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19화 (119/605)

119화. 모몬트 성

119화. 모몬트 성

고블린의 팔은 굵기에 비해 짧은 편이다. 그래서 인간의 체형에 맞춰진 인간의 도구를 잘 다루지 못했다.

로벨은 엉성하게 날아드는 곡괭이를 워 해머 머리에 걸어 빗겨내고 흐룬팅을 수직으로 휘둘렀다.

“꾸이이익!”

“흠!”

로벨은 고블린의 낮고 평평한 코까지 파고든 흐룬팅을 단번에 뽑았다. 초록색 핏물과 하얀색 뇌 조각이 비산했다.

“기사 나리! 어이쿠! 살려줘요!”

외팔이 더치가 손도끼를 휘두르며 도움을 청했다. 왼손이나 진배없는 바클러가 박살 난 후 실력이 많이 떨어졌다.

“고작 두 마리잖아! 응?”

가만히 생각하니까 어폐가 있었다. 1대 2 상황이 ‘고작’은 아니었다. 로벨은 위 해머를 어깨 뒤로 당겨 힘껏 집어 던졌다. 쇠뭉치가 두 바퀴 반을 회전해 푸줏간 칼을 휘젓는 고블린 뒤통수를 때렸다. 퍽-! 소리와 함께 해머 머리가 손가락 두 마디쯤 파고들었다.

“이런!”

로벨은 고블린이 너무 잘 죽어서 당황했다. 다급히 남은 고블린을 세어보려는 찰나, 외팔이 더치가 손도끼를 휘둘러 고블린 멱을 땄다.

“우하하핫! 뭣도 아닌 놈이!”

“아... 앗!”

로벨은 흐룬팅을 오른손으로 옮기고 한숨 쉬었다. 고블린 15마리 중 8마리를 참살하자 6마리가 도망갔다. 결국 생포한 고블린이 한 마리도 없...

“한 마리 비잖아?”

“이 사람들이 진짜...!”

로벨이 손가락을 꼽을 때, 허풍쟁이 제이콥이 씩씩거리며 폐가 뒤에서 나왔다. 허풍쟁이 뒤에는 몇 가닥 안 되는 머리채를 잡혀서 아등바등하는 고블린이 있었다.

“제이콥!”

로벨은 활짝 웃으며 허풍쟁이 이름을 불렀다. 울프 용병단 창설 이후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역시 데려오길 잘했다니까. 다음에 또 데려가야지.’

만약 허풍쟁이가 로벨의 생각을 알았다면 당장 고블린을 풀어줬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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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고블린을 유심히 관찰했다. 숨이 붙어있는 고블린을 지근거리에서 구경하기는 처음이었다. 희번덕거리는 콩알만한 눈과 콧대가 안 보이는 낮은 코와 톱날처럼 삐뚤삐뚤한 이빨이 신기했다.

“생고기만 먹어서 그런가? 냄새가 지독한데?”

“내가 볼 때 안 씻어서 그런 거 같아.”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도 신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고블린은 송곳니를 드러내고 쉬익- 쉬익- 소리 냈지만 인간들은 무서워하기는커녕 재미있어했다.

“오! 이빨 좀 봐! 아주 큼직한데?”

“사람을 잡아먹으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

“아야랑 이야카가 더 커.”

고블린은 심한 모멸감을 받았다. 송곳니가 늑대남매보다 못해서는 아니었다. 먹이로 여겨온 인간에게 먹잇감 취급당하기 때문이었다. 고블린은 멧돼지처럼 팔다리가 한 덩이로 포박되어서 데굴데굴 굴려졌다.

“인간! 죽어라! 인간! 죽여라!”

“죽으라는 건지, 죽여 달라는 건지 영 헷갈리는데?”

“둘 다 가망이 없지만...”

인간들의 잡담은 새로운 인간의 등장으로 끝났다. 마녀 키르케가 고집 센 농마의 고삐를 질질 끌며 다가왔다.

“아이참! 싸움이 끝났으면 도와주세요!”

로벨은 눈웃음으로 사과하고 고삐를 받았다. 농마는 고블린 냄새에 질색해서 머리를 휘저었다.

“워. 워. 진정해. 괜찮아.”

로벨은 타고난 기사답게 능숙히 말을 다뤘다. 농마는 로벨의 따뜻한 손길에 금방 진정했다. 그러자 전투마가 콧김을 뿜으며 앞발을 굴렸다. 주인을 뺏겨서 질투했다. 로벨은 두 마리 말을 번갈아 달래며 마녀 키르케에게 물었다.

“심문할 수 있겠어?”

“고문이요?”

“고문이 아니라 심문... 아마도 고문도 해야겠지만.”

마녀 키르케는 질색하면서도 관심을 보였다.

“정확히 뭐를 알아내야 하나요?”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패거리가 더 있는지...”

“너무 많잖아요!”

“그런가? 그럼...”

