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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20화 (120/605)

120화. 흉내

120화. 흉내

로벨의 행동은 현명하지만 무모했다. 마법사가 마법을 쓸 틈을 주지 않은 것은 훌륭했다. 그러나 장소가 안 좋았다.

“이런! 미쳤소?”

지프 모몬트 경이 롱소드를 뽑아 막았다. 로벨은 반사적으로 칼날을 쳐내고 흐룬팅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아무런 명분 없이 기사를 벨 수 없었다. 지프 모몬트 경은 짐승처럼 소리치며 로벨의 흐룬팅을 후려치고 말머리를 성으로 돌렸다.

“아처! 아처!”

성벽 위 병사들이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어림잡아도 20발이 넘었다.

“저놈의 기사 나리가!”

“내 사고 칠 줄 알았다!”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은 수레 뒤로 넘어가 엄폐했다. 그러나 빠트린 것이 하나 있었다. 두 용병은 벌떡 일어나 상황판단이 느린 마녀 키르케를 끌어당겨 수레 아래 숨겼다.

“거 눈치껏 따라하쇼!”

“아얏! 아파요!”

한편, 저스티스 기사단은 평화를 사랑하는(?) 성직자답게 대화를 시도했다.

“옛 신의 사도를 향해 활을 겨누는 것인가!”

“네 이놈들! 지옥불에 영겁토록 튀겨지고 싶은가!”

옛 신을 들먹이자 효과가 있었다. 뿌리 깊은 신앙을 가진 병사들은 당황해서 시위를 풀었다. 로벨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투마 엉덩이를 때렸다. 성문을 통과하는 지프 모몬트 경을 순식간에 따라잡았다.

“로벨 로드릭!”

지프 모몬트 경은 허리를 비틀어 롱소드를 휘둘렀다. 그러나 상대는 마상시합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최강의 그랜드 챔피언이었다. 로벨은 흐룬팅을 비스듬히 올려 롱소드를 머리 위로 넘기고 텅 빈 옆구리에 워 해머를 휘둘렀다. 퍽-!

아밍 더블릿을 입어 갈비뼈가 부러지는 등의 ‘평범한’ 부상은 피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아주 멀쩡하지도 않았다.

“커헉!”

지프 모몬트 경은 얼굴로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멀어졌다. 로벨은 아무 방해 없이 악마추종자 앞에 이르렀다.

“워워! 워!”

고삐를 당겨 전투마를 급정지시켰다. 전투마는 이제 좀 달릴만한데 왜 그러냐는 듯 앞발을 번쩍 들어 투레질했다. 로벨은 등자를 뒤로 기울여 요령 좋게 균형을 잡고 흐룬팅을 아래로 내밀었다.

“악마추종자!”

“호칭인가요, 확인인가요?”

최강의 기사가 최고의 칼을 들이밀었는데 반응이 미지근했다.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 갔다. ‘진짜 악마추종자일까?’, ‘죽일까?’, ‘협박? 납치? 고문?’, ‘악마추종자가 아니면 큰일이잖아!’ 로벨이 내적갈등에 시달리는 사이 악마추종자가 먼저 움직였다. 흐룬팅의 칼날을 잡고 주문을 외웠다.

“내 몸에 흐르는 피는 들끓는 용암. 타올라라.”

로벨은 깜짝 놀라 흐룬팅을 당겼다. 악마추종자의 손이 찢어지며 핏물이 뿌려졌다. 이어서 피가 떨어진 자리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마법이다!”

로벨이 놀란 만큼 악마추종자도 놀랐다.

“그 칼은...?”

로벨은 불길을 피해 말머리를 돌리며 흐룬팅을 살폈다. 칼날에 피가 흐르는데 다행히 불로 변하지 않았다. 악마추종자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보통 칼이 아니군요.”

“이건 보통 망치야!”

로벨은 워 해머를 집어던졌다. 숙련된 전사도 피하지 못할 거리였다. 악마추종자 역시 피할 엄두를 내지 못해 오른손으로 막았다. 빠각! 뼈 부러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울렸다.

“실비아!”

지프 모몬트 경이 경악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악마추종자는 첫째 오라비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 나이 먹고도 독신인 이유가 있군요? 레이디를 대하는 태도가 엉망이에요.”

“너... 누구야?”

곱게 자란 레이디라면, 아니,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팔이 부러졌는데 저리 태연할 수 없다.

“이름을 묻는 건가요, 고향을 묻는 건가요, 아니면 직업을 묻는 건가요?”

로벨은 쓸데없는 질문임을 인정했다. 이름은 실비아, 성은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몰라 알 수 없고, 직업은 당연히 악마추종자였다.

