어서...”

“음... 틀린 말은 아니잖아?”

로벨은 이런저런 서류를 확인했다. 새로 가입한 깃발 보험 대상 명단, 아만다 마을 피해복구 현황 보고서, 뉴 로드릭 마을의 구울 소탕 보고서 등등이었다. 로벨은 진저리치며 후다닥 사인했다. 그리고 페르젠 백작의 편지를 받았다. 앞서 본 서류에 비하면 심히 간단명료했다.

“조만가 찾아뵙겠소. - 하버트 페르젠?”

“세상 사람이 모두 기사들 같으면 일하기 참 쉬울 텐데요.”

“...그거 칭찬 아니지?”

로벨은 점심을 먹고 다시 집무실에 앉아 일거리를 처리했다.

성이 6개, 마을이 12개, 이중 직접 다스리는 마을이 2개, 소금광산 1개, 식품공장 1개, 갤리선 2척, 용병 140명을 거느린 것치고 상당히 짧게 끝났다. 어린 집사 등이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일한 덕분이다.

로벨은 서류뭉치를 치우고 눈덩이를 비볐다.

“이제 끝났지?”

“급한 것은요.”

“안 급한 것도 있어?”

로벨은 눈알을 굴리며 도망칠 곳을 찾았다. 방문은 어린 집사가 막고 있고, 창문은 너무 높아 가망이 없었다. 로벨이 괴로워하자 어린집사가 크게 인심 썼다.

“그건 천천히 하죠. 여독이 남아서 피곤할 텐데 오늘은 그만 쉬세요.”

“옛 신이시여!”

볼탄 반도를 횡단하고 온 사람한테 일거리를 들이민 것이 너무하긴 했다.

로벨은 집무실에서 도망 나와 성 밖을 기웃거렸다. 아야와 이야카가 쥐를 잡는지 헥헥거리며 뛰어가고, 이어서 마녀 키르케가 빗자루를 치켜들고 따라갔다.

‘마녀와 빗자루라?’

로벨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앞마당으로 나갔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울프 용병단과 로드릭 마을 주민을 모아놓고 모험담을 떠들고 있었다. 얼핏 엿들으니 고스트 100마리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오우거 10마리와 싸우는 중이었다. 로벨은 실소하고 성벽을 따라 뒷마당으로 이동했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깊은 우물과 겨우내 불사를 장작더미와 사격훈련용 허수아비가 한눈에 들어왔다.

“여긴 변함이 없네.”

성벽 위에서 졸던 용병이 로벨을 발견하고 화급히 투구를 고쳐 썼다.

“...아닌가?”

로벨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식구가 늘어나 혼자 있을 곳이 많지 않았다.

로벨은 우물가에 앉아서 300년의 역사를 가진 성과 그 수십 배의 세월을 간직한 하늘을 멍하니 보았다. 그래도 집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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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로드릭 마을주민이 진상한 양젖과 돼지치기 마을에서 사 온 햄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배를 꺼트릴 겸 컴포지트 아머를 분리해서 반들반들하게 닦는데, 펄프 대장이 바쁜 몸짓으로 찾아왔다.

“마로드! 잠시 밖으로 나오셔야겠습니다!”

“왜?”

“페르젠 백작군이 성 밖에 도착했습니다!”

로벨은 철판 단위로 분해한 컴포지트 아머를 보고 난감해 했다.

“하필 지금?”

“하필 지금입니다!”

로벨은 소드 벨트만 챙겨서 아성 밖으로 나갔다. 울프 용병단이 크로스보우를 어깨에 걸고 제자리를 찾아 바쁘게 뛰어다녔다.

로벨은 성벽을 올라가 언덕 아래를 보았다. 그리고 왜 보고가 늦었는지 알았다. 페르젠 백작 깃발 아래 집결한 병력이 3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싸우러 온 것은 아니네.”

로벨은 칼자루에 한 손을 올리고 반대 손으로 턱을 만졌다. 외팔이 더치의 찰진 욕설과 애꾸눈 볼포스의 침착한 지휘 아래 울프 용병단이 자리를 잡고 크로스보우를 장전했다.

애꾸눈 볼포스가 안대를 만지작거리며 보고했다.

“영주님, 전투준비가 끝났습니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기를 명령했다. 성벽을 따라 빠르게 전달되었다.

“대기!”

“대기하라!”

성벽 여장 위로 크로스보우 40대가 정렬했다. 성 밖 사람에게 상당히 부담되는 위용이었다. 페르젠 백작군에 사이에서 소란을 생겼다.

“헥. 헥. 영주님!”

로벨은 뒤늦게 성벽 올라온 어린 집사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백기를 준비해.”

“백기요?”

“저쪽에서 백기를 내걸 거야.”

로벨의 예언대로 페르젠 백작이 백기를 들고 언덕을 올라왔다. 로벨은 전투마에 올라 하얀 수건을 묶은 라이트 랜스를 받았다. 어린 집사가 불안한 눈초리로 말했다.

“그러고 나가시려고요?”

로벨은 우플랑드 한 장만 달랑 걸치고 있었다. 크고 작은 칼을 세 자루나 찼지만, 전장에 나서기에는 많이 미흡했다.

“페르젠 백작은 체면을 중시하는 기사야. 백기를 가지고 공격하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몰라요. 겁쟁이! 코골이! 영주님을 보필하세요!”

겁쟁이 데비와 코골이 바디가 화급히 달려왔다. 그러나 로벨은 호위를 기다리지 않고 성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린 집사의 앳된 비명이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화살이 닿기 애매한 언덕 중간에서 백기와 백기, 기사와 기사가 마주했다.

로벨은 전투마를 세우고 라이트 랜스를 땅에 꽂았다. 후계자 전쟁에서 함께한 전우가 지금은 적이 되어서 얼굴을 마주하기가 어색했다.

“그간 평안하셨소?”

“솔직히 말하면 그렇지 못하오.”

페르젠 백작은 클로즈 헬멧을 벗어 옆구리에 끼었다. 스톤헤드 요새와 검은 산에서 고생이 많았는지 풀싹 늙었다. 로벨은 안쓰러움과 고소함을 담아 물었다.

“본인에게 원하는 것이 있소?”

페르젠 백작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긴장감이 어색함으로 바뀔 무렵,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본인을 살려주시오.”

로벨은 어린 집사의 말한 그대로라 도리어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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