로벨은 전투마와 농마의 뺨을 토닥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누구의 명령을 받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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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이니,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도 근사한 마법을 기대했다. 마녀가 지팡이를 흔들며 주문을 외우면, 고블린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진실을 토해내는, 옛 이야기에 흔히 나오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러나 현실은 역시 현실이었다.

딱!

“쿠히이잇! 그만! 그만 때려라!”

“빨리 말하라고욧!”

지팡이와 비명이 등장하긴 하는데, 기대와 사뭇 달랐다.

마녀 키르케는 떡갈나무 지팡이로 고블린 머리를 통! 통! 소리 나게 두드렸다. 고블린은 맞은데 또 맞자 몸부림쳤다. 혹 난 곳을 혹 날 정도로 때리면 정말 아프긴 하다.

“인간! 잔인한 인간!”

“저걸 잔인하다고 해야 할지...”

저런 심문이면 로벨도 잘 할 자신이 있었다.

기대한 것과 다르지만 소득이 있었다. 고블린은 ‘위대한 왕’의 부름을 받아 소환되었으며, 왕의 명령을 받아 인간들을 공격했노라 자백했다.

“위대한 왕?”

“기사님을 거느린 진짜 왕은 아니에요. 인지의 세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러니까 마법사의 왕이에요.”

“마법사한테도 왕이 있어?”

“그러니까 지금 생각하는 그런 왕이 아니라니까요. 인지의 세계에서 인지의 존재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란 뜻이에요. 으으음! 그냥 별명이라 생각하세요!”

“난 또 뭐라고, 장작패기의 왕, 주정뱅이의 왕, 뭐 그런 거잖아?”

“그런 장난스러운 게 아니... 끄아앙! 못해먹겠다!”

전문가와 문외한의 대화는 항상 전문가의 고통으로 끝나는 법이다. 로벨은 마도의 세계를 탐구하는 대신 핵심만 짚었다.

“그 ‘위대한 왕’의 이름이 뭐야?”

마녀 키르케가 지팡이를 세우고 ‘쓰읍!’ 소리를 내자 고블린이 허겁지겁 말했다.

“이름! 모른다! 뀌익! 그냥! 왕이다! 왕이 부른다! 그럼 따른다!”

“이름을 몰라? 그럼 어디 사는지는 알아?”

로벨이 묻고 마녀가 지팡이가 휘둘렀다. 고블린은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아, 안다! 나 안다! 꾸이잇! 때리지 마!”

로벨은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길 안내를 부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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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수레에 고블린을 태우고 저스티스 기사단과 합류했다. 옛 신의 신실한 칼들은 로벨이 정말 고블린을 잡아오자 입을 모아 감탄했다.

“우리가 사흘 걸려도 못한 일을 하루 만에 완수하다니! 실력이 참 대단하시오!”

“고블린과 인연이 질긴 탓이오.”

로벨은 흐룬팅 칼집으로 고블린을 툭 쳤다. 고블린은 본능적으로 이빨을 드러냈다가 외팔이 더치에게 호되게 얻어맞았다.

“이 고블린이 악마추종자에게 안내해줄 것이오. 현장에서 대면하면 발뺌을 못 할 테니 본인을 증인 삼아 이단심문을 진행하시오. 사트로 후작이 개입할 여지를 줘서 안 되오.”

기사에게 충성의 의무가 있듯이, 군주에게는 보호의 의무가 있다. 볼프 사트로 후작은 악마추종자 편이 아니지만, 봉신들의 눈을 생각하면 이단심문을 막아야만 한다. 따라서 볼프 사트로 후작이 개입할 여지를 주면 안 된다. 유서 깊은 귀족이자 명성 높은 기사인 로벨이 증인이라면 가능했다.

“거기까지 생각하신 거요?”

로벨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더글라스 경은 가난한 시골 영주에서 6개 성과 12개 마을을 거느린 대영주로 성장한 로벨의 능력을 엿보았다.

‘강하고, 과감하고, 영리하며, 날카롭다.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무서울 정도다.’

로벨 일행 4인과 저스티스 기사단 4인은 호기심과 경계심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며 모몬트 성으로 향했다.

포비아 왕국과 네일 공국 국경에 위치한 모몬트 성은 성(Castle)보다 요새에 가까웠다. 깊이 6피트, 폭 12피트로 파인 해자 위로 36피트 성벽이 우뚝 서 있고, 이중으로 설치된 성문 바로 뒤에 총안이 빼곡한 아성이 자리했다.

“과연, 국경은 다르구나.”

똑같은 볼탄 반도의 성이라도 동부와는 사뭇 달랐다. 성과 성벽에서 쏟아붓는 화살비를 뚫고, 물과 오물로 채워진 해자를 건너서, 수직으로 높이 솟은 성벽을 오르려면 세 자릿수 인명피해는 각오해야 할 것이다.