로벨은 전투마 고삐를 살짝 당겼다. 불길을 뛰어넘어 목을 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 성에는 로벨과 악마추종자 외에도 사람이 많았다.

“그만 두시오!”

지프 모몬트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전투마 앞을 막았다. 이어서 성(Keep) 안에서 롱 스피어와 파이크를 소지한 10여 명의 병사들이 뛰쳐나와 전투마를 에워쌌다. 로벨은 분위기가 안 좋아 익숙한 쇠 대신 낯선 혀를 사용했다.

“저 여자는 사악한 마법사요! 까마귀 마을을 불태운 범인이요!”

“나, 나는 모르오. 그러나 내 동생이...”

“미련한 자!”

로벨은 화를 내고 저스티스 기사단을 보았다. 로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옛 신의 이름과 이단심문관의 권한으로 명한다! 저 마녀를 체포하라!”

더글라스 경이 지목하자 저스티스 기사단 3인이 말에서 내려 무기를 빼 들었다. 상대해야 할 기사가 총 다섯이 되자 용감한 모몬트 성의 병사들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악마추종자는 놀라지도, 겁먹지도 않았다.

“로벨 로드릭 남작, 강인하고 용감한 기사, 자신이 대단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나요?”

“응?”

“이 모든 것이 그분의 뜻입니다.”

악마추종자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주문을 외웠다.

“또 마법이야! 막아!”

로벨은 대거를 뽑아 어깨 뒤로 당겼다. 그러나 지프 모몬트 경이 단호한 얼굴로 막아서서 던질 수 없었다. 더글라스 경이 기합을 지르며 달려왔으나 창벽에 가로막혔다. 메이스를 휘둘렀지만 주문보다 빠르지 못했다.

“진실과 거짓, 질서와 혼란, 빛과 그림자는 홀로 생기지 않는 법.”

악마추종자의 몸이 투명해졌다. 햇살에 닿은 서리처럼 스르륵- 사라지고 있었다. 로벨은 대거의 방향을 바꿔서 성문을 가리켰다.

“막아!”

지프 모몬트 경과 악마추종자는 알지 못했지만, 이곳에는 마법사가 한 명 더 있었다. 마녀 키르케가 수레 위로 올라가 주문을 외웠다. 노래가닥처럼 매끄럽고, 메아리처럼 울림이 가득한 마법이었다.

“사랑과 믿음! 정의와 신념! 뿌리 깊은 나무는 외로워도 흔들리지 않음이라!”

챙-!

외팔이 더치는 무의식적으로 하늘을 보았다. 어디서 유리창이 깨진 듯했다. 그러나 모몬트 성에는 유리 비슷한 것도 없었다.

“이이이잇...!”

악마추종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로벨이 칼을 들이밀고 팔을 부러트려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 마법 한 방에 망가졌다.

“너! 넌 드루이드!”

“에헴! 사랑과 우정의 드루이드! 깜짝 등장!”

“...무슨 깜짝 등장이오. 처음부터 같이 있었잖소.”

마녀 키르케는 외팔이 더치에게 조용하라는 제스처를 취한 후 떡갈나무 지팡이를 붕붕 휘둘렀다.

“저 사람은 아가씨가 아니에요! 속지 마세요!”

“실비아가 아니라고?”

“우오오오오오!”

악마추종자가 고함을 질렀다. 가냘픈 목에서 나왔다고 믿어지지 않는 천둥 같은 소리였다. 로벨과 지프 모몬트 경의 전투마가 깜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

“타앗!”

로벨은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전투마 안장에 두 발을 올리고 힘껏 뛰어올랐다. 지프 모몬트 경의 머리와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불길을 단번에 뛰어넘었다. 외팔이 더치가 익숙하게 소리쳤다.

“또 날았어!”

이번에는 비행거리가 짧았다. 로벨은 몸을 둥글게 말아 땅바닥을 한 바퀴 구른 후 흐룬팅을 뻗었다. 처음과 달리 망설이지 않았다. 칼끝이 악마추종자 복부를 비스듬히 뚫고 등 뒤로 솟아났다. 로벨의 기습에 모두가 놀랐다.

“기사 나리!”

“아앗! 실비아앗!”

로벨은 허물어지는 악마추종자의 몸을 어깨로 지탱하고 흐룬팅을 뽑았다. 핏물이 꿀렁꿀렁 나오다가 천천히 멎었다. 동시에 악마추종자 모습이 바뀌었다. 고운 머리카락이 후드득- 떨어지고, 윤기 넘치는 피부가 쪼그라지고, 가느다란 손발이 굵어졌다. 로벨에게 달려들던 지프 모몬트 경이 깜짝 놀라 롱소드를 치웠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젊고 아름다운 레이디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정수리가 벗겨진 추레한 노인이 생겼다. 로벨도 만만치 않게 놀랐지만 굳건한 자존심으로 티 내지 않았다.