“기사 나리, 누가 나옵니다.”

로벨 일행을 알아본 건지, 아니면 저스티스 기사단을 맞이하기 위해서인지 성 안에서 기사가 나왔다.

“이거 뜻밖의 손님이군.”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 자로 재고 자른 듯 반듯한 머리카락, 사슬을 덧댄 아밍 더블링과 허리춤에 늘어트린 십자모양 롱소드가 신분을 증명했다.

“지프 모몬트 경이오?”

지프 모몬트 경은 도개교 위에 말을 세우고 로벨 일행을 쭉 훑어보았다.

“그러는 경들은 누구시오. 이쪽은 명성 높은 저스티스 기사단 같소만...”

로벨은 허풍쟁이 제이콥에게 눈짓했다. 로벨을 오랫동안 따라다닌 허풍쟁이는 눈치껏 소개했다.

“로드릭 성의 주인이며 로드릭 가문의 주인이신 로벨 로드릭 남작님이십니다.”

“그랜드 챔피언?”

지프 모몬트 경의 눈빛이 변했다. 사람 속을 꿰뚫어 볼 듯 날카로운 눈이었다. 로벨은 고향에서 본 철부지 기사 조이 모몬트 경을 떠올렸다. 친형제가 닮은 것은 머리카락 색뿐이었다.

“정말 뜻밖의 조합이오. 옛 신의 기사단에 그랜드 챔피언이라니.”

로벨과 더글라스 경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경이 하겠소?’, ‘아니오, 경이 하시오.’ 그러나 지프 모몬트 경이 먼저 말했다.

“명망 높은 분들께서 ‘내 성’에는 무슨 일이시오?”

특정 단어를 강조한 의도가 분명했다. 더글라스 경은 성벽 위의 병사들을 힐끔 보고 가급적 부드럽게 말했다.

“불청객도 객인데, 문전박대할 셈이오?”

“객인지 적인지 두고 봐야 알 일이지 않소.”

별 소용이 없었다. 로벨은 흐룬팅에 손을 올리고 전투마를 두어 걸음 전진시켰다.

“지프 모몬트 경, 경을 고발하고자 찾아왔소.”

“역시 그렇군.”

지프 모몬트 경은 눈썹 위에 일(一)자로 걸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당당히 말했다.

“그러나 본인은 잘못이 없소. 전쟁을 선택한 것도, 전쟁을 수행한 것도 주드 맥켈런 남작이니, 패전 또한 맥켈런 남작이 책임져야 하오. 본인은 본인에게 주어진 권한으로 거래했을 뿐이니, 본인을 고발할 수 없소.”

로벨은 당당한 반응에 당황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을 지원한 일로 항의하러 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 일도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그 일이 전부가 아니었다. 외팔이 더치가 고블린을 두드렸다.

“야, 야, 일어나 봐. 야, 임마! 이 상황에서 잠이 오냐!”

고블린은 야행성 몬스터를 배려하라는 둥의 불만을 토로하고 싶었으나 언어능력이 부족해서 참았다.

“왜 그러냐. 인간.”

로벨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손가락으로 지프 모몬트를 가리켰다.

“저 기사가 네가 말한 ‘위대한 왕’이야?”

고블린은 외팔이 손에 일으켜져서 지프 모몬트 경을 보았다. 햇빛이 거슬리는지 눈을 깜박이다가 말했다.

“아니다. 뀌잇. 모른다. 저런 인간.”

“뭐라고?”

“모른다고!”

로벨은 당황했고, 더글라스 경은 화냈으며, 지프 모몬트 경은 재미있어했다.

“그건 뭐요? 애완동물이오? 본인이라면 머리와 몸통을 분리해서 가지고 다니겠소만...”

마녀 키르케가 기사들의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애완동물이 아니라 고블린인데...”

다행히 아무도 관심주지 않았다. 더글라스 경이 심각하게 따져 물었다.

“저자가 아니오?”

로벨은 지프 모몬트 경을 가리키며 반박했다.

“그럴 리 없소! 본인의 위치를 알리자마자 고블린을 보냈으니, 이 성이 아니면...”

“뀌이이이이잇!”

바로 그때였다, 고블린이 괴성을 지르며 수레 위에 납작 엎드렸다.

“경애하는 마법사의 왕! 미천한 몸종 인사한다! 실패했어요! 살아있다! 인간 기사다!”

유창하지만 뒤죽박죽이다. 로벨은 고블린이 엎드린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프 모몬트 경을 향한 듯 하나 아니다. 로벨은 지프 모몬트 경 어깨 뒤로 새로 등장한 사람을 보았다.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쉬르코(Surcot: 겉옷, 작중시대에선 어깨 파인 여성용 드레스)가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저 레이디는...”

“내 여동생 실비아요.”

로벨은 워 해머와 흐룬팅을 뽑았다. 역시 말보다 손이 앞서는 것이 기사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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