“...역시 악마추종자였군.”

“정말, 정말 내 동생이 아니오?”

“정말이오. 본인이 일전에 본 것과 같소.”

로벨은 악마추종자 시체를 내려놓았다. 지프 모몬트 경의 얼굴이 매우 안 좋았다.

“그럼 내 동생은 어디 있는 것이오!”

“그건 나도...”

지프 모몬트 경은 몸을 휙! 돌려서 엉거주춤 서 있는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찾아라! 실비아를 찾아! 당장!”

“예, 예스, 마로드!”

지프 모몬트 경은 성벽 위의 병사들도 불러내려 여동생을 찾도록 명령했다. 하인, 하녀, 가능하면 가축들까지 동원할 기세였다. 자연히 로벨 일행은 뒷전으로 밀렸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악마추종자의 종아리를 툭툭 차며 말했다.

“그런데 기사 나리, 이리 죽이면 어찌합니까요?”

“응?”

“에릭 공작님의 누명을 벗겨야지 않습니까요?”

“...응?”

로벨은 두 눈을 깜박이다가 아차! 해서 악마추종자를 흔들었다.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날 리 만무했다. 더글라스 경이 피 묻은 메이스를 쓱쓱 닦으며 다가왔다.

“이거 생각지도 못한 결말이오. 하긴, 정상적으로 체포했어도 참형이나 화형을 처했을 테니 마음 쓰지 마시오.”

“아니, 그게 아니라, 본인의 목적은...”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일이라면 본인이 돕겠소. 이 땅에 사악한 마법사가 숨어든 것을 확인했으니 에릭 공작의 정통성 또한 재조사해야 마땅하오.”

“...하면?”

“교황 성하와 국왕 폐하의 결단이 있어야겠지만, 증거와 증인이 분명하니 누명을 벗을 수 있을 것이오.”

로벨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더글라스 경은 넋이 나간 지프 모몬트 경과 바쁘게 뛰어다니는 모몬트 가문 병사들을 한 번씩 보고 다시 로벨을 보았다. 이 자리에서 축하받을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잘된 일이지 않소?”

“무엇이 말이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권력을 되찾으면 경은 볼탄 반도의 최고 실세가 되지 않겠소.”

로벨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고, 외팔이 더치와 마녀 키르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허풍쟁이 제이콥만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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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프 모몬트 경은 영지민을 총동원해서 수색작업을 벌였지만 끝내 실비아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저스티스 기사단은 악마추종자와 고블린을 가지고 먼저 떠났다. 교황과 기사단에 결과를 보고하고 후속조치를 실행하려면 몸이 두 개라도 부족했다. 따라서 어느 쪽도 로벨 일행에게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마녀 키르케가 씁쓸하게 말했다.

“아마 죽었을 거예요.”

누구를 지칭하는지 분명했다. 로벨은 아름다운 레이디 실비아-비록 가짜였지만-의 모습을 떠올렸다.

“설마?”

“겉모습을 훔치는 것은 쉽지만, 기억을 훔치는 것은 쉽지 않아요. 도플갱어가 그러하듯 당사자의 신체를 사용해야 해요.”

도플갱어는 기억을 훔치기 위해 뇌를 파먹는다. 로벨은 눈살을 찌푸리고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외팔이 더치가 허전한 왼손을 주무르며 투덜거렸다.

“그러고 보니까 기분 나쁘네? 다 늙은 노인네가 젊은 아가씨 흉내 낸 거 아니오?”

마녀 키르케가 입술을 삐쭉였다.

“그게 왜요? 젊은 아가씨가 늙은 남자를 흉내 내면 기분 안 나빠요?”

로벨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수레가 아니라 전투마를 타고 있어 눈치 챈 사람이 없었다. 외팔이 더치가 턱을 긁적이고 말했다.

“그건 뭐, 그것도 나쁜가?”

“멍청아! 남을 흉내 내는 게 좋을 리 없잖아!”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이 의견을 일치시키고 끄덕였다. 로벨은 괜스레 초조해서 반박했다.

“남을 흉내 내는 게 꼭 나쁜 의도는 아니야. 그래, 결과가 좋을 수도 있잖아?”

마녀 키르케가 지팡이를 내려놓고 중얼거렸다.

“그치만... 그런 일이 결과가 좋을 리